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00)
제 555화
138화. 백야의 탑지기(7)
‘저게 검황의 검을 견뎌냈다는 킨젤로의 그 함선인가? 이름이 그르닐이었던가.’
뒤늦게 함선을 확인하자마자, 헤도는 팍 짜증이 치솟는 걸 느꼈다. 우락부락한 근육 위로 도드라진 굵은 핏줄이 사납게 꿈틀거렸다.
무인으로서 초월적인 영역에 들어선 이후.
헤도는 이런 답답한 상황을 겪어본 적이 없었다. 실력 행사는 늘 복잡한 일을 단순하게 만들어주었다.
지금은 그 반대였다. 진과 무라칸만 살리면 되는 단순한 일이 엉킨 실처럼 복잡하게 꼬여버린 것이다.
생각한 대로 흘러간 게 하나도 없었다.
금고는 갑자기 털렸고, 진은 살려주려고 해도 묘하게 얄미운 혓바닥을 놀려 계속 저항했으며, 알고 보니 금고를 턴 건 요나였고, 그 검에 중상을 입었으며, 산드라는 평소보다도 더 참을성 없이 천장을 스스로 부쉈으며, 이제는 킨젤로의 함선까지 말썽이었다.
심지어 함선 그르닐이 등장한 시점이 하필 지금인 것도 우스웠다.
‘이러면 내가 본가 지원을 요청한 이유가 룬칸델들 때문이 아니라, 영락없이 킨젤로 때문인 것처럼 보이겠군.’
한숨을 내뱉으며 흰 머리칼을 반듯하게 쓸어넘긴 헤도는 문득, 어쩌면 차라리 이쪽이 여러모로 덜 귀찮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가주에게 내가 지원을 요청한 이유가 고작 이 정도 침입자를 감당하지 못해서였다는 걸 설명하는 쪽이 오히려 더 머리가 아팠을지도 모르겠어. 차라리 잘된 건가?’
헤도의 시선을 기준으로, 룬칸델들의 뒤편으로 펼쳐진 어두운 새벽하늘에 수백 개의 검은 점들이 보였다.
마법사들을 태운 채 이쪽으로 날아오고 있는 드락카의 용들이었다. 그 가운데 유난히 빛나는 건 기함 코젝, 아마 옥타비아가 지휘관으로 탑승하고 있을 터였다. 켈리악이 부재하지 않았다면 옥타비아 대신 그였을 것이다.
헤도가 지원을 요청한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조차 홀로 감당할 수 없는 일이 벌어졌으니 가문은 긴장할 필요가 있다는.
‘우습군. 오만과 자만이라는 껍질을 한 번 더 벗을 때가 되었나.’
픽, 헤도가 웃음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스스로를 강하다고 생각해 안일하게 대처한 자신이 우스웠다. 그조차 범접할 수 없는 최강의 존재, 시론 룬칸델은 분명 이런 상황에서도 방심 따위를 하는 일이 없었을 텐데 말이다.
“어? 저거 뭐야, 그르닐? 우리 함대에…… 포를 쏘고 있네?”
산드라가 말했다.
퍼버버벙……!
그르닐의 사방에서 함포가 쏘아지고 있었다. 정박된 양산함들이 무참히 파괴되기 시작했다.
신들이 폭죽놀이를 하는 듯 장엄한 화염이 어둠을 걷어냈고, 불타며 쏟아지는 파편은 유성우처럼 보였다.
아마 대중들이 목도했다면 다들 지플이 망하고 있다는 생각을 할 것이다. 저런 함대를 만드는 일에 대체 얼마나 천문학적인 인력과 자원이 투자되었을지를 상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룬칸델들은 마른침을 삼키면서도, 이조차 지플에 달리 끔찍한 타격은 되지 않으리라는 불쾌한 직감에 사로잡히고 있었다.
룬칸델들은 이번 임무에 참여하고 나서야 비로소 불구대천의 적, 세계제일가 지플의 위세를 제대로 경험하고 있다는 기분이었다.
“헤도! 이러면 다 살려주는 게 진 씨가 살아남을 확률을 더 높여주잖아! 본대는 분명 헤도가 룬칸델이 아니라 그르닐 때문에 지원을 요청한 걸로 생각할 거라고. 안 그래? 솔직히 헤도가 이 정도 침입자들 때문에 본대 지원을 요청하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산드라의 목소리는 해맑았다. 그 사실이 룬칸델들의 가슴을 더욱 답답하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다 살려주자, 길 열어! 얼른 안 움직이면 입을 십자로 찢을 거야, 이 무능한 근육돼지!”
