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499)
제 555화
138화. 백야의 탑지기(6)
추락하는 산드라는 두 팔을 활짝 벌린 채 한가득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사정과 그녀의 기행을 모르는 이들이 본다면, 영락없이 절절한 마음으로 오랜만에 만난 연인을 반기는 모습이었다.
‘저건, 산드라 지플……!?’
‘방금 막내에게…… 우리 진 씨라고!?’
‘12기수와 산드라 지플 사이에 모종의 관계가 있는 것인가?’
조슈아와 디푸스, 제인도 산드라를 올려다보며 두 눈을 휘둥그레 뜰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등장해서 진을 ‘자기’라 칭하는 건 황당했고, 그녀의 말에 그 괴물 같던 헤도가 순식간에 난처한 기색을 표하는 건 충격적이었다.
착!
산드라는 마법사답지 않은 민첩하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진과 열 걸음쯤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꺄하핫, 멋지게 받아서 안아줄 줄 알았는데. 그렇게 슬쩍 피하기예요?”
“세상엔 피하는 게 상책인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지.”
“오늘 제 옷 어때요? 금팽이 상단에서 특별 추천을 받아 주문한 건데, 괜찮아요?”
진은 그녀의 룬칸델 정복과 비슷한 느낌의 검은 코트와 셔츠가 아니라, 황금으로 빚은 의수에 시선을 두었다. 안쪽에 새겨진 그림은 자신의 얼굴이라는 사실도 알아볼 수 있었다.
-오른팔이라…… 딱 적당한 것 같아요.
-뭐가 적당하다는 거지?
-내 모든 걸 가져가기엔 아직 너무 이른 감이 있거든요. 오른팔 정도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군요. 우린 이제 연애 첫날이니까.
가이파 군도에서 나눈 대화가 떠올라서 한 번 더 소름이 돋았다.
한창 싸우던 이들은 모두 말문이 막혔고 한동안 잔해와 부서진 석재가 지상으로 쏟아지는 소음과 경보음만이 도드라졌다.
진은 그냥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실제로 취향에 맞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그쪽이 이 끔찍한 위기를 벗어나는 일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될 것 같았다.
“다행이네요! 날 속인 거였으면 그 깜찍한 쥐돌이 쥐순이들을 몰살하려고 했는데. 저 멍청한 근육돼지를 시켜서…… 망할 근육덩어리를…… 빌어먹을! 헤도! 이거 어떻게 할 건데, 무슨 수로 책임을 질 거야!”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앵-!
경보음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바깥 상공엔 벌써 드락카의 용들이 비행을 시작했고, 함선 코젝도 출격을 준비하는 상태였다.
“반드시 진 씨랑 저녁 식사 하게 해준다며!”
“……차질이 조금 있었습니다, 아가씨.”
“차질? 차질이라고! 이 중요한 순간에, 죽을래 진짜!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데.”
룬칸델들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저 괴물이 고작 산드라에게 이토록 쩔쩔매는 모습은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그리고 진은 그 대목에서 헤도가 ‘적극적으로’ 살수를 펼치지 않은 이유를 깨달았다.
‘산드라의 명령 때문이었군.’
심정이 복잡해졌다.
산드라 덕분에 헤도로부터 살아남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당연하게도 안도감보다 훨씬 더 큰 굴욕으로 다가왔다.
적의 장난 같지도 않은 기행이 어떤 식으로든 이득이 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요나가 아니었다면, 산드라가 아니었다면.
이번 임무는 이미 실패였다. 아마 도주까지는 가능했을 테지만 룬칸델은 별다른 소득 없이 큰 타격만 입었을 게 분명했다.
‘안일했던 건 지플과 헤도뿐만이 아니다. 나와 룬칸델 역시 너무 쉽게만 생각했어.’
그러나 후회나 자책이나 하고 있을 때는 아니었다.
문제는 차후 보완하면 되고, 오늘의 굴욕은 더 큰 치욕으로 갚아줄 날이 올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적들도 이런 변수를 모두 계산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이라도 자신이 먼저, 가장 완벽하게 아무도 예상치 못한 변수들을 읽어내야 했다.
