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51)
EP.352)# 2
352 – 포기 # 2
“포기요?”
아이라의 이야기에 나는 깜짝 놀라 되물었다.
이미 한 번 들은 이야기를 되묻는 버릇이 얼마나 나쁜 것인지 나도 잘 알고 있었다만, 내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시 물어봐 확실하게 만들고 싶어졌다.
스윽.
의자에 앉아 있던 아이라는 다리를 반대쪽으로 꼬았다. 편안한 잠옷차림. 그 실크 네글리제 아래로 드러난 새하얀 다리에 잠시 신경을 빼앗겼을 때 아이라가 다시 말했다.
“비무제에 참가하는 건 포기하도록 해. 기권하는 거야.”
역시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니었구만. 아이라는 비무제 개막의 하루 전 날 내게 찾아와 그 참가한 것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고 기권하기를 요구해오고 있었다.
대체 어째서인지 당장 나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러나 지혜로운 여왕으로서 내가 느낄 궁금함을 미리 파악하기라도 한 것인지 아이라가 설명을 덧붙여 주었다.
“태오야, 너를 위한 비무제가 아냐. 그리고 여왕의 신하인 네가 비무제에 참가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지. 사람들이 뭐라고 생각하겠니?”
“…….”
정론이기는 했다.
이미 젊은 여왕의 정부라고 소문이 난 내가 여왕의 배우자를 뽑는 비무제에 참가한다면 그에 대해 얼마나 많은 소문과 추문이 따라다닐까. 다만 나는 각오를 끝냈었다.
남들의 시선이나 근거 없는 소문 따위야 옛적에 극복했다. 진정으로 급한 사람들은 내가 다른 사람들에게 어떻게 보이든 신경 쓰지 않게 되는 법이니까.
다만 이제 와서 아이라가 그런 것에 신경을 쓰기 시작한다는 게 나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아이라야 말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나 이야기 따위야 전혀 거들떠도 보지 않고 고고하게 피어 있던 절벽 위 꽃이 아니었던가?
아이라가 말했다.
“포기 해.”
“…그게, 어째서 저에게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비무제를 계획할 당시 아이라 님께서는, 죽음을 각오한 자라면 출신과 성별 등에 무관한 지원자들을 받겠다 하셨지 않습니까?”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나는 앙그마르의 유일무이한 여왕 아이라 폰 타란테라야. 내가 말하는 것은 곧 법이 되고 규칙이 되는 거지.”
맞는 말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태오야. 너 설마 진심으로 비무제에 참가해 우승할 생각이었던 것이니? 우승해서, 나를 네 것으로 만들겠다고?”
그 질문에 나는 잠깐 말이 막혔다. 이렇게 직설적으로 물어올 줄이야. 여기서 내가 어떻게 답을 해야 가장 올바른 선택인지 고민이 된다.
어떤 대답을 하든지 운명이 갈리리라.
네 / 아니오.
두 선택지에 선 나는 마침내 하나의 답을 도출했다.
“…그렇습니다. 저는 여왕님을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쿵쾅쿵쾅.
내 가슴에서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내 예민한 귓가에 마구 들려왔다. 마치 성난 남자가 굳게 쥔 주먹으로 가슴팍을 두드리는 것 같은 기분.
말해버렸다.
여왕과 신하.
우리들은 그 관계를 넘어서서 연모를 품은 남자와 여자다.
그렇게 생각하니까 아이라의 가느다란 발끝이나 새하얀 허벅지 따위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로부터 나는 향기와 매혹적인 숨소리가 유난히 생생해서 얼굴에 피가 몰렸다.
다만 아이라의 반응은 밋밋했다.
놀라거나, 당황하거나, 기뻐한다거나, 아니면 화를 내거나 할 일 없이 그저 나른한 표정을 지어보일 뿐. 혹시 내가 너무 수줍게 말해서 못 들은 건가?
어디서 용기가 샘솟았는지 모르겠다만 나는 다시금 분명히 말했다.
“저는, 아이라 님을 사모하고 있습니다. 아이라 님이 제 것이 되었으면….”
미처 말을 다 끝내지 못한 것은 흐으응-하고 긴 콧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스르륵.
아이라가 가느다란 눈을 떴다. 마치 그 모습이 뭐라고 설명하면 좋을까…. 곧 아이라가 입을 열었다.
“태오야, 어째서 그런 당연한 이야기를 지금 하는 거니?”
“…당연한 이야기요?”
슥.
아이라는 자신의 가슴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내게 연모와 독점의 감정을 품는 것. 그건 사람이라면 당연한 일이야. 누구나 나를 사랑해. 나도 그걸 잘 알고 있어. 태오, 네 마음도 옛적에 알고 있었지.”
“…….”
