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tand at the peak of wealth RAW novel - Chapter 73
75. LTCM?(3)
김현아와 신선영이 거주하는 집은 예일대학이 있는 뉴헤이븐에 약간 못 미친 외곽에 자리했다. 그들은 아파트를 임대해서 살고 있었다.
애초에 김현아는 기숙사에 거주하다가 신선영이 취직을 하면서 둘이 합쳤다고 했다. 대학 도시로 알려진 뉴헤이븐답게 이 아파트에는 대학생 커플이 많다나.
그날 저녁 갑자기 들이닥친 유서준과 서하나를 보고 김현아는 깜짝 놀랐다.
김현아는 현재 박사과정 3년 차. 졸업논문을 준비하고 있어 바쁘다고 했다.
유서준은 곧바로 그동안 연락이 끊어진 김현아를 타박하기 시작했다.
“아, 그게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정신이 없어서 연락하기 어려웠어. 서준이 너도 군대에 있었잖아. 여기 적응되었을 때에는 서준이도 제대한 후라 어디로 연락해야 할지 몰랐지. 학과로 편지를 보낼까 몇 번이나 고심하다가 결국 못한 게 이렇게 되었어.”
김현아가 변명했다.
유서준이 본 김현아의 모습은 옛날이나 그리 차이 없었다. 다만 도시풍의 세련된 모습으로 변했다고 할까. 공부 때문인지 가꾸지 않은 모습도 과거와 비슷했다. 털털한 그녀의 성격도 예전 그대로였다.
이렇게 비행기를 타고 오면 그리 멀리 떨어진 것도 아닌데 못 본 기간이 무려 3년이 넘었다. 생각보다 서먹서먹하지 않다는 사실에 그는 놀랐다.
저녁은 김현아와 신선영이 적당히 파스타 요리를 해서 먹었다. 밥을 먹은 후 곧바로 부근의 해변으로 자리를 옮겼다.
어두워지는 밤바다를 바라보며 백사장에 둘러앉아 맥주 파티가 벌어졌다. 간단한 스낵 안주에 캔맥주로 해변가에서 마시는 맥주는 일품이었다. 주위에는 그들처럼 한여름의 선선한 바람을 즐기는 사람이 많았다.
유서준과 서하나는 투자자문사 설립 이야기를 했다.
김현아는 미국에서의 대학 생활을 입에 올렸고 신선영은 최신 금융기법에 대해 흥미로운 내용을 풀었다.
“그래서 LTCM은 대체 무엇으로 먹고살지? 주식 매매야?”
서하나가 질문을 던졌다.
신선영이 손을 저으며 아니라는 뜻을 나타냈다.
“지난 3월부터 운용을 시작했는데 3월은 회사 전체적으로 약간 손해가 났어요. 4월은 그저 그랬고요. 초반에 수익이 나지 않는 것은 포지션 구축 때문이고 실제 보유 포지션이 효과를 내기 시작한 게 5월부터니까 그 시기부턴 수익이 의외로 컸어요. 5월 한 달 약 7%를 벌었다고 하더군요.”
선진 증시에서 월 7%의 수익은 엄청난 것이었다. 일 년 10%만 넘어도 초대박 펀드라고 알려지니까.
“흥미로운 것은 그중에 주식 매매는 없어요. 주식은 우리의 주력이 아니니까요. 제가 LTCM에 들어간 이유도 그 때문이지만.”
5월, LTCM에서 가장 수익이 많이 난 분야는 이탈리아 채권이라 했다. 이탈리아 채권과 금리의 스와프 스프레드를 이용하여 차익거래를 한다고 했다. 유서준도 서하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우리 회사의 주력은 미국 국채 스프레드예요. 30년 만기 채권을 살펴보면 신채권과 구채권 사이에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가격 차가 발생하거든요. 그 차이는 매우 작아 대부분 무시하지만 우리는 그걸 이용해서 차익거래를 하는 거죠.”
