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a Shounen Manga RAW novel - Chapter 52
52화 새로운 길
***
“이야······.”
탄성이 절로 나오는 전경이었다.
눈으로 직접 보면서도 내가 배의 최상층으로 온 것인지, 아니면 갑작스레 휴양 리조트로 공간이동이 된 것인지 분간하기 힘들 정도였다.
실내는 놀라우리만치 다양한 공간으로 분화되어 있었는데, 한 편엔 정원과 풀장이 있었고, 다른 한 편엔 Bar가, 또 한 편엔 공연이 가능한 무대가 마련되어 있었다.
대충 풋살장 정도일 줄 알았는데, 막상 와서 보니 종합운동장인 느낌이랄까.
그냥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넓고, 또 뭐가 많았다.
“넓다.”
“그러니까. 보이는 것보다도 훨씬 넓어 보이는데?”
“공간에 변형이 들어간 듯싶습니다. 제가 아는 도깨비 어르신들 중에 이와 같은 술법을 쓰는 분들이 제법 계시지요. 아주 드물지는 않습니다. 약간의 장난과 거짓이 섞인 것일 뿐이니까요.”
“그러냐? 나는 도깨비가 아니라서 좀 놀랍긴 하네.”
물론 이 같은 능력이 존재한다는 걸 모르진 않았다. 다만 만화책에서 보는 것과 현실로 직접 겪는 것에 차이가 꽤 있었던 것뿐이지.
“그나저나······.”
나는 이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딱히 안내자가 없었기에 갈 곳은 우리가 정해야 했다.
공간은 대단히 넓었으나, 이를 쓰는 이용자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나마 중앙 분수대 근처 벤치에 몇몇 이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있는 게 눈에 띄었는데, 다 합해봐야 스무 명이 채 되지 않는 듯 했다.
저들 또한 우리를 보고는 있었으나, 딱히 손짓을 한다거나 부르려는 움직임을 보이지는 않았다.
“엉덩이 무거운 것들 좀 보소······ 일단 저기로 가야겠지?”
나는 곧장 그리로 걸어갔다.
가까이 다가가니 면면들이 조금씩 들어왔다.
딱히 사람들 간 공통점이 보이는 구성은 아니었다. 차려입은 의복도 가지각색에다, 인종도, 연령도 모두 제각각이었다.
그나마 공통점이라면 다들 얼굴에 부티가 좔좔 흐른다는 것 정도일까.
“흐음······.”
대충 슥 훑어본 결과, 딱히 눈에 띄는 얼굴은 없었다.
내가 다가갈 즈음부터 요상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기 시작한 웬 빨강머리를 제외하곤, 딱히 별 느낌이 오는 이가 없다고나 할까.
물론 빨강머리 또한 막 엄청 주의를 끈다거나 하는 건 아니었다. 상대적으로 눈길이 좀 더 간다? 정도였을 뿐이지.
사실 그냥 희한한 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대다수 소년만화 속의 흑막들은 사실 그리 복잡하고 심오한 녀석들이 아니다. 딱히 정치적이지도 않고, 대단한 신념을 품고 있지도 않다.
한 마디로, 도둑이 은행을 터는 것에 이유가 없듯, 흑막이 나쁜 짓을 꾸미는 것에도 딱히 대단한 이유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나쁜 놈이니까 나쁜 짓을 하는 것이지.
하여, 흑막들의 면면들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 악당이오’가 직관적으로 얼굴에 나타나 있는 경우가 종종 있다. 나와 마찬가지로 말이다.
물론 작중에 처음 등장할 당시에야 커튼 그림자로 얼굴의 반을 가리고 있다거나, 어둠에 숨은 상태로 실루엣만 보여준다거나 하며 이를 감춰놓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막상 다 까놓고 보면, 그냥 그놈이 제일 악당처럼 생긴 경우가 허다했다.
아쉽게도 당장은 그런 녀석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다 그냥 무난무난하다고나 할까.
물론 그렇다고 이 중에 흑막이 없다고 단정할 순 없겠지만, 약간 긴장감이 풀어지는 게 사실이었다.
그때였다.
“아, 오셨군요!”
웬 흑발의 청년 하나가 씩 웃으며 다가왔다.
개중에서도 가장 무난무난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이번에 새로 오신 신규 vip분들. 맞으시죠? 모험가?”
“아, 예.”
보아하니, 이 중에서 가장 처지는 녀석이 안내역을 맡은 듯했다.
“혹시······ 단장님?”
녀석이 나를 보며 물었다.
“예예.”
“한눈에 알아봤습니다. 무척이나 강해보이셔서.”
