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26)
제 1111화
247화. 라프라로사 해방 전쟁(15)
“긴장한 모양이지, 우스운 소리를 하는 걸 보니.”
싯!
또 한 번 자줏빛 검기가 루나의 얼굴 옆을 지나쳤다. 본능적으로 반응하지 못했다면 목이 떨어졌을 터.
“너는, 이미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마주하고 있다.”
오히려 두 번이나 얼굴 근처를 스친 자줏빛 검기보다도, 그 말이 루나의 등허리를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렇군, 준비가 되지 않은 건 나였나.”
크란텔의 칼날이 한층 더 선명한 붉은빛에 휘감겼다.
분명 시마트가 ‘죽음을 유예하는’ 방식은 이미 그 한정된 시간을 한참 전에 지났다. 지금의 시마트는 언제 갑자기 육신을 잃고 소멸해도 이상하지 않다는 뜻.
그러나 루나는 그걸 믿고 시간을 끌어서는 승산이 전혀 없다고 판단했다. 설령 싸움이 하루, 이틀, 일주일이 이어지더라도, 둘 중 하나가 쓰러질 때까지 시마트는 소멸하지 않는다고 확신한 까닭이었다.
눈으로 볼 수 없어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시마트라는 무인이 가진 창성의 의지를.
시마트의 자줏빛 칼날이 흔들렸다.
방향은 읽을 수 있지만, 거리를 정확히 잴 수 없었다. 한 걸음을 예상하고 몸을 빼면 두 걸음 깊숙이 칼날이 밀려왔고, 두 걸음을 예상하고 받아치면 허공에 검풍이 일었다.
“청풍제가 수련시킨 덕인가, 그때보다는 조금 나아졌군.”
벌써 루나의 몸엔 다섯 이상의 잔상처가 남았다. 혈관 속으로 침투하는 자뇌가 피를 태우는 감각이 느껴졌다.
“이 시대의 인간이란 참으로 신기해. 너는 고작 수십 년 검을 잡았을 뿐인데 이만큼이나 강하고, 나와 처음 싸운 후로부터도 얼마 지나지 않았건만 또 성장을 이루었다. 나는 이런 일이 모두 태양신의 부재로 인해 생긴 부당한 현상이라 생각했으나…….”
카드득! 자색 칼날이 크란텔의 방향을 비틀었다. 루나는 순식간에 코앞으로 다가온 시마트의 얼굴로 주먹을 내질렀다.
파공음과 함께 풍압이 일었다. 지극히 루나다운 파괴적인 정권, 그러나 다음 순간. 시마트는 흩어진 바람이 다시 날카롭게 뭉쳐서 자신의 등을 찌르는 걸 피해야 했다.
가장 강한 검은 바람을 닮아 있다.
루나와 시마트 둘 다 엘티엇의 무학을 떠올리고 있었다. 검뿐만이 아니라, 몸과 행동 전반이 바람을 닮아야만 경지에 닿을 수 있다는.
그런 의미에서 방금 루나가 내지른 주먹은 광풍이었다. 시마트는 보법을 밟은 후, 정권에 형성된 바람의 핵을 찔렀다.
그러자 핵은 폭발하며 역으로 루나 쪽으로 날카로운 기운을 토해냈다. 크란텔에 가로막히긴 했으나, 루나는 한 걸음 뒤로 밀린 채 자세가 무너졌다.
예전의 시마트였다면 그 틈을 찌르러 들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시마트는 단박에 그게 목숨을 건 허수라는 사실을 알아보았다.
그렇게, 루나는 매 순간 목숨을 건 채 덫을 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긴장하지 않았다. 눈빛은 전혀 흔들림이 없고, 심장은 단단하고 차분하게 뛰었다.
“이제 보니, 그리 나쁘지 않은 일 같더군. 바람이 부는 방향을 다 알아서는 재미가 없을 테니.”
시마트가 허수 속으로 거침없이 쇄도하며 말했다. 루나는 그의 목을 노리고 크란텔을 휘둘렀으나, 시마트는 다시 유려하게 빠져나와 역공을 펼쳤다.
