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65)
제 222화
84화. 불씨(3)
앤이 진의 뺨을 치기 위해 손을 번쩍 들어 올리려는 찰나.
뮤가 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냥 가자고, 앤.”
명령에 가까운 어조.
앤은 알고 있었다. 이럴 때 뮤의 말을 어겨봐야 좋을 게 없다는 것을. 평소 두 사람은 몹시 가까워 서열을 신경 쓰지 않는 듯 보이나, 사실 두 사람의 위계는 꽤 뚜렷했다.
“칫!”
홱 고개를 돌리는 앤.
‘뮤 누님이 생각보다 똑똑한 구석이 있었군.’
지금 진을 폭행하거나, 싸우겠다고 덤벼드는 것은 멍청한 짓이었다.
아직 두 사람이 진의 실력을 완전히 파악하지 못한 것도 문제지만. 무엇보다도 시론이 직접 진이 깨어나는 즉시 ‘기수 임명식’을 진행하겠다고 선포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진을 다치게 하거나, 불미스러운 일을 만든다면?
그건 곧 시론의 명령을 어기는 셈이었다.
심지어 뮤와 앤은 과거 시론이 연회를 주최하기 직전, 진을 죽이기 위해 억지스러운 임무를 내린 적도 있으니 더더욱 조심해야 했다.
까드득!
뮤가 이를 악물었다. 그녀는 오히려 앤보다 강한 분노를 느꼈으나, 막내에게 말려들어 낭패를 보지 않겠다는 일념이 더 강했다.
“……축하한다는 말까진 못 하겠군. 어서 아버지께 가보아라.”
“그러죠, 누님들.”
“그리고 엠마 닐트로, 너는 후회할 짓 하지 마라. 처음이자 마지막 경고다.”
뮤와 앤이 그냥 진을 지나쳐 걸음을 옮기자.
토나 형제는 안 그래도 벌어졌던 입이 더 커졌다.
‘저 미친 것들이 막내를 어려워하고 있어!?’
‘내가 뭘 본 거야?’
아울러 엠마는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폭죽처럼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가까스로 억누르는 모습.
“형님들, 턱 떨어지겠어.”
“아, 응. 그만 다물게.”
“고마워……!”
와락!
토나 형제가 쭈뼛거리다 진을 한 번씩 끌어안았다.
두 사람도 진 덕분에 뮤와 앤이 자존심을 구겼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건 그들이 그간 꿈에서만 겪어본 일이었다.
“형님들은 잘 지냈어?”
진이 자연스레 토나 형제를 떼어내며 말했다.
‘대사막의 신기루가 빚은 형님들을 베었던 날이 떠오르는군.’
인정하기 싫지만, 진은 이들에게 분명 조금이나마 형제애 비슷한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루나나 요나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폭풍성에서부터 나름 미운 정이 들었다고 해야 할까.
살살 눈치를 살피며 다가오는 두 사람이 은근히 귀여워 보이기도 했다.
“으응, 우리야 뭐 잘 지냈지. 뮤, 앤 누님들이 날마다 지…… 아니, 좀 극성맞게 굴었던 걸 빼면.”
“이렇게 막내 네가 살아있는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너무 좋다.”
“맞아!”
“그래? 난 그렇게까지 좋지는 않아.”
진의 차가운 대답에 토나 형제의 어깨가 팍 쪼그라들었다.
“앗.”
“아아…… 그래, 미안. 우, 우리가 너무 호들갑을 떨었지.”
진이 대답을 굳이 이렇게 한 건 이유가 있었다.
“대신 앞으로는 천천히 친해질 시간을 가져보자고. 나도 형님들 썩 싫지는 않거든.”
엠마에게 메시지를 전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었다.
앞으로는 누구 앞에서든, 허락 없이 나서서 자신을 이용하지 말라는 뜻.
그리고 더 확실하게 충성 의지를 보이라는 의미.
눈치 좋은 엠마는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진의 의중을 파악했다.
반대로 토나 형제는 진이 ‘친해져 보자’고 말한 사실에만 크게 감동한 듯, 힘껏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12기수님.”
“그냥 진 도련님이라고 불러, 엠마.”
