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94
193화. 기다림의 이유
에피소드 24.
형형색색의 산호가 눈을 즐겁게 하고, 이따금 흔들리는 진주 자개 풍경이 영롱하게 울리는 아름다운 전각은 심해에서도 꽤 한적한 곳에 세워져 있다.
초대받지 못한 인간은 들어오지 못하는 구역에 있는 데다가 주변 풍광도 훌륭해서 쉬기에 참 좋은 곳이건만, 정작 이곳을 찾는 이는 몇 되지 않았다.
전각을 세운 당사자는 다름 아닌 이 바다의 지배자이자 용궁의 주인인 가람이었다. 그는 퍽 슬퍼했으나 왕이 직접 지은 전각을 휴식처로 쓸 만큼 배짱이 좋은 이가 많은 것도 웃기는 일이다.
여하간 결국 그 전각은 요즘 몹시 아프다던 용왕이 틈만 나면 휴식을 취하러 가는 장소가 된 터라 최근 들어선 작은 별장 취급을 받을 정도로 입소문을 탔는데, 그건 비단 바닷속에서만 퍼진 소문이 아니었다.
[이거, 아프다는 소문이 파다하길래 부랴부랴 얼굴 좀 보러 왔더니만, 풍류를 즐기고 있을 줄이야. 역시 그대가 일부러 낸 소문이었나?]전각의 난간에 걸터앉아서 장죽을 물고 있던 용왕이 물살을 가르며 내려오는 새하얀 호랑이를 보고는 헛웃음을 지었다.
약초를 빻아 넣어둔 터라 씁쓸한 향이 가득한 담뱃대를 소매 안으로 집어넣은 용왕은 자연스럽게 전각 안으로 들어오는 호랑이에게 나지막하게 대꾸했다.
“그대야말로 일어났다는 소식이 빨리도 퍼지기에 직접 퍼트리고 있는가 의심하고 있었다네. 그래, 내가 걱정된다는 것은 핑계일 것이고…. 어쩐 일로 왔는가? 이리 깊은 곳까지 말일세.”
[날 너무 매정한 이로 몰고 있는 것 같네그려. 오랜 지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그렇다면 그런 모습이 아니라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는 성의를 보였어야지…. 싸우고 싶어 안달이 난 얼굴이지 않나, 자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백호가 목을 그르렁 울리며 느릿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오랜 시간을 봐온 사이지만, 친하다기보다는 데면데면한 사이였기에 용왕은 다소 껄끄럽다는 듯이 쯧 혀를 찼다. 그러자 백호가 태연하게 몸을 늘어뜨리며 앉더니 웃음기가 조롱조롱 매달린 목소리로 말했다.
[싸우는 걸 즐기지는 않다만, 그대가 원한다면야 언제고 싸워줄 수 있다네. 그대에게는 일방적이지만 마음의 빚이란 게 있으니 말이야.]“마음의 빚이라…. 그건 내게 가질 게 아니라 자네의 수장에게 쌓아뒀어야지. 본래 자네가 맡았어야 하는 일이잖나.”
[이제는 세월이 더 흘러서 다들 나이를 세는 것이 무용해졌다마는, 우리의 수장을 정할 때만 해도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나같이 늙은 놈보다는 앞날 창창한 젊은 놈에게 미래를 맡기는 게 당연하지 않나.]“그래서 가장 어린 호랑이에게 수장 자리를 떠넘겼는가? 자네들에게도 무거운 산군의 자리를? 호야가 그리 고생하는데 다들 제 동굴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고, 염치도 없지.”
눈을 반쯤 내리깔고 신랄하게 대꾸하는 용왕을 보며 백호가 굉장히 기분이 좋다는 듯이 끌끌 목을 울렸다. 불만을 표하는데도 백호에게는 영 타격이 없어 보이자 용왕의 표정이 더욱 예민하게 날이 섰다.
용궁의 다른 이들이 봤으면 바짝 기었을 살벌한 기세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백호는 커다란 앞발에 얼굴을 턱, 올리며 편안한 자세로 입을 열었다.
[그대와 같은 친우가 곁에 있으니 우리가 걱정할 일이 무에 있겠어. 여전히 사이가 좋은 듯하니 우리가 옳은 선택을 했어. 그렇지 않나?]“새벽, 자네…!”