“만물의 여왕인 내가 너무 아름답고 사랑스럽기에 내게 반하는 것이야 해가 저물면 달이 떠오르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분위기랑은 좀 많이 달라지는 것 같다. 내가 바라고 있었던 이야기의 진행은 이런 게 아니었으니까. 한 편으로는 역시 아이라 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래, 아이라에게 사랑받는다는 것은 당연한 일. 그게 누구든 용기를 낸 고백이 그리 특별할 것도 없는 거야. 좀 우스웠다. 내 고백이 이렇게 얼버무려지는 건가?
그때 후-한숨을 내쉰 아이라가 말했다.
“태오, 네게는 역시 사실대로 말할 수밖에 없겠구나.”
“사실요?”
“이번 비무제에서는 누구하나 우승하지 못할 거야. 요 며칠, 거리를 돌아다니며 참가자들을 살폈지만 나를 이길 수 있는 자는 없었어. 사실 예전부터 예상했었지. 그럴 줄 알고 열었던 비무제기도 하고.”
“그럼, 이 비무제라는 것을 여는 의미가 있습니까?”
내 질문에 아이라는 가느다랗게 뜬 눈을 감은 후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학습을 잘 따라오지 못하는 어린 학생을 가엾게 여기는 가정교사 같은 모습이었다.
“태오야, 아직도 모르겠니? 이 비무제는 그저 구실이야. 많은 병력들을 이 북쪽으로 모으기 위한 구실. 이들은 군세가 되어 장벽을 넘어 가르가타를 되찾아 올 거야.”
작은 망치로 머리를 퉁 내려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사실 이 괴상한 비무제를 여는 것에 있어서 아이라에게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다는 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다.
단지 그것이 평소처럼 ‘재미있으니까.’ 혹은 ‘지루한 일상의 여흥.’같은 변덕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만. 의외로 구체적이고 확고한 목적에 나는 퍽 얼떨떨했다.
“그러니까, 비무제에 모인 참가자들을 이용해 장벽 너머 성채를 탈환하는 병력으로 삼을 생각이란 말씀이십니까?”
“그래, 태오야. 이 왕국에서 두 번째로 현명한 너라면 이미 알고 있을 줄 알았지만. 아무래도 나의 기대가 너무 컸던 것 같구나.”
아이라는 어딘가 실망한 듯이 보였다. 내가 그녀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이겠지. 다만 내 머릿속엔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그렇지만 용감한 투사들이라 해도 비무제에 참가한다는 것과 장벽을 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대체 어떻게 그들을 벽 너머로 진군 시키실 겁니까?”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그것을 가능하게 해야 비로소 여왕이라 할 수 있지. 그런 것은 문제가 되지 않아. 아무튼, 이 비무제는 그런 거야. 포기하도록 하렴.”
즉.
아이라는 도전자에게 패배할 생각이 없었고, 그들을 이용해 자신의 계획에 사용할 생각뿐이었던 것 같다.
그 말은 곧 애초에 결혼이라는 걸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았다. ‘여왕과 결혼하여 앙그마르와 모든 권세를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은 벌과 나비를 모으기 위한 미끼였을 뿐.
가르가타 성채 탈환의 병력 부족의 문제에 대해서 항상 자신만만해 하고 있더니 이런 식으로 해결을 하려고 할 줄이야.
“그러니, 알았으면 포기하도록 하렴. 그리고, 네 여왕이자 주인인 나 아이라 폰 타란테라의 심기를 거스른 것에 대해 사과하도록 해.”
슥.
아이라가 내게 손을 내밀어왔다.
손 등에 입을 맞추라는 소리겠지. 저것에 입을 맞추면 우리들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엉뚱한 여왕과 밉살맞은 신하의 관계로 다시금 돌아 가버리고 말리라.
비무제도 포기해야겠지.
그렇지만 지금 내게 딱히 다른 방도가 있나? 당장 생각나는 바는 많지가 않았다.
슥.
나는 일단 아이라의 손바닥을 슬쩍 붙잡았다. 맞닿은 피부에서 느껴지는 온기. 그것을 느끼고 있을 때 아이라가 재촉해온다.
“…자, 어서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맹세해. 태오, 너는 나의 귀여운 요정으로 남겠다고. 그리고 비무제도 포기하겠다고 말이야.”
“…….”
문득.
나의 포기를 강조하는 아이라의 고집에 한 가지 의문이 생겨났다. 굳이 그녀가 나의 참가를 거부하는 이유는 뭐지?
어차피 아이라의 이야기대로라면 그녀를 이길 수 있는 투사들은 아무도 없을 터. 억지로 내 출전을 금지시키지 않아도 그녀가 압도적인 힘으로 모두 이겨버리면 그만인 일.
그럼 우승자도 없을 것이고.
아이라 역시 관심에도 없었던 결혼을 할 필요가 없을 터다.
그러나 굳이 나의 참가를 막는다는 것은-.
