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17)
제 999화
229화. 켈리악의 안전장치(1)
1804년 2월 25일, 독마성.
“그로쉬에 성이 무너졌군.”
조르륵…….
켈리악이 찻잔을 채우며 말했다. 그는 창문을 관통해 들어오는 인공태양의 창백한 빛을 손으로 가리며 앞에 앉은 마왕들을 둘러보았다.
라갈 펀, 레일라 벨가시움, 렐드로 트리낙, 셉 모겔레스.
인세가 그로쉬에 성을 치는 동안 켈리악은 지옥에 남은 마왕들을 포섭해 왔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빠르게 끝장이 날 줄이야…… 정말 켈리악 친구 말대로군. 사키엘, 그 머저리는 상실의 장까지 사용하고도 이게 무슨 망신이야?”
“사키엘은 최선을 다했고, 자신이 가진 모든 수단을 동원해 상황에 가장 알맞은 판단을 내렸다. 그럼에도 적이 더 강했을 뿐. 그녀를 모욕할 이유가 있나?”
“아이고, 예. 죄송합니다, 레일라 님. 제가 실언을 하였네요, 하여간 나는 얘랑 정말 안 맞아. 내가 뭐 사키엘을 대단하게 모욕했냐? 그냥 상실의 장까지 펼쳤는데 놈들에게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 게 아쉬우니 한 말이지. 안 그런가, 켈리악 친구?”
레일라는 아직 사키엘과 자신의 관계에 대한 기억을 다 되찾지 못했다.
다만 어쩐지 그녀를 모욕하는 게 불쾌하게 느껴졌다. 레일라의 입장에선 굳이 잊힌 기억이 아니더라도, 총서기관으로서의 사키엘은 분명 라갈과는 비교할 수 없이 우수한 인재였다.
“자네 말도 옳고 레일라의 말도 옳은 것 같군. 사키엘이 연합에 조금이라도 타격을 줬다면 좋기는 했을 것이네. 그러나 상실의 장과 역천 때문에 피해를 받은 건 킨젤로와 내가 되찾아야 할 가문뿐이로군.”
“빌어먹을! 지토 이 개자식! 내가 지금껏 놈에게 세뇌되어 그 긴 세월 충성을 바쳤다는 사실을 견딜 수가 없을 지경이다. 그토록 많은 마족들이 인세의 공격에 죽어가는데, 지토는 아무런 지원도 해 주지 않았다. 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나!”
렐드로가 주먹을 그러쥐며 소리쳤다. 옆에 앉은 셉 또한 지토에 대한 분노로 얼굴이 일그러져 있었다.
“……켈리악 경의 말대로, 그리고 우리가 떠올린 기억대로. 지토가 원하는 건 진마계의 승리나 번영이 아니기 때문이겠지. 그 괴물은 오로지 더 많은 고통을 원한다. 진마계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내던지는 부하들? 지토가 그들을 조금이라도 생각할 것 같나. 당장 우리조차 켈리악 경의 도움으로 진실을 깨닫기 전엔 지토와 다를 게 없었는데.”
“아이, 다를 게 없었다니. 뭘 또 그렇게까지 말을 하나, 셉. 우린 세뇌 때문에 맛탱이가 가 있었으니 피해자라고. 아, 거참! 눈가는 또 왜 촉촉해졌어. 울지 마라, 모양 빠지게. 복수하면 된다, 복수하면.”
라갈의 충심은 이제 지토보다 켈리악에게 훨씬 더 깊이 향하고 있었다. 내면의 저울질을 끝낸 것이다. 한 꺼풀 세뇌가 더 벗겨졌고, 그간 켈리악이 보여 준 능력에 감복한 까닭이었다.
“켈리악 경. 그로쉬에 성이 함락됐으니, 이제 곧 인세의 병력이 지옥으로 들어설 것이오. 상실의 장이 깨지며 전장에 남은 마력과 마기의 잔재 때문에 며칠은 시간이 필요할 테지만, 그리 오래 걸리지는 않을 터. 지금 인세엔 그들을 막을 만한 병력이 남아 있지 않소.”
레일라의 말에 켈리악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 역시 처음 만난 날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켈리악을 존중하고 있었다.
