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93
192화. 한밤의 티타임 (5)
단단히 각오하고 던진 질문이었고 돌아올 답을 절반쯤 확신하고 있었다고 해도 충격이 없지는 않았다. 내가 몰랐던 진예신의 의외의 부분에 대한 놀람과 내가 아직도 진예신을 은연중에 캐릭터로 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반성이기도 했다.
감정 조절이 어렵다고 하더니만, 끊임없이 자책감에 시달리게 만드는 생각만 이어져서 억지로라도 입을 열었다.
물론 애써 마음잡아 튀어 나간 질문은 가시가 잔뜩 붙어서 말하고도 속으로 혀를 차버렸지만, 자책감은 덜었다.
“박호승이 감응할 거라는 것도 예상하셨다거나?”
툭 내던져진 말에 진예신의 어깨가 바짝 굳는 게 보였다. 말에도 형태가 있다면 아마 지금 내 말은 죄다 밤송이 같지 않을까.
듣기에 썩 좋지 못한 날이 선 어투에 봄이 슬금슬금 내 눈치를 봤고, 겨울의 노을이 슬그머니 진예신에게 더 붙었다.
“그건 반반이었어요. 호승 군과 세환 군은 계속 발현석을 들고 다녔으니까 어느 정도의 자극만 주어진다면 충분히 감응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아무리 그래도 민간인을 데리고 들어간 건 무모했습니다.”
“알아요. 하지만 위험할수록 보상은 좋아지는 법이니까요. 게다가 지킬 자신이 있었고, 설령 제가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되더라도 두 사람은 무사할 거라는 확신 정도는 있었어요.”
더불어 자신의 계산이 잘못되어 박호승과 이세환이 행여 다치게 되면, 완치까지의 지원은 물론이고 책임지고 옷 벗을 각오까지 했다며 여유를 되찾은 진예신이 부드럽게 말을 덧붙였다.
그리곤 제 옆에서 점점 쭈그러드는 제 마석의 손을 한 번 잡았다가 놓으며 나긋나긋하게 이어 말했다.
“호승 군네 집안 말이에요. 백호 그룹이 왜 호랑이를 상징으로 삼은 지 요한 군도 알고 있나요?”
“아주 오래된 일이라고 알고 있는데…. 분명 조상님 중에 의원을 업으로 삼으셨던 분께서 다친 호랑이를 치료해준 후에 연이 생겨서 박씨 가문의 상징으로 호랑이를 썼다고 했습니다.”
“그건 요한 군이 본래 있던 세계에서의 이야기지요?”
“네. 박호승 어머님께 들었던 이야깁니다. 혹시 이곳은 다른 얘기가 전해집니까?”
진예신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톡톡 무릎을 두드렸다.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있던 겨울의 노을이 고개를 번쩍 들더니 동물 모습으로 형태를 바꿨다.
주황색 털이 매력적인 어린 여우가 진예신의 무릎에 똬리를 틀고 누웠고, 그걸 본 봄이 기겁하면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봄으로부터 전해져 오는 감정이 경악이 절반, 어이없음이 절반인 걸로 봐서 내숭 부리고 있다는 말을 하고 싶은가보다.
어쨌건 따뜻한 털뭉치를 무릎에 올린 진예신은 한결 부드러운 표정이 돼서는 말을 계속했다.
“아까도 말했지만, 이 세상에는 커다란 흐름이라는 게 있고 그걸 벗어나려면 아주 큰 노력이 필요해요. 어지간한 비틀림으로는 어림도 없죠. 특히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려는 성질이 아주 강해서 이 세계가 이물질로 판단하는 게 흐름에 끼어들면 어떻게 해서든 배제하거나 흐름 속에 편입시키려고 해요.”
“어느 쪽의 방식이든 썩 좋게 들리진 않습니다.”
“실제로도 그리 좋진 않지만, 그걸 이용하면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가 나오기도 해요. 이를테면 요한 군을 데려온 일 같은?”
감이 잡힐락 말락 하는 이야기에 미간을 찌푸리자 진예신이 숨죽여 웃고는 어쩐지 갑자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봄의 손등을 톡 두드렸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던 봄이 아무런 말도 없이 그저 한숨만 푹 내쉬었고, 그게 어떤 대답이라도 된 것인지 진예신은 고맙다며 속삭이듯 말하곤 내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세계가 이물질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은 간단해요. 정해진 흐름을 거스르려고 하는가, 순응하려고 하는가. 요한 군이 대표적이죠. 만약 요한 군만을 이 세계로 데려왔다면 사소하게는 불운이 계속 이어졌을 거고 크게는 목숨의 위협을 자주 느꼈을 거예요. 홍도가 준 돌멩이는 아주 잠깐의 가림막밖에 되지 못했을 거고요.”
