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47)
제 1047화
250화. 지플과 킨젤로(1)
1804년 6월 2일, 이야기의 탑.
지플은 이제 ‘성지’와 이야기의 탑을 하나로 합치는 작업을 거의 끝낸 상황이었다. 그 여파로 이야기의 탑 인근은 발레리아조차 기록을 살피기 어려울 만큼 복잡한 상태가 되었다.
“놀랍군요. 당연히 바멀 연합이 먼저 찾아오리라 예상했는데…….”
탑 최상층, 켈리악은 지금 막 하늘에서 내려온 한 인물을 마주했다.
“그보다 먼저 당신이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블리기에트.
테마르의 모습을 한 태양신의 자아였다. 그는 처음 반을 만났을 때보다 더 많은 광휘에 싸여 있었는데, 오는 길에 살점을 더 취한 까닭이었다.
그만큼 격이 높아지고 권능이 강해졌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켈리악은 그가 자신을 전혀 위협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 보였다.
[내가 올 걸 알고 있었으면서 뻔한 거짓말을 늘어놓는구나, 켈리악 지플.]켈리악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블리기에트의 말대로 그는 이 상황을 미리부터 알고 있었다. 마신석은 단 1초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블리기에트가 이곳으로 도달할 시간을 맞췄다.
그러니 이제는, 블리기에트가 앞으로 내뱉을 말들도 일치하는지 확인할 시간이었다.
“불쾌했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블리기에트, 태양신의 자아시여.”
[너흰 끔찍한 물건을 만들어 나의 통찰을 피하고, 감히 나를 예측하고, 나의 또 다른 육신까지 점거하고 있으니 불쾌할 수밖에.]또 다른 육신, 블리기에트가 그렇게 표현한 건 지플의 ‘성지’를 뜻했다.
현재 이야기의 탑은 매 순간 움직이는 중이고, 기록 마법으로도 그 위치를 똑바로 파악할 수 없는 상황이다.
그런데도 블리기에트가 단번에 탑을 찾은 건, 성지를 느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성지는 그 자체로 블리기에트처럼 태양신의 자아였다.
켈리악은 어깨를 으쓱이곤 바닥을 향해 한 차례 손을 휘저었다.
그러자 텅 빈 바닥에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찻주전자와 잔이 형성되는 모습이 이어졌다. 그것들은 마치 처음부터 그 자리에 있던 듯이 보였다.
‘온전한 나’를 흉내 낸 징그러운 힘.
블리기에트는 켈리악의 마신석이 이미 이런 경지에 도달한 사실을, 방금에서야 깨달았다. 따라서 자신은 켈리악과의 협상에서 주도권을 가질 수 없다는 사실도. 그로서는 부활 이후 연달아 치욕을 겪는 셈이었다.
켈리악은 먼저 자리에 앉으며 블리기에트 쪽 의자에 손을 내밀었다.
“아직은 이 힘을 다루는 게 서툰지라, 찻잎이 취향에 맞으실지 모르겠군요.”
마신석은 당신에 대한 조사를 이미 끝냈다.
블리기에트는 그 뜻을 알아채며 자리에 앉았다.
[나는 부활과 동시에 네놈들의 장치에 포착된 모양이군. 향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안타깝군요. 아무래도 다른 자아의 취향이 반영된 것일 터. 조정이 필요하겠습니다.”
불편하다.
블리기에트는 켈리악의 한 마디 한 마디에 모욕감을 느끼고 있었다. 감히 신을 흉내 낸 자가 자신을 능멸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켈리악을 공격할 수는 없었다. 그를 죽이는 건 고사하고, 자칫하면 다른 자아에게 ‘잡아먹힐’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말루기아…… 지금은 너희가 엘로나 지플이라 부르는 내 또 다른 자아가, 어쩌다 너희의 병기가 된 것인지 궁금하군.]“그에 대해선 꽤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는데, 들어보시겠습니까?”
[아니. 레지날드 지플로부터 시작된 너희 가문의 초라한 비사 따윈 다 알고 있다. 내가 궁금한 것은, 말루기아가 어째서 너희에게 잡혀주었는가일 뿐이지.]“……잡혀주었다?”
처음으로 켈리악의 입가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말루기아는 가장 거대한 파멸의 자아다. 우리가 여럿으로 분화되었을 때, 말루기아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지우려고 하였어. 우리가 직접 창조한 이 세상은 물론이고, 우리 자신마저도. 말루기아는 종말 그 자체였다.]따라서 말루기아는 세계 재구축을 원하는 블리기에트는 물론이고, 거의 모든 자아와 대립하는 존재였다. 말루기아의 목적은 이 세상을 무로 되돌리는 것뿐이니 말이다.
켈리악으로서는 처음 알게 되는 정보였다. 그건 곧 마신석으로부터 미리 전달받지 못했다는 뜻이기도 했다.
“흥미로운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면 저와 제 가문이 함정에 빠졌다는 뜻입니까. 이런…… 곤란한데.”
[아마도. 우리는, 변하지 않는다. 유지를 원하는 자아는 계속 유지를, 재구축을 원하는 자아는 재구축을, 파멸을 원하는 자아는 파멸을 원하지. 처음부터 끝까지, 결코 바뀌는 법이 없어.]“블리기에트 님 말대로 말루기아가 그만큼 강대한 존재였다면, 세상을 파괴할 기회는 지금보다 고대에 더 많았을 겁니다. 한데 굳이 그 복잡한 방식으로 우리를 선택하면서까지?”
