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rviving the Game as a Barbarian RAW - chapter (30)
30화 핏빛 성채 (1)
무릇 게이머라면 수상한 벽이 나타나거나, 특이한 조형물이 있으면 일단 상호 작용 키를 눌러보는 버릇이 있다.
나 역시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그 버릇은 9년간 [던전 앤 스톤]을 플레이하며 수많은 ‘히든피스’, 즉, 숨겨진 요소들을 발견해 내는 데 보탬이 되었다.
예를 들면 여기 분수대 조각상처럼.
“비요른?”
“아, 가겠다.”
나는 찝찝함을 뒤로하고 일행을 따라 내성 안으로 들어섰다.
굳이 조각상 얘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
평생 동안 배움에 매진하는 마법사조차 알지 못하는 지식을 바바리안이 알고 있다니?
‘괜히 의심 살 일은 피하는 게 좋겠지.’
이번엔 책에서 봤단 거짓말도 통하지 않을 게 분명할뿐더러, 어차피 ‘그 물건’은 왜곡 마법으로도 밖으로는 갖고 나갈 수 없는 아이템 아닌가.
“이곳이 내성이군요.”
중세에 외성이 1차 방어선 역할을 한다면, 내성은 최후의 보루에 가깝다.
원래라면 이곳엔 영주의 가신들과 기사, 병사들이 주둔하며 무기고 같은 각종 군사 시설이 존재했을 장소.
주변을 둘러보던 레이븐이 한숨을 내쉬었다.
“…듣긴 했지만 이래서야 뭐 건질 것도 없겠네요.”
외성의 삼분지 일 크기인 내성은 처참하리만치 파괴되어 있었다.
건축물들이 전부 무너져 터만 겨우 남은 정도.
심지어 이곳엔 몬스터조차 없었다.
“서둘러 다음으로 넘어가도록 하겠습니다.”
레이븐의 지시 하에, 약 30분간 돌무더기들을 치워 낸 우리는 지하로 향하는 길목을 찾아냈다.
“무라드 씨가 앞장서 주시겠어요?”
“그러겠네!”
“아, 마력을 아껴야 하니 횃불도 켜 주시고요.”
난쟁이놈이 횃불을 꺼내 머리 위에 끼웠다.
키가 작아서 그런지, 만화에 나오던 두더지 광부 같다.
화르륵!
두꺼운 나무판자를 밀어낸 우리는 그 아래 감추어져 있던 계단 아래로 천천히 내려갔다.
핏빛 성채의 세 번째 챕터 지하 감옥.
나도 침을 삼키며 마음가짐을 새로 했다.
「지하 감옥 1층에 진입했습니다.」
아오, 징그러운 건 잘 못 보는데…….
***
“레이븐 양, 여기선 어떤 몬스터들이 나오나?”
“스컬 랫, 벤시, 데스핀드, 키메라 울프, 구울로드 그리고 시체골렘이 나오는 걸로 알고 있어요.”
“시체골렘 빼고는 전부 상대해 본 몬스터군.”
“그러실 거예요. 시체골렘은 핏빛 성채에서만 나오는 몬스터니까.”
“하하핫, 간만에 공적을 쌓을 수 있겠구먼!”
새로운 몬스터와 전투하며 경험치를 올릴 수 있단 사실에 난쟁이놈이 기뻐했다.
하지만 난 그럴 수 없었다.
일러스트조차 그리 끔찍했는데 실제론 얼마나 역겹겠는가.
“달리 조심해야 할 점이 있나?”
“살점폭발만 조심하면 돼요. 폭발력은 그리 세지 않지만, 체액에 산성독이 섞여 있어서 가까이서 맞으면 치명적일 수 있거든요. 물론 그전에 제가 막아 드리긴 할 테지만.”
“하핫! 마법사님이 있으니 무서울 게 없구먼!”
“전부 무라드 씨처럼 든든한 전사분들이 계셔서 가능한 일인걸요.”
지랄.
서로 죽일 듯이 노려보며 전리품 갖고 설전을 벌일 때는 언제고.
터벅.
