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90
189화. 한밤의 티타임 (2)
지금으로부터 6년 전, 해가 바뀌고 얼마 지나지 않았던 1월 3일. 전라북도 무주의 덕유산에서 적색경보가 울렸다.
설경으로 유명한 덕유산은 한겨울에도 등산객이 많은 산인데, 경보가 울린 전날에 폭설이 내려서 그다음 날까지도 등산객 출입이 통제됐기 때문에 급히 대피해야 할 일반인은 없었다.
지금처럼 확고한 체계가 없었던 시절의 협회였던지라 할 일이 줄어든 것은 다행스러운 일이었겠으나 고등급 감응자가 돌아다니기에도 유달리 눈구름이 짙고 안개가 자욱해서 불편했다고 한다.
어쨌든 그날 균열 공략팀으로 파견된 감응자는 마침 쉬고 있었던 진예신과 윤혜아 페어, 대한민국 최강의 패인 신여월, 그리고 당시에 만능 서포터로 이름이 높았던 박차군이었다.
박차군은 게임에서도 은퇴한 사람으로만 나오고, 은퇴자의 상세 정보는 파기하기 때문에 정확히 어떤 능력을 지닌 사람인지 나도 잘 모른다.
‘균열 내부는 바깥 환경과 유사하게 설산. 균열 주인은 나비 날개를 단 남자였다고 했던 것 같은데….’
이지를 지닌 주인이었다면 대화를 통해 이름을 알아내고, 그것을 균열의 이름으로 사용하거나 보고서에 기록했을 것이다.
하지만 박차군이 대화를 시도했으나 불발로 끝나고 곧바로 전투에 진입했다고 하니 인간형이어도 지성이 없는 몇 안 되는 경우였던 셈이다.
특히 서리꽃의 나비는 적색 등급의 균열. 이 정도 되는 균열에서 주인과 대화가 불가능한 건 그리 좋은 신호가 되지 못한다.
아니나 다를까. 멀쩡히 들어갔던 네 사람 중에서 한 사람은 스스로 걷지도 못하는 중상자로 나왔고, 윤혜아 역시 부상이 심해 큰 흉터를 얻었으며, 진예신과 신여월도 자잘한 상처를 잔뜩 달고 나왔다.
‘중상자로 박차군과 윤혜아의 이름이 표기됐다가 한 달 뒤에 박차군만 은퇴자로 추가 기술됐었어.’
균열에서 부상이 생기는 건 흔한 일이라 보고서에는 항상 중상자만 표기하고, 이외의 내용을 적진 않는다.
다만 완치가 불가능하여 은퇴자가 되거나 끝내 사망하여 명예 퇴직자가 될 경우, 그 날짜에 기록이 추가된다. 박차군의 경우는 은퇴자로서 기록됐는데, 어디가 부상인지에 대해선 여전히 설명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부상이 완치된 윤혜아는 아예 추가 기록 자체가 없었는데, 이후 균열 공략 활동이 줄어든 것을 보면 꽤 후유증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잠깐만. 그러고 보니 이 균열 직후부터 윤혜아의 균열 공략이 줄어든 것도 있지만, 아예 내부 공략에서 빠졌네? 보고서 쭉 읽을 땐 일단 빠르게 다 읽느라 바빠서 깊게 생각을 못 했었는데, 이거 확실히 문제가 있긴 있었네.’
문득 김휘율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올랐다. 약속을 깨고 싶지는 않지만, 공략팀으로 가겠다던 윤혜아가 그 짧은 대답만으로도 워낙 죄책감에 시달리고 있기에 깊게 파고들지 않았었다.
균열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실력도 좋은 감응자가 어느 순간부터 내부 진입을 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예의주시했어야 했는데.
그 후로 별다른 언급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내 머리를 탓하고는 땅굴을 파고 들어가고 있는 진예신을 질문으로 건져 올렸다.
“박차군이라는 분은 지금 황담복 회장님 밑에서 일하고 계시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HS재단의 부회장이신 걸로 아는데, 맞습니까?”