신선영이 여러 매매기법을 설명했다. 사실 이런 매매의 대부분은 파생상품과 연결되어 있다. 파생상품은 한쪽에선 팔고 한쪽에선 사면서 그 위험을 최소화하는 거래기법이다. 사실상 위험이 거의 없다 보니 보유 포지션을 크게 가져간다. LTCM은 대개 자본금의 30배까지 포지션 규모를 확대한다. 결국 작은 수익이 30배 커져 돌아오므로 수익은 매우 컸다.
“파생상품 지식이 전무해서 정확히 모르겠지만 의외로 위험할 수도 있지 않아요?”
유서준이 물었다. 그가 아는 한 금융시장에서는 공짜 점심이 없다. 위험이 없으면서 수익이 크다면 누구나 다 달려들어서 그런 수익은 곧 없어지기 마련이다.
신선영도 고개를 끄덕였다.
“이론적으로는 위험이 없어요. 다만 현실에서는 분명 리스크가 존재하죠. 그걸 어떻게 제어하느냐가 능력이고 LTCM의 설립자인 메리웨더는 그 분야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죠.”
“뜬구름 잡는 이야기네.”
서하나가 고개를 내저었다. 사실상 신선영이 말하는 여러 기법은 국내 증시에 적용이 불가능했다.
“그렇지 않을 거예요. 한국에도 곧 파생상품 시장이 열릴걸요? 소문에 따르면 96년경으로 생각하고 있나 봐요. 정부에서도 더 미루기 어려운 것이 파생상품 시장이 없는 주식시장에는 외국인의 자금이 들어오지 않거든요.”
신선영이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풀었다.
김현아가 동조했다.
“그때가 되면 신세계가 열리는 거죠. 주식시장은 기존과 완전히 흐름이 달라질걸요.”
“준비된 자만이 그 과실을 얻을 수 있겠네.”
서하나가 생각에 잠기며 중얼거렸다.
사실상 대한민국의 주식시장은 이제 걸음마 단계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점차 개방되면서 선진 증시와 비슷한 모습을 갖춰나갈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국내 자본의 유출과 개인 투자가의 피해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현재 국내 주식시장을 좌우하는 것은 기관투자가가 아닌 개인투자가이고 그들은 선진기법으로 무장한 외국 투자가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항상 개인투자가의 꾸준한 수익을 고민하는 서하나였다. 그녀가 SJ 투자자문에 합류할 결심을 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유서준은 파생상품에 대한 보다 깊은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적어도 국내에 파생상품이 도입될 시기까지 완벽한 수익모델을 찾아야 했다. 그 기간은 앞으로 대략 2년 남짓이었다.
신선영이 설명을 했다.
“파생상품의 하나인 선물과 현물인 주식의 가장 큰 차이는 선물의 양방향성이죠. 주식은 반드시 주가가 올라야 수익을 내죠. 주가가 오르는 한 모두가 이익을 얻고요. 어떤 사람은 많은 수익, 어떤 사람은 적은 수익으로 다르더라도. 반대로 주가가 내리면 대부분은 손해를 봐요.”
이런 속성 때문에 89년 주가지수가 1000을 찍고 내려오면서 수많은 사람이 손해를 봤다.
“반면 선물은 올라도 이익을 볼 수 있고 내려도 이익을 볼 수 있어요. 그 말은 올라도 손해를 보고 내려도 손해를 볼 수 있다는 의미죠. 옵션이 도입되면 더 복잡해져요. 이런 게 복잡하게 얽히면 다양한 상품이 만들어질 수 있어요.”
더 이상의 설명은 유서준에게 무의미했다. 아직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준비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서준은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어둠 때문에 검게 보이는 검은 바다가 눈앞에 다가왔고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앞으로 그의 미래 역시 저 바다처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어둠일 것이다. 그 어둠을 뚫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사명이기도 했다.
