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healer's hidden ending strategy RAW novel - Chapter 192
191화. 한밤의 티타임 (4)
비희를 만났던 생애 첫 번째 균열은 뭐가 뭔지 제대로 파악해보기도 전에 끝이 났었다.
처음으로 균열 주인의 이름을 물어본 것. 그리고 비희와 알쏭달쏭한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을 제외하면 흑색 균열치곤 참으로 무난한 곳이었다.
그다음 공략에 참여했던 두 번째 균열인 은방울꽃 산골짜기 족자는 꽤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얻은 물건들은 귀했고, 신여월 협회장과 처음으로 함께 내부에 들어갔던데다가 기억하고 있던 것과 꽤 다른 양상을 보였던 균열 주인의 태도 등 인상 깊은 구석이 많았다.
무엇보다도 공략이 끝난 이후가 유달리 특이했기 때문에 잊히지 않았다. 파트너인 행운의 봄이 다짜고짜 나를 꿈의 통로로 끌고 갔으니까 당연한 얘기다.
얼마나 충격적이었으면 그때 봤던 꿈의 통로 풍경을 여태 기억하고 있을까. 발을 담그지 못하게 말캉거리던 새파란 바다와 오랜 기억 속의 크루즈, 그리고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달.
봄이 같은 통로에 두 번 가는 건 안 된다고 해서 그 뒤로 다시 본 적은 없지만, 한 번 뇌리에 박힌 망망대해는 드문드문 향수에 젖은 것처럼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확신할 수 있다. 꿈 구슬이 형성해낸 이 가상의 공간이 슈퍼문이 뜬 그때 그 바다와 아주 똑같은 공간이라는 것을.
‘감상에 빠질 계제는 아니지만, 저 달도 오랜만에 보니까 정겹네.’
봄이 밀어서 빠졌을 때만 나를 허락했던 바다는 이번에도 말캉말캉한 젤리처럼 내가 들어가는 것을 방해했고, 커다란 달은 요요하게 나를 내려다봤다.
잠깐 달을 올려다보다가 거리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은 드넓은 바다 위에 두 발로 서서 주변을 살폈다. 분명 같이 있어야 하는 진예신이 보이지 않았다.
‘황야 구슬도 꿈 구슬도 발동시킨 사람까지 전부 휩쓸리는 게 기본인데…. 진예신은 어디로 간 거지?’
시야에 잡히는 사람도 없고, 살살 늘리고 있는 아이온의 탐지 범위에 걸리는 생명체도 없다. 위협이 될만한 게 없으니 안전이 보장됐긴 한데, 묘하게 신경에 거슬리는 느낌이 든다.
설마 진예신은 같이 오지 않았나? 그럴 리가 없는데. 구슬이 오작동할 가능성은 없으니 진예신이 일부러 숨어있다는 게 더 그럴듯한 가정이다.
그때 갑자기 왼손에 따끔한 통증이 일더니 부르지도 않았는데 봄이 불쑥 튀어나왔다. 깜짝 놀라서 휘둥그레 눈을 뜨자 봄이 까르륵 맑게 웃으며 크루즈 쪽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발랄하게 제안했다.
[있지, 요한아. 우리 저어기 가보자.]“갑자기 왜 나온, 아니, 그 전에 어떻게 나왔어? 꿈 구슬의 공간에서는 원래 못 나오지 않아? 아이온 사용은 돼도 마석이 실체화되는 건 불가능한 곳이잖아.”
당황해서 횡설수설 생각나는 대로 말해버렸다. 봄은 또랑또랑하게 눈을 빛내면서 내 말을 잘 들어주더니 꺅꺅 호들갑을 떨며 내게 덥석 매달렸다.
[역시 우리 요한이! 잘 기억하구 있네! 그치만 까먹은 것고 있다, 그치~? 요한이는 지금 황야 구슬을 들고 있는걸? 두 구슬을 동시에 발동시키지 않으면 짝꿍 구슬을 든 사람은 예외 대상에 속하잖아.]“아.”