“차군이라는 이름이 흔하진 않죠. 네, 맞아요. 황 회장님께서 감응자에 대해 잘 알고, 사람 보는 눈도 좋으니까 재단 일도 아주 잘할 거라고 하시더니 같이 일하자면서 스카우트하셨죠. 아, 물론 재단의 부회장까지 올라간 건, 박차군 선생님의 능력이에요.”
“그러면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을 정도로 회복하신 겁니까?”
협회는 언제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당대에 이름을 날렸던 감응자를 쉬이 놓아줬을 리가 없다.
실제로 박차군은 현재 협회 일을 우선시하느라 명예 회장에 가까운 황담복 대신 HS 재단의 실세나 다름없으니 전투를 제외한 능력도 뛰어나고, 일하는 데에 무리가 없으니 협회에서 총무부에라도 재직하게 붙잡았을 텐데 어쩐 일일까.
협회 일 그만두고 싶으면 죽으면 된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수많은 퇴직자 중에서 무언가의 책임-아직도 자세한 정황을 쉬쉬해서 잘 모른다-을 지고 은퇴한 김휘율을 제외하면 살아있는 은퇴자는 박차군 뿐이니까.
“지금처럼 괜찮아진 건 그렇게 오래된 일이 아니라서 그래요. 어지간하면 선생님도 협회에 복귀하고 싶어 하셨지만….”
진예신이 미간을 찡그리며 쓰게 웃었다.
“초연 씨가 정말 고생을 많이 했는데도 한 달 가까이 사경을 헤매셔서 은퇴로 결정이 났었죠. 당시의 의료진이 최선을 다했는데 침대 생활을 면치 못할 거라고들 했을 정도예요. 그래도 감응자의 신체는 일반인보다 훨씬 튼튼하니까 희망을 걸고는 있었죠. 불행 중 다행으로 선생님의 마석은 다소 빛을 잃긴 했지만, 깨지지는 않았거든요.”
“마석이 멀쩡하다면 시간은 걸려도 완치 판정을 받으실 수 있었을 텐데…. 이후로도 복귀하지 않으셨다는 건 치료되지 않은 부분이 있다는 뜻입니까?”
“네. 외상은 전부 나았는데, 내상이 문제였어요. 그때 폐를 정말 심하게 다쳤거든요. 초연 씨가 노력했지만, 한 번 망가지면 폐는 회복이 안 되니까요. 그때만큼은 제가 행운의 봄과 계약하지 않은 게 후회됐었죠….”
심초연의 능력은 수술과 제약에서 빛을 발한다. 나와는 다르게 치유 그 자체를 이뤄내는 주문이 아니라 수술을 보조하는 주문에 가까워서 그렇다.
그러니 이미 손상된 폐를 되살리는 일은 하지 못한다. 그건 행운의 봄이나 할 수 있는 고난도의 치유 주문이니까.
그러니 하필이면 폐를 다쳤다는 건 운이 나빴다고밖에는 할 말이…, 아니, 정말로 운만 나빴던가? 부드럽게 흐르던 생각에 제동이 걸렸다.
진예신의 감정이 한순간에 바닥을 치는 바람에 나도 휩쓸려서 잊었는데, 애초에 내가 한 첫 번째 질문은 ‘풍월주는 만났는가’였고, 진예신의 대답은 ‘예’였다.
그렇다면 생각의 방향을 다르게 해야 한다. 이 세계에서 풍월주와 관련이 됐다는 뜻은 우연이나 운과는 거리가 아주 멀다는 뜻과도 동의어니까 말이다.
‘행운의 봄이 아직 누구와도 감응하지 않은 걸 알고, 자신의 계획에서 먼저 치워야 할 사람을 낙점해서 일부러 부상을 입힌 거야.’
풍월주가 직접 움직인 사안이니 아마 본래 목적은 박차군을 아예 죽이는 것이었을 텐데, 함께 있었던 사람이 신여월을 비롯한 쟁쟁한 사람들이라 부상에 그쳤을 가능성이 높다.
전투에 참여했다지만 어디까지나 박차군은 서포터 포지션이고, 신여월은 자신을 보조해주는 사람 하나 지키지 못할 정도로 약한 사람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 신여월조차 상처를 달고 나왔다는 건, 무력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일이 터졌다는 얘기겠고….’