그가 주위 백사장을 둘러보고 있을 때였다. 어둠 속에서 한 사람이 다가왔다.
신선영이 손을 흔들었다.
“강수가 왔네.”
나타난 자는 박강수였다. 박강수 역시 예일대 대학원에 입학했다. 그가 김현아를 따라왔다는 설이 있지만, 진실은 알 수 없었다. 박강수는 예일대 기숙사에 거주하고 있었다.
“하나 누나 오랜만.”
박강수가 서하나에게 인사를 한 다음 유서준을 향해 웃음을 지었다.
“서준이도 왔구나. 이 먼 곳까지 어쩐 일로?”
“이런저런 일로 겸사 겸사…….”
유서준은 적당히 둘러댔다.
미국에 건너온 후 그들 세 사람은 한두 달에 한 번씩 모인다고 했다.
유서준은 예전에 김현아를 사이에 두고 박강수와 대립하던 때를 떠올렸다. 그 내기에선 분명히 유서준이 이겼었는데 지금 지나고 보니 상황이 모호해졌다.
유서준은 사실상 김현아와 연락이 끊어지면서 멀어졌고 박강수는 계속 가까이 있는 상황이었으니.
유서준은 박강수와 김현아의 사이를 슬쩍 가늠해 보았으나 특별히 가까운 느낌은 없었다. 박강수는 분명히 가까이 다가가려고 시도했겠지만, 김현아가 다소 거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서준은 김현아와의 관계를 떠올려보았지만 서하나와의 결혼을 염두에 둔 상황이라 그녀와의 관계를 다시 시작할 생각은 없었다. 다행히 그를 만난 김현아 역시 특별히 그에게 집착한다는 느낌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동성 친구처럼 대해주고 있달까.
“오우, 유서준, 요즘 잘 나가나 본데?”
유서준의 근황을 들은 박강수가 환호성을 터트렸다. 박강수가 유서준과 캔을 맞부딪치며 슬쩍 말을 추가했다.
“유사 투자자문사란 게 인맥이 없으면 투자 유치조차 쉽지 않겠지만.”
“그래서 내가 요즘 돌아다닌다고 바쁘잖냐? 머나먼 미국도 다 와보고.”
유서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을 받았다. 박강수는 말을 해도 꼭 저렇게 꼬투리를 잡는 버릇이 있었다.
박강수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말을 이었다.
“선영 누나한테 LTCM에 대해 들었으니 알겠지만 역시 여기 와보니 세상은 넓더라. 한국 내에서 주가 오르내림에 아웅다웅하는 방식으론 앞으로 적응하기 쉽지 않을 거다.”
국내 시장을 무시하는 태도였다.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유서준은 어째 기분이 살짝 나빠지려 했다.
유서준 뿐만 아니라 서하나마저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박강수가 황급히 말을 돌렸다.
“물론 하나 누나가 옆에서 잘 해줄 테니 염려할 필요는 없겠지. 하하.”
“이미 알겠지만 서준이 실력 정말 대단하더라.”
서하나가 말을 돌리며 칭찬을 했다.
박강수가 혼자서 피식 웃음을 짓더니 서하나에게 물었다.
“누나도 이쪽으로 유학 오세요. 누나 예전에 공부도 잘 했잖아요? 여기 와서 새로운 분야를 배워 돌아가면 크게 대접받을걸요?”
“그러고 싶지만…….”
서하나가 말끝을 흐렸다. 그녀 역시 한때 그런 꿈을 꾸었었다. 이젠 완전히 놓아버린 꿈이었지만. 적어도 그녀는 지금 현재의 상황이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증권사에서 상사의 눈치를 보며 투자 상담을 하던 때보다 월등히 좋았다. 유서준이 함께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고.
박강수가 그녀의 반응에 다시 한소리를 했다.
“적어도 서준이 옆에 있는 것보다는 여기 오셔서 제 옆에 계신 게 더 나을 겁니다.”
