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775)
제 777화
190화. 말리엣 히스터의 전승지(6)
진과 발레리아는 해변을 걷고 있었다.
전승지 바깥, 혼카 섬을 둘러싼 바다는 저녁놀에 물들어 파도마다 붉게 빛나는 보석이 넘실거렸다.
-[전, 본 적, 없지만, 섬의, 저녁, 밤, 풍경. 좋다고, 들었습니다. 전승자들, 나가서, 바람 쐬면서, 기다리십시오. 여기, 어수선, 합니다.]
아까 가위바위보 시험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골렘이 한 말이었다. 젠과 테벤이 통신 장치를 주기 전에 손봐야 할 부분들이 있다며 호들갑을 떨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 다 그런 이유로 뜻하지 않은 산책을 하게 된 게 싫지 않았다.
젖은 모래 위로 두 사람의 발자국이 늘어지고 있었다. 기분 좋은 바다 내음이 코끝을 간질였고,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은 두 사람의 머리칼을 흔들었다.
“발목까지만 담가 볼까.”
놀랍게도 발레리아가 신발을 벗으며 한 말이었다. 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잘게 부서지는 파도를 맨발로 밟았다.
이렇게 함께 걷고 있으니 꼭, 전생의 좋았던 시절들이 떠올랐다.
때로는 스승과 제자로서, 때로는 친구로서, 때로는 그보다 더 가까운 느낌으로 세계를 유랑하던 시절이.
그러나 돌아보면, 그때도 각자의 가슴 속엔 서로에게 내보이지 않은 고독이 있었다.
진은 가문에 대한 복수심과 그로부터 비롯된 성공의 열망이 가득했고, 발레리아는 히스터의 사명 때문에 때때로 언제든 떠날 사람처럼 굴었었다.
둘 다 상처받고 싶지 않기 때문이었다.
진은 추방당하며 길리를 잃었고, 발레리아는 어릴 적 회색 부엉이를 잃었다. 두 사람은 가족을 잃은 기억에 더는 누군가에게 너무 깊이 마음을 주지 않으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완전히 마음을 열고 함께 걷고 있었다.
“기분이 좋다, 라는 걸 요즘 들어 자주 느끼는 것 같아. 너와 다른 동료들을 만나기 전까지는 오랫동안 잊고 있었지.”
“네게는 지플에 대한 복수와 히스터로서의 사명이 전부였을 테니까.”
“물론 지금도 그것들은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야. 다만 세상은 혼자 사는 게 아니라는 걸 느끼고 있어. 이런 아름다운 풍경을 홀로 보면서 걸었다면, 지금만큼 기분이 좋지는 않았겠지. 오히려 쓸쓸했을 것 같아.”
발레리아에겐 그런 순간이 많았다. 어린 나이부터 도망자로서 세상을 떠도는 동안, 그녀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온갖 신비로운 공간을 혼자 탐험하는 일이 잦았다.
그러나 어떤 장관을 마주하고도 지금만큼 감동을 받은 적은 없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장소라도 무채색의 풍경과 별반 다를 게 없던 것이다.
전생에서도 발레리아의 이런 솔직한 모습은 본 적이 없다. 진은 왠지 속이 간지러워서 잠시 시선을 먼 곳에 두었다.
“많이 컸네. 마미트에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티칸에 자리를 잡기 전까지의 시기를 생각하면.”
“사춘기였다고 해두자. 나도 그랬던 나를 생각하면 좀 민망하다.”
“이제 다른 동료들한테도 전보다 더 곁을 내어줄 건가?”
“노력할 생각이야. 동료들은 내가 처음 와서 매번 비협조적으로 굴 때도 이미 나를 아껴주었으니.”
“그래? 어떻게 노력할 건데? 정말 할 수 있겠어?”
“그만 놀려.”
“알았다.”
발밑에서 작은 게들이 흩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은 잠시 앉아서 그 모습을 지켜보기도 하고, 조금씩 바다로 가라앉는 태양을 멍하게 쳐다보기도 했다.
“진.”
“응.”
“너를 만난 게 운명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생각지 못한 이야기에 진은 하마터면 헛기침을 할 뻔했다.
“……운명?”
“마미트에서, 내가 널 보자마자 이름을 말했던 거. 기억나?”
“기억나.”
“그때는 이미 네가 성국 사건으로 유명 인사가 된 시점이니, 내가 대뜸 아는 사람인 것처럼 이름을 불렀어도 넌 당황하지 않는 눈치였지. 그런데, 난 사실 네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부터 널 봤었어.”
“……날 보고 있었다고?”
“꿈을 꿨거든. 언젠가부터, 거의 매일 네가 나오는 꿈을 꿨었지.”