“그래서 여러 명을 동시에 데려오는 작업을 했다는 뜻입니까? 하나는 이물질로 판단하여 제거하려고 할 테지만, 여럿을 데려오면 흐름으로 흡수하려고 할 테니까?”
“몇 번을 말했지만, 역시 요한 군은 이해가 빨라서 참 좋아요. 맞아요. 그래서 요한 군을 데려오기로 결정한 다음엔 요한 군의 주변을 좀 알아봤어요. 그 과정에서 호승 군과 세환 군에 대해서 알게 됐고, 또 그 두 사람과 배경까지 온전하게 데리고 오면 아주 괜찮은 결과를 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죠.”
하나를 데려오는 데에 드는 대가와 여럿을 데려오는 데에 드는 대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당연히 후자가 더 무거운 값을 치러야 했을 것이다.
그런데 벌써 오래전인 듯한 청풍과의 대화를 복기해보자면, 이들은 사람 몇 데려온 정도로 그친 게 아니라 두 개의 세계를 합치는 작업을 진행했다.
그날 사천은 먼저 간 동료들이 많음을 대놓고 말했고, 청풍은 진예신이 시간을 대가로 낸 것처럼 자신들도 무언가를 대가로 냈음을 넌지시 일러줬다.
“도중에 일이 많이 꼬여서 결국은 두 개의 세계를 통합하기로 했지만, 유일하게 어머니 세계의 기억이 남아 있을 요한 군이 최대한 이질감을 느낄 수 없도록 호승 군과 세환 군의 자리를 가장 먼저 만들었어요.”
“자리를 만들었다 함은?”
“음, 이건 설명이 조금 필요한 부분인데요. 창조된 세계는 으레 그렇듯이 어머니 세계와 비슷한 점이 많아요. 비슷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똑같은데 몇 가지 차이점을 두어서 다른 세계가 된다고 보는 게 더 맞겠네요. 여하간 그 차이점이 이 세계를 유지하는 거라고 보면 되는데, 그중 하나가 마석이에요.”
“즉, 이 세계에 존재를 온전히 묶어 두고, 흐름에 섞이게 하기 위해서 마석과의 감응은 필수적이다. 그러니 부협회장님을 비롯해서 청풍과 같은 이들이 선택한 제가 의구심을 갖지 않게 하기 위해서 주변인인 박호승과 이세환에게도 마석과 감응하게 만들어 흐름에 함께 엮는다. 제가 이해한 바가 맞습니까?”
진예신은 대답 없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게 긍정을 표한다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돌연 숨이 막혔다. 나는 그저 내 안위와 행복만을 원하는 범인일 뿐인데, 이들은 자신의 미래를 걸고 내 선택을 지지한다고 말한다.
나는 정말로 그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 맞는가? 그 기대에 부응해줄 수 있는가? 글쎄, 나는 정말 모르겠는데.
“청풍도 같은 말을 했을 것 같은데. 요한 군, 너무 부담가지지 말아요.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우리에게 있어요. 요한 군은 그냥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요.”
“이런 얘기를 다 듣고도 멋대로 움직일 정도로 제가 염치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군은 호승 군과 세환 군이 결과적으로 살아있으니까 빚졌다고 생각하고 있는 거잖아요? 안 그래도 괜찮다는 얘기에요. 막말로 잘살고 있던 요한 군과 당신이 있던 세계를 막무가내로 합친 건 우리고, 그것 때문에 감응자가 돼서 위험한 일을 하게 됐으니까 원망해도 저흰 할 말이 없어요.”
작은 입을 벌리며 하품을 하던 여우가 애교스럽게 진예신의 손을 살짝 깨물었다. 그 평화로운 광경을 보면서 눈을 깜빡였다.
진예신은 노을의 귀 사이를 살살 긁어주면서 언제 나타난 건지 알 수 없는 차 한 잔을 내 쪽으로 밀어줬다. 늦은 밤에 진예신의 집무실에 찾아가면 얻어 마실 수 있는 재스민 차였다.
“다시 본래 하던 이야기로 되돌아가자면, 호승 군을 마석과 감응하게 하고자 했는데 잠재력이 약간 모자란 거예요. 그저 그런 마석과 감응하면 되레 요한 군이 더 신경 쓸 게 분명하니까 확실하게 높은 마석과 감응시키고자 했고, 거기서 새벽에 대한 이야기를 찾았죠.”
“박호승 집에 내려오는 호랑이 이야기를 새벽과 엮은 겁니까?”