‘어째서인지는 몰라도, 헤도는 산드라 지플의 명령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인물이다. 다만 오늘 나와 산드라가 정말 저녁을 함께할 수는 없을 테니. 가능하다면 날 살려 보내려고만 한 거다. 산드라의 미움을 사지 않기 위해.’
-혹시 이곳에서 챙긴 것이 있다면, 놓고 가게. 그리하면 자네를 일단 살려주도록 하겠네.
헤도가 그렇게 말한 배경을 짐작하자, ‘자네를 일단 살려주도록’이라는 대목이 거슬렸다.
‘설계도를 되찾은 후 헤도는 나, 혹은 나와 무라칸만 빼고 나머지는 다 죽일 생각이었군.’
조슈아와 디푸스, 제인뿐만이 아니라, 계속 어울리지 않게 불쌍한 새우 노릇을 하고 있던 망령대들까지도. 진은 그렇게 확신했다.
‘망령대까지 처리하려는 이유는 가문보다 산드라의 명령을 우선했다는 증거를 인멸하기 위해서거나. 귀찮아지기 싫어서. 그리고 내가 죽을 수 있는데도 본대를 부른 건…… 함선 설계도를 빼돌린 우리가 무난히 탈출했다는 사실이 차후 알려지면. 산드라에게도 피해가 올 수 있기 때문에.’
연이어 떠올린 가정들에 머릿속이 폭발할 듯 뜨거워졌다.
‘나와 무라칸뿐만이 아니라 룬칸델의 모두가 다 살아남아야 한다. 적어도 2마탑을 벗어날 때까지는!’
드락카의 본대가 지원을 올 테니, 2마탑을 빠져나간 다음에도 필시 버거운 전투가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그걸 뚫고 루테로 마법 연방을 빠져나갈 가능성을 조금이라도 높이려면 요나와 디푸스, 제인과 더불어 조슈아까지도 우선 살아남아야 했다.
‘어떻게 해야 하지? 탑지기와 협상할 수단이 필요하다.’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진은 헤도의 뒤편 저 멀리, 뻥 뚫린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는 함대 사이로…….
낯익은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본 순간 떠오른 단어는 바로 이것이었다.
천운.
‘하늘이 날 돕는군. 아니, 어쩌면 놈들이 왔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
막 새로 드러난 하늘 위의 변수를 어떻게 이용할지 진은 즉시 결론을 내렸다.
또한 이 기회를 이용해 헤도라는 인물을 최대한 파악하는 것도 놓쳐선 안 될 것 같았다.
진이 산드라 지플의 목에 칼을 들이댔다. 그녀는 칼이 목에 닿은 와중에도 진과 가까워진 게 마냥 좋기만 한 눈치였다.
“길을 여시오, 탑지기.”
진의 말에 헤도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가씨를 인질로 삼겠다? 그건 별 의미가 없다는 걸 모르지 않을 텐데, 자네는. 가이파 군도에서 겪어보지 않았나.”
“물론 산드라 지플이 반 불사라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 하지만, 그 사실 자체는 아직 외부에 제대로 밝혀진 바가 없지 않소? 게다가 산드라가 내 탈출을 도우려 했다는 사실이 만천하에 알려지는 건 당신에게도, 산드라에게도 그다지 좋은 영향을 끼치지 않을 것이오.”
“벌써 몇 번이나 말하는 것이지만, 설계도를 돌려주게. 그리하면 자네를 살려주겠네.”
“나 또한 계속 같은 대답을 하는군. 나는 훔친 것이 없소. 그리고 내가 길을 열라고 말한 것은, 지금부터 이곳에 있는 룬칸델 모두에게 위해를 가하지 말라는 뜻이오. 나와 무라칸뿐만이 아니라.”
헤도의 눈빛이 단단해졌다.
“적지 한복판에서 지나치게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당신이 가로막더라도, 나는 산드라를 데리고 이 자리를 빠져나갈 자신이 있소. 그다음, 과연 이 이상한 여자의 입을 단속할 수 있겠소? 언론 통제도 한계가 있을 텐데.”
