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38)
EP.139)교수 # 2
139 – 요정 교수 # 2
나는 ‘엘프’하면 보통 숲을 노니는 길고 늘씬한 요정들을 떠올렸다.
내가 접해왔던 매체들에서의 엘프는 자연을 사랑하고 보호하고-뭐 그런 스테레오 타입으로 굳어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이 세상의 엘프는 넓은 초원에서 가축을 방목하며 살아가는 유목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지닌 양털과 치즈 같은 것을 팔기 위해 마차를 끌고 상단을 운행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드넓은 남쪽의 초원에는 요정의 상단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나.
그리고 그런 상단들을 전부 규합해 하나의 거대한 조직으로 만든 것이 벨호크 가문이었다. 또 그 중에서도 벨호크의 피를 가장 짙게 이은 것이 스텔라 벨호크고.
스텔라 폰 벨호크.
스텔라는 천성적으로 게으름이 많고 요령부리기를 좋아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문 내에서의 입지가 바람 앞의 등불 같았다.
그런 주제에 사치를 부리는 씀씀이는 매우 커서 자신만의 화려한 사냥터를 만들고 그곳에서 매번 사냥을 즐겨 재산을 탕진했다고.
말하자면 탕아(蕩兒)다.
망나니 같은 것.
결국 벨호크는 가문에서 내쫓겼다-라는 것이 내가 독립적으로 조사한 스텔라 벨호크의 행적이었다.
정말 이게 끝이다. 워낙 게으르고 방탕해서 그 이상의 유의미한 기록도 없다.
벨호크 가문 자체에서 스텔라에 대한 것을 의도적으로 숨기고 기록을 파쇄 했기 때문이겠지. 부끄러운 존재니까.
그러다가 스텔라는 갑자기 2막으로 넘어가는 부근에서 헤드 헌터로 등장해 사람들을 죽여대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원작의 소설 내에서도 그리 밝혀진 게 없었다.
여왕이 처형당하고 많은 것이 붕괴했던 앙그마르 왕국에서는 누구나 쉽게 타락하고 망가졌으니까. 아마 스텔라 벨호크도 처형 이후 그런 수순을 밟았겠지-라는 추측 뿐.
그런 스텔라 벨호크가 내게 소리치는 것이다.
“주주총회가 얼마 안 남았어…! 이대로 성과도 없이 계속 있다간 나 진짜 쫓겨날지도 몰라…! 가문에서 주는 지원도 끊기고…!”
스텔라는 거의 미쳐있었다.
꽈아아악.
내 팔을 붙잡고 이리저리 흔들기 시작하는데 그 악력이 강해서 찔끔 눈물이 나올 것만 같았다.
“이거 놓고 진정해주세요!”
“진정하게 생겼냐고! 가문의 지원이 끊기면, 이 아크에서도 쫓겨날 텐데! 그럼 난 굶어 죽을 거야! 굶어 죽을 거라니까!”
너무 흥분 했구만.
이렇게 된 이상 다시금 마법을 갈겨서 제압하는 수밖에 없다.
그렇게 생각해서 완드로 손을 뻗는데 다행히도 스텔라가 내 어깨를 사르륵 놓아주었다. 그녀는 곧 바닥에 쭈그려 앉아 눈물을 보였다.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부자로 태어났으니까. 그냥 돈 좀 쓴 거뿐이잖아. 우리 가문의 돈이잖아.”
나랑은 사고방식이 다르고 살아온 환경이 아예 다르니까 내가 뭐 할 말이 없구만.
“지원금을 끊으면. 나보고 일을 하라는 소리잖아. 나더러 평민들처럼, 단명종들처럼 일을 하라니. 분명 굶어 죽을 거야…!”
방금 전까지 가난하고 굶주려서 쓰레기통을 뒤졌다는 임프들을 보다가, 평생 부자로 살았던 엘프가 쫓겨나기 전에 하소연하는 걸 보고 있으니까 조금 화가 나는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면 스텔라 벨호크가 이렇게 패닉에 빠져 있는 것은 내게 있어서는 호재이고 기회였다.
