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mporarily Closed for Work Reasons RAW novel - Chapter (272)
순백의 새하얀 수염으로 뒤덮인 거인의 손에는 눈부신 황금빛으로 빛나는 법전이 들려 있었다.
스윽.
천신의 백안이 지상에 널려 있는 마족들의 시체에게 향했다.
[아직 한 마리가 남아 있구나.]천신의 입술이 무미건조하게 열렸다.
[나와라.]언령을 머금은 천신의 음성이 울려 퍼졌다.
드드드!
그러자 마족의 시체 더미에서 죽은 어미의 품에 안겨 있던 생존자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려 천족들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천신의 명령에 아무 거리낌 없이 마족을 학살한 천족들의 얼굴에 처음으로 당혹한 기색이 어렸다.
머리와 등에는 분명 마족의 증거인 뿔과 날개가 있었지만, 나타난 건 아직 젖도 떼지 못해 보이는 어린 아기였던 것이다.
오들오들.
아기, 엘리야는 자신을 둘러싼 천족들을 보며 겁에 질린 새끼 고양이처럼 몸을 떨었다.
[무엇 하고 있느냐? 어서 정의를 집행하지 않고.]그때 천족 중 하나가 당황한 얼굴로 천신을 향해 물었다.
“아버지이시여, 아무리 마족이라 하지만, 이런 아기까지 죽여야 한단 말입니까? 저희는 빛과 선을 추구하는 천족…….”
그의 말은 이어지지 못했다.
콰콰쾅!
콰지직!
그가 천신이 내리친 법전에 벌레처럼 짓뭉개져 버렸던 것이다.
천신, 율법의 수호자가 끈적끈적한 피가 뚝뚝 떨어지는 법전을 펼치며 읊조렸다.
[남의 물건을 훔친 자는 손을 베어라. 욕을 뱉은 자는 혀를 베어라. 그리고 마족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목을 베라고 했다. 어서 행하라.]“아버지와 성스러운 율법에 따르겠나이다.”
천족들이 일제히 자신들의 무기를 엘리야에게 겨눴다.
“으에엥! 으에에엥!”
그 흉흉한 기세에 엘리야가 참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천족은 멈추지 않는다.
슈욱! 쌔애액!
신성을 머금은 무구들, 압도적인 폭력이 아기인 엘리야에게 쏟아졌다.
콰르르 콰콰쾅!
잔혹한 폭력에 지상마저 풍랑처럼 요동치며 신음했다.
본래라면 그들의 공격에 엘리야는 살점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을 테지만.
“으에에엥!”
아기의 울음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울고 있는 엘리야의 목덜미를 덥석 잡고 있는 정체불명의 사내에게 향했다.
-신의 탑 49층 ‘천신의 시련’
-마족 엘리야의 간절한 기원에 응해 신이 강림합니다.
“넌 누구냐? 왜 신성한 천족의 행사를 방해하느냐?”
천족들이 당황하며 갑자기 나타난 사내에게 무기를 겨눴다.
한편, 사내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손에 쥐고 있는 엘리야와 그의 목에 걸려 있는 세계수의 씨앗이 있는 목걸이를 보았다.
“하! 이제 하다 하다 꼬맹이가 날 부르는 거냐?”
“으에엥?”
그때 그들에게 천신의 시선이 닿았다.
[……신인가? 하지만, 그대에게선 사악한 기운이 느껴지는구나.]고오오! 천신의 눈에 살기가 깃들었다.
천신이 단숨에 사내와 아기를 짓뭉길 기세로 피 묻은 법전을 내리쳤다.
벼락처럼 쏟아진 천신의 법전.
콰르르 콰콰쾅!
엘리야가 우는 것도 잊고 동그랗게 커진 눈으로 자신을 들고 있는 사내, 이신을 바라보았다.
[이, 이 더러운 악신 놈이 내 법전을 막아?]웬만한 빌딩보다 거대한 천신의 법전이 그가 아무렇게나 내밀고 있는 오른손에 막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이신이 이번 층의 클리어 조건을 살폈다.
-클리어 조건 : 타락한 천신 ‘율법의 수호자’와 천족을 계도하라.
상황을 파악한 듯 이신의 입술이 사악하게 뒤틀렸다.
“크큭, 그래도 이번 층의 시련은 좀 취향에 맞는군. ‘단죄하는 신의 중지’!”
화르륵!
갑자기 피어오르기 시작한 지옥의 업화에 천신의 법전이 불타기 시작했다.
[헉! 율법이 담긴 내 소중한 법전이!]“마침 제물이 필요하던 차였다.”