“점점 선을 넘는군.”
“탈출 과정에 아무리 격한 전투를 치러도 산드라는 죽지 않을 테니 반 불사라는 점도 오히려 지금 상황엔 우리에게 유리한 조건이오.”
“자신 있게 말하고 있지만, 아가씨를 데리고 루테로 마법 연방을 빠져나가는 건 불가하다는 사실을 분명 모르지 않을 걸세. 자네와 무라칸 님만 떠나게.”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진.
“마지막으로 말하겠소. 길을 여시오, 탑지기.”
답답한 듯, 헤도가 담배를 꺼내 물었다.
‘12기수가 아가씨에게 집착하는 건 여러모로 보험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내가 놔줘도 본대의 추적까지 따돌리는 건 불가하다는 걸 알 텐데, 왜 고집을 부리는 것인가? 그리 어리석은 인물은 아닌 줄 알았건만.’
자신이 비켜주든 비켜주지 않든 천운이 따르지 않는 이상, 여기 있는 룬칸델은 모두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
헤도는 본대를 부른 시점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가 진과 무라칸을 제외한 나머지를 직접 죽이려는 건 어디까지나 명분이 필요해서였다.
차후 켈리악에게 추궁 당할 때 할 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비록 방심해서 진과 무라칸은 놓쳤으나, 나머지는 모조리 사살했다고 말이다.
“음, 자기.”
한창 신나서 진의 옆얼굴만 쳐다보던 산드라가 입을 열었다.
“대충 어떤 생각으로 이러는지는 나도 알아요. 저 빌어먹을 근육덩어리가 미운 거죠? 나도 오늘만큼은 정말 찢어 죽이고 싶을 지경이에요. 감히 자길 위험에 빠뜨리다니…… 하지만, 헤도의 입장도 조금은 생각을 해주어야 하지 않을까요?”
의외로 진과 헤도의 대화 사이에 숨겨진 모든 흐름을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진에겐 보험이, 헤도에겐 명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다만 그녀는 지금껏 진의 옆모습만 감상하느라 하늘에 생긴 변화를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모두 다 무사히 빠져나가면 헤도는 물론이고 나도 마냥 무사하기는 어려울 거예요. 분명 추궁을 당할 테니까. 그건 자기도 바라지 않죠? 우리 결혼 생활도 아직 제대로 시작 못 했는데 내가 가문 지하 고문실 같은 곳에 처박히면 진 씨도 슬퍼지잖아?”
“지하 고문실? 아가씨가 그런 곳에 처박힐 일은 없을 텐데요.”
“헤도는 좀 닥쳐! 내가 수습하고 있잖아!”
표독스럽게 외친 산드라가 씨익 웃으며 다시 진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까, 그냥 나랑 흑룡이랑 셋이서만 오순도순 떠나요. 그렇게 하면 자기는 거의 확실하게 살아남을 수 있어요. 내가 미끼가 되어줄 테니까. 그럼 아무도 다치지 않는다고요? 우린 탈출극이라는 데이트도 하는 거고!”
그녀는 진을 제외한 나머지 룬칸델을 사람으로도 분류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진은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헤도와 눈을 맞췄다.
“탑지기께서는 내가 왜 이토록 고집을 부리는지 아직도 모르시는군.”
진이 손가락으로 헤도의 뒤편 하늘을 가리켰다.
“저걸 보면 내 제안을 받아들이는 게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 것이오.”
뒤를 돌아보는 헤도.
하늘엔 백여 척이 넘는 지플의 비행 양산함들이 떠 있었는데, 이상하게 그 사이에서 딱 한 대만이 불빛을 밝히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건 지플의 함선이 아니었다.
함선 그르닐.
검황성을 타격했던, 킨젤로의 기함.
그르닐의 함포들은 멈춰 있는 양산함들을 조준하고 있었다.
“우린 보내주고, 저거나 막으러 가시는 게 좋지 않겠소? 당신과 당신 아가씨에게 저것보다 좋은 명분은 없을 것 같은데.”
진은 미소를 지었고, 헤도는 담배를 꺾으며 표정을 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