계속 그렇게 쓰러져 있을 건가?
꺼져.
한심하긴. 진, 당신 잘난 형제들이 좋아하겠어.
뭐야,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궁금한 게 남은 걸 보니 아직 세상에 미련이 있군. 따라와, 기껏 손을 내밀어준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눴던 건 용서해줄게.
발레리아가 꿈의 내용을 설명해주자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런 꿈을…… 계속 꿨었다고?”
꿈은 전생에 진이 발레리아를 처음 만난 순간과 완전히 똑같았다.
“게다가 내가 과거 전승지들에서 찾은 기록들 중엔, 1795년과 1799년에 나를 찾는 사람이 마미트를 찾아오리라는, 당시로써는 미래를 알리는 기록도 포함되어 있었지. 그 역시 너였고.”
“미래를 알리는 기록? 그게 가능한 일인가?”
“완전한 수준의 기록 마법이라면, 한정적이긴 하나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아즈 밀의 예지와는 다르게 미리 훗날의 기록을 엿본다고 해서 미래가 확정되지는 않아. 내가 기록을 알고도 마미트에서 널 기다리지 않았다면, 우린 만날 수 없었을 거야.”
진은 점점 더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발레리아의 말대로라면, 자신의 회귀를 뛰어넘는 기록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발레리아가 꿈을 꾼 건 전생의 기록이고, 진이 마미트를 찾아온다는 건 현재의 기록이니 말이다.
“많이 놀란 것 같네.”
“그럴 수밖에.”
“나는 그 꿈과 미래의 기록들이 모두, 내 선조들이 남긴 안배이자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마 선조들이 본 미래의 기록엔, 내가 사명의 끝으로 향하려면 네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었겠지.”
히스터가의 뿌리, 요정족에 대한 단서를 찾고 르엣을 만난 일도 진이 없었다면 모두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너를 만난 이후, 가끔은. 네가 나를 잘 아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어.”
-고추랑 양파를 잔뜩 넣은 양고기 찜이랑, 소 내장 스튜. 이건 후추 좀 넉넉히. 그리고…….
함께 완타라모 숲으로 가기 전, 진이 식당에서 주문했던 음식은 회색 부엉이들이 가장 좋아하던 음식이었다. 자연스레 전생에서 진과 발레리아가 함께 자주 먹은 음식이기도 했다.
흔한 조합이기는 하나, 진이 세부적인 요소까지 전부 똑같은 음식을 주문한 건 분명 묘한 일이었다.
발레리아가 걸음을 멈추며 진을 돌아보았다.
“진. 네게도, 뭔가 비밀이 있지?”
진은 어떻게 대답할까 고민하며 그녀와 눈을 맞췄다.
하지만 발레리아는, 대답을 듣기 위해 물은 게 아니었다. 그녀는 진이 ‘한 번 죽은 적이 있다’는 기록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 비밀이 무엇이든, 내게, 혹은 세상에 해가 되는 내용은 아닐 거라는 확신이 들어.”
“발레리아.”
“그리고 난 언젠가 너에 대한 모든 기록을 살펴보게 될 것 같아. 그때, 좀 민망하더라도 내 마법을 거부하지 않으면 좋겠어.”
노을이 끝나가고 있었다.
발레리아는 태양이 마지막으로 쏟아내는 붉은 빛에 흠뻑 젖은 채 활짝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진은 방금 들은 모든 이야기를 잠시 잊고 말았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채, 그저 발레리아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할 뿐이었다. 그녀의 머리칼에 밴 바다 내음이 선명해지며 머릿속을 어지럽게 만들었고, 눈앞은 발레리아의 모습을 제외한 윤곽이 모두 흐려지고 있었다.
한 걸음, 발레리아에게 다가갔다. 저도 모르게 두 걸음, 세 걸음, 코가 닿을 듯 가까워지도록.
발레리아는 두 팔을 펼치며, 진을 안아주었다. 맞닿은 뺨이 녹을 듯이 뜨거웠다. 태양이 막 가라앉으며 섬에는 잔잔한 어둠이 드리우고 있었다.
“……너를 만나 다행이야, 진.”
“나도.”
어째서인지 목이 멘 채, 진은 그렇게 대답했다.
* * *
두 사람이 다시 전승지로 돌아온 건 새벽이 다 지나갈 때쯤이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통신 장치를 손보는 테벤과 젠의 작업이 끝났고, 혼카와 슈리가 그 소식을 전해준 것이다.
[오래, 기다리셨, 습니다. 전승자들. 즐거운, 시간, 보내셨습니까?]진과 발레리아는 왠지 민망해서 골렘에게 얼버무리는 모습을 보였다.