“설마 아이라 님께서는.”
“…….”
“혹 제게 패배하실지 모른다는 걸 걱정하고 계시는 겁니까? 만에 하나 제가 우승하여 일이 틀어지는 걸 두려워하시는 것이 아니십니까?”
내 말에 아이라의 손바닥이 내 손에서 스르륵 빠져나갔다.
고개를 들어 올리니 아이라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끓는 주전자처럼 잔뜩 붉어진 얼굴로 나를 흘겨보는 표정은 그녀와 몇 년을 함께 지냈음에도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 * *
엘가가 먹던 녹색 쥬스를 입에서 뿜어냈다.
“푸우웁-!”
그에 그녀 앞에서 식사하고 있던 미르나는 엘가의 타액과 녹색 즙으로 범벅이가 된 채 머리칼을 곤두세웠다.
“지금, 더럽게 뭐하는 짓이에요!!!”
항상 도도하고 침착함을 유지하려는 미르나가 저렇게 짜증을 부리는 건 처음이었다. 하지만 엘가는 미르나에게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다급히 물었다.
“아니, 뭐? 출전권을 박탈당했다고? 그게 무슨 소리냐!?”
깜짝 놀란 것이겠지.
나도 그랬으니까.
엘가가 재차 묻는다.
“야, 빨리 대답해 봐! 출전권을 박탈당하다니! 그리고 근신 처분까지 받아? 대체 뭘 했는데 그렇게 된 거야? 당장 오늘 점심 먹고 개막이잖아!”
“그게….”
나는 엘가와 드레이코 자매들에게 어젯밤 있었던 일을 설명해주었다. 어젯밤 아이라가 찾아와서 내게 포기를 권유한 것.
그리고 그것을 거부하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아이라의 화를 돋우어서 출전권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박탈당하고 근신처분을 받은 것까지.
━태오 가스펠. 네 권리를 박탈하겠어. 당분간 숙소에서 머리를 식혀.
사실 실감이 안 났는데. 이렇게 아가씨들에게 말을 하고 나니까 비로소 내가 여러모로 큰일이 났구나 싶은 기분이 확 들었다.
어쩌지?
엘가가 화를 냈다.
“야, 우리가 지금 뭣 때문에 그 고생을 했는데…! 아오,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어쩐지 일이 잘 풀리더라니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지. 덮쳐야 해.”
그 단호한 목소리에 나는 당혹스러웠다.
“덮치라뇨?”
“아이라를 덮쳐서, 확 임신을 시켜버려. 그럼 기왕 순결을 잃은 몸. 너랑 결혼한다고 하지 않겠어?”
무슨 말도 안 되는 이야기냐 싶겠지만, 여성의 정조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땅에서는 꽤 흔히 일어나는 일이긴 했다. 자신을 덮쳐 온 남성과 울며 겨자 먹기로 결혼하는 여성들….
따끔.
그때 내 가슴이 아팠다. 내 마음 속에 사는 종이거미가 양심을 깨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 나는 이미 미르나에게 그런 작전을 쓴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요즘은 굉장히 후회했다. 내 흑역사다. 그런 강제적인 방법은 더 이상 사용하고 싶지 않아.
그때 얼굴에 묻은 녹즙을 슥슥 닦아낸 미르나가 으흠-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그런 방법이 그 여왕에게 통할 것 같진 않네요. 애초에 그 여왕을 덮칠 수는 있나요? 단박에 마법을 맞고 날아갈 거에요.”
“우리가 함께 공격하면 그 꿈속에서 있었던 것처럼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리오네스 영애. 말도 안 된다는 거. 사실 잘 알잖아요. 그렇게 해서 억지로 하렘에 끼워 넣어 봤자 불협화음만 일어나죠.”
미르나의 정론에 엘가는 머리를 신경질적으로 긁었다.
“그럼 어떻게 해? 그럼 어떻게 하냐고. 그렇게 폼 잡으면서 비판만 하지 말고 너도 뭐라 해결책을 제시해 보든가.”
“해결책. 해결책이 있긴 하죠. 제가 여기에 있음으로서 하나.”
슥.
미르나가 검지를 폈다.
“아이라 여왕의 명령은 태오 가스펠에 한한 것. 그렇다면 다른 사람이 대신 하면 되는 거에요.”
그 말에 엘가가 와락 미간을 좁혔다.
“뭐야, 태오가 못 나가면, 너나 내가 대신 나가자는 거냐?”
“아뇨.”
미르나가 고개를 저을 때 한참 이야기를 멀뚱히 듣고 있었던 나르미 아가씨가 그 커다란 눈을 왕방울 만하게 뜨며 손뼉을 쳤다.
“언니, 그거 말하는 거구나! 진짜 그거면 되겠어! 태오, 너도 알잖아. 우리 드레이코 가문이 갖고 있는 보물이 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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