허수를 펼칠 틈 없이 연격으로 들어오는 맹공이었다. 눈앞이 온통 자색 칼날로 뒤덮였고, 루나는 본능과 예측에 의지해 간신히 그의 공격을 피했다.
저도 모르게 헛숨이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 순간, 루나는 ‘붉은 기운’의 의지를 느낄 수 있었다. 붉은 기운은 마치 오랜 시간 기다린 일을 해야 할 때라는 듯, 루나에게 말하고 있었다. 이제 자신을 완전히 받아들여야 할 때라고.
‘식상한 유혹이로군, 꺼져.’
그러자 샘물이 마르듯, 붉은 기운이 꺼져가는 게 느껴졌다. 크란텔도 보통의 오러로 휘감겨 새하얗게 변했고, 붉은 안광도 사라졌다.
붉은 기운이 사라지자 거짓말처럼 움직임이 한층 무거워졌고, 반응은 더뎌졌다. 시마트는 루나의 변화를 인지하곤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루나가 방금까지보다 더 위험한 적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시마트가 보기에, 방금 루나는 붉은 힘을 버린 것이 아니다.
그녀는 붉은 힘을 초월하고 있었다. 몸놀림이 둔해진 건 극히 사소한 요소일 뿐, 이제부터 그녀는 안개가 걷힌 듯 더 선명하게 볼 수 있을 터였다.
검을 휘둘러야 할 순간을, 피해야 할 순간을, 들어가야 할 순간을.
본능적 감각이 아니라 순전히 자신의 눈과 의지로 짚을 수 있게 된 것이다. 루나 본인도 그 사실을 느끼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래, 그 말대로 승패가 이미 정해진 싸움은 지루한 법이지. 그러니 지금 너도 그렇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이고.”
산맥을 허무는 검기, 대지를 뒤집는 일격, 하늘과 바다를 할퀴는 거대한 섬광.
두 사람의 싸움은 시작부터 그런 무지막지한 전투와 거리가 멀었고,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멀어지고 있었다.
루나와 시마트가 보법을 밟을 때마다 잔잔하면서도 묵직한 바람이 번졌다. 바람에 쓸린 크리의 잔해들이 허공을 부유하다 입자로 부서졌다.
잔해의 먼지들이 둘 가운데서 엉키며 시야를 가리고 있었다. 그 누구도 정확히 읽을 수는 없는 먼지바람 속에서, 두 사람의 검은 계속 서로를 향해 기울었다.
그들은 검은빛처럼 빠르게 움직여 잔상을 남기기도, 물속인 듯 아주 느리게 궤적을 그리기도 했다.
파상처럼 부드럽게 번지는 검기가 서로의 몸을 훑고 있었다. 검격이 부딪히는 마찰음도 점점 잦아들기 시작해, 핏물이 튀는 소리조차 들릴 지경이었다.
이내 두 사람은 싸움터가 아니라 평야의 들판에 서 있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다. 두 자루의 검은 바람에 나부끼는 들풀들처럼 엉켰다.
더 이상 허수와 그 파훼는 존재하지 않는다. 싸움은 대등한 양상으로 변모해가고 있었다.
이제 두 사람은 서로의 바람 속에서 자신을 찾아야 했다. 은빛, 그리고 자색의 바람이 먼지와 뒤섞여 꿈처럼 떠다니고 있었다.
‘이런 싸움은…… 처음이로군. 내가 그 시절, 청풍제와 제대로 승부를 겨뤘다면 바로 이런 모습이었을 테지.’
시마트는 루나로부터 엘티엇을 보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강하면서도 유려하며, 유려하면서도 단단한. 엘티엇의 정수라고 할 만한 무언가가 크란텔 안에서 꿈틀대고 있었다.
그건, 시마트가 평생 외면해온 그림자를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이기도 했다. 엘티엇을 배신한 순간부터, 사실 그의 내면 한편에 늘 그대로 있던 죄책감을.
미안한 마음을, 용서받고 싶다는 마음을, 사실은 그를 있는 그대로 동경하고 싶다는 마음을. 시마트는 절감하고 있었다.