[히히, 황야 구슬 손에서 놓지 말구 계속 들고 있어야 해! 안 그러면 나 다시 들어가서 못 나오게 되니까 위험할 수도 있다구.]장난스럽게 웃은 봄이 내 뺨에 제 볼을 연신 비비면서 나름 엄하게 말을 덧붙였다. 물론 꼬맹이 모습으로 말해봤자 무섭긴커녕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목에 팔을 두르고 오랜만에 높이 매달려서 좋다며 연신 종알거리는 봄을 편하게 고쳐 안다가 멈칫했다. 무심코 눈에 들어온 왼손바닥에 화상으로 인한 흉터가 진하게 남아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한테 자주 안기는 봄인데 오랜만에 ‘높이’ 매달렸다고…?
“예전 몸이잖아?”
[이제 알아챈 거야? 역시 요한이는 자기 몸에 둔하구나!]“거울을 본 것도 아니고,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바로 안다고 그래….”
[헤헤, 그런가아~?]입을 조금 벌리고 주책없이 웃은 봄이 내 품에 편하게 기대면서 발을 달랑거렸다. 그리고선 다시금 크루즈를 손가락질하며 어서 저쪽으로 가자며 보챘다.
일반적인 균열이었다면 가만히 이 자리에서 진예신이 있는 곳을 완벽하게 탐지한 후에 이동했을 거다. 하지만 이 창해에 유일한 물체인 크루즈를 제외하면 별달리 살펴볼 것은 더 없었고, 내 무력의 근간인 봄도 품에 있는데 움직이지 않을 이유는 없었다.
봄을 안은 팔에 힘을 조금 더 준 채로 발끝에 아이온을 모아 단박에 튕기듯 크루즈를 향해 달렸다. 속도엔 제법 자신이 있었기에 망설임 없이 아이온을 운용했고, 덕분에 눈 깜짝할 사이에 크루즈에 발을 디뎠다.
[와아~! 요한이 최고! 엄청 빨라졌네!]“연습하는 거 계속 봤으면서 새삼스레?”
[보는 거랑 경험하는 거랑은 다른걸? 안겨 있으니까 바람도 시원했구 눈앞이 휙휙 바뀌니까 좋았어!]다음에도 또 안고 달려 달라며 애교를 양껏 부린 봄은 어느덧 크루즈를 기웃기웃 살피더니 뾰로통하게 입술을 삐죽거렸다.
왜 그러느냐고 묻기도 전에 크루즈의 수많은 선실 중 하나가 벌컥 열리면서 내가 가장 익숙한 나이의, 그러니까 고등학생 모습의 진예신이 나왔다.
민망한지 어색하게 웃으며 나온 진예신을 나와 봄이 똑같이 위아래로 훑어봤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난 진예신이 어디 다치거나 이상해진 부분이 없는지 살폈다는 거고, 봄은 당장이라도 한 대 칠 것처럼 맹렬하게 쏘아봤다는 점이겠다.
쌕쌕 숨을 내쉬며 점점 흉흉해지는 봄의 등을 토닥여 진정시키면서 우물쭈물하는 진예신에게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
“사진에서만 보던 모습으로 보니 감회가 새롭습니다, 부협회장님.”
“아하하….”
“제 모습도 이러니 참 낯선 기분도 듭니다. 흉터까지 그대로인 성인의 몸인데 봄은 멀쩡히 있고, 아이온도 쓸 수 있다니. 참으로 특이한 설정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으음…. 그건 저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라고 하면 믿어주시나요? 솔직히 저도 꿈 구슬을 직접 써보는 건 처음이라 제 몸도 지금 영 어색하거든요.”
믿음이 전혀 가지 않았지만, 믿을 수밖에 없는 말이긴 했다. 게임 진행 중에 진예신이 꿈 구슬을 만져본 적은 정말 없었고, 지금도 세상에 하나씩만 있는 구슬들을 오늘에서야 얻었는데 써볼 기회가 있었을 리가 없으니까.
못마땅하게 진예신을 보면서 마지못해 긍정의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봄이 휙 고개를 돌렸다.
무의식적으로 따라간 봄의 시선 끝엔 진예신이 나왔던 문이 있었고, 이내 그 안쪽에서 빼꼼 작은 아이의 머리가 빠져나왔다.