산드라가 재차 소리치는 사이 헤도는 다시 진과 눈을 마주쳤다.
‘그야말로 천운이 따르는군, 진 룬칸델.’
헤도는 결론을 내렸고, 진은 일순 그의 내면을 들여다보았다.
그가 시론을 생각하며 오만을 털어내고, 한 단계 더 높은 무의 영역에 들어서고자 결심한 순간의 눈빛이 무엇인지를 직감적으로 읽어낸 것이다.
그건 그만한 각오를 가져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눈빛이었다.
‘다음에 만날 땐 거기서 더…… 강해질 셈이오? 그럴 수 있단 말인가, 탑지기!’
오싹, 소름이 돋았다.
각오를 해야 했다. 저 괴물이 또 한 번의 초월을 해내기 전에 자신은, 자신과 룬칸델은 그보다도 더 눈부신 성장을 반드시 이룩해내야만 했다.
파치칭-!
별안간 장검 베일이 금속성의 날카로운 소음을 일으키며 새하얀 빛으로 물들었다. 헤도는 눈 깜짝할 새도 없이 베일을 휘둘렀고, 룬칸델들은 간신히 반응해 방어 자세를 취했다.
그러나 검기의 파도는 룬칸델들을 스치지도 않은 채, 그들의 뒤편과 더불어 마탑의 상층부를 향해 뻗어 나갔다.
“아, 안 돼!”
“헤도오오, 오, 오…… 아…… 아……!”
그의 검기가 목표한 것은 백야의 탑 곳곳에 몸을 걸친 채 숨만 헐떡이고 있던 망령대들이었다.
빛이 물결처럼 움직인다면 바로 이런 형태일 것이다.
헤도가 퍼뜨린 검도의 오러에 망령대들은 굵은 소금처럼 분해되어 마탑 곳곳에 뚫린 균열 바깥으로 흩날려 사라지고 있었다.
망령대들이 최후에 내지른 비명은 먼 메아리처럼 힘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그 대목에서 룬칸델들은 또 한 번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망령대 네 사람을 죽인 건 이제 놀랍지도 않으나 방금 보여준 검기는 그 자체로 헤도가 지금껏 한 번도 전력을 드러내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또한, 그의 검은 대상을 완전히 ‘소멸’시키기에 이른 시론의 경지를 조금 닮아 있었다.
“지나가게, 룬칸델들.”
무서운 적막이 감도는 가운데 헤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그의 손에 들린 장검 베일은 여전히 눈부신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야, 육체미. 길을 열어줄 거면 검이라도 좀 내려놓고 얘기하는 게 어떻겠냐? 어? 계속해보자는 건 아닐 텐데 말이다. 애들이 놀라잖냐.]“방금까지 제게 이토록 대적한 룬칸델들의 용기가 거짓이라고 생각되지는 않아 한 말입니다, 무라칸 님. 불쾌하셨다면 죄송하다는 말씀을 올리도록 하죠.”
[뭐, 그렇게까지 할 건 없고.]무라칸이 인간으로 변신하며 진의 옆에 섰다.
“그 검, 잘 맡아두고 있어라. 아무래도 이 무라칸과 사연이 있는 물건인 것 같으니. 가자, 꼬마.”
진이 산드라의 목에 댄 칼을 치우며 걸음을 떼자 나머지 일행도 눈짓을 주고받다 그 뒤를 따랐다.
헤도를 지나치며 등을 보이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이 없으나, 진은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며 앞으로 나아갔다.
혹시라도 그가 뒤에서 검을 휘두를까, 그런 두려운 마음은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그만큼 가벼운 사내가 아니라는 것은 더 의심할 필요가 없는 문제였다.
“하늘이 자네를 아낀다면.”
이내 진이 자신의 어깨를 지나치자 헤도가 낮고 깊은 목소리를 내었다.
“그건 자네의 아버지가 하늘 그 자체가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헤도로서는 지금 이해하기 어려울 만큼 진에게 유리하게 흘러간 우연, 천운에 대한 이야기였다.
“당신에게 한 수 배웠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께 전하도록 하겠소.”
“산드라 아가씨.”
“왜 또!”