한 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아서 접근할 방법조차 없었던 사람이었는데. 이렇게 스스로 내 앞에 나타나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말이다.
내 안에 흐르는 앙그마르의 피가 눈앞의 여자를 더욱 몰아붙이고 괴롭히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얄미운 부르주아 녀석. 일을 하는 게 뭐 그리 대수라는 거냐. 일하기 싫으면 굶는 게 당연한 거지-!
그러나 그런 내색은 전혀 부리지 않은 채 나는 스텔라 벨호크를 위로 할 겸 그녀의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슥. 가까이 다가서자 지독한 술냄새가 화악-풍겨서 나도 취할 뻔했지만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말했다.
“가문에서 쫓겨날 위기라니. 그거 참 안타까운 일입니다. 교수로 이름을 올려놓고 계시는 것도 벨호크 가문의 비호가 있기 때문일 텐데. 가문에서 쫓겨나게 된다면-.”
분명 아크에서도 스텔라를 쓸모없는 부품이라고 취급하여 내쫓을 게 분명하다. 그럼 우아하고 고상한 상류문화를 즐겨왔던 스텔라 벨호크는 정말 미쳐버릴 수 있는 것이다.
혹시 그래서 헤드 헌터가 됐나?
아주 가능성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지금도 논문인지 뭔지를 작성하기 위해 님프와 임프들을 납치하고 있다는데….
혹시 이대로 가문에서 추방되게 내버려두면 악역으로 급발진하는 거 아니냐.
「침착한 상황 판단!
재능 《침착한 사고》에 의해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모든 직업 경험치 + 5」
…아주 불가능한 이야기도 아닌 것 같구만.
스텔라가 악당으로 타락해버리면 내가 짜놓은 앙그마르 가문의 부흥 계획이 틀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악성 변수가 되기 전에 어떻게든 진정시켜놓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성과를 위해 제 표본을 채집하려고 했다는 거죠?”
“이제 시간이 정말 얼마 안 남았어! 앞으로 총회가 한 달 남았단 말이야. 유의미한 결과를 남겨야 해. 유의미한-.”
하얗게 칠해진 엄지손톱을 까득하고 깨무는 모습을 보니 정말 사람이 궁지에 몰렸구나 싶은 기분이 확 들었다.
그녀의 입장에서 가문에서 내쫓긴다는 것은 모든 걸 잃는다는 것과 같은 일일 테니까 뭐. 이해는 한다.
내 주변에도 나이가 들고 보육원을 떠나면서 불안함을 느끼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으니까. 당장 나도 ‘내가 잘 살아갈 수 있을까.’라는 기분으로 겁을 집어먹기도 했었지.
“일단,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내일 얘기하도록 해요.”
술부터 깨고 내일 맨 정신일 때 말하자. 술에 취해 있는 사람과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것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으니까.
스륵.
벨호크 교수가 침대 위에 앉았다.
“그럼 나 여기서 자고 가도 되지? 내 연구실이랑 방은 징수꾼들이 기다리고 있어서 말이야.”
“돈을 빌렸습니까?”
“한 오 억 코인 정도-?”
5억 원이라는 소리잖아.
나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아찔한 금액에 눈앞이 번뜩이는 것 같다.
이래서 요즘 모습을 감추고 있었던 것이구만.
“일단 주무세요.”
“이거 극세사 이불 맞아? 극세사 이불 아니면 나는 잠 못 자는데.”
“그냥 좀 자세요.”
스륵스륵.
옷도 벗지 않은 채 침대에 누운 스텔라 교수는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옷을 벗겨주는 게 좋을까 생각했지만 괜히 이런저런 시비에 걸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그냥 내버려두기로 했다.
이불이랑 침대에 술 냄새 배겠네.
* * *
아침에 눈을 떠보니 스텔라 교수의 모습이 없었다.
“뭐야.”