[가람, 그대가 이리 목소리를 높이는 것도 오랜만인데, 그게 우리 수장을 위해서라니. 기념비적인 일 아닌가. 그대들 셋이 모여 있으면 항상 우리 수장이 휘말리던 것이 어제인 것처럼 선명한데 말이야. 세월이 흐르더니 그새 사이가 많이 애틋해졌어.]새벽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서 즐거움을 도통 감추지 못한 목소리를 내자 용왕이 이를 한 번 갈았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강에서 태어나 용왕의 자리까지 오른 가람은 이 별의 생명체 중에서도 손꼽히게 오래 산 자인데, 산 하나에 터를 잡고 처음으로 터주가 되는 기록을 세운 새벽도 연륜으로는 엇비슷했다.
둘 다 이제는 잘 기억도 나지 않는 유년 시절부터 얼굴을 봤었지만, 명절날에만 잠깐 만나는 먼 친척 어르신 같은 정도의 거리감으로 살아왔다.
다만 아주 약간 문제가 있는데, 가람보다 새벽이 조금 더 어르신이라는 점이다. 언제나 새벽이 가람을 놀려먹었다는 얘기다.
오래간만에 만났더니만 새벽이 어떤 이인지 잊어서 이번에도 속절없이 휘말린 게 못마땅해진 용왕이 짜증스럽게 쏘아붙였다.
“쯧. 차라리 더 잠들어 있지를 그랬나.”
[끌끌, 그 모난 성격은 변치 않았어.]“자네에게만 그러는 것이네. 내 이래 봬도 꽤 인망이 좋은 용왕이니 말이야.”
[뻔뻔한 것도 여전한 걸 보아하니 정말 아픈 곳이 없나 보군, 그대. 다행이야. 내가 그래도 제법 걱정하면서 왔어.]둥글게 휘어진 금색 눈동자가 찬란하게 빛나는 걸 물끄러미 보던 용왕이 그 말에 거짓이 없음을 깨닫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싫어서가 아니라 어떤 반응을 하면 좋을지 모를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아는 새벽이 앞발을 삭삭 핥으며 웃었다.
이젠 이 별에 살아 있는 모든 이가 새벽에게는 어린애여서 제 앞에서만큼은 치기 어린 표정을 짓는 가람이 좋았다. 긴긴 시간이 흘러도 여러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한다는 게 좋았다.
호감을 짓궂은 말씨로 표현하는 것은 새벽 나름의 배려지만, 받아들이는 가람은 전혀 그리 생각하지 않는 게 흠이지만.
“하아…. 자네가 찾아오면 이래서 싫어.”
[통제가 되지 않으니까?]“알면 빨리 용건만 말하고 가는 게 어떤가? 다른 모습으로 변한다면, 내 자비롭게 머무름을 허락하겠지만 본체로는 안 되네.”
[끌끌, 까다롭구먼그래.]“내가 진실로 자네와 목숨을 걸고 싸우길 바라나?”
용왕이 소매에 넣었던 기다란 담뱃대를 꺼내 새벽을 가리켰다. 명백한 위협의 표시에도 새벽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몹시 기다란 담뱃대의 끝에 달린 장식을 보며 웃었다.
[설마. 이리 오래 살았지만, 아직 기다리고 있는 것도, 보고 싶은 것도 많으니 여기서 목숨을 걸 수야 없지. 그것보다 그대, 그걸 여태 달고 다닐 줄은 몰랐는데. 영 성에 안 차는 것처럼 말하더니만 마음에 들었나 보아.]“귀물을 버려서야 쓰나.”
용왕이 담뱃대 끝에 묶어둔 작은 목련 장식을 흔들더니 심해에서는 구하지도 못하는 산의 물건이 얼마나 귀한 줄 아냐며 심드렁하게 말을 더했다.
더불어 이 정도의 물건은 원수가 준다고 해도 일단 받는 게 예의라는 말까지 퍽 얄밉게 덧붙인 용왕이 드디어 난간에서 내려오며 새벽의 앞에 가까이 붙어섰다.
“그래서 진짜 목적이 뭔가? 이쯤 어울려줬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는데, 아니라고 하진 않겠지?”
물이 흐르는 것처럼 미끄러지듯이 내려온 가람의 발치를 빤히 바라보던 새벽이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가 가람을 올려다봤다.
이만치 오래 살았으면 본래 조예가 없던 분야에서도 눈치라는 게 생긴다. 가람에게선 해묵은 저주의 냄새가 났다. 새벽 자신이 묶여 있던 것과 같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흡사한 기운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역시….]“역시?”