“······아, 예.”
황당한 놈이었다. 한눈에 못 알아보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나?
애초에 내 옆에 있는 녀석이라곤 꼬맹이와 좀 더 큰 꼬맹이, 그리고 약간 움츠러든 채 끊임없이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왕녀뿐이었다.
물론 왕녀나 이 녀석들이 실제로 약하다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딱 단장이겠다 싶은 건 애초에 나밖에 없지 않느냐고.
아주 혀에 꿀만 잔뜩 바른 놈인 듯했다.
“단장님만 일단 이리로 와주시겠어요? 네, 감사합니다. 이제 소개를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이게 이제까지의 관례라서. 간단하게만 해주시면 됩니다.”
그러고 녀석이 나를 분수대 중앙으로 이끌었다.
약간 경계가 되긴 했지만, 어쩔 수 없을 듯했다.
“아, 예. 이번에 운 좋게 신규 vip가 된 주걱턱 모험단입니다. 저는 단장인 히로라고 하고, 옆에는 저희 단원들입니다.”
인사를 끝냈음에도 별 반응은 나오지 않았다.
다들 그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만 볼 뿐이었다.
‘뭘 더 해야 되나?’
약간 고민이 됐으나, 그냥 어련히 시키겠지 싶어 가만히 있었다.
그때였다.
“이번 모험가 자격시험에서 1위를 했다고 들었는데.”
나는 소리가 난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래, 여태 잘 참았다 했다.
좀 전부터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고 있던 예의 그 빨강머리였다.
“예, 뭐.”
“이 인원이 모험단의 전부는 아니겠지?”
“아, 그게······.”
그러곤 나는 잠시간 말을 멈췄다.
딱히 전후사정을 제대로 설명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그냥 저 빨강머리의 표정과 말투가 띠꺼웠기 때문이다.
언제 봤다고 반말일까?
“한명 더 있긴 한데, 시험 자체는 네 명으로 친 게 맞아. 여기 꼬맹이 둘이랑 나, 그리고 여기 없는 한 명 더.”
그러자 빨강머리의 표정이 묘하게 뒤틀린다 싶더니, 이내 녀석이 피식 하고 웃었다.
“······자격시험도 옛날 같지 않나보군.”
“······.”
흐음.
나는 머리를 긁적거렸다.
때마침 내 생각을 읽었는지,
“S급 모험가 사비에르님입니다. 재작년 모험가 자격시험에서 높은 순위를 기록하셨죠. 그리고 불과 2년 만에 S급 헌터로 오르시기도 하셨고요.”
나를 안내했던 흑발 청년이 녀석에 대해 일러주었다.
“아······.”
황당한 놈이었다. 옛날 운운하더니 고작해야 2년 전에 친 거였냐고.
“그럼 그쪽이 재작년 1위인 건가?”
그러자 녀석이 잠깐 움찔하더니,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3위다. 멍청이 길잡이 녀석이 길을 잘못 드는 바람에 1위를 놓쳤지. 하지만 대적자인 나는 그 누구에게도 지지 않았어. 무려 6개의 모험단이 같은 보물로 몰렸음에도 불구하고 말이야.”
“아, 그래? 잘했네.”
진심이었다. 무려 저 레오 모험단도 3위이지 않는가.
헌데,
“······건방진.”
빨강머리가 나를 노려보며 대뜸 이를 가는 것이었다.
“······.”
저 혼자 자격지심에 불타오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잽싸게 흑발 청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괜히 저 피곤한 놈이랑 더 엮이기 전에, 다른 쪽으로 화제를 좀 전환시켜줬음 했던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신규 vip가 있다고 해서 와봤더니······ 어쩐지 익숙한 얼굴이 하나 보이는군.”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의 음성이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한 나는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다.
“어?”
이제까지 본 녀석들과는 달랐다.
그야말로 느낌이 빡 오는 얼굴이었다.
삐쩍 꼴았다 싶을 정도로 호리호리한 체형에, 올백으로 넘긴 진한 흑발, 형형히 빛나는 두 눈, 짙게 주름진 얼굴과 기다란 수염, 그리고······ 왼쪽 눈썹 위부터 시작하여 오른쪽 볼 아래까지 사선으로 그어진 흉터 하나.
설마······ 흑막?
그러고 다가오는 중년의 남자를 유심히 지켜보고 있을 때였다.
그가 내게로 향해 있던 걸음을 불쑥 옆으로 틀었다.
이어 그의 고개 향한 곳은 다름 아닌,
“설마하니 본인을 모험가라고 칭할 생각은 아니겠지요, 테르미스 왕녀님.”