이내 마지막 계단을 내려서자 미로 구조의 지하 감옥이 눈앞에 펼쳐졌다.
철창 속엔 데드맨들이 쇠사슬에 묶인 채 으르렁거렸고, 바닥에서는 뼈만 남은 쥐새끼들이 괴상한 소리를 내며 돌아다녔다.
“비요른, 이것들도 몬스터인가?”
“아까 말한 스컬 랫이에요.”
“마법사 너한테 물어보지 않았다!”
참고로 등급은 데드맨과 같은 무등급.
사실상 몬스터라고 부를 만큼의 전투력도 없기에 우리들은 대충 보이는 대로 짓밟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머지않아 벤시와 조우했다.
“끄흐흐흐, 흐흐흐흐흐!”
벤시는 기괴한 얼굴의 윤곽 형태만 드러난 원령 상태로 이리저리 날아다니고 있었다.
“비, 비요른…….”
아, 얘 벤시를 무서워했지.
내게 살짝 달라붙는 아이나르를 보며 레이븐이 피식 웃었다.
아이나르가 보지 못해서 다행이다. 안 그러면 또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을 테니.
“벤시와 부딪치지 않게 조심하세요. 한두 번으론 크게 위험하진 않지만…….”
“…않지만?”
“아주아주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아, 아주아주 끔찍한 경험이라니? 그게 무슨 뜻인가! 정확히 말해라 마법사!”
“글쎄요. 상상에 맡기도록 할까요?”
혈색이 돌지 않는 아이나르를 보며 레이븐이 씨익 미소 지었다.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걸 보니, 얘도 성격이 그리 좋진 않은 거 같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대화에 껴들었다.
“마법사에겐 벤시를 상대할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흐음, 책을 좋아하신다더니 역시 견문이 넓으시네요?”
견문이 넓단 소리를 들을 정도인가 이게?
음, 바바리안 치고라는 전제가 붙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는 커트라인 안쪽이겠지.
“그럼 장난은 그만하고, 벤시들부터 정리하고 가겠습니다. 테이룬 쉘.”
이내 레이븐의 지팡이로부터 생성된 빛의 화살이 쏘아지더니 벤시를 꿰뚫었다.
게임 속 마법명은 마력시.
마법사의 평타나 다름없는 기초 공격 주문이기에 캐스팅 시간도 없었다.
“끼히이이이이이익!!!”
잠시 기다리자, 수십 마리의 벤시들이 격렬한 증오를 내뿜으며 몰려들기 시작했다.
동료가 죽으며 남긴 ‘징표’를 감지한 것이다.
위력적인 광역기를 다수 소유한 마법사 입장에선 오히려 반길 만한 일이었겠다마는.
“이헤르노 하인다르.”
화염세례.
마법 지팡이에서 뿜어진 불길이 일자형 통로를 가득 메웠다.
그리고 불길이 잦아들었을 때.
남아 있는 벤시는 없었다.
후우웅!
이번에도 어김없이 바닥에 쏟아진 마석들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주머니 속으로 알아서 들어갔다.
사실, 공격 주문보다 이게 제일 부럽다.
마석을 일일이 안 주워도 된다는 거.
후, 마법사를 팀에 넣어서 데리고 다니려면 얼마나 걸리려나…….
새삼 아직 갈 길이 멀구나 싶다.
***
모니터 너머의 2D 세상과 현실은 다르다.
그게 피부로 전해지는 오싹함이라면 더욱더.
「캐릭터가 지하 감옥 2층에 진입했습니다.」
직접 겪은 지하 감옥은 미친 과학자의 실험실 같은 느낌에 가까웠다.
돌연변이처럼 근육이 올록볼록하며 머리가 서너 개씩 달린 키메라 울프.
엘더 구울들을 서른 마리씩 데리고 다니는 구울로드.
이 8등급 몬스터들은 전부 그로테스크한 외형을 소유했을 뿐만 아니라, 주변의 자잘한 소품들도 하나하나가 공포물 게임들을 연상시켰다.
화룡점정은 지금부터겠다마는.
