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a Munchkin RAW novel - Chapter (55)
먼치킨 길들이기 55화
원래 숨기는 게 많은 녀석이었지만 잘 지낸다는 편지 한 통도 보내지 못할 만큼 열악한 오지로 떠난 것도 아닌데.
키네미아는 느닷없이 찾아온 침울한 기분에 검지 손톱으로 책상 위를 부드럽게 긁었다.
문득 그 축제의 마지막 날 터지던 불꽃 소리가 귓전에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잊지 말라고 하더니.’
정작 자기는 까맣게 잊어버렸나 보지?!
‘하! 그래도 나는 전-혀 상관없지만!’
‘티끌만큼도 신경 쓰이지 않지만!’
머릿속을 침범한 에이얀을 밀어내면서 미간을 찌푸린 키네미아가 문득 툭 내뱉었다.
“……내가 아무와도 안 추면?”
“네?”
“내가 누구와도 춤추지 않으면 나한테 실망할 거야?”
눈을 휘둥그레 떴던 로메오 남작이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그럴 리가요. 우리 아가씨가 뭘 선택하시든 저희는 실망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내가 후사를 만드는 건 중요한 일이잖아. 우리 가문은 손도 귀하니까.”
“가문을 잇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죠. 입양을 해도 되고, 숙부님이신 백작님도 계시잖습니까.”
그렇긴 하지. 키네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누구와도 춤을 추지 않아도 괜찮아?”
로메오 남작이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모두가 키네미아의 데뷔탕트에 들떠 있는 동안 정작 아가씨 본인의 기분을 헤아리지 못했던 모양이다.
그가 허리를 숙여 키네미아와 눈을 맞추고는 자상하게 말했다.
“그럼 더 좋죠. 우리 아가씨가 어떤 남자를 데려와도 저희 마음에는 차지 않을 테니까요. 좀 더 많이, 오래 고민해 보셔도 됩니다.”
“……응.”
한결 마음이 편해진 키네미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그녀가 오늘의 속성 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려던 차였다. 로메오 남작이 키네미아를 막았다.
“아가씨, 그래도 혹시 모르니 춤은 연습해 보셔야죠.”
“으응…….”
“지금껏 잘 배우셨을 테지만요.”
“응. 나 춤 잘 춰.”
키네미아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우리 아가씨께서 못하는 게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키네미아는 데뷔탕트가 열리기 전까지 일주일 내내 로메오 남작의 발을 밟아 댔다.
로메오 남작은 내심 키네미아가 아무와도 춤을 추지 않는다고 해서 다행이라는 불경한 생각을 하고 말았다.
* * *
이번 해, 데뷔탕트가 열리는 장소는 로슬린 공작이 아끼는 별장인 브리즈 저택 안 중앙 홀이었다.
벽의 문양부터 테이블에 놓인 냅킨 하나까지. 신경 쓰지 않은 곳이 없는 듯한 홀 안에서 아직 앳된 얼굴의 남녀가 웃음꽃을 피웠다.
데뷔탕트에서는 파트너를 홀에서 신청하는 것이 관례였기에 서로 맞는 상대를 찾아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첫 파트너는 대부분 이후에도 좋은 관계로 이어지기에 데뷔탕트는 장성한 후계들이 짝을 맺기 가장 좋은 때이기도 했다.
멀찍이 선 샤프롱들은 이를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부채를 흔들었다.
“그나저나 오늘 그 리온의 대공녀께서 참석하신다더군요.”
먼저 운을 띄운 것은 레슬리 백작 부인이었다.
“정말요?”
“어머나.”
그러자 댐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한곳에 모여 있던 샤프롱들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데뷔탕트에는 오시는군요. 지금껏 한 번도 모습을 드러낸 적이 없었잖아요.”
“아무리 리온이라도 데뷔탕트를 거절할 수는 없었겠죠.”
“역시 레슬리 부인께서도 대공녀가 궁금하셨군요?”
“순식간에 유명인이 됐잖아요. 이거니 저거니 하면서-”
“맞아요. 그 슬라임인지 뭔지 하는 장난감 때문에 저희 딸아이가 얼마나 보고 싶어 하던지…….”
“아, 그 물컹물컹한 장난감이요? 그게 뭐가 그리 특별하다고 좋아하는지…….”
“저희 애는 17살인데 아직도 주물러요. 마음이 편해진다나.”
몇몇이 ‘저희 애도…….’라면서 동의를 표했다. 그 사이에서 조그맣게 ‘저도…….’라고 말하는 부인이 하나 있었다.
‘저도?’
레슬리 백작 부인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돌아보았지만 다들 부채로 입을 가린 채 호호 웃기만 하는 중이었다.
“저희 부군은 꼭 사업 얘기를 하더라고요. 사업을 연달아 성공시키셨잖아요. 그런데 대공녀께서 좀처럼 얼굴 내미시는 곳이 없으니 아주 안달이 났어요. 오늘도 할 일이 많은데 굳이 따라나서겠다는 걸 겨우 말렸지 뭐예요.”