시마트는 시마트가 아닌 적명족 지도자로서의 삶을 택했다. 무엇이 엘티엇을 배신하게 만들었느냐는 오랜 물음에, 이제는 간단히 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답은 태양신을 되찾겠다는 대의명분 따위가 아니다.
‘그저…… 치기에 불과했었다.’
시마트는 자신을 들여다보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본질적으로 루나보다 앞서 있기에 자연스레 살수를 쳐냈다.
그리고 시마트는,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원한 맺힌 동포들의 목소리가 이 어두운 선체 안에 메아리치는 것 같았다. 심복이었던 리마가스, 대투왕들, 그리고 그가 이름을 기억하는 모든 투왕들과 평전사들. 그들의 목소리가 가시처럼, 족쇄처럼 그의 내면을 어지럽히기 시작한 것이다.
왜, 여기서 이토록 만족스러운 싸움을 하고 있느냐고.
왜, 동포들은 꿈이 짓밟힌 채 소멸했는데 혼자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하려 하느냐고.
우리가 죽어가는 동안 너는 무엇을 했느냐고.
동포들은 그렇게 시마트를 다그치고 있었다. 어떻게 적명족의 투신인 당신이 이런 추태를 보이느냐고 묻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목소리는, 허상이나 환청이 아니다.
투신 동포, 그건 적명족의 모습이 아니오.
혼기에 잠식된 어두운 목소리가 고막을 찌른 순간, 시마트는 저도 모르게 눈을 휘둥그레 뜨며 주위를 살폈다.
루나의 바람이 몰려드는 와중, 한 번 더 동포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포는 우리의 마지막을 더럽히고 있소.
“어디에…… 있는가. 어디에서 말하는 것인가.”
-그나마 멀쩡하게 죽을 수라도 있다면, 네놈들에겐 다행인 일이겠군.
다시 한 번 진이 한 말이 떠올랐다.
어디서 말하느냐 물었지만, 시마트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목소리는 로키아의 혼돈에 붙잡힌 동포들의 영혼이 토하는 울분이었다.
그들은 죽어도 안식을 누릴 수 없다. 시마트가 혼돈의 힘을 빌리기로 한 순간부터, 그걸 단지 전황을 바꿀 한 가지 요소일 뿐이라 생각한 순간부터, 적명족의 미래는 정해진 셈이었다.
시마트 본인의 미래는 창성의 의지로 극복할 수 있을지언정, 다른 모든 동포들의 끔찍한 운명까지 바꿀 수는 없다.
잊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각성해서 깨닫게 된, 지난날의 과오를. 시마트가 그걸 잊지 않고 있었다면, 그는 마치 진처럼 다른 이들의 운명도 바꿀 수 있었을 것이다. 적어도 안식을 누릴 수는 있는 최후를 말이다.
“그만…… 나는.”
시마트의 검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검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빠르게 말라가고 있었다.
스아악-!
그리고 루나는, 크란텔을 휘둘러 그의 근처로 밀려든 혼기를 밀어냈다. 루나도 혼돈에 휩싸인 적명족의 목소리를 인지한 것이다.
“시마트, 어차피 네 육신이 소멸한 후 짊어질 것들을 이 싸움에 끌어들이지 마라.”
시마트는 곧장 목소리가 사라지는 걸 느꼈다. 루나가 차분한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루나 룬칸델…….”
“나는 방금 너를 몇 번이고 죽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건 우리가 약속한 방식이 아니지. 어차피 너는 나를 꺾어도, 꺾지 못해도 방금 그 목소리들과 함께 영원토록 고통받게 될 것이다. 너와 네 동포들이 저지른 짓들은 죽음으로도 용서받을 수 없어.”
루나와 시마트의 차이는 내면에서 발생하고 있었다.
시마트는 자신만 보았고, 루나는 자신과 더불어 눈앞의 적을 놓치지 않았다. 루나는 지금 시마트를 단지 죽이러 온 것이 아니라, 그를 초월하고자 온 것이었다.
“그러니, 지금에 충실해라. 내가 평생 기대하고 고대하던 무의 극지가, 이렇게 쉽게 흔들리고 약해지는 영역일 리는 없다.”
다시 잠잠해진 전장 속에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검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