“그나저나 레이븐 양도 대단하군. 무섭지도 않나?”
“글쎄요. 워낙 해부학을 좋아해서.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네요.”
씨바, 그게 바바리안 해부는 아니겠지?
그러고 보면, 바바리안 심장이 비싸게 팔리는 것도 다 마법 재료라서라던데…….
“아, 도착했네요.”
지하 감옥의 모든 몬스터를 사냥하며 지하 3층에 도달한 우리는, 무너진 영주성의 지하 공간과 이어지는 숨겨진 문짝을 발견했다.
원래라면 간수실에서 지도부터 입수해야 했겠지만…….
“벽 뒤에 문이 감춰져 있다니, 지도를 미리 외워서 들어오길 잘했네요.”
철저하게 예습을 해온 레이븐 덕분에 헤매는 일은 일절 없었다.
뭐, 나 혼자였어도 잘 찾아오긴 했을 거다.
지하 감옥만큼은 게임과 구조가 일치했으니까.
‘하지만 그건 내가 전부 플레이어니까 가능한 얘기겠지.’
새삼 마법사가 지닌 위상이 체감된다.
위력적인 공격 마법.
상처 악화 저주 같은 유틸성 높은 지원 계통 능력.
수많은 서적을 정독하며 쌓았을 지식까지.
괜히 마법사가 팀에서 신관 이상의 대우를 받는 게 아니다.
“배낭은 여기 앞에 두고 들어가는 쪽이 좋겠네요. 적어도 얀델 씨는 더욱더요.”
나는 약간의 창피함을 느끼며 머리부터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특대형 사이즈의 배낭을 문 앞에 내려놨다.
…돈 벌면 마법 배낭부터 사던가 해야지.
아까부터 이것 때문에 불편했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아, 지금부터는 얀델 씨도 횃불을 켜 주시고요.”
레이븐의 지시에 나도 머리 위에 횃불을 고정시켰다.
이로써 모든 준비가 끝났다.
끼이익, 끼이익, 끼이익-
둥근 밸브를 돌려 철문을 열자 썩은 악취가 밀려든다.
“전혀 예상치 못한 곳이군.”
“마, 마법사… 꼭 여길 들어가야 하나?”
“저도 죽을 만큼 싫지만, 어쩔 수 없어요.”
폐수 처리장을 연상시키는 공간.
원기둥 형태인 벽면에는 커다란 수도관들이 즐비했고, 거무죽죽한 오물 같은 것을 똑똑 떨어뜨리고 있었다.
또한.
바닥엔 꺾이고 절단된 팔다리들과 머리가 산처럼 쌓여 있으며, 그것들이 부패하며 쌓이고 쌓였을 가스가 코를 찌르며 두통을 유발했다.
“웩, 웨엑!”
가장 먼저 구토를 한 건 운반꾼이었다.
호위라도 하듯 레이븐 옆에 붙어 무게만 잡고 있던 놈은, 정말 무표정한 얼굴로 속에 든 것들을 게워냈다.
두 번째는 레이븐이었고.
“욱, 우에엑!”
많은 해부 경험으로 시각적 내성은 있을지 몰라도 냄새에는 취약한 모양.
놀랍게도 나는 버틸 만했다.
예전이었으면 분명 졸도했을 광경이 눈앞에 펼쳐있었음에도, 이 비위 좋은 바바리안의 육체엔 아무런 영향이 없었다.
“자네라도 멀쩡하니 다행이군. 어서 앞으로 가보세.”
뭐라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며 나는 중심부로 천천히 다가갔다.
지익.
걸을 때마다 스펀지를 밟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불빛이 중심부에 가까워질수록, 어둠 속에서 윤곽만 보였던 거대한 형체가 또렷해졌다.
“안, 녕.”
놀랍게도 그것은 우리에게 말을 걸었다.
고장 난 안내 음성 테이프처럼 여성의 목소리로.
“끅, 꺾! 살! 난, 커꺼꺽, 살려 줘! 나를! 끼긱, 까드드득, 맛있, 어, 아버지, 끼히!”