왕녀 쪽이었다.
“······타마르 대신.”
녀석을 본 왕녀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굳어진 표정으로 짐작하건대, 그녀가 내심 우려하고 있던 일이 벌어진 모양이었다.
“어디 도망가서 잘 먹고 잘 살고 계시는 줄 알았습니다만······ 다시 이스트랜드로 돌아오시기로 결정한 모양이지요? 그래도 백성들의 목숨이 걱정이 되긴 했나봅니다?”
“그, 그건······.”
“1황자께서 걱정을 많이 하시더군요. 자기가 못나 모두에게 피해를 준 것 같다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립니까? 제국의 첫 번째 황자라는 사람이 말입니다. 고작해야 소국의 공주에게 청혼 한 번 했다고 그따위 나약한 소리라니······.”
“······.”
저 흑막처럼 생긴 녀석의 정체가 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위세가 대단하긴 한 모양이었다. 말마따나 제국의 1황자라는 녀석을 무시하는 발언도 그렇고, 타국의 왕녀라곤 하나 당사자를 앞에 두고 거침없이 말하는 것도 그렇고.
다만, 그렇게까지 똑똑한 것 같지는 않았다. 저렇게 나대다간 언제 본인의 척추가 왕녀에게 접힐지 모를 텐데.
“심지어 왕사 바타르 공이 이 배에 타고 있더군요. 고령의 나이에도 왕녀님을 설득하고자 쫓아 내려온 모양인데······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 아닙니까? 우리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왕사 본인의 가치가 좀 더 높을 수도 있는데 말입니다. 물론, 그 또한 이제 죽을 날만 기다리는 늙은이긴 하지만.”
“나는 분명 돌아가라고 했는데 그가······.”
“말에 힘이 부족하셨나 보지요. 어련하시겠습니까. 그건 그렇고, 이쯤에서 그만 선택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혼례를 올리던, 아니면 도망을 치던. 둘 중 하나를 확실히 하겠다고 하시면 내 들어드리도록 하지요.”
······.
희한한 일이었다. 저 인간의 말을 듣는데 왕녀보다도 내가 더 화가 나는 느낌이었다.
저건 뭔데 저렇게 띠꺼운 걸까.
“이 배는 본래 난마 항구에 2주 간 정박하기로 되어 있습니다만, 왕녀님이 말씀만 하신다면 하루 정박 후 곧장 다시 출발하도록 선장에게 전달하겠습니다. 아이막 항구에서 내린다면 제국수도까지는 이틀이면 충분하지요.”
이에 왕녀가 질끈 입술을 깨물었다.
“어떤 걸 택해도······ 살 길은 없다는 거군.”
그러자 타마르 대신이라 불린 남자가 묘한 미소를 내비쳤다.
“살길이 없다니······ 오해를 하고 계시군요. 1황자님과 맺어지기만 한다면 세상을 굽어볼 수도 있을 터인데요. 물론, 혼례가 정상적으로 진행될 경우에 말입니다만.”
“······.”
“굳이 하나만 조언해드리자면, 그래도 백성들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본인 하나만 위하자고 도망을 친다는 건······ 왕족의 자질이 없는 것과 다름없지요. 피의 고귀함을 증명하는 방법이 달리 있는 게 아닙니다. 이 같은 기회가 왔을 때······.”
그 순간,
“기회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자제하지 못하고 그만 내뱉고야 말았다.
······.
곧이어, 모든 이목이 내게로 집중되었다.
흑막인지 아닌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다만 내가 분명하게 알 수 있었던 것 한 가지는, 그냥 저 녀석이 무척이나 재수 없는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자기 스타일도 아닌 녀석이 갑자기 들이댄 거, 그거 하나 싫다고 했더니 나라 전체가 좀생이마냥 달려드는 게 말이 되나? 그리고 뭐? 고귀한 피를 증명할 기회?”
나는 그를 향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아갔다.
그러곤,
“백성들이 겁에 질려 있으니 잔말 말고 호랑이 아가리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가라? 이봐요, 아저씨. 이리로 가까이 와 봐. 그게 어떤 기분인지 내가 알려줄 테니까.”
진심을 담아 녀석을 쏘아봤다.
“······.”
그는 두어 차례 움찔하기는 했으나 뒤로 물러나지는 않았다. 이어 스스로를 정돈한 뒤, 나를 정면으로 마주해왔다.
그러나 물론,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쪽이 이번에 자격시험 1위로 모험가가 된 친구인가 보군. 왕녀님과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주제 넘는다고 생각하지 않나? 게다가 그 발언 수위는······ 걱정이 될 정도인데.”