일전에 윤혜아와 눈앞의 진예신이 죄책감으로 고개를 숙이는 꼴을 보아하니 위기의 순간에 박차군이 자신을 희생하여 나머지를 살리는 선택지를 골랐을 수도 있겠다.
머릿속으로만 이런저런 가정을 하면서 진예신의 얼굴을 유심히 살폈다. 진예신은 애꿎은 생수병의 뚜껑만 열심히 긁다가 내 시선에 부스스 웃으면서 듣기에 퍽 경쾌해진 어조로 말을 이어 붙였다.
“지난 일을 후회해봐야 지금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하나도 없지요. 그러니 요한 군이 궁금해하는 부분만 말하고 다른 얘기로 넘겨도 되겠지요?”
“물론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넓다지만, 감응자 세계는 좁다. 거기에 대한민국으로 국한하면 협회에 재직하는 이상 박차군 본인과 언젠가는 만남이 있을 것이다. 여차하면 내가 찾아가서 이래저래 떠봐도 좋고.
그래서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자 진예신이 한결 편안해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서리꽃의 나비 안에서 풍월주를 만났어요. 진입했던 네 사람이 모두 마주했죠. 말이 통하지 않던 균열 주인을 전투를 통해 잡았고, 그 과정에서 혜아가 왼팔에 약간 동상을 입었고, 제가 오른 다리를 살짝 다쳤죠.”
그 정도야 심초연 손에 순식간에 치료될 상처다. 윤혜아도 완치는 됐지만, 중상자로 이름을 올렸으니 그 외에 더 다쳤다는 뜻인데.
눈을 가늘게 뜨자 진예신이 킥킥 웃더니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말을 계속 이었다.
“여기서부터는 보고서에 빠진 부분이에요. 의도적으로 기록하지 않았죠. 사실 여월 님은 풍월주에 대해 밝힐 때도 됐으니 사실대로 적자고 하셨는데, 박차군 선생님께서 시기상조라며 스스로 숨기셨어요. 가장 많이 다친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니까 다들 어쩔 수가 없었죠.”
신여월이나 김휘율에 비하면 박차군은 어린 감응자에 속한다. 대략 이십 년 정도의 격차가 있으니 그쯤이면 부모·자식뻘의 나이고, 협회가 불안정한 시기에 입사해서 한창 고생했을 나이기도 하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개중 더 아픈 손가락은 있으며 신여월에게 있어서 박차군이 그와 비슷했을 거다. 일생일대의 원수를 세간에 밝히자는 결심을 뒤로 미뤄줄 정도로.
“여하간 균열 주인을 막 끝장내고 출구를 기다리고 있는데, 바람이 심상치 않게 불더군요. 설산에 눈보라가 휘몰아치는데 어딜 봐도 출구가 열리는 기세가 아니었어요. 바짝 긴장한 순간에, 아주 낭랑한 방울 소리가 들렸고, 맨발의 여성이 나타났죠. 풍월주였어요. 꿈에서 본 것을 제외하면 첫 만남이었죠.”
저절로 상상이 갔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흰옷으로 무장한 선한 얼굴의 여인이 새하얀 눈밭을 밟고 서서 우아하게 인사를 했을 거다.
중력이라고는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가벼운 몸놀림으로 나긋나긋하게 허리를 숙였다가 예의 그 예스러운 어투로 말했겠지.
“안녕하신가, 그대들.”
나는 아직 들어보지 못한 풍월주의 캐치프레이즈와도 같은 문장을 입 모양으로 작게 따라 했다.
진예신의 목소리로 들으니 어쩐지 조금 어색한 문장을 혀끝으로 굴리다가 이어지는 문장에 기함하며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그리 인사한 풍월주의 다음 말은 이거였어요. 이리 절경인 곳에서 만났으니 내 자비를 베풀어보겠네. 넷 중 하나가 남아준다면, 셋은 상처 없이 보내주겠소.”
그게 무슨 개소리야, 진짜. 누가 들어도 지랄하지 말라고 펄쩍 뛸 선택지가 따로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