그의 속셈이 훤히 보였지만 유서준은 반응하지 않았다. 일일이 그런 말에 발끈할 나이도 지난 지 오래다.
오히려 김현아가 박강수를 나무랐다.
“강수는 여전하네. 서준이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 것을 보면.”
“예전에 서준이랑 내기해서 동아리에 몇백만 원 기부했다며? 너 그거 때문에 그러지?”
신선영 역시 한마디 끼어들었다.
예전의 그 내기 이야기가 나오자 대화가 왁자지껄해졌다.
주가지수가 1000고지를 밟았던 때 유서준이 모든 주식을 다 팔고 매매를 접은 것은 아직도 동아리에서 신화적인 이야기로 남아있었다.
박강수가 다 마신 맥주캔을 손으로 꽉 잡아 우그러트리며 말했다.
“그때 전 파산하는 줄 알았다니까요. 하하.”
“뭐, 그럴 때 동아리에 좋은 일도 하는 거잖아. 하하.”
김현아도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모여 예전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옛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마치 이곳이 타국이 아닌 한국의 한 해변 같은 느낌이 났다.
비슷한 길을 가는 사람이니 언젠가는 다시 만나겠지만 당분간은 만날 일이 없을 것이다. 이제는 굳이 경쟁자도 아니고 서로의 성공을 빌어주어야 할 사이가 아닐까.
유서준은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신선영도 김현아도 나름 잘 나가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즐거워졌다. 뭐, 박강수도 일단 잘되라고 빌어줘야겠다.
물론 유서준에게 앞으로 할 일은 더욱 뚜렷해졌다. 일단 SJ 투자자문을 LTCM에 뒤지지 않는 회사로 키워야 한다. 지금 LTCM에 속한 신선영을 언젠가는 빼내어 자신의 회사로 옮기게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박강수가 LTCM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고…….
유서준이 맥주를 들이켜며 혼자만의 생각에 잠겨있을 때 서하나는 유서준과 김현아 사이의 미묘한 관계를 가늠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가 어떤가에 따라 그녀 자신과 유서준의 관계 역시 달라질 가능성이 있었기에.
부의 정점에 서다 4
76. 뉴욕의 밤
그날 밤을 김현아네 아파트에서 머문 유서준과 서하나는 다음 날 아침 여행을 핑계 삼아 그들과 헤어졌다. 주말이라 함께 부근을 여행하자는 제안도 있었지만, 유서준은 폐를 끼치고 싶지 않다며 사양했다.
두 사람은 일단 뉴욕 맨해튼의 월가를 둘러보았다. 전 세계 금융의 중심지이자 모든 자본이 몰려 있는 곳.
월가의 중심에는 미국의 중앙은행이라 할 연방준비은행(FRB)이 자리 잡고 있었다. 20세기 초에 르네상스풍으로 건축된 건물이라 했다. 그 이웃엔 초현대식 건물인 체이스맨해튼은행이 있고 허드슨강을 따라 JP모건은행과 메릴린치은행이 줄지어 서 있었다.
90년대 중반 한국에서 가장 큰 은행은 한일은행이었다. 그 한일은행과 비교하여 자본금 면에서 무려 10배 이상 차이가 나는 거대은행의 집단. 이것은 대한민국 금융의 취약성과 후진성을 알려주는 가늠자였다.
유서준은 거대한 은행 건물 아래에서 호승심을 불러일으켰다. 언젠가는 자신이 이곳을 제패할 것이라고. 언젠가는 SJ 투자금융의 뉴욕지사가 이곳 월가를 호령할 때가 있을 것이라고.
월가를 돌아본 두 사람은 뉴욕의 몇몇 명소를 구경한 후 멋들어진 저녁 식사를 했다.
두 사람은 뉴욕의 한 호텔로 들어갔다. 오늘이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이었다.