책상 위에 한 장의 쪽지가 놓여 있어서 확인해보니 「아침.」이라고 짧게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덮여 있는 냅킨을 치워보니 계란과 소시지가 몇 개 올려 진 접시가 보였다.
내 아침이라고 차려주고 간 건가.
어질러져 있던 방도 깨끗이 치워져 있다.
“웃기네.”
아주 예의 없는 사람은 또 아닌가 보다.
슥슥.
나는 대강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은 후에 바깥으로 나섰다. 몸에 착 달라붙는 앙그마르 로브의 감촉이 이제는 꽤 좋다.
그렇게 「사랑관」의 바깥으로 나오니 제법 익숙한 얼굴이 날 기다리고 있는 게 보였다. 양산아래로 햇살에 빛나는 은발 머리칼이 눈부시다.
“미르나 아가씨.”
“어제 밤에 기숙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다면서요? 스텔라 교수가 당신의 방에서 비명을 지르고 소란을 부렸다던데.”
“…….”
벌써 소문이 그렇게 났나?
“그걸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여기저기 다 떠들어대고 있어요. 그게 사실인가요? 스텔라 교수가 왜 태오 가스펠, 당신의 방에 있었던 거죠?”
내 생각이지만 미르나는 아마 나의 외도를 의심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새벽에 남녀 둘이서 문제를 일으킨다면 확실히 그런 느낌으로 소문이 나도 이상하지 않고, 그걸 듣는 사람들도 ‘둘이 뭐야.’라는 느낌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이해가 된다.
스텔라 교수가 내 방에서 머리칼을 훔치려다 들켜서 소란을 일으켰다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어?
그런데 이걸 어떻게 설명하는 게 좋을지 모르겠다.
스텔라 벨호크와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비밀로 해주기로 했었는데. 그래서 어떤 말이 좋을지 곰곰이 혼자 고민할 즘 미르나가 말을 걸어왔다.
“왜 아무 말도 못하는 거죠? 둘이서 무슨 짓을 했나요?”
“아니, 미르나 님. 잠깐만요.”
“태오, 당신의 방이 어디죠?”
미르나는 갑자기 성큼성큼 걸어가서 내 방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이내 방문까지 따고 들어가더니 내 방을 이리저리 살펴보는 게 아닌가?
그러다가 내 침대 위에 놓여 있는 보라색 머리칼을 발견하고는 그걸 내게 보이며 추궁을 했다.
“침대 위에 머리칼이 있군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그야 자고 갔으니까 당연히 베개나 침대에 머리칼 정도는 묻어 있겠지. 그런데 ‘그냥 자고 갔어요.’라고 말하면 미르나가 믿을까?
스륵.
내 책상 위에 놓여진 쪽지와 빈 접시를 발견한 미르나.
“혹시 스텔라 교수가 아침 식사까지 차려주고 갔었나요?”
“음, 그게-.”
내가 설명할 사이도 없이 미르나는 내 옆을 휙 스쳐지나가서 주변을 살펴다보다가 이내 내 방의 쓰레기통에서 무언가를 꺼내들었다.
그것은 마치 뱀의 허물처럼 길게 늘어져 있는 물건이었는데 다름 아닌 여성의 스타킹이었다.
“이건 뭐죠?”
미르나는 검지와 엄지로 그 끝을 붙잡은 채 마치 더러운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나로서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게 왜 거기 있죠?”
스텔라 교수가 내 방에 멋대로 스타킹을 버려두고 갔었다니.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오늘 아침에 쓰레기통을 볼일이 없었으니까.
“태오 가스펠, 지금부터는 말을 잘 고르는 게 좋을 거에요.”
촥-부채를 접고 그것으로 내 턱을 겨누는 미르나.
단순한 부채지만 검을 겨누고 있는 것만큼이나 무섭다. 실제로 미르나라면 부채로도 내 목을 따버릴 수 있을 테지.
그러나 이대로 미르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을 사람이라면 가문의 부활 같은 건 접는 게 좋다.
나는 먼저 딜을 걸기로 했다.