이신이 당황하는 천신과 자신을 포위하고 있는 천족들을 보며 사악하게 웃었다.
“영광으로 여겨라. 너희들, 곧 신의 정점이 될 이 몸께서 계도해 주마.”
그리고 잠시 후.
마족의 시체로 뒤덮인 폐허에 천족들의 시체가 더해졌다.
그중 특히 인상적인 것은 바로 머리에 반쯤 타 버린 법전이 박힌 채 절명한 천신의 시체였다.
그곳에서 살아 있는 것은 이신과 그의 손에 들린 아기, 엘리야뿐이었다.
이신이 얼굴에 묻은 천신의 피를 훔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왜 시련이 끝나지 않지?”
분명 클리어 조건으로 놈들을 모두 계도해 줬는데 말이다.
죽음으로서.
그때 그런 이신의 생각에 반응하듯 탑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띠링!
-무분별한 살생으로 클리어 조건이 변경되었습니다!
-클리어 조건 : 마족 엘리야를 진정한 마왕이 될 때까지 지켜라,
“진정한 마왕이 될 때까지 지키라고? 이걸?”
이신이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자신의 손에 들려 있는 엘리야를 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엘리야가 방긋 웃었다.
“꺄아~!”
영락했다지만 마족은 본래 힘을 숭상하고 전투를 즐기는 종족이다.
엘리야의 눈에 원수인 천신과 천족을 도륙한 이신은 엄청나게 멋지고 위대해 보였다.
“시바.”
절망한 이신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
“잠깐! 잠깐만요, 자까님!”
“또 왜 그러세요.”
“이번엔 이신인가요?”
“어? 이것도 마음에 안 드세요? 정 그러면 초특급 블록버스터 ‘스페이스 갓’ 4편 찍은 이야기라도 쓸까요? 제가 봐도 4편은 좀 잘 나온 것 같은데.”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담당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관자놀이를 움켜쥐었다.
“이러면 독자님들이 어떻게 생각하겠어요? 다 끝난 이야기로 대충 때운다고 생각하지 않겠어요? 자까님? 야, 지금 내 말 듣고 있어! 왜 당근을 흔들고 있죠?”
휙! 담당이 내가 손에 들고 있는 당근을 낚아챘다.
“대체 이건 뭐예요?”
“구조 신호…… 아니 제 점심밥인데요.”
“자까님, 설마 다이어트 하세요? 그렇게 삐쩍 마른 사람이?”
“아뇨. 그냥 집에 쌀이 떨어져서 도시락 대신에 가져왔는데요…….”
그러자 담당이 거지를 보는 듯한 짠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하아, 이번 마감만 잘 끝내면 소고기 사 줄게요.”
지그시.
내 시선에 담당이 얼굴을 와락 구겼다.
“좋아할 줄 알았더니 뭐죠, 그 때려 주고 싶은 얼굴은?”
“우리 누나가 소고기 사 주는 사람은 흑심이 있다고 조심하라고 했는데요. 역시 오늘따라 화장이 짙다고 했더니만, 담당님 혹시 영계인 절 노리고 계셨나요?”
으드득!
미녀 편집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옥수수 가는 소리가 섬뜩하게 울려 퍼졌다.
“자까님, 미쳤어요? 뒈질래요?”
“어허, 주먹은 내리시고여. 데이트, 아니 소고기를 위해 열심히 써 보겠슴니다!”
타닥. 타다닥.
시작은 이랬다.
[마치 백지처럼 새하얀 공간, 장미 넝쿨에 뒤덮인 채 망부석처럼 앉아 있는 남자가 있었다.]***
그는 대체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그곳에 있었던 걸까?
바닥에 널려 있는 머리칼과 수염이 그 세월을 어렴풋이 짐작케 한다.
장미 넝쿨에 휘감긴 채 참선하고 있는 남자의 모습은 마치 깨달음을 구하기 위해 보리수 아래서 고행한 싯다르타의 모습을 떠올리게도 하였다.
온통 정적만이 가득한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단 하나.
사각, 사각.
눈부신 광채에 휩싸여 있는 펜 한 자루.
마치 살아 있듯 스스로의 의지로 움직이고 있는 펜은 백지처럼 비어 있는 이 공간에 활자를 끊임없이 새기고 있었다.
띠링! 띠링!
-보상으로 ‘마왕 엘리야’의 신앙과 ‘운명 개변 포인트’를 1 얻었다.
-보상으로 ‘무한의 수를 헤는 자’의 신앙과 ‘운명 개변 포인트’를 1 얻었다.
