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58)
제 1058화
251화. 대적자들(8)
진은 흠칫하며 시리스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언제나처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떤 면에선 모든 일에 초탈한 듯 보이고, 어떤 면에선 만인에게 무관심한 듯 보이는.
그러나 오랜 동료로서, 그리고 친구로서 진은 그 시리스가 늘 그런 표정을 하는 이유를 알고 있었다.
책임감.
자신이 누구인지를 인식한 그 순간부터, 시리스의 삶은 오로지 완벽한 차기 비궁주가 되기 위한 단련으로 가득했다.
혹독하고 지루한 삶.
시리스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런 인생에 익숙해져 있었다. 비궁을 위해 사는 일에 ‘다른 무언가’가 끼어들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본 적도 없었다.
진을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쪼르르…….
시리스가 자신과 진의 잔에 포도주를 채웠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너는 마미트에서 나한테 사기를 쳤어. 하하……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그때 연고를 발라준 것도 이상한 일이었어.”
“어떤 점이 그렇습니까?”
“처음에 나는 알아서 바르라고 연고를 줬었지. 그러다 네 더러운 손을 보고 대신 발라주겠다고 했어. 원래 내 성격이라면 연고도 안 줬을 거고, 직접 발라주는 일은 더더욱 없었겠지.”
“그건 그렇습니다.”
“그냥, 그때는 그런 험한 곳에서 또래를 만났다는 게 신기했나 봐. 난 어려서부터 어머니를 대리하는 일이 많았고, 비궁 밖을 나갈 땐 주로 임무 지역이었으니 또래랑 대화조차 해본 적이 거의 없었거든.”
진은 탈라리스를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시리스가 다섯 살쯤 되었을 때부터 중요 회의에 시리스를 대신 보내고 애인들을 만나러 갔다는 이야기를 자랑처럼 하고는 했었다.
물론 그만큼 시리스가 똑똑했다는 걸 자랑하려는 의도지만, 그녀가 비궁 후예로서 얼마나 큰 압박을 견디며 자랐는지 단번에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매 순간 제왕 수업을 받았고, 늘 시험에 시달렸다.
“그래서 구해줬더니, 그 녀석이 룬칸델의 막내라는 걸 알았을 땐…… 정말 치가 떨렸다고. 그런데, 얼마 지나 생각해보니까 난 너한테 화가 난 게 아니었어.”
“……시리스 님 본인에게 화가 났던 겁니까? 속았다는 사실에.”
“맞아. 난 나한테 화가 났어. 멍청하게 작은 호의를 베풀었다가, 비궁을 얼마나 우습게 만든 건가…… 심지어 대련도 졌네. 그런 생각이 들었지.”
후우!
시리스가 포도주를 한 모금에 들이켜곤 미소를 지었다. 진도 뒤따라 잔을 비우곤 다시 채웠다.
“그런데 지고 나서 또 너한테 연고 발라주고…… 패배감, 실망감, 뭐 그런 기분에 휩싸이는 와중, 묘하게 상쾌하기도 한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 알겠지? 사실은, 난 늘 압박을 벗어나고 싶었던 거야. 소궁주라는 압박감을.”
그토록 오랜 시간 함께했음에도.
진은 시리스의 이런 속내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눈치챈 적도 없었다. 그녀는 언제나 완벽한 소궁주였으니까.
그녀가 열다섯이 되었을 무렵부터, 비궁의 보호를 받는 이들은 문제가 생기면 탈라리스가 아닌 시리스를 찾았다.
“나는 열심히 할 수밖에 없었다, 진. 나는 냉정하게 어머니보다 재능이 떨어져. 어머니는 놀면서 지내도 과거 시론 경, 론 경과 비롯해 3대 강자였고…… 나는 하루도 수련을 쉰 적이 없는데 이 세대 5대 강자 축에도 못 들어가는 수준이지. 그래서 어머니가 나를 어릴 때부터 그만큼 혹독하게 몰아붙인 거고.”
진은 대답하지 않고 그녀와 가볍게 잔을 부딪쳤다.
“그런 내게, 너는 언제나 좋은 경쟁자였다. 인연은 신선하게 시작했고, 이후 함께 겪은 일들은 위험하지만 신비로웠지. 네가 우리 비궁 덕에 목숨을 건진 게 몇 번이냐?”
“셀 수도 없습니다.”
콜론부터 시작해 지금까지, 비궁은 언제나 아낌없이 진을 지원해주었다. 당장 진마계 인사들을 만나러 밀라로 올 때도 모트를 탄 것이다.
“정말 셀 수도 없이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시리스 님. 무슨 짓을 해도 결코 다 갚을 수 없을 만큼.”
“그래, 양심이 있다면 알아야지. 하하, 그럼 내 머리카락 좀 땋아봐.”
“머리카락이요?”
“해본 적 없지?”
“없는 것 같군요.”
시리스는 자신의 긴 머리칼을 어깨 앞으로 내밀어 한 번 땋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머리칼을 넣고, 부드럽게 매듭을 짓듯이…… 이렇게 하는 거야. 여기, 그리고 여기까지 해서 세 갈래 정도만 땋아줘.”
“최대한 예쁘게 해보죠.”
“응, 안 예쁘면 턱을 돌려버릴 거야.”
진이 자리에서 일어서 시리스의 뒤에 섰다. 조심스레 머리칼을 고르고, 넘길 때마다 달콤한 향이 났다.
진은 집중하느라 한동안 먼저 입을 열지 않았고, 시리스는 어느 순간부터 낮은 소리로 콧노래를 불렀다.
한 줄기가 다 땋아졌다.
진이 다 땋은 머리를 비춰주고자 거울을 들었을 때, 거울 안에서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왠지 웃음이 나왔다.