**
커다란 창문 너머로 높이 솟은 마천루가 보이는 호텔 객실에서 유서준과 서하나는 작은 테이블을 앞에 두고 대화를 나누었다.
방을 두 개 따로 잡긴 했지만 잠이 들기 전 뉴욕에서의 일을 정리하기 위해 유서준은 서하나의 방에 잠시 머물렀다.
두 사람은 LTCM에 대한 기본적인 내용을 정리하고 SJ 투자자문의 궁극적인 방향을 수립했다.
유서준이 말을 꺼냈다.
“우리가 나가야 할 방향은 살로먼 브러더스 같은 투자은행이죠?”
“그렇다고 봐야지. 아직 우리나라엔 투자은행 개념은 없고 투신사만 존재하지만 결국 언젠가는 설립 가능하리라고 봐.”
유서준의 질문에 서하나가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유서준은 냉장고에서 캔맥주를 두 개 꺼내 하나를 서하나에게 넘겼다.
“투자 부문도 주식이 아니라 주식과 파생상품을 결합한 형태가 되어야겠죠?”
“응, 그게 더 안정적인 수익률이 가능하니까. 오래지 않아 국내에도 파생상품 시장이 들어서겠지. 그때는 우리도 본격적으로 변해야겠지.”
서하나도 큰 흐름에서 유서준과 의견이 일치했다.
유서준이 그녀를 보며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앞으로 많이 부탁드려요.”
서하나는 유서준의 눈을 피하며 캔맥주를 땄다.
“내가 뭘…….”
유서준은 캔맥주를 천천히 들이켰다. 시원한 맥주가 혀끝에서 싸하게 느껴졌다. 아무 계획 없이 무작정 미국으로 날아왔지만, 성과는 있었다.
서하나가 말을 꺼냈다.
“여기에 잘 온 것 같지?”
“네.”
“현아 만나보니 어땠어?”
유서준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창으로 다가갔다. 화려한 도심의 불빛이 창으로 들어왔다. 맥주캔을 든 서하나가 그의 옆으로 다가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두 사람은 잠시 창밖을 구경했다.
그는 그녀가 김현아 이야기를 꺼낸 이유를 짐작했다. 아마 이곳으로 날아올 때부터 그녀는 김현아의 존재가 심히 신경 쓰였을 것이다. 한때 그의 연인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현아는 안색이 좋아 보였어요. 학교 공부도 만족하는 것 같고…….”
“그런 말 아니잖아…….”
서하나가 나직한 목소리로 그의 말을 잘랐다.
유서준은 미소를 머금은 채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름다운 얼굴이, 커다란 반짝이는 두 눈을 그에게 향한 채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생각보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
“생각보다 별다른 느낌은 없었어요. 이미 오래전에 떠나보내기도 했고, 다시 시작하기에는 너무 시간이 흘렀죠.”
차분한 그의 말에 서하나의 안색에 변화가 일었다가 가라앉았다.
캔을 쭉 들이킨 서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냥 담담했나 보네.”
유서준은 맥주를 비우고 난 다음 서하나를 뒤에서 껴안았다.
창밖을 바라보는 서하나를 유서준이 뒤에서 안고 함께 창밖을 바라보는 자세였다.
“하나 누나, 저 아직 답변 못 받았어요.”
“응?”
서하나가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뒤로 돌렸다.
유서준은 가볍게 그녀에게 입을 맞춘 다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난 연말에 프로포즈한 거 아직 답변 안 주셨잖아요.”
“아…….”
서하나는 6개월 전 한겨울 종로의 밤을 떠올렸다.
사실 그때 곧바로 대답하고 싶었다. 나는 당신의 것이라고.
하지만 김현아가 발목을 잡았다. 자신이 그보다 나이가 많다는 사실과 그의 마음에 아직 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김현아란 여인이 있었으니까. 못 본 지 오래되었지만, 다시 보면 그의 마음이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기에 그녀는 기다렸다. 다시 그와 김현아가 만날 때까지. 그리고 마음의 정리를 해주기를 바랐다.