어, 음, 어…….
솔직히 좀 충격적이었다.
“후…….”
씨바, 너 원래 게임에선 조용했잖아.
진짜 나한테 왜 그러냐?
볼멘소리가 절로 튀어나오지만, 한탄해 봐야 바뀌는 건 없겠지.
옆을 보니 나름 믿음직하던 드워프 놈조차 바짝 얼어 있다.
“다들 정신 차려라!!”
즉시 고함을 내질러 넋 나간 팀원들을 깨웠다.
한데 이에 자극이라도 받았을까.
“아버지! 아버지! 아파! 아파! 아파요! 아파아아아아!!”
웅크려 있던 시체더미가 몸을 일으켜 세우더니, 발인지 뭔지 모를 그것을 앞으로 내디뎠다.
쿠우웅-!
핏빛 성채의 중간 보스.
시체골렘이었다.
***
마이너함의 결정체인 [던전 앤 스톤]이지만, 나름 대중적인 부분도 없는 건 아니다.
적어도 일러스트 하나만큼은 유명했다.
흑백 사진으로 찍어 온 듯한 생동감 넘치는 일러스트가 넷상에서 흔히 말하는 ‘짤’로 많이 사용된 탓이다.
정작 그 일러스트들이 게임에서 나왔다는 걸 알고 있는 사람은 적었지만.
나는 새삼 한 번 더 깨달았다.
“씨바.”
아무리 사실적으로 그린 그림이더라도, 진짜는 따라갈 수 없다.
“아파! 아파! 아파아아아아아!!!!”
사람의 팔과 다리 그리고 머리통을 수천 개 모아 오밀조밀 뭉치면 이런 느낌일까.
심지어 그 하나하나가 의지를 가진 것처럼 개별적으로 움직인다.
수백 개의 입들도 마찬가지다.
통제 없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낸다.
대부분은 괴롭다, 춥다, 원망스럽다, 죽여줘라, 살려줘라는 식의 논리도 두서도 없는 순간순간의 감정들.
“캬아아아아악—!”
음, 그도 아니면 단순한 비명이던가.
온갖 기괴스러운 음성들이 합쳐지며 자아낸 소름끼치는 하모니에 다시 한번 모두가 얼이 나갔다.
“히쿠로드! 조심해라!”
해부학에 능하다던 마법사.
수많은 몬스터를 접했을 3년 차 드워프.
운반꾼이라기엔 제법 있어 보이는 분위기를 뿜어내던 인간 남자.
그들은 초심자 바바리안 둘은 깍두기 취급했지만…….
놀랍게도 지금 이 순간, 냉정함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은 나와 아이나르뿐이었다.
“다들 뭘 하고 있는 건가!”
시체골렘을 예의주시하던 아이나르가 난쟁이놈의 목덜미를 당겨 들어 올린 그때.
콰아앙!
투포환처럼 날아든 시체더미가 그 자리에서 폭발했다. 그리고 피와 살점이 흩어지며 아이나르와 난쟁이놈에게 달라붙었다.
치이이익!
다행히 아이나르는 옷 위라 타격이 없었지만 난쟁이놈은 달랐다.
“아악! 눈! 내 눈……!”
씨바, 어찌 된 게 투구의 좁은 틈으로 들어가 눈에 맞은 모양.
순식간에 난쟁이놈이 무력화됐다.
그리고 자기만 믿으라던 마법사는…….
“웩, 웨에엑!”
아직도 토를 하고 있다.
…너네들 진짜 뭐 하니?
어쩐지 일이 술술 쉽게 풀리더라니.
아무렴, 그럴 리가 없지.
“아이나르! 난쟁이놈을 데리고 뒤로 가서 마법사를 지켜라!”
그리 외친 나는 방패를 위로 치켜들며 시체골렘과 마주섰다.
선택지가 없었다.
되도록이면 튀고 싶지 않지만…….
버스 기사랍시고 설치던 놈들이 뻘짓을 해대고 있지 않은가.
“베헬—라아아아!!”
살아남으려면, 직접 운전대를 잡는 수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