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76)
제 222화
88화. 축하 사절단, 의외의 만남(3)
“길리 때문에 사절을 안 보내는 거라고?”
그녀의 눈빛과 몸짓에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은 감정이 느껴졌다. 부끄러움, 민망함, 죄스러움…… 그리고 씁쓸함과 걱정.
사람을 작아지게 만드는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그녀를 얽고 있었다.
길리가 고개를 조아리자, 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괜찮아, 길리가 미안할 것 없어. 이번 일로 맥로란에 특별히 악감정을 갖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진은 단번에 길리가 걱정하는 부분을 정확히 짚었다.
“……면목 없습니다. 헤아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도련님.”
사실 진은 대답과 달리.
맥로란가가 만약 길리에게 큰 상처를 줬다면, 그래서 지금까지 길리를 괴롭게 하고 있다면, 너무나 괴로워서 그 시절 겪은 일들을 아직도 자신과 무라칸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면.
나중에라도 맥로란가를 응징할 생각이었다. 사절단을 보내지 않은 것쯤은 정말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딸기파이여, 슬픈 표정 짓지 말고 이리 오너라. 저 귀염성 없는 꼬마 녀석 왕 놀이도 끝나 가니, 어른들끼리 술이나 한 잔 마시면 딱 좋을 것 같구나.”
무라칸이 자연스레 길리를 데려가자, 진이 페트로를 찾았다.
“페트로.”
“예, 도련님!”
“설마 볼타가가 사람을 보내지 않은 것인가?”
“다시 한 번 확인해보겠습니다.”
페트로가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자정이 지나버렸다.
“이상한 일이군요. 온갖 몰락 귀족들이 다 찾아왔다가 그냥 돌아갔는데, 볼타가만 사절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볼타처럼, 그야말로 ‘바닥을 기는’ 가문들은 사절을 보내는 것에 대해 다른 형제들의 눈치를 살필 필요도 없었다.
애초에 룬칸델과 직접적으로 교류를 맺을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는 가문이 아니기 때문.
형제들은 진이 어떤 몰락 귀족들을 만나든, 신경도 쓰지 않을 것이다. 로사조차도.
따라서 오히려 세가 약한 가문일수록 이럴 때 어떻게든 순혈 룬칸델과 인연을 만들려고 했다.
없는 돈을 짜내 공물을 만들어 보내고, 가보라도 들고 찾아오는 게 보통이었다.
그런데 볼타는 다른 몰락 가문과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였다.
“그렇단 말이지, 음…….”
진이 잠시 생각에 빠졌다.
‘설마, 볼타가에 피콘 민체의 후손이 있다는 걸, 가문 내에 알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말인가? 지금 이 시기에?’
피콘 민체.
이견이 없는, 대륙 역사상 최고의 대장장이이자 바리사다와 브라다만테를 벼린 인물.
피콘 민체가 죽고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이 흘렀으나, 아직까지도 대륙 최고의 대장장이 집단은 ‘민체 대장장이 협회’였다.
민체 협회의 정식 대장장이들은 휴페스터, 루테로 마법 연방 가릴 것 없이 웬만한 기사나 마법사보다 좋은 대우를 받았다.
특히 각각 ‘모루’, ‘망치’, ‘불’이라 불리는 민체 협회 3대 대장장이는 시론조차 각별한 예우를 담아 대해줄 정도.
상황이 이러한데, 정작 민체의 직계 후손이 몰락한 귀족 가문의 집사나 하고 있다는 걸, 어느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전생에서 그 사실이 처음 밝혀진 건 내가 스물셋, 넷일 때쯤이었다. 분명 검술 1성에 이르기 직전쯤이었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났다. 휴페스터 전역이 발칵 뒤집혔던 사건이니까.
피콘 민체의 후손은 ‘빈 브랑슈’라는 이름을 사용하고 있었다.
다른 모두가 그랬듯이. 그는 자신이 피콘의 후예라는 걸 알지 못했고, 그의 부모도, 증조부모도, 고조부모도 마찬가지였다.
말하자면 피콘의 후손들은 어느 순간부터 ‘민체’라는 성과 정체성을 잃은 채, 평범한 양민으로서 살아갔던 셈. 당대의 혼인법과 풍습에 따라 성도 여러 번 바뀌었다.
그러던 중 난데없이 볼타가의 집사 빈 브랑슈에게 대장장이의 신이 깃들었다.