“어떻습니까? 열심히 한다고 하기는 했는데.”
“음, 좋네. 끝까지 잘 부탁해.”
다시 머리를 땋는 진, 그리고 흥얼거리는 시리스.
진은 실로 오랜만에, 아니. 어쩌면 처음으로 그녀가 들뜬 모습을 보여주는 중이라고 생각했다.
아름다웠다. 은백색 머리칼이 햇빛 쏟아지는 강물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한때는 말이야.”
“예, 시리스 님.”
“한때는, 나도 어머니랑 같은 생각을 했었어.”
“어떤……?”
“어느 날 문득 널 비궁의 안주인으로 들이는 게, 정말 괜찮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야.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아. 나침반 탈환 때였을까? 아무튼, 그게 비궁을 위해 가장 좋겠다 싶었지.”
비궁을 위해.
시리스는 그 말을 곱씹으며 한 잔을 더 들이켰다.
“넌 잘 모르겠지만, 나에게 그 문제는 긴 화두였어. 왜냐하면, 내 마음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야. 오로지 비궁을 위해 너와 결혼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 건지, 아니면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결혼하고 싶다고 생각을 한 건지.”
진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시리스는 묵묵히 머리를 땋는 그의 모습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오늘은 어떤 대답을 듣고 싶어서 이야기를 시작한 게 아니었다.
“반드시 전자여야 했어.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비궁을 위해서 너와 결혼하고 싶었어야 했어.”
다만 머리를 땋는 진의 손길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다는 게, 왠지 기분이 좋았다. 그래서 장난기가 발동해 질문을 하나 던졌다.
“진, 왜 네 의사는 중요하지 않냐고 안 물어봐?”
“그건…….”
“넌 그냥 거절하면 됐을 테니까?”
“그런 뜻이 아니라.”
“하하, 아니긴 뭘 아니야. 넌 거절했을 거야. 너는 이미 마음에 품고 있는 사람이 있었을 테니까.”
발레리아 히스터.
시리스는 그녀와 진이 붉은부엉이 안에서 밤을 함께 보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진과 이야기를 나눠야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한 번은, 딱 한 번은 진에게 마음을 전하는 게 좋겠다고 말이다.
“진.”
“예.”
“내 입장에선 안타깝게도, 난 비궁 때문이 아니라…… 언젠가부터 그냥 너를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경쟁자로서의 너를 존경했고, 친구로서의 너를 좋아했고, 남자로서의 너를 사랑했어.”
두 번째 머리칼이 다 땋아졌다. 진은 떨리는 손을 진정시키며 마지막 머리칼을 골라냈다.
“고백한 건 난데 왜 네가 떨어? 머리 망가지면 그냥은 안 넘어간다.”
“시리스 님…….”
“이 마음을 조금 더 일찍 알았다면 좋았을 거야. 그리고 내가 어머니처럼 좀 더…… 뭐랄까, 표현에 능숙한 사람이었다면 한 번은 기회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야. 이 마음을 닫아야 할 때가 온 것 같아. 비궁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우리.
시리스가 그렇게 표현한 건, 진과 자신뿐만이 아니었다. 함께하는 동료들 모두를 포함하는 이야기였다.
“이제 우리를 기다리는 싸움은 그 어느 때보다 힘겨울 거야. 그때, 실수하고 싶지 않아. 나는 이미 선택을 내렸어.”
도저히 말을 고를 수가 없었다.
진은 겨우 떨림이 멎은 손으로 그녀의 머리칼을 땋을 뿐이었다. 마지막 머리칼을 다 땋았을 때, 진은 또 거울로 시리스에게 그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 마지막까지 섬세하게 잘했네.”
그리고 진이 고개를 끄덕이려는 찰나.
뒤돌아 앉은 시리스가 자연스레 그의 목을 끌어당겨 입술을 맞췄다.
“이걸로 그간 네가 경쟁자로서 비궁에 빚을 진 건 전부 청산된 거야. 앞으로는 서로 빚을 질 일이 없겠지.”
나에게 넌. 제일 친한 친구이자,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까.
“그러니까 앞으로도 필요한 게 있다면 무엇이든 편하게 말해. 지금처럼 뻔뻔하게 굴라는 뜻이야. 알겠어? 대신, 두 가지만 약속해.”
“……무엇을?”
“첫째, 앞으로도 나를 대하는 게 달라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난 이제 네가 전보다 더 편해졌거든. 할 수 있겠어?”
진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둘째는…… 이건 말하면 좀 내가 나쁜 사람이 되는 기분이지만, 뭐 어때. 어차피 없을 일인데. 만에 하나라도 네가 발레리아를 생각하는 마음이 영원하지 않은 것 같다면, 내게 와.”
시리스가 다시 몸을 돌렸다.
왠지 진의 눈동자가 젖은 것 같았고, 보고 싶지 않았다. 두 번째로 내건 약속의 대답을 듣고 싶지도 않았다.
진이 고개를 저을 것 같기 때문이 아니었다. 마찬가지로 소중한 동료인, 발레리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드는 까닭이었다.
잔은 두 개, 포도주는 한 잔이 남았다.
시리스는 남은 술을 모두 자신의 잔에만 채웠다. 그리고 그 잔을 비우려다가, 충동적으로 한기를 일으켰다.
화아아아…….
눈꽃처럼 피어오른 한기에 가득 찬 잔이 순식간에 얼어붙는 모습이 이어졌다.
“……왠지 이건 지금 마시고 싶지 않네. 언젠가 생각날 때 다시 와서 비워야겠어. 이제 가자, 진. 먼저 나가서 조금만 기다려, 난 지배인에게 이거 보관하라고 부탁한 다음에 나갈 테니까.”
진이 나간 후, 시리스는 한동안 얼어붙은 잔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소궁주의 마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