“내 주제 파악은 알아서 할 테니 걱정 마시고, 그리고 발언 수위에 대해선 남말 할 처지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제아무리 왕족이라곤 하나, 백성들의 목숨을 저울질 할 수는 없는 법. 제 한 목숨 지키고자 도망을 치는 건······ 왕족의 도리가 아니지 않나?”
“협박을 아주 환상적이게도 하시는구먼. 그건 그냥 니들이 전쟁을 안 일으키면 되는 거 아냐? 우리 황자님이 차였네. 저쪽 왕녀가 몸을 좀 보는 것 같으니, 운동을 한 번 시켜봐야겠다. 그냥 이러고 넘어가면 될 일을 가지고.”
“······.”
그는 약간 당황한 듯했다.
“그리고 당신 두골 제국의 귀족인 모양인데······ 그렇게 말 함부로 해도 괜찮겠어? 만약 정말로 혼담이 성사되어서 저기 왕녀가 실제 황자비가 됐어. 그러다 황후까지 됐어. 그러고 이제 슥 주위를 한 번 둘러보는데, 어라? 일전에 나를 갈궜던 녀석이 눈앞에 있네? 어, 열 받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
“설마 왕녀가 절대로 황자비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대놓고 제국 수도로 달려가라고 권한 주제에 말이야. 혹시 뒤에서 뭔 수를 꾸미고 있다거나 하는 건······.”
물론 나도 내 말이 무척이나 오버스럽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긁어대려 했던 건, 이 녀석이 바로 그 흑막이 맞는지를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아이고, 아이고······ 첫 만남부터 왜들 이러십니까, 환영인사를 나눠야 할 자리에서. 괜히 얼굴들만 붉히게 되었네요.”
우리를 안내했던 흑발 청년이 갑작스레 끼어들었다.
“자자, 그만들 하시고 일단은 자리를 파하도록 하지요. 조만간 좀 더 제대로 된 축하파티를 마련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곤 슬쩍 나를 옆으로 미는 것이었다.
“······흠.”
나는 이를 못이기는 척 받아들였다.
저 타마르란 재수 없는 놈의 의중을 확인하지 못한 게 아쉽긴 했지만, 계속해서 뻗대고 있기엔 상황이 썩 좋진 않았기 때문이다.
일단 아직 항해할 날이 많이 남기도 했고, 우리의 충돌을 염려했는지 어디선가 관리인처럼 보이는 이들이 속속 등장하고도 있었으며, 또 옆에 있던 빨강머리가 은근 신경을 쓰이게 했던 것이다. 연신 주먹을 쓰다듬으며 뭐라 뭐라 중얼거리는데, 제법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고나 할까.
다행히 재수탱이 또한 별 말 없이 뒤로 물러나는 모습이었다. 녀석이야 뭐, 나와의 충돌은 애당초 계획에도 없었던 일일 테니.
흑발 청년은 우리를 엘리베이터 앞까지 데려간 뒤, 객실매니저에게 새 방으로 안내받으면 된다고 친절히 일러주었다.
이어,
“아참, 오랜만입니다. 테르미스 왕녀님.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네요, 아주 어릴 적에 한 번 뵌 적이 있었는데 말입니다. 혹시 저를 기억하실지 모르겠네요.”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긴 채 돌아섰다.
“두골 제국의 4황자 네르구이입니다.”
*
새로 배정받은 객실은 입이 쩍 벌어질 정도로 화려했다.
이전 1등칸 객실도 화려하다 생각했는데, 그를 훨씬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다만, 당장 내 눈에 이러한 것들이 잘 들어오지는 않았다.
나는 좀 전까지의 일들에 대하여 곰곰이 되짚어보는 중이었다.
화가 나 끼어들 때까진 몰랐는데, 가만 생각해 보니 뭔가가 이상했다.
나는 왜 화가 났을까.
간단하다. 왕녀의 처지에 동정이 갔으니까. 그녀가 억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바로 이것이 무엇보다 이상한 점이었다.
이건 소년만화에서 나올법한 전개가 아니었으니.
왕녀를 생존시키는 것.
그것 자체에만 집중한다면 사실 딱히 이해하지 못할 건 없었다. 어찌되었건 대 목표는 그녀를 살리는 것이니까.
하지만 문제는 그 방법이었다. 결혼.
자꾸만 뭔가가 탁탁 걸리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내가 내 입으로 말했듯이, 결국 왕녀는 하기 싫은 결혼을 억지로 해야 하는 것이었으니까. 살기 위해서.