신경질적으로 홱 고개를 돌린 산드라를 보며, 헤도는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거인처럼 거대한 손으로 조심스레 산드라의 옷매무새를 고쳐주었다.
“잘 놀다 오십시오.”
헤도는 여전히 진이 산드라를 데리고 탈출할 수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건 자신에게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한 진이 헤도를 가벼운 사내가 아니라 인정해 장검 베일을 그냥 지나쳤듯.
헤도 역시 진이 산드라를 어떻게든 검의 정원으로 납치해갈 만큼 부족한 인물이 아니라 판단하고 있었다.
산드라는 그저 룬칸델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기만 했고, 헤도는 그녀의 짧은 일탈을 배려해주고 있을 뿐이라는 걸 진도 모르지 않았다.
적이라 할지라도.
여기서 산드라를 더 이용하겠다고 억지와 욕심을 부리는 건, 무인 대 무인으로서 나눈 일종의 신뢰를 더럽히는 일이었다.
“어어 그래.”
“지난번처럼 또 만남을 기념하겠답시고 사지 하나를 두고 오시진 마시고. 노는 동안 저들이 훔친 물건들을 되찾아보는 것도 생각해보실 문제입니다.”
산드라는 코웃음을 쳤다.
“줬던 걸 왜 뺏어? 그렇게 호들갑 떨 문제도 아니고 말이지. 부부 사이에 내 것 네 것이 중요한가 싶기도 하고? 저번에 진 씨가 서자 놈 목을 나 대신 따버렸을 땐 조금 속상했지만.”
“그렇습니까.”
“우린 갈 테니까 헤도는 저쪽 일이나 제대로 정리해. 내가 볼 땐 금고 털린 것보다 저게 더 문제니까.”
산드라가 손가락으로 저편 하늘을 가리켰다. 함선 그르닐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양산함들을 격침시키고 있었다.
“예, 알겠습니다. 그럼 이따가 뵙도록 하죠.”
파아앙-!
단 한 번의 도약에, 헤도의 거구가 순식간에 점처럼 작아졌다. 그는 거의 포탄처럼 보일 만큼 빠르게 소타 사막의 상공으로 쇄도하는 모습이었다.
드락카의 용들도 점점 더 그르닐과 함대에 가까워졌다.
방금까지 치른 그토록 격한 싸움은 다 거짓이었다는 듯, 선선한 새벽바람이 부서진 백야의 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헤도가 사라지자 룬칸델들은 악몽에서 깨어난 듯 호흡을 골랐다. 단언컨대 그는 기수들이 겪어본 이들 중 최악, 최강의 적이었다.
기수들의 가슴속에 열병처럼 뜨거운 결기가 넘칠 듯이 들어찼다. 형제애가 좋다고 할 수는 없으나 말하지 않아도 기수들은 서로의 감정을 정확히 읽어내고 있었다.
강해지겠다는 단단한 각오와 결기였다.
그러나 딱 한 사람, 기수가 아닌 룬칸델.
요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헤도에게 중상을 입힌 직후부터 역류와 내상을 견디느라 식은땀만 흘리고 있었다.
“누님, 괜찮으십니까? 역류가……!”
진이 그녀를 부축하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있어.”
“예?”
요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산드라를 가리켰다.
“……우리 막내는 애인…… 있다고, 이…… 시끄러운…… 망나니. 부부? 진…… 씨? 죽인…… 다.”
그녀는 아까부터 다른 건 아무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고, 오직 진에게 드러내는 산드라의 애정이 죽이고 싶을 만큼 거슬리던 상태였다.
산드라는 차갑고 깊은 요나의 살기를 마주하면서도 반짝반짝 눈동자를 빛냈다.
“어머, 작은 언니! 작은 언니라고 불러도 되죠? 내 정신 좀 봐, 우리 진 씨랑 엄청 친하시죠? 알아요, 알아. 산드라는 다 안다고요. 잠깐만 기다려요, 제가 얼른 안 아프게 도와드릴 테니까!”
“꺼져…… 주, 죽여…….”
“소타 사막 빠져나갈 때까지 계속 아프면 안 좋잖아요, 작은 언니. 아직 갈 길이 좀 멀다고요? 어디 보자. 마취약이 어디에 있더라.”
그 모습을 본 모두는 황당한 마음에 잠시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진과 룬칸델들은, 그렇게 백야의 탑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