정확히는, 이미 계약되어있던 대장장이의 신을 빈이 처음으로 ‘인지’한 것이 진이 스물넷 무렵이었다.
‘전생의 내 정보가 잘못된 것일 수도 있다. 세상에 빈 브랑슈의 일화가 알려진 것이 그때쯤일 뿐, 가문은 그전에 이미 빈의 정체를 알았을지도. 특히, 조슈아에겐 예언자라는 인물이 있으니.’
진이 생각을 정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진은 지금과 달리 기수가 되지도 못했고, 하인들에게도 은근히 멸시를 받는 신세였었다.
따라서 가문이 돌아가는 형세를 제대로 인지할 수 없었다. 언제나 구석진 곳에서 혼자 종일 의미 없는 수련을 행하고, 숨어들듯 방으로 돌아오는 나날이 계속될 뿐이었으니 당연했다.
반면 그때의 조슈아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조슈아가 아닌 다른 형제가 빈 브랑슈를 확보했다 할지라도, 그걸 굳이 가문의 쓰레기와 공유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진은 당시 빈 브랑슈가 대장장이의 신 계약자로 알려진 뒤, 누구의 세력에 포함되었는지도 알지 못했다.
당연히 룬칸델에 소속되었으리라고 짐작했을 뿐.
어쨌거나 확실한 상황은 직접 만나보아야 알 수 있을 터.
“볼타가의 영지가 슈체론 왕국의 한 시골이었지? 직행 가능한 이동 관문이 있나?”
서, 설마 지금 볼타가를 찾아가시려는 겁니까?
페트로는 그런 것을 묻지 않는 인물이었다.
“없습니다, 도련님. 관문 지기들에게 가장 가까운 슈체론의 다른 도시로 이동 관문을 개방하라고, 즉시 기수령을 내리도록 하겠습니다.”
* * *
슈체론 남부 이동 관문에 도착하자마자, 볼타가 저택까지 슈리를 타고 달렸다.
이제 슈리를 탄 모습이 드러나도 문제될 것이 없었으나, 진은 괜한 이목을 끌고 싶지 않아 산길만을 이용했다.
“뉘, 뉘십니까?”
볼타가의 작은 저택은 곧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허름한 모양새였다.
입구는 문지기라 부르기도 민망한, 비쩍 마른 소년 둘이 지켰다. 봉급을 제때 받지 못해 굶주린 것인지, 아니면 잘 받았는데도 이 모양인지는 알 수 없었다.
“룬칸델 12기수 진 룬칸델이다. 볼타 가주를 만나러 왔으니 안내하라.”
“어…… 엇!”
“아, 알겠습니다! 가, 가주니이임! 가주님! 루, 룬칸델의 기수께서 오셨습니다!”
벌떡 일어선 두 사람이 가주를 찾아 소리를 질렀다.
잠시 후 가주가 등장했을 때(심지어 가주조차 소년들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추레했다), 진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뱉을 뻔했다.
그가 나서며 저택의 문짝이 부서진 것이다. 다급한 마음에 문을 평소보다 조금 세게 열었더니 벌어진 현상이었다.
이쯤 되니 진은 오는 내내 고민했던, ‘볼타가 사절을 보내지 않은 이유’들을 모조리 지워버려야만 했다.
‘이동 관문은커녕, 말 한 마리도 못 구할 것 같이 가난한 것 같군. 이 상황에 사절은 무슨 사절이겠어.’
볼타가 사절을 보내지 않은 건, 그저 돈이 없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몰락했기로서니, 휴페스터에 이런 가문이 존재한다는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루, 룬칸델의 12기수께서 이 누추한 곳은 어인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물어볼 것이 있어서 왔소. 그런데, 대체 왜 어쩌다 이 지경이 된 거요?”
초면이지만 도저히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 최근 영지에 기근이 들었는데…… 도적떼와 마물까지 기승을 부려서…… 그, 부끄럽군요.”
“슈체론 왕가에 지원을 요청하지 그러셨소.”
“그러기엔 사실상 왕가가 이 영지를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보시다시피 큰 가치가 없는 땅이다 보니…….”
듣자마자 납득해버렸다. 볼타 가주의 말대로 영지는 정말 하나도 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 그래도 올해는 겨울 재배 품목들이 제대로 수확이 되고 있어서 자급자족할 수 있을 것 같…… 아니, 제가 지금 무슨 소리를. 죄송합니다, 진 룬칸델 경. 사절을 보낼 여유가 되지 못해 찾아뵙지 못했습니다.”
