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107
제106화
사슬을 휘감은 강설의 모습은 애처롭기 그지없었다.
고개를 푹 숙이고 침묵에 잠긴 그의 모습.
“이봐, 여자! 이거 괜찮은 거야?”
“아직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았는데 나도 잘 몰라.”
“주인이 이렇게 죽은 듯이 가만히 있는데?”
“가사 유도 장치잖아. 실제로 죽은 것과 마찬가지야.”
눈을 감고 벽에 기대어 곰곰이 생각 중인 카루나와, 강설과 쟈마드의 변화 없는 상태에 불안해진 카렌까지.
현실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설의 소환수들 또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상황을 알지 못하기에 더 괴로운 면도 있었다.
스르르륵…
“어? 이거… 이거 봐!”
강설의 몸이 검게 물들어갔다.
“성공인가?”
미레이가 집중한 모습으로 강설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아….”
스르르륵…
강설의 황금빛 눈까지 침범한 검은 기운은 이내 그의 눈을 시커멓게 만들었다.
기괴하고 무섭게 보이는 강설의 얼굴.
심지어.
쿵!
쿵!
심장 박동을 하듯 새우처럼 몸을 튕기는 강설 때문에 사슬까지 흔들렸다.
“이거, 심각한데….”
“왜? 무슨 일이야?”
“생각보다 기억을 물리치는 게 쉽지 않나 봐. 이건 정상적인 반응이 아니야. 이건… 그림자에 잠식당하고 있는 거야.”
“그걸 말이라고!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데?”
“어떡하기는. 잘 물리치기를 바라면서 기다려야지.”
“그런 무책임한….”
“네 주인이 선택한 거야. 넌 네 주인을 못 믿는 거야?”
“…….”
스윽.
카루나가 벽에서 떨어져 미레이에게 다가왔다.
“미레이,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좋아.”
그가 미레이에게 물었다.
“주인님의 악몽에 우리가 개입할 방법이…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건… 음….”
– 강제로 다른 그림자들이 개입하려면 개입할 순 있을 텐데 어떤 부작용이 일어날지 모르니 일단은 없는 셈 쳐야 해.
미레이가 강설과 나눴던 대화 중 일부분.
그녀가 이마를 짚었다.
“이론상으로만 가능하다는 얘기지.”
“제가 가겠습니다.”
“카루나!”
카렌이 카루나를 향해 소리쳤다.
“아니, 길을 찾지 못할 거야. 심층 의식이라는 건 미로와도 마찬가지라서 길을 잃게 될 거야. 네 주인과는 상관없이 네 안전까지 위험해지는 거지.”
“상관없습니다.”
“카루나, 나도 데려가!”
“카렌. 이건 위험한 일이야.”
“그러니까 나도 데려가라고! 이 멍청한 놈아! 또 나만 혼자 남겨둘 셈이야?”
“…….”
미레이가 가만히 듣고 있다가 뭔가를 떠올렸는지, 손가락을 튕겼다.
딱-!
“그래! 그러면 되겠네.”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혼자서는 길을 잃을 게 확실해. 네 주인이 어디 있는지 찾아내는 것만도 족히 그곳의 시간으로 한 달 혹은 일 년은 걸릴 수도 있어. 하지만… 둘이라면 다를 거야.”
“들었지?”
“뭐가 다르다는 겁니까?”
“기본적으로 악몽은 침입자들을 이물질로 간주하거든. 너와 저 요정은 악몽에게 환대받지 못할 거야. 그 과정에서 심층 의식 내에 파문이 발생할 거고 그게 또 공명을 일으켜서 서로의 위치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네 주인의 위치까지….”
“그만! 하나도 못 알아듣겠잖아! 일단 들여보내 줘! 주인이 이러다 죽겠어.”
카렌의 말이 성급하다고 탓할 수는 없었다.
미레이도 그들이 말은 안 했지만 지금 이 상황이 촌각을 다툴 만큼 급박한 상황이라는 것을 인지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거기다, 앞선 내용은 이들이 알든 모르든 상관없는 내용이었다.
“자리를 잡아, 너희를 주인에게 보내줄 거야.”
“좋았어! 자, 카루나. 이리 와.”
“우리가 어떻게 하면 됩니까?”
치지지지지지직…
“일단 무지하게 아플 거야. 약은 이미 다 떨어졌거든.”
“상관없습니다.”
“나도!”
“그걸 견디면, 시커먼 공간에서 네 주인을 찾아. 그리고 출구로 뛰어.”
“알겠습니다.”
“서둘러!”
곧장 가사 유도 장치에 몸을 맡긴 그들은 비명을 질렀다.
기계 장치가 작동을 시작한 것이다.