“예, 진 도련님. 가끔 좋은 차향이 생각나면 언제든 이 유모의 방을 찾아주세요. 검의 정원 바깥에선 접하기 어려운 진귀한 차들을 준비해놓도록 하겠습니다.”
가문 돌아가는 꼴이 궁금하면 찾아오라는 이야기였다. 그 말에 흡족해진 진이 가볍게 엠마와 눈을 맞췄다.
“조만간 한 번 들르도록 하지. 만족할 만한 찻잎이 준비되어 있으면 좋겠군.”
엠마와 토나 형제가 사라지자 괜히 근처에 서성이던 하인들도 황급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수호기사들은 진에게 경례를 올리며 갈 길을 갔다.
기수가 되었으니 이제 공식적으로 일반 수호기사보다 계급이 높아진 것이다.
시론의 집무실은 안채에 있었다.
그러나 안채로 가기 전, 진은 다른 한 곳을 먼저 들를 생각이었다. 검의 정원 안뜰 가장 깊숙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신성한 지하.
영묘.
‘아버지를 뵙기 전에, 그곳으로 가서 룬칸델을 수호한 영웅들에게 예를 올리는 것이 먼저다.’
물론 진짜로 그런 마음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영묘를 먼저 가겠다고 판단한 것엔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 시론이 자신을 먼저 찾아오라고 명령을 내린 상황은 아니라는 것.
둘째, 형제들 중 지금껏 예비 기수 생활을 끝내자마자 영묘를 먼저 찾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
둘째가 중요했다.
‘영묘를 먼저 찾는 행위만으로 내게 조금이라도 호의를 보일 만한 원로들이 있다.’
원로들 중엔 예를 극도로 중시하거나, 역사와 전통에 민감한 부류가 많았다.
지금 검의 정원은 진에게 적의 소굴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조슈아를 꺾고 왕좌를 차지하려면 아군이, 그것도 아주 많은 아군이 필요했다.
간단한 행동만으로 일부 원로의 호의를 얻을 수 있으니, 영묘에 먼저 들르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생도일 땐 당연히 영묘에 대한 진입 권한이 없었으나 이제는 아니었다.
복도를 빠져나와 안뜰로 향하자 보는 눈이 더 늘었다.
그러나 다른 형제들을 마주치는 일은 없었고, 진은 무난히 영묘에 다다랐다.
불빛 하나 없이 어두운 지하에 가득한 석관들.
‘새삼 이곳에 테마르의 무덤은 없다는 사실이 떠오르는군. 맹약이라…….’
테마르 룬칸델이 죽은 이후, 지플과 룬칸델이 맺은 굴욕적인 맹약.
맹약의 내용은 간결했다. 마법을 사용한 마검사 선조들을 숭배하지 말고, 앞으로도 마법을 결코 사용하지 말 것.
그렇기에 그간 진은 지플을 볼 때마다 맹약을 어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맹약을 어겼다고 거품을 무는 건 몇 번 보았지만, 지플은 막상 나에 대한 이야기가 세상에 드러난 다음에도 룬칸델을 어쩌지 못하고 있다.’
그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룬칸델을 치는 게 부담스러운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단 하나였다. 시론 룬칸델, 세계 유일 창성기사의 존재.
그가 사라지면 지플은 룬칸델을 치는 일을 결코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시론이 있는 한 앞으로도 지플은 지금과 같은 태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
‘내심 그것들과 곧장 큰 전쟁이 벌어지진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는데, 확실해졌어. 당분간 전면전은 없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석관을 향해 묵념하고 있던 중.
바깥쪽에서부터 서서히 인기척이 느껴졌다.
누군가 새로 영묘에 들어온 것이다.
“오셨습니까, 아버지.”
시론이었다.
그는 집무실에 있었음에도, 진이 깨어나자마자 그 사실을 느끼고 영묘를 찾아온 것이다.
아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그리고 이미 바깥에선 시론의 지시를 받은 기수와 수호기사들이 기수 임명식을 준비하고 있었다.
“실망이로군.”
대뜸 시론이 내뱉은 첫 마디.
실망.