“미르나 아가씨. 아가씨가 절 의심하고 계시는 거 압니다. 일단 진정하시는 게 좋겠어요. 제가 다 설명을-.”
“의심요? 이렇게나 증거가 확실한데? 그리고 저, 지금 이래 뵈도 굉장히 진정하고 있는 것이랍니다. 제가 진정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 지 보여드릴까요?”
스르르르.
미르나의 눈이 가느다랗게 떨렸다.
덩달아 나의 등 뒤로 쭉-하고 소름이 끼쳐서 오싹오싹한 기분이 된다. 그렇지만 미르나의 겁박에 물러설 수는 없는 일.
하렘의 왕이자 가부장제의 제왕을 꿈꾸고 있는 나로서 여성의 등쌀에 못 이겨 빌빌거리는 것만큼 부끄러운 일이 없다.
“으흠.”
목을 가다듬은 나는 오히려 큰 소리 치기로 했다.
“저에 대한 미르나 님의 신뢰가 이것밖에 되지 않는다니. 정말 슬프기 짝이 없습니다.”
“뭐라구요?”
“만약 미르나 님께서 생각하시는 모든 것들이 오해라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는 겁니까?”
“…….”
말은 안했지만 미르나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지는 게 보였다. 목에 닿아 있던 부채도 아주 약간이지만 힘을 잃는다.
스륵.
머릿속으로는 아마 “이 녀석 왜 이렇게 당당하지? 진짜 아무 일도 없었나?”라고 혼란을 느끼고 있는 게 아닐까?
“거짓말하지 말아요!”
그러다 그녀는 곧 이게 전부 내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는지 오히려 더 화를 내기 시작했다.
“지금이라도 사실대로 말하도록 하세요!”
이런 미르나의 화를 풀어주기 위해서는 정말 사실을 공개하는 수밖에 없으리라. 스텔라 벨호크 교수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비밀로 할 생각이었지만.
내가 당장 위험에 처해 있으니 사실을 말하는 수밖에.
그래서 나는 내가 아는 것을 이야기했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스텔라 교수가 논문을 위해 반요정인 내 머리칼을 채집하려고 몰래 숨어들어왔다가 들켰고. 비밀로 해 달라 말했던 것까지 전부.
엘가에 대해서라면 모를까 스텔라 교수에 대해서라면 나는 아직 결백했으니까.
아직은.
“제 결백을 주장하기 위해 스텔라 교수님과의 맹약을 깨트렸네요. 정 못 믿으시겠다면 벨호크 교수에게 물어보셔서 확인하시면 될 겁니다.”
내 진심을 담은 설명에도 미르나 드레이코는 반신반의했다. 결국 나는 그녀를 데리고 스텔라 교수의 연구실을 찾아서 확인을 시켜주는 수밖에 없었다.
스텔라 교수는 방방 뛰었지만 말이다.
“비밀로 하라고 했잖아. 그걸 말해버리면 어떻게 하니?”
“교수 님, 정말 죄송하게 됐습니다. 저도 드레이코 가문에 신세지는 게 있어서. 미르나 아가씨의 추궁에는 어쩔 수가 없어요.”
내가 고개를 천천히 젓자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었던 미르나가 당황한 것처럼 물었다.
“…그, 그럼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는 건가요?”
그 말에 최대한 무고하고 결백한 느낌으로 말했다.
“제가 누차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그보다 미르나 님께서 절 그렇게나 믿지 못하고 계셨다는 것에서 저는 오히려….”
나는 무언가를 말할 것처럼 행동하다가 그냥 입을 다물었다. 여기서 이 이상 말했다간 스텔라 교수가 나와 미르나의 관계를 눈치 챌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그렇게 말이 끊어진 것에서 미르나는 조바심을 느꼈던 모양이다.
“오히려, 오히려 어떻게 됐다는 건가요?”
미르나는 무척이나 불안해보였다. 얼마나 불안해 보이냐면 눈물까지 글썽거릴 정도였다.
문득 나는 내 주머니에 들어있는 목걸이가 유난히 크고 도드라지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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