[힘이 있는 존재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군. 어느 정도는 맞지만, 우리가 만든 세상은 그렇게 간단한 구조가 아니지. 불필요한 변수가 많아. 태양은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으나, 사실 손바닥으로 눈만 가려도 피할 수는 있지 않더냐?]켈리악의 눈동자가 가늘어졌다.
놀라운 정보였다. 그러나 설령 사실이라 하더라도, 지금의 지플에게 큰 타격이 될 만한 내용은 아니었다.
어차피 마지막 싸움이 끝난 후, 엘로나는 폐기될 예정이었다. 켈리악은 정보가 아니라 블리기에트의 의중을 살피고자 주의를 기울였다.
그가 왜 이 이야기를 꺼냈는지, 이유는 명확했다.
“솔직히 그저 세상의 창조자를 한번 만나봐서 나쁠 건 없다는 마음이었는데…… 방금 블리기에트 님은 자신이 나름대로 가치가 있다는 걸 증명하셨습니다.”
협상이었다.
블리기에트는 ‘아이란’이라는 제약을 없애고자 지플을 찾았다. 그리고 그 거래를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한 패로 엘로나, 즉 말루기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 것이다.
[내가 너희를 말루기아로부터 지켜주마.]“하하하……!”
켈리악은 허리를 뒤로 젖히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는 다시 블리기에트와 눈을 맞췄다.
물론, 이미 켈리악은 엘로나 지플을 완벽하게 폐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두었다. 설령 성수관을 통한 제어가 어그러지더라도, 적절한 시기가 되면 얼마든지 엘로나를 감당할 수 있었다.
하지만 안전장치는 많을수록 좋다. 그게 예측 가능한 태양신의 자아라면 더더욱.
“아, 이런. 또 불경한 모습을 보였군요. 아무리 봐도 제 눈에는 블리기에트 님이 엘로나를 어찌할 수가 없을 것 같기에 그만. 그런데…….”
우우웅-!
별안간 켈리악의 근처로 십여 개의 녹색 창이 떠올랐다. 그 속엔 그만이 알아볼 수 있는 언어로 블리기에트에 관한 내용이 서술되어 있었다. 블리기에트는 이제 이 인간의 불경이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블리기에트 님의 아군이라 부를 수 있는 자아들이 함께한다면, 불가능한 이야기는 아니겠군요.”
[나는 그들을 깨울 것이다.]“하지만 그 자아들이 과연 블리기에트 님의 이 굴욕적인 거래를 인정하겠습니까? 오히려 합심해서 우리를 친다는 선택지가 생길 수 있을 것 같습니다만.”
[마음에 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켈리악 지플. 우리를 이용하려는 그 탐욕에 젖은 눈은, 굳이 통찰이 없더라도 누구나 읽어낼 수 있을 것이다.]“나와 가문은 인간으로서 세상을 지배하고 싶은 것이지, 블리기에트 님처럼 유일신이 되고 싶은 게 아닙니다. 그러니 인간적인 감각을 잊지 않으려면 이렇게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자칫하면 블리기에트 님 같은 불멸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게 될 겁니다.”
지플은 킨젤로나 태양신교와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지플에게 태양신의 힘은 어디까지나 수단일 뿐, 목적 그 자체가 될 수는 없었다.
“블리기에트 님이 원하는 대가는, 아이란 비먼트가 걸어둔 테마르의 육신에 대한 제약을 해제하는 것.”
블리기에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는 그 일을 해주는 대신, 언젠가 엘로나 지플이 통제를 벗어나면 블리기에트 님이 보호해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아이란의 제약이 해결된 후엔, 테마르의 육신을 소유하고 싶다는 내용일 테지.]“그렇습니다. 블리기에트 님께는 그저 거추장스러운 껍데기일 뿐이지만, 저희에겐 꽤 사연이 깊은 자인지라. 이대로 저와 계약을 진행하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다.]그러자 녹색 창들이 꺼지며 켈리악의 근처에 불길이 치솟았다. 불의 인장, 쉬누의 권능이었다.
“이 맹약은 태양신으로부터 탄생한 신, 쉬누의 힘이 강제할 것입니다. 블리기에트 님이 얻게 될 자유에 비하면 사소한 굴욕이니, 여기 손을 올려주시지요.”
블리기에트가 켈리악의 앞에 떠오른 불꽃으로 손을 뻗었다. 불꽃이 뱀처럼 그의 팔을 휘감았다. 계약이 완료되었다는 의미였다.
“아시겠지만, 일이 진행되기 전엔 언제든 파기할 수 있는 계약입니다. 제가 아이란의 제약을 지우기 전에 다른 수를 찾게 되신다면 그 불을 흩어버리십시오.”
블리기에트는 한동안 자신의 왼팔을 휘감은 불을 내려다보았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지?]“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필멸자의 역사를 뒤바꾸는 일이니, 족히 반년은 필요할 겁니다. 적들이 가만히 있다면 그보다 짧아질 테지만, 그럴 리가 없으니 말입니다. 보십시오, 이제 제 말이 끝나고 7초 뒤에 여기 차원문이 하나 열릴 테니.”
정확히 7초가 지난 후, 켈리악의 말대로 강철 차원문이 열렸다. 오르갈의 차원문이었다.
그러나 차원문 속에서 나타난 이들은, 지금껏 킨젤로의 주역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아니었다.
사람 같은 모습을 한 검은 형체들. 켈리악은 그들을 보자마자 인상을 구기며 한숨을 내쉬었다.
“헬루람. 블리기에트 님의 자손이라 할 수 있는 그 괴물이 저를 노리고 있습니다. 저것들은, 심연 군단이라고 하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