돌아보면 전생에선 참 숱하게 들었던 말이지만, 현생에선 처음이었다.
그러나 시론은 나무라는 듯 말한 것이 아니고, 부자 사이에 평범한 농을 주고받는 것 같은 말투였다.
그 덕에 진은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며 대답을 할 수 있었다.
“제가 너무 늦게 깨어났기 때문입니까?”
“내가 네게 모두가 보는 앞에서 기회를 주는 것은 아까가 마지막이었다. 너는 가진 것을 모두 사용해, 그보다 더 좋은 결과를 냈어야 하느니라.”
시론의 말과 달리.
진은 그의 정수가 담긴 일검을 받은 덕에, 검의 정원에 있는 모두에게 한없이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럼에도 시론은 부족하다고 느낀 것이다.
정확히는, 진의 수련이나 성장이 부족하다고 여기진 않았다. 자신조차 열아홉엔 진보다 대단하다고 할 수 없었으니 말이다.
“영기를 사용해야 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진은 시론의 일검을 받을 때 영기는 아예 사용하지 않았다.
오직 오러와 명왕족의 뇌기만을 사용했다.
영기까지 사용했다면 결과가 조금은 달랐을 터.
물론 시론의 일검을 ‘받아칠’ 정도까진 안 되었겠지만, 적어도 기절을 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영기를 쓰지 않은 이유는 무엇인가.
진은 처음부터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적들에게 다 보여주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현재는 루나 누님을 빼면 모두가 나의 적이다.’
적들은 진이 솔더렛의 계약자이자 마검사라는 사실과, 나이에 걸맞지 않은 어마어마한 힘을 갖고 있다고만 알고 있을 뿐.
진의 ‘정확한 무위’가 어느 정도인지는 아직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싸움은 언제나 그렇듯, 내가 가진 패를 상대가 모르면 모를수록 유리했다.
‘영기까지 사용해서 더 압도적인 모습을 보였어야 한다는 게 아버지의 의견인 것이로군.’
시론은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석관 앞에서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꽤나 긴 침묵이 흘렀다.
진은 그 침묵이 그다지 불편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자신에게 질책이나 명령이 아닌, ‘의견’을 제시했다는 것 자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흥미롭기 때문이었다.
그건 그만큼 자신을 인정하고 있다는 의미였으니까.
“막내야.”
“예, 아버지.”
“널 기수로 임명하는 것은 룬칸델에 큰 손해다.”
진이 대답 대신 고개를 조아렸다.
“네가 그 손해를 메꿀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 지켜보도록 하겠다.”
“알겠습니다.”
“내게는.”
시론이 돌아서며 말했다.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 한 시간 뒤 임명식이 시작될 테니, 그때까지 이곳에 있다가 나오도록 하라.”
진이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시론이 먼저 영묘를 나섰다.
멀어지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며, 진은 한참 동안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 시간이 많지 않다고?’
대체 무슨 뜻일까.
지병? 그딴 것이 창성기사의 육체를 어쩔 수는 없었다. 노화? 그 역시 지금의 시론에게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머리가 멍해지고 있었다.
단순히 지나가는 말로 할 만한 내용이 아니다.
시론이 그 이상을 말하지 않으려는 눈치이니, 감히 물어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시론에게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 말 속에 숨은 뜻은 알 것 같았다.
‘아버지의 시간이 다하기 전에 가주가 되라는 뜻. 그리고 아버지는, 더 이상 내게 직접적인 기회와 도움을 제공하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
어쩐지 영묘를 나선 시론의 뒷모습이, 조금 쓸쓸하게 다가왔다.
그건 진이 시론을 보며 처음 느낀 감정이었고, 다른 형제들은 아직 한 번도 겪지 못한 감정이었다.
룬칸델에서 시론을 향해 진과 비슷한 감정을 느껴본 적 있는 이들은, 과거 그와 함께 싸웠던 전대 흑기사들과 젊은 시절의 로사가 전부였다.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고 영묘를 빠져나오기 전, 진은 마력으로 불꽃을 일으켜 영묘의 촛대들에 작은 불씨들을 밝혔다.
그리곤 기수의 회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