[내가 찾아올 이를 제대로 골랐구나.]깨어나자마자 보은의 의미로 감응을 도와주고, 소문을 모으기 위해 발 가는 대로 별을 헤집고 다녔던 새벽은 가람의 표정과 희미하게 남은 기운에서 자신의 짐작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일부러 수장인 호야에게도 들리지 않고, 만나러 오겠다는 미호도 거절한 채 용궁에 방문하기를 잘했다. 조금만 더 늦었다면 가람에게 남은 흔적은 없어졌을 거고, 새벽은 원하던 답을 구하지 못했을 게 틀림없었다.
“담홍도? 처음 듣는 이름인데. 애초에 내내 용궁에 자리보전하고 있었기에 누군가를 만날 수가 없었네. 요 몇 달간 찾아온 인간들을 제외하면 말이야.”
[그렇다면 질문을 바꿔야지. 그대를 찾아온 인간 중에 복숭아꽃 향기를 강하게 풍기는 자는 없었나?]가람의 눈썹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가 내려왔다. 터주면서도 역마살이 끼었는지 떠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틈만 나면 여기저기 사람 만나러 돌아다니는 게 새벽이라는 호랑이다.
가만히 앉아서 물을 통해 세상 흘러가는 소리를 듣는 가람과 달리 진짜 눈으로 보고 듣는 게 많은 새벽이 굳이 심해에 내려와서 묻는다는 건, 새벽이 찾고 있는 자가 그의 눈과 발을 피할 정도로 꽤 도망을 다니는 수완이 좋다는 뜻이다.
거기에 모르는 이름이라고 말했는데도 질문을 다시 하는 모양새가 딱 증거가 여기에 있다고 외치는 것과 다름없어서 가람은 순순히 답해주기로 했다.
자신에게는 별것 아닌 질문이기도 했고, 겸사겸사 새벽에게 빚을-새벽이 말하는 마음의 빚을 제외하고-지워두는 것도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있었네. 하지만 그건 그에게서 난다기보단 누군가에게서 묻혀온 향이었는데….”
[묻혀왔다? 잘못 맡은 것은 아니겠지, 그대.]“내가 이리 건강해진 게 얼마 되지 않은 일이라 그럴 수도 있지. 하지만 복숭아꽃 냄새가 나던 건 봄의 주인이라네. 그리고 그 아인 자네가 찾는 이와는 확실하게 다른 인물이지. 그렇지 않은가?”
[끌끌,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양발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어깨를 들썩이며 웃은 새벽이 그르렁그르렁 목을 울렸다. 가람이 서늘하게 새벽을 내려다보면서 자세히 말해줄 생각이 없다면 빨리 떠났으면 좋겠다며 채근했고, 새벽은 가람의 말에 거대한 몸을 일으켰다.
[봄의 주인인 요한은 위명에 맞게 온갖 꽃의 향기를 풍기던데, 그 속에 복숭아꽃 향은 없었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이런 겨울에 꽃향기 하나 구분 못 하진 않으니 확실하네. 하지만 그대가 만났을 땐 향이 있었다면 그건 아마….]새벽이 터주인데도 제약 없이 이곳저곳을 다닐 수 있는 건, 이 별의 바람이 그의 편을 들어주기 때문이다. 자연스럽게 새벽의 주위로 모이는 강한 바람에 가람의 기다란 옷자락이 쉴 새 없이 펄럭였다. 그 탓에 새벽의 중후한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려서 가람이 미간을 좁혔다.
[그 애가 머무는 곳에, 그래, 어쩌면 가까운 사이 중에 신뢰할 수 없는 자가 섞여 있나 보아.]“…인간이란 어찌 그리도 쉬이 신뢰를 버리는지.”
용케도 놓치지 않고 모든 말을 들은 가람이 중얼거리자 새벽이 끌끌 웃음을 터트렸다.
[처음부터 신뢰의 방향이 달랐던 게지. 안타까운 일이로고.]그 말을 끝으로 강풍이 새벽을 데리고 떠나버렸다. 순식간에 왔다가 심기만 어지럽히고 사라진 새벽에 가람이 이마를 짚었다가 다시 난간에 걸터앉았다.
평소보다도 더 짙게 약초를 태우며 가람이 연기를 내뱉었다. 오래 산 자의 감각이 비명을 질렀다. 곧 어마어마한 폭풍이 불어올 것이라고.
‘부디 무사하면 좋으련만.’
하지만 마음이 다치는 건 어쩔 도리가 없을지도 모르겠다고 가람은 생각해버렸다. 새벽의 말마따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