“어머, 우습지만 저희 부군도 같은 처지랍니다.”
“부인의 부군께서는 오늘 참석하셨잖아요.”
“왜 그랬겠어요. 다 그런 이유가 있었던 거죠.”
곳곳에서 호호호, 웃음이 터져 나왔다.
“좀 늦으시네요. 아, 대공녀께서는 수도에서 지내지 않으시죠?”
대부분의 귀족들은 사교 시즌 내내 수도의 타운 하우스에서 지냈다. 키네미아처럼 대공녀쯤 되는 귀족이 영지에 틀어박혀 있는 건, 요양 같은 이유가 아닌 이상에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뭐, 알 만하죠. 소문이 좀 안 좋았어요? 아기들 피를 모아 목욕을 하고 있다느니…….”
“정말일까요? 그렇게 포악하고 악독한 소문이라니…….”
“이제 알게 되겠죠. 사실인지, 아닌지.”
그때였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인들이 양쪽 문을 열었다.
“키네미아 리온 대공녀십니다!”
좌중의 시선이 모두 2층의 문으로 향했다.
문이 열리자 제일 먼저 시선이 간 곳은 바다처럼 새파란 눈동자였다. 깊은 눈은 정면을 향해 있었다.
레슬리 백작 부인은 부채를 펼쳐 제 벌어진 입을 가렸다.
‘선대 대공과 닮았다는 말은 진짜였나 보네…….’
미모로는 아무도 따라가지 못했다던 트로이 리온 선대 대공을 여성형으로 만든다면 딱 저랬을 성싶은 외모였다.
그야말로 벽화에나 그려질 법한 아름다운 미모에 다들 눈을 떼지 못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레슬리 백작 부인이 다시 흥미를 가진 것은 대공녀의 차림새였다.
‘수도의 유행을 따른 건 아니지만…….’
무릎 위로 오는 하얀색 드레스에 얇은 허리 옆에는 코발트블루의 리본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수도의 유행은 아니지만, 아담한 체구와 앳돼 보이는 얼굴이 어우러져 청량함이 느껴졌다. 그저 유행을 따른 것보다 훨씬 생기가 넘쳐 보였다.
게다가 치맛단을 풍성하게 감싼 레이스는 이국적인 느낌이 물씬 느껴지는 매력이 있었다. 무심코 달려가 어느 디자이너의 제품인지 당장 묻고 싶을 정도로.
처음 얼굴을 내비친 대공녀에게서는 어느 하나 평이한 부분이 없었다. 생김새부터 차림새까지 전부 독보적이었다.
얼마나 귀한 얼굴이기에 그렇게 꽁꽁 숨어 있나, 리온에 잔뜩 벼르고 있던 이들조차 어안이 벙벙해졌으리라.
이를 방증하듯 리온에 이를 가는 몇몇 이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돌린 채였다. 트집 잡을 곳이 없으니 아예 못 본 척을 하려는 셈인 듯했다.
인간관계가 중심이 되는 사교계였다. 무시도 사교계에서는 큰 배척의 수단이 되니까.
그러나 레슬리 백작 부인은 그들의 얕은 수에 낮게 코웃음을 쳤다.
이미 등장만으로 제 특별한 존재감을 드러냈는데, 고작 무시라고? 저 대공녀는 코웃음도 치지 않으리라.
역시나 대공녀는 전혀 주눅 든 얼굴이 아니었다.
온갖 모임을 찾아다녔던 레슬리 백작 부인도 17살 때는 저렇게 시선을 자연스레 받아 낼 수 없었다.
‘벌써 대범함까지 갖췄어.’
온실의 꽃처럼 귀하게만 자랐을 용모이건만, 태도는 생소한 신기술들을 거리낌 없이 차용해 영지를 발전시킨 담대한 영주다웠다.
사람들의 눈을 당당히 마주하는 모습에서는 대귀족의 기품이 엿보였다.
레슬리 백작 부인은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무너졌다고는 해도 건국부터 함께해 온 귀족이라는 건가.’
첫인상부터 태도, 분위기까지 대공녀는 등장만으로 좌중을 완벽히 사로잡은 것이다.
반면 기품 있게 사람들을 둘러보는 것처럼 보이는 키네미아는, 사실 귀족들을 살피면서 마음속으로 별을 그리는 중이었다.
‘저 푸른 머리는 허진스 남작 부인인가? 원한도 4/10개. 위험도 1/10개. 무난.’
‘패틴슨 남작. 원한도 6/10개. 위험도 6/10개. 주의.’
‘핫! 저건 허링 후작이잖아. 원한도 9/10개. 위험도 7/10개. 요주의! 저긴 죽어도 피하자.’
‘저 사람들은 왜 날 보고 수군거리지? 내가 모르는 원한인가?!’
나름 생존을 위한 필수적인 절차였다.
원한 속성의 대공녀였으니 어떤 장애물을 피해 어떤 루트로 돌아다녀야 하는지 미리 알아 두는 것이 관건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