내가 그걸 부추긴다? 그게 맞나? 소년, 소녀의 꿈을 이끌어야 할 모험가가?
물론 이 상황은 레오에게 부여된 미션이 아니다. 암만 소년만화 속이라 할지라도, 주인공이 해결하는 상황이 아닌 이상에야 모두가 다 행복한 결말이 나올 순 없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암만 생각해도 뭔가가 계속 걸리는 것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설사 황자비가 되었다고 쳐. 그런데 또 어떻게 황제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냔 말이야. 인정받기도 쉽지 않은 환경일뿐더러, 심지어 혈족도 아닌데.’
······.
결국 나는 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혼자 따져봐야 답은 나오지 않는다.
나는 이어, 진즉에 했어야 할 일을 시작했다.
“왕녀!”
이윽고,
“······나 부른 거?”
다른 방에 있던 왕녀가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여기 앉아 봐. 할 말 있으니까.”
왕녀는 군소리 없이 앞에 와 앉았다.
“사실 나도 할 말 있었거든······ 근데 아까 왜······.”
“됐고, 나부터. 방법 없어?”
“······응? 뭐가?”
왕녀가 모르겠다는 듯 되물었다.
“결혼 안 해도 되는 방법.”
왕녀의 두 눈 가득 의아함이 떠올랐다.
“······그야 도망······.”
“그거 말고. 제국에서도 말 안 나올 수 있는 방법. 전쟁의 빌미가 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말이야. 없어?”
없을 리가 없다. 있어야 한다.
있어라. 있어라.
곧이어,
“······하나 있긴 한데.”
왕녀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역시나.
나는 쾌재를 불렀다.
“당신한테 말하는 건 의미가 없지. 당신은 나를······ 결혼시키려는 쪽이니까.”
“됐고, 일단 말해봐.”
왕녀는 주저주저 하면서도, 이내 천천히 말을 꺼냈다.
“······간단해. 두골 제국의 전사가 되면 돼.”
“전사? 군영에 들어간다고?”
“조금은 달라. 일반 병사는 아니니까.”
이어진 왕녀의 설명은 내가 생각했던 ‘소년만화스러운 전개’에 완벽히 부합하는 것이었다.
두골제국에는 ‘전사의 길’이라 불리는 아주 특별한 전사 선발 시험이 존재한다.
이를 통과한 자는 ‘제국의 심장’이란 타이틀과 함께, 본인이 섬길 이를 스스로 택할 권리가 주어진다. 이때 다른 이들은 그에게 어떠한 선택도, 의무도 강요할 수 없다. 설사 그게 당대의 ‘칸’이라 할지라도.
역시나 존재했던 것이다. 모험가가 취할 만한 마땅하고도 타당한 해결책이.
‘전사의 길이라······ 그러고 보니 이 여자에게 그걸 통과했다는 설정이 있었지.’
물론, 그 이후 어떻게 황제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뭐, 당장 싫은 걸 안 시킬 수 있다는 게 어디야.
왕녀는 거기까지 말한 뒤,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 바라던 것이기도 해서 나도 이 방법으로 상황을 극복하고 싶긴 했었어. 내가 제국의 전사가 되면, 어차피 전쟁의 빌미 또한 사라질 것이니까. 다만······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지. 누구의 보호도 받지 못한 채, 홀로 제국의 수도까지 뚫고 들어가야 하는 일이니까. 더군다나 이미 이렇게 잡히기까지 했으니······.”
“됐고, 데려다주지.”
“······뭐?”
“전사의 길? 그거 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물론 그걸 통과하는 건 네 몫이겠지만.”
왕녀는 멍하니 입만 벌렸다.
“······어째서?”
“몰라도 돼. 이제 됐어. 가 봐.”
나는 거기까지만 말하곤, 왕녀를 물렸다.
어렵고 쉽고는 상관이 없다.
찜찜했던 것이 사라지고 새로운 길이 트였으면 됐다.
나는 그제야 제대로 된 방 구경을 시작할 수 있었다.
*
그날 밤.
왕녀의 말마따나, 그 계획이 아주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와장창!
유리창이 깨지면서 일단의 무리가 들어왔다.
하나, 둘, 넷, 여섯, 여덟······ 열.
vip룸에 들어온 손님치고는 매너가 아주 개똥이었다.
초대도 하지 않았는데 무작정 들어온 것 하며, 복장불량에다, 기물 파손까지.
‘참나, vip룸에서 경호에 대한 건 걱정하지 말라더니······.’
암살자들의 습격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