볼타 가주가 난데없이 무릎을 꿇으려는 찰나 진이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사실, 진은 그를 꼭 안아주고 돈도 한 보따리 쥐여주고 싶었다. 볼타가가 아직 검의 정원에 있는 그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았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누구라도 빈 브랑슈의 존재를 알았다면 이들이 이렇게 살고 있을 리 만무할 테니 말이다.
따라서 볼타 가주는 충분히 제 역할을 한 것이다. 적어도 진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그런 걸 따지러 온 것이 아니오. 빈 브랑슈라는 친구를 만나러 왔소. 볼타의 집사로 재직하고 있다던데.”
볼타 가주의 눈이 동그래졌다.
“빈? 그 친구는 무슨 일로 찾으십니까?”
“알 필요 있소?”
진의 담담한 목소리에 볼타 가주와 문지기들이 매우 빠른 속도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진 경, 다만, 빈. 우리 집사는.”
순식간에 붉어지는 볼타 가주의 눈동자.
“사흘 전에 도적떼에게 잡혀갔습니다. 요 앞길에 쌓인 눈을 쓸다가 그만, 차라리 더 나이 먹고 쓸모없는 제가 잡혀갔다면 더 좋았을 겁니다…….”
볼타 가주가 쿨쩍쿨쩍 우는 게 퍽 안타까웠으나, 그를 위로해줄 시간은 없었다.
“당장 데려올 테니, 빈 브랑슈가 무사하길 빌고 있으시오.”
아마 무사할 것이다. 진의 회귀로 인한 역사의 변화가 이 극단적인 촌 동네까지 번지지만 않았다면.
“옛?”
“방향.”
“그, 부, 북쪽입니다. 도적들은 북쪽으로 향했습니다.”
“가자, 슈리!”
[먀!]돌연 슈리가 눈구름을 일으키며 쏜살같이 나아가자, 한동안 볼타가 사람들은 그 뒷모습만 꿈뻑꿈뻑 쳐다볼 뿐이었다.
북쪽으로 세 시간을 달리자 과연 도적들의 소굴이 보였다.
“뭐야!”
“누구냐!”
진이 자연 동굴 앞에 쳐놓은 엉성한 막을 젖히고 들어서자, 술판을 벌이고 있던 도적들이 벌떡 일어서 소리를 질렀다.
단언컨대, 예비 기수 시절에도 만나본 적 없는 피라미 중의 피라미였다.
세상 모든 도시가 대도시는 아니고, 모두가 뛰어난 사람은 아니었다.
진은 환경상 괴물, 초인들의 틈바구니에서 자랐으나, 세상엔 이런 하찮기 이를 데 없는 도적에게 애를 먹는 사람들도 있는 법이었다.
“빈 브랑슈는 손을 들어라.”
“누구냐고!”
“수도 쪽 귀족 나리 같은데, 그냥 가던 길 가쇼. 험한 꼴 당하지 말고.”
뒤쪽에 있는 한 가녀린 청년이 손을 드는 모습이 보였다. 그가 빈 브랑슈였다.
이후엔 검이나 주먹을 뻗을 것도 없었다.
가지고 있는 기운 중, 극히 미량을 드러내자 도적들은 본능적으로 납작 엎드리거나 몸을 떨기 바빴다. 이내 진이 더 기운을 끌어올리자 하나도 빠짐없이 기절해버렸다.
빈은 겁에 질린 눈초리로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찬찬히 진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가 다가올수록.
진은 과거 청새 군도에서 겪었던, 기묘한 공명을 느끼고 있었다. 시그문드가 그람의 무덤에 반응하며 공명했던 그 현상과 거의 흡사했다.
우우웅……!
그러나 지금 공명하는 것은 시그문드가 아니라, 되찾은 그의 애검.
브라다만테였다.
빈과 계약한 대장장이의 신과 브라다만테가 공명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내게도, 네게도 무척 운이 좋은 날이로군.”
진이 빈에게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빈은 진의 손을 맞잡은 순간, 머릿속에서 생전 처음 듣는 목소리가 울리는 걸 경험했다.
[브라다만테! 빈, 어서 저 녀석이 들고 있는 검을 빼앗아라. 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