“맞아요. 새벽은 원래 인간에게 너그러운 호랑이였거든요. 모종의 이유로 봉인되듯이 그 마을에 묶였는데, 하필 그 마을을 풍월주가 눈독 들여서 균열로 만든 거예요. 그게 펑! 하고 터져서 크게 사달이 나고, 그 과정에서 새벽도 폭주하게 되는데, 이게 요한 군도 잘 아는 ‘균열 폭주 사건’이에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고, 오늘 우리가 해결했으니까 앞으로도 일어날 일이 아니게 됐죠.”
내가 새벽을 원래 몰랐던 이유도, 망각의 도시라는 균열 이름을 처음 들은 이유도 저 한마디로 모두 이해됐다.
미래에 있을 폭주 사건의 원인이 되는 균열은 자세한 설명이 나오지도 않았고, 게임 오리지널 에피소드여서 소설에서 정보를 얻을 수도 없었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히 풍월주가 만들어낸 균열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폭주한 걸로만 알았는데, 이런 비하인드가 있었단 말이지….
자연히 생각은 균열 주인과 새벽에게로 흘렀고, 새벽이 훌쩍 떠나면서 했던 말까지도 이어졌다.
“그럼 새벽이 제게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 건 새벽도 이 모든 자초지종을 다 알고 있다는 뜻입니까?”
진예신이 여느 때보다 생기 넘치는 얼굴로 주황색 눈동자를 반짝였다. 다소 짓궂은 태가 나는 앳된 얼굴이 꼭 평범한 고등학생처럼 보여서 일순 진예신이 내 또래처럼 느껴졌다.
“모두가 공범이죠, 요한 군의 측면에서 본다면요! 나도, 청풍도, 새벽도, 그리고 행운의 봄도.”
그 말에 내 시선이 저절로 봄에게 향했다. 어느 순간부터 언제 노을에게 화를 냈냐는 듯이 얌전하게 있던 봄이 헤헤 웃으며 어물쩍 시선을 넘기려고 들었다.
그래, 넌 나랑 떨어질 수 없는 사이니까 이따가 얘기를 나눠도 될 거다. 다음을 기약하며 일단 봄을 시선에서 놓아주고 진예신에게 다시 집중했다. 진예신은 특유의 노래하는 듯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꿈이 현실이 되길 바라는 건, 인간으로서 당연한 소망이잖아요.”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하하, 예전엔 말이죠? 솔직히 세계라고 해도 너무 거창해서 실감도 잘 나지 않고, 지키겠다는 숭고한 마음이 생기지도 않았어요. 그냥 힘이 있으니까, 풍월주가 가로막으니까, 해야 하니까. 그런 마음이었죠.”
진예신의 손길에 꾸벅꾸벅 졸던 노을이 결국 추욱 늘어지면서 잠에 빠졌다. 진예신은 애정 어린 눈으로 여우를 보면서 웃었다.
“그런데 봐요. 이렇게나 나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고, 이런 아이와 있다 보니까 함께한 시간이 소중해지고, 함께했던 공간이 아름답게 보이고, 행복을 바라게 되고…. 종내엔 그래요, 세상을 사랑해버리게 되는 거예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렇게 돼버린 거죠.”
매체 속의 주인공은 항상 정의로웠고, 선한 의지를 가졌고, 사람을 사랑했으며, 누가 보아도 빛나는 인물들이었다. 보는 사람이 답답해서 가슴을 두드리는 때가 종종 생겨도 결국은 당연하다는 것처럼 승리를 쟁취하는 그런 인물.
“그냥 그런 사소한 이유로 내가 사는 곳과 내 사람들이 무사했으면 좋겠어요. 거기엔 노을이도 있고, 봄도 있고, 여월 님도 계시고, 또 요한 군도 포함되어 있죠.”
진예신은 주인공 자리를 스스로 버렸다고 말했지만, 봐라. 그는 아직도 선한 의지를 가졌고, 사람을 사랑하고, 이 세계를 넘치게 사랑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요한 군은 정말로 언제나 말했지만,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면 돼요. 오늘처럼 제가 막무가내로 일을 벌였다면 화를 내고 추궁하면 되고, 친구들이 위험하다면 어떤 상황이든 가장 먼저 달려가면 돼요.”
“그러다 당신이 위험해진다 해도?”
“설령 내가 요한 군의 앞에서 죽는다고 해도.”
여우를 쓰다듬던 손을 멈춘 진예신이 결연하게 눈을 빛내며 나를 쳐다봤다. 주황색 눈동자가 마치 태양처럼 빛났다.
“요한 군은 요한 군의 세계를 지키면 돼요.”
아, 봄아. 나는 아직도 이 세계에 정을 붙였다기보단 박호승과 이세환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너와 감응하면서 했던 계약을 난 벌써 이행하고 있었나 보다.
“그건 결국엔 제가 그랬듯이 이 세계를 지키는 일로 이어질 테니까요.”
저 말이 옳다고 속절없이 동의해버리는 걸 보니까 말이야. 그렇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