봄의 얼굴이 대번에 불만족스럽게 일그러지더니 대뜸 아이를 손가락질하며 펄펄 뛰었다.
[노을이 너어~! 나랑 약속한 거 안 지켰구!]노을? 그렇다면 봄과 또래처럼 보이는 외형의 저 아이는 진예신의 마석이 실체화한 모습이라는 건데….
협회 본부에 머무르다 보면 사람 혹은 동물의 형태로 돌아다니는 마석들이 제법 많은데, 진예신의 마석이 직접 나온 건 처음이라 신기한 마음에 빤히 쳐다봤다.
겨울의 노을은 여느 마석이 그렇듯이 보석을 박아넣은 듯한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며 날 마주 보다가 대답을 좀 하라며 성질내는 봄을 한 번 보고는 다시금 쏙 선실로 들어가 버렸다.
무시당한 봄이 충격에 눈을 크게 떴다가 곧 몸을 부르르 떨고는 ‘야!’하고 빽 소리쳤다.
오, 이렇게 흥분한 봄은 처음이라 놀라운데. 그래도 여기서 더 흥분했다가는 쌈박질이라도 벌일까 싶어서 냉큼 봄을 안아 들었다.
내게 안겨서도 씩씩대는 봄의 등을 천천히 두드려주면서 진예신을 쳐다보자 그가 일단 선실로 들어가자며 문을 활짝 열어줬다. 나와 봄은 사양하지 않고 선실 안으로 들어갔다.
‘평범하네.’
일반적인 크루즈 선실과 다른 점은 없는 내부엔 침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겨울의 노을만이 특별했다.
쟤랑 말을 좀 해야겠다며 내려달라고 발버둥 치는 봄을 잘 달래며 작은 소파에 앉자 진예신이 맞은편의 침대에 걸터앉으며 큼큼 헛기침을 했다.
그 소리에 겨울의 노을이 꼼지락거리다가 진예신의 옆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았고, 봄이 눈을 사납게 치켜떴다.
봄이 날뛰기 전에 빨리 뭐라도 말해보라는 눈빛을 진예신에게 보냈고, 다행히 그는 할 말이 확실하게 정리됐는지 빠르게 대화의 포문을 열었다.
“황야 구슬이 저장된 기억을 혼합하여 발동하는 자가 원하는 공간을 만드는 거라면, 꿈 구슬은 내면에 깊이 남은 풍경을 무작위로 선정하여 공간을 만들어내요. 거기에 감정 조절이 어렵다는 옵션이 붙죠. 그래서 풍월주의 손에 들어가는 걸 원하지 않았고, 요한 군과의 대화에 꼭 쓰고 싶었어요.”
“그건 서로 거짓말하지 않기 위해서입니까?”
“요한 군이 거짓말한다고 생각해서가 아니에요. 요한 군이 숨기는 걸 억지로 캐내고 싶어서도 아니고요. 그냥 내가 나도 모르게 요한 군에게 거짓말을 할 거 같아서 그랬어요.”
앳된 얼굴의 진예신이 술술 말하다가 혀끝을 살짝 씹었다. 평소였다면 볼 수 없을 민망함에 붉힌 볼이라거나 억지로 말을 끊기 위해 입술을 깨무는 모습 같은 게 제법 신선했다.
이거 참, 꿈 구슬 효과 한 번 끝내주는군. 실없는 생각을 하다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모처럼 서로 돌려 말하지 않아도 될 때가 왔는데, 이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물론 나도 내어주는 게 있겠지만, 그만큼 얻어가는 게 있을 거니까.
“어디까지 계획하신 겁니까? 제가 추측하기론 구슬이 있다는 것을 알고 일부러 망각의 도시를 선택한 것 같은데, 맞습니까?”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진예신의 말간 눈동자가 꾹 감겼다가 떠졌다.
녹색이 아닌 노을 같은 주황색 눈동자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불현듯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해버렸다.
“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니까 호승 군과 세환 군을 데리고 간다는 것부터 구슬을 얻어 풍월주를 끌어낸다는 것까지 모두 제가 계획한 일이에요.”
지금껏 들어왔던 진예신의 모든 말 중에서 가장 확정적이고 단호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