예전의 그녀였다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그녀 스스로 모든 면에서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나이라는 문제와 상대가 김현아라는 그녀 못지않은 예쁜 후배였기에 기다렸다. 그 스스로 판단을 내릴 때까지.
그러던 중에 마침내 멀리까지 와서 김현아를 만나는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긴장했던 그 만남이 지나갔다.
서하나는 창밖을 보며 말했다.
“불 꺼줄래?”
유서준은 객실의 불을 끄고 다시 그녀를 뒤에서 안았다.
은은한 어둠이 드리워지고 창으로 들어온 불빛이 두 사람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창밖에 비치는 맞은편 건물 불빛을 보면서 두 사람의 대화가 끊어졌다.
이국의 땅에서 맞이하는 밤은 묘한 흥분을 불러일으켰다.
유서준은 창문에 어린 그녀의 반사된 모습을 보며 그녀의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를 안고 있는 팔에 점차 힘이 들어갔다.
서하나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난 이미 오래전에 마음을 결정했어. 다만 서준이 너의 마음이 결정되기를 기다린 것뿐이야.”
그녀의 목소리는 나지막하고 단아했다.
유서준은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저도 오래전에 이미 결정을 내렸어요.”
“응, 알아. 하지만 그건 이성이지. 정말 마음이 움직여 결정한 것은 오늘이 아닐까.”
유서준은 그녀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다.
그는 그녀의 목덜미로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이제 누나는 내 여자예요.”
“으응…….”
서하나가 간지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몸을 비틀었다. 유서준은 그녀에게 입을 맞추었다.
잠시 시간이 멎은 듯 두 사람의 움직임이 정지했다.
이윽고 유서준이 입술을 떼며 말했다.
“오늘은 제 방으로 돌아가지 않아도 되겠죠?”
서하나는 대답 대신 유서준의 뺨에 살짝 입을 맞추었다.
유서준의 손이 그녀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었다. 옷자락이 벌어지며 어둠 속에서 그녀의 속옷이 슬며시 드러났다.
서하나의 안면에 홍조가 드리워졌다.
“아, 지난번에 사드렸던 그 속옷이네요?”
“흐응, 입은 거 보여 달라며?”
서하나가 떨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유서준의 손이 천천히 내려가며 블라우스 단추를 완전히 풀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옷자락 사이로 레이스가 달린 브래지어가 하얀 가슴을 가린 채 드러났다.
유서준은 여전히 그녀를 뒤에서 껴안은 채 어깨너머로 그녀의 몸을 보기 위해 힐끔거렸다.
서하나가 몸을 비틀었다.
“아아, 너무 그렇게 보지 마.”
유서준이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사실 오늘이 두 번째예요.”
“응? 언제?”
“예전에 휴가 나왔을 때 누나가 술 많이 마셨던 날…….”
서하나가 그날의 일을 떠올리고는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유서준이 짓궂은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날 택시에 태웠을 때 옷핀이 빠져서 안이 다 보였어요.”
“으윽, 이미 다 보고도 못 본 척했나 보네. 아아, 늑대.”
유서준의 손이 천천히 그녀의 몸을 타고 내려갔다.
“어디까지 봤는데?”
“위도 아래도…… 다 보이는데 안 볼 수는 없었죠.”
“아래도? 너 설마, 그날 벗겨본 것은 아니지?”
서하나의 음성이 떨려 나왔다.
“설마요. 그러고 싶었지만…… 참았죠.”
“역시 늑대였어.”
“오늘은 제대로 보여주실 거죠?”
“으응? 아아…….”
유서준의 손이 그녀의 치마를 풀었다. 치마가 그녀의 다리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는 그녀의 몸을 자신에게 돌렸다. 아름다운 얼굴 아래로 뽀얀 피부와 우아한 곡선이 눈을 가득 채웠다.