(……)
마치 펜의 움직임에 호응하듯, 수많은 세계에서 남자의 분신들이 신의 탑의 시련을 이겨 내고 보내는 신앙과 세계수의 씨앗이 품고 있는 ‘운명 개변 포인트’가 남자에게 스며들었다.
스윽.
아무 예고 없이 남자의 눈꺼풀이 열렸다.
“그래, 이 정도면 된 것 같아.”
남자가 선언했다.
“나 유일신은 신의 탑 99층 ‘투신의 시련’에 도전하겠다.”
드드드드!
쿠구구궁!
그러자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이 활자로 채워진 백색의 공간이 갈라지더니 지옥문을 연상케 하는 흉측한 장식들로 가득한 거대한 문이 소환되었다.
마치 수문장처럼 문 앞에는 한 남자가 서있었다.
“드디어 도전하시는 겁니까, 나의 신이시여.”
거대한 창을 손에 쥔 낯익은 남자의 모습에 유일신의 입가에 미소가 깃들었다.
“오랜만이구나. 아마 어쩌면 이 탑을 만든 게 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어.”
남자가 고개를 저었다.
“저 혼자 만든 것은 아닙니다. 신들의 정점이라 불리는 최상급 신들이 모두 자신의 인과율을 소모시켜 도와주었지요. 그런데 나의 신이시여, 감히 묻습니다. 승산은 있으십니까? 악몽을 손에 넣은 투신은 신의 전생 때보다 더욱더 강해졌습니다.”
“글쎄. 잘 모르겠어.”
유일신이 빙그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투신 정도도 이기지 못하면 나락과 파괴신으로부터 세상을 구할 수는 없겠지.”
투둑! 투두둑!
유일신을 얽매던 장미 넝쿨이 힘을 잃고 하나씩 끊어지기 시작했다.
***
“잠깐! 잠까안!”
내 원고를 보던 담당이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낯빛이 유리처럼 창백했다.
“아, 또 왜 그러세요?”
“너, 너어! 일신이가 아니구나!”
“넹, 유사신이라 불러 주세여.”
나는 머리를 긁적이며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상황 파악 끝나셨으면 절 그만 이 ‘악몽의 시련’으로부터 내보내 주실래요? 아무래도 투신과 싸우려면 저도 본체 놈을 좀 도와야 될 것 같아서요.”
나는 담당, 아니 그녀를 향해 말했다.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님.”
행복한 세계의 유일신입니다 (3)
스윽.
담당, 아니 악몽이 쓰고 있던 안경을 벗었다.
검붉은 장미 꽃잎 같은 눈동자가 나를 꿰뚫을 듯 담았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니? 내 정신 왜곡은 분명 완벽했을 텐데.”
“에이.”
난 웃으며 손사래 쳤다.
“너무 티 나잖아요. 제 담당은 배 나오고 머리도 벗겨지기 시작한 중년 남자인데. 악몽님은 너무 예쁘고 날씬하잖아요. 마치 제가 항상 이런 담당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상형처럼. 어? 악몽님, 웃어요?”
자기도 모르게 배시시 입가가 올라간 악몽이 황급히 표정을 굳혔다.
“언제부터 너랑 일신이 바뀐 거지?”
“음,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바뀐 건 아니에요.”
까닥.
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움직였다.
스스슥.
그러자 마치 성연이가 크레파스로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것처럼, 조금 어설프게 생긴 도마뱀이 떠올랐다.
나는 손가락으로 그 못생긴 도마뱀의 꼬리를 툭 잘랐다.
“엄밀히 말하면 이렇게 본체 놈이 저를 남기고 떨어져 나간 거라고 해야 되나? 뭐, 꼬리로 비유하자니 좀 기분 나쁘지만 말이죠.”
그러자 악몽의 표정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었다.
“그나저나 제가 지은 유사신이라는 이름 어떻게 생각하세요? 사신이라고 하면 뭔가 좀 간지나기도 한데, 앞에 유씨가 붙으니까 왠지 유사품 느낌도 나는 게 미묘한 기분이 든다니까요.”
시답잖은 농담을 해 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궁금해 할지 모를 누군가를 위해 설명을 조금 하자면.
띠링!
-축하한다. 신의 탑 25층 ‘원소의 시련’을 클리어했다.
-보상으로 ‘4대 정령왕’의 신앙과 ‘운명 개변 포인트’를 1 얻었다.
-현재 보유한 운명 개변 포인트 : 25/100.
막 25층을 클리어했을 때의 일이었다.
“하아, 하아!”
사실 고백하자면 그때의 우리는 만신창이였다.
몸도 몸이지만 특히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끊어지기 직전의 고무줄처럼 불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