“진 룬칸델은 신중한 인물이지. 그러니 상실의 장이 남긴 잔재가 사라지더라도 바로 지옥으로 들어서진 않을 것이네. 우선 잔재가 사라지면, 진은 발레리아 히스터를 이용해서 전장에 남은 모든 기록을 살필 것이야. 내부 정보를 확인할 만한 기록이 있는지 살피고 싶을 테니.”
켈리악이 라갈에게 시선을 옮겼다.
“어쩌면 지금쯤 자네와 내가 손을 잡은 것도 파악했을지도 모른다.”
“흠, 내가 대충 싸운 걸 알아봤을 수는 있지만, 설마 그 어지럽던 방어선의 기록을 다 뒤져봤으려고?”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우리 가문이 예부터 기록 마법사를 어떻게든 말살하려 한 것이지. 내가 지플의 가주였던 시절 가장 큰 불찰은 아들에게 예상치 못한 배신을 당한 게 아니야. 기록 마법사를 진 룬칸델에게 넘긴 것이지.”
“그 정도란 말인가? 기록 마법사라는 게.”
“그래…… 아마 상실의 장이라는 마법도, 발레리아 히스터가 기록 마법을 대성한 상태였다면 온전히 펼쳐졌다 할지라도 진을 크게 위협할 수 없었을 것이다.”
켈리악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쩌면 상실의 장뿐만이 아니라, ‘마신석’이 완전해져도 극의에 다다른 기록 마법을 훼손할 수는 없을지도 모른다고.
“진 룬칸델이 지옥으로 곧장 들어서지 않을 이유는 세 가지가 더 있다. 지플과 킨젤로가 재정비를 할 시간도 필요하지. 공공의 적을 꺾자고 모였는데, 바멀 연합만 아직 별다른 피해를 받지 않았다고 혼자 지옥으로 들어설 필요는 없지 않겠나.”
“듣고 보니 켈리악 친구 말이 맞군! 그렇다면 나머지 하나는 무엇인가? 앗, 아니지. 나는 생각이라는 것을 하는 마족…… 내가 한번 맞춰 보고 싶군. 음, 으음. 그건…… 그건 바로! 성국, 지토의 눈이다!”
켈리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레일라는 흠칫하며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라갈에게 이 정도 지능이 있다는 걸 직접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지토는 인세가 진마계로 들어서기 전에 반드시 자신의 눈을 되찾으려 할 거야. 물론 지토는 지금도 미친 괴물처럼 강하지만, 눈까지 되찾으면 정말 변수라는 게 없어지겠지. 아마 그때부터는 헬루람도 신경 쓰지 않을걸? 그렇게 되면 지토가 켈리악 친구에게 허락한 자유도 끝이 나겠지…….”
켈리악의 자유가 끝난다, 라갈은 그렇게 되면 여기 모인 이들이 모두 죽게 되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지토가 마녀 때문에 켈리악을 일부러 살펴보지 않는 것 같지만…… 눈을 찾으면 우린 아마도 다 죽게 되겠지. 하지만 이제 예전만큼 죽음이 두렵진 않군. 지토의 귀염둥이 라갈은 이제 없다!’
켈리악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토의 눈을 찾으러 인세로 나갈 인물은 뻔하군. 제일검 파엘리토. 혹은 그 뒤를 잇는 리돌로스와 비델루체. 어쩌면 지토가 그들 셋을 한 번에 보낼 수도 있고.”
셉이 말했다.
그 셋은 명실공히 진마계 최강의 마족들이었다. 그중 파엘리토만이 극마의 경지에 올랐다고 알려졌지만, 나머지 둘도 그에 거의 근접했다는 게 중론이었다.
“지토, 그 개자식이 정말 진마계를 위했다면 애초에 그 셋을 전장에 앞세웠겠지. 그들이 있었다면 그 수많은 마족들이 그렇게 먼지처럼 죽어갈 일은 없었을 텐데.”
“한데 세 명이 동시에 출전하면, 인세가 눈을 지킬 수는 있는 것인가? 셋이 아니라 둘만 나서도 어려울 것 같군.”
“아냐, 아냐. 내가 싸워보니 인세 놈들도 보통이 아니더라고. 인세 각 세력의 대장급 초인들이 모이면 그 셋이라 할지라도 답이 없을걸? 그로쉬에 성을 친 놈들뿐만이 아니라, 엘로나 지플도 있다고. 이 몸이 한 번 병상으로 보낸 인물이긴 한데, 켈리악 친구는 그자가 파엘리토보다 강할 거라고 예상할 정도라고.”