서하나가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그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 사이로 창밖에서 들어온 불빛이 내려앉았다.
**
유서준은 방안으로 들어오는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다.
낯선 방안. 창밖으로 건너편 빌딩이 햇살과 함께 눈에 들어왔다.
그는 자신의 품에 안겨 잠든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서하나. 지금까지 그가 봤던 그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그는 어젯밤을 떠올렸다. 그녀의 몸매도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가히 여신이라 부르기에 조금도 부족하지 않을 여인이었다. 그는 이런 그녀를 얻게 되었음을 감사했다.
유서준은 2001년에 적힌 그 날의 일기를 떠올렸다. 바로 그녀가 죽었다는 그 부분이었다. 서하나가 그와 결혼한다면 그녀는 죽을 일이 없을 것이다. 사실 서하나는 그가 지금처럼 돈을 모으지 않았던 상황이었다면 이어질 접점이 거의 없었다.
결론적으로 의심스러운 인물은 김현아였다. 그녀는 그와 대단히 가까운 관계를 유지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다면 그녀가 죽은 이후로 그가 결혼하지 않았다는 추측이 타당했다.
어제 본 김현아는 대단히 상태가 좋아 보였다. 그런 김현아가 왜 죽게 될까? 아직 2001년은 무려 7년이나 남아있었다. 그가 신중하게 지켜봐야 할 문제였다. 이제는 그녀와 엮일 일이 사라졌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불행해지는 것을 그냥 두고 볼 생각은 없었다.
신선영과 박강수의 LTCM 관련 문제는 지금 당장 해결할 사안은 아니었다. 아직 무려 30년은 더 남아있으니 천천히 해결해야 할 것이다.
복잡한 생각을 고민하고 있을 때 서하나가 몸을 꿈틀거리더니 잠에서 깨어났다.
“깼어요?”
유서준의 말에 서하나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하고 있었어?”
“누나 보고 있었죠.”
서하나가 얼굴을 붉히더니 이불로 몸을 돌돌 말았다.
“못 됐어.”
가만히 둘 유서준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의 이불을 잡아당겨 이불 속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이리로 와 봐요.”
“아아, 안돼.”
서하나가 거부하다가 결국 그를 이불 속 옆자리로 인도했다.
유서준이 창문을 가리켰다. 밝은 햇살이 환하게 들어오는 기분 좋은 아침이었다. 어젯밤에 본 창밖의 마천루는 대낮에는 색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저 창문을 비추는 햇살이 참 좋죠?”
“응, 햇빛이 멋지다.”
서하나는 옆으로 누워 창을 바라보았다. 유서준이 그녀의 뒤에 붙어 나란히 누운 채 같은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서준이 그녀의 몸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말했다.
“지금 좋은 생각이 났어요.”
“뭔데?”
서하나가 별 의심 없이 그에게 물었다.
유서준이 그녀의 귀에다 대고 귓속말로 말했다.
“지금 누나를 저 창가의 햇빛 아래 세워보고 싶어요.”
“응?”
무슨 말인지 금방 이해하지 못한 서하나가 평소처럼 반문하다가 갑자기 몸을 돌렸다.
곧바로 베개가 그에게 날아왔다.
“허억, 변태!”
유서준의 얼굴이 베개에 짓눌리며 소리쳤다.
“그게 누나가 너무 예뻐서 그렇잖아요. 누나 책임이지.”
“아냐, 네가 이상한 거야.”
서하나가 베개로 누른 것도 모자라 베개 위를 마구 두들겼다.
유서준은 그런 그녀의 반응을 무시하고 그녀를 번쩍 들어 창가에 앉혀놓았다.
그녀의 몸을 덮었던 이불이 떨어져 나가고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그녀의 하얀 몸 위로 내려앉았다.
여신. 미치도록 예쁜 여신이 그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