[산책, 즐겁게, 하신, 모양. 주인님이, 우리 혼카 섬에는, 아름다운 곳, 많다고, 했습니다.] [흥, 누가 산책을 열 시간 가깝게 하냐? 이런 건 데이트라고 하는 거다, 골렘. 선조들은 일이나 시키고…… 뭐, 우린 패배자니까 불만은 없다.] [그래, 정말로 불만은 없어. 영 숙맥처럼 보이는 네놈들이 대체 어떻게 시간을 보냈는지만 자세히 알려준다면.] [그런 걸, 묻는 건, 예의가, 아닙니다.] [뭐? 예의? 우리처럼 삼백오십 년 동안 전승지에만 있어 봐! 이런 게 얼마나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는지!] [저도, 전승지에만, 있었습니다만. 그것도, 더 오래. 그리고, 타인의, 연애사. 원래. 재밌는, 이야기.] [테벤, 나 저 골렘 싫어!] [나도 싫어!] [싫으면, 덤비십시오, 얼마든지, 상대해드립니다.]젠과 테벤은 씩씩대다 살살 골렘의 눈을 피하며 통신 장치를 꺼내 보였다.
통신 장치는 네모난 판처럼 생긴 물건으로, 총 세 개였다.
[초장거리 통신 장치다. 세상의 끝과 끝에 있어도 연인끼리 대화를 가능하게 해주는 물건이지…….] [큭…… 이걸로 너희가 맨날 깨나 볶을 걸 생각하니 오장육부가 뒤틀리는구나. 하지만 행복해라! 후손, 그간 외로운 길을 걸었을 테니.]“그런 용도로 사용할 생각은 없지만, 감사합니다. 선조님.”
[뭣!? 그런 용도로는 안 쓴다고? 그럼 못 줘. 연인이라면 대화를 자주 해야지!] [못 준다고? 또 추한 모습을 보이는구나, 테벤. 아직도 승부에 승복할 줄을 모르는 거냐? 대체 너란 놈이란.]진과 발레리아는 무해한 바보 같은 그들의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사용법과 제작법은 이 설명서에 모두 자세히 적혀 있다. 지금은 세 개가 전부지만, 재료와 수준 높은 공학자가 있다면 더 만들 수 있지. 그럼 이제 어서 가! 우린 다시 가위바위보 수련에 매진하겠다.] [오랜 짐을 넘겼으니 더 편안해질 수 있겠군, 큭큭.]진은 설명서를 살펴보다가, 통신 장치 중 하나를 다시 젠과 테벤에게 내밀었다.
“두 분께선 종종 우리와 통신을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골렘과 함께.”
“심심하실 때마다 바깥세상 이야기를 전해드릴게요. 선조님들께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그것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 말에 젠과 테벤은 왈칵 눈물을 쏟을 듯 찡한 표정이 되었다.
[그게 정말이냐?] [우린 하찮은 패배자들인데…… 그런 인정을 베풀겠다고?]“전혀 하찮지 않습니다, 선조님. 이 전승지에서 선조님들 덕분에 얻어가는 게 너무 많습니다. 두 분께서 견디신 지난 삼백오십 년간의 노고에 비하면…… 저는 아무것도 한 게 없어요.”
[우리 후손, 최고다!] [둘 다 내 후손은 아니지만 최고다!]테벤과 젠이 두 사람을 끌어안으며 덩실덩실 춤을 췄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골렘과 눈을 맞췄다.
“너에게 이름을 지어줄게.”
[오…… 드디어, 제게, 이름이. 어서, 어서, 정해, 주십시오.]“이엘로 히스터.”
골렘은 한동안 움직임을 멈춘 채 말이 없었다.
혹 말리엣을 기리고자 이엘로의 이름을 물려준 게 싫은 걸까, 잠시 발레리아는 걱정이 되었으나 그럴 필요가 없었다.
골렘의 두 눈에서 마력이 눈물처럼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
[주인님께 은혜를, 입은, 아이의 이름. 그리고, 가문의, 성. 감동, 입니다. 저는 이제, 이엘로, 히스터. 히스터가의, 일원.]“마음에 든다니 다행이야. 앞으로 잘 부탁해, 이엘로.”
골렘, 아니. 이엘로는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이며 발레리아와 악수를 했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밀었다.
[이건, 제, 설계도. 형제를, 만들어주십시오. 또 하나는…… 주인님의, 비전, 마법서입니다.]통신 장치와 더불어 이엘로의 설계도와 비전 마법서까지.
말리엣이 남긴 전승지에서의 여행은 이토록 풍족하게 끝이 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