“신뢰가 가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이야기로군. 켈리악 경의 평가는 정확할 테지만, 그런 자가 아무리 방심했어도 네게 당하다니.”
“아, 못 믿겠으면 나중에 엘로나 지플하고 만나게 될 때 물어보든가. 레일라 넌 무슨 짓을 해도 나처럼 엘로나 지플을 그만큼 다치게 할 수 없을 거다. 쳇.”
“물론 라갈의 말대로 인세는 강하지. 하지만 3대 마왕을 성국으로 보낼 때, 지토는 분명 인세 전역에 균열을 형성할 것이다. 주요 마왕과 대장군 다수가 사망했으나 아직 진마계엔 수십억의 병력이 있으니, 인세 전 병력이 그 셋에게 절대 집중하지 못하도록 만들겠지.”
“내가 보기에도 그렇다. 지토는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균열을 인세에 풀 것이다. 그리고 인세가 지토의 눈을 지켜내는가에 따라서 진마대전의 판도가 완전히 바뀔 터.”
“켈리악 친구, 그럼 우리는 그 결과에 따라 유동적으로 움직이는 거지?”
“그렇다.”
“지토가 눈을 되찾는 것, 되찾지 못하는 것. 어떻게 되는 게 우리에게 더 나은 그림인가?”
켈리악은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그는 어느 쪽이든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지, 회의할 시간은 많다. 렐드로와 셉은 이만 돌아가게.”
“알겠소.”
“우린 다음 부름이 있을 때까지 다른 마왕들과 계속 접선을 시도하면 되는 것이오?”
“그렇게 하게. 마왕들이 세뇌에서 더 많이 깨어날수록 도움이 될 테니.”
각성의 불.
마왕들은 지토의 세뇌를 일부 해제할 수 있는 켈리악의 권능을 맹신하고 있었다. 불의 인장처럼 절대적인 신뢰를 주는 권능이니 말이다.
하지만 켈리악은 렐드로와 셉이 앞으로 데려올 마왕 전부에게 각성의 불을 제대로 사용해줄 생각이 없었다.
켈리악이 마왕들을 찾는 이유는 오로지, 그들이 보유한 영혼을 살펴보는 것일 뿐. 그 영혼들 중 옛 지플이나 키다드 홀처럼 쓸 만한 존재를 찾아내려는 것이다.
두 마왕이 물러갔다.
“켈리악 경.”
“말해 보게, 레일라 벨가시움.”
“오라버니. 아니, 파엘리토 님이 걱정이오.”
“그가 성국을 침공했다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까 봐?”
“……그렇소.”
“자네는 아직 창성. 자네들의 언어로는 극마겠군. 어쨌거나 그 영역에 닿은 존재를 잘 모르는 모양이군.”
“극마에 도달한 마족이 신과 다름없는, 혹은 신을 뛰어넘는 힘을 가졌다는 건 잘 알고 있소. 하지만 파엘리토 님은, 얼마 전의 나처럼 세뇌된 상태잖소. 힘과 정신, 모든 면에서 온전할 때보다 능력이 떨어진 상태요.”
“하여, 내가 그를 도울 방법이 없는 것인지가 궁금한 것이군.”
“그렇소.”
“안 그래도 지금부터 그를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레일라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파엘리토 님에게도 각성의 불을 사용할 수 있겠소?”
“직접 마주하기 전에는 확신할 수 없다. 그는 애초에 극마였던 만큼, 지토가 특별히 공을 들여 세뇌했을 테니 내 권능도 당장은 통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아.”
“아…… 그럴 수 있겠군.”
“대신, 그가 세뇌를 깨닫지 못하더라도. 내가 그에게 한 가지 안전장치를 제공할 수는 있지.”
“안전장치?”
이내 켈리악은 자리에서 일어서서 레일라를 내려다보았다.
“지금 바로 함께 파엘리토에게 가지, 레일라. 지금 그는 자네 정도의 보증인이 없으면 나를 만나 주지 않을 걸세. 과격한 수를 쓰면 만나 줄 테지만, 그건 옳은 방법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