“끄으으으아아아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아아아악!”
픽-!
삐이이이이이이…
카렌과 카루나, 둘의 고개가 동시에 푹 꺼졌다.
“…그러면 나만 남은 건가?”
미레이가 품에서 궐련을 꺼내 불을 붙였다.
“후우… 그 주인에 그 소환수들이야. 안 그래, 소딘?”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부러워. 내가 이루고 싶었던 꿈들이거든. 그러니까 말이야….”
갑자기 밖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명히 여기에 있다! 마녀의 냄새가 난다!”
미레이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 마지막까지 지켜볼 생각이야.”
그녀가 은신처 밖으로 나섰다.
* * *
카렌과 카루나 그리고 미레이의 걱정은 적중했다.
현재 강설과 쟈마드의 상황은 그리 쉽지 않았다.
벽을 부순 쟈마드와 마주한 강설.
하지만, 신들이 그것을 가만히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쩌저적…
그들이 뒤에서 손을 휘젓자, 금이 갔던 부분이 순식간에 메워졌다.
강설은 멍하니 선 채로 그들에게 물었다.
“방금… 방금 여기 뭔가 있지 않았어?”
신들은 그런 강설의 말에 이렇게 반응했다.
“글쎄… 난 보지 못했는데?”
“헛것은 본 게 아닐까나?”
“뭐, 실수 때문에 일어난 정신적인 충격이라든지… 큭큭….”
“이리 와, 다시 앉으라고. 우리와 계속 놀아야지, 스노우맨. 넌 우리와 노는 걸 좋아하잖아?”
강설의 눈이 다시 흐릿해지기 시작했다.
‘그래, 영원히 이들과 놀고 싶어.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다시금 게임판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모든 욕구 중 가장 위에 놓이는 것은 지배욕이다. 내가 아닌 다른 무언가를 지배한다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쾌락을 선사했다.
강설이 말들을 움직이는 게 딱히 말들 각자의 삶을 위해서가 아닌, 그 자신의 지배욕을 위한 것이었을까.
이제 강설은 그것조차 잘 모르게 되었다.
그는 바보가 되어, 아이가 되어, 게임판을 바라봤다.
하지만.
“…아니, 잘못 보지 않았어. 분명… 봤다고.”
“우리를 믿지 않는 거야?”
“우린 네 친구잖아? 우리가 하는 말을 믿어야지.”
“친구….”
우리는 친구일까.
어린아이가 된 강설은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말했다.
“나갈래, 여기서.”
“하하! 그런 길을 선택했다고? 이봐, 스노우맨이 나간다고 하는군!”
“과연, 가능할까?”
스윽.
강설의 눈앞에 주사위가 내밀어진다.
까딱까딱하는 것이 얼른 가져가라고 재촉하는 모양새였다.
“주사위를 굴려, 스노우맨.”
“주사위의 눈에 따라 결정될 거야.”
“네가 이곳에서 나갈 수 있는지, 아니면 영원히 이곳에 남을 건지.”
강설은 말없이 주사위를 바라보았다.
17년간 함께했던 정육면체. 어디는 매끈하고 어디는 각이 졌다.
눈이 파인 홈에 손가락이 닿을 때면 늘 마음 한구석이 간질간질했다.
그에게 주사위는 신이었고 운명이었으며 삶이었다. 늘 주사위가 정하는 대로 살아왔다. 그것이 규칙이니까.
툭.
도로로로로로.
주사위가 빙글빙글 돌았다.
그의 모든 걸 결정할 주사위가.
투둑…
툭.
마침내, 주사위가 정지했다.
주사위의 눈은 1이었다.
주사위는 그에게 죽음을 선고했다.
“푸하하하하하! 1이 나왔어, 스노우맨.”
“이걸 어쩌나? 강설은 이제 여기서 빠져나가지 못해.”
“우리와 함께야, 영원히….”
아, 그런가. 주사위가 그렇게 나왔으니 그런 거겠지.
세상 모두가 밉다.
신들의 비웃음도, 1이 나온 주사위도, 이 게임판도.
모두가 밉다.
모든 것에서 적의를 느꼈다.
분명, 이대로 악몽에 잡아먹힐 것이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땅이 세차게 진동했다.
쿵-!
“어?”
“뭐야?”
“무슨 짓이지? 스노우맨?”
강설은 1이 나왔던 주사위를 살폈다.
주사위의 눈은 진동 때문인지 2로 바뀌어 있었다.
이를 알아차리지 못한 신들이 오해하는 것 같았다. 그가 부정을 저지른 것이라고.
“내가 안 그랬어.”
쿵!
쿵!
갑자기 진동이 더 심해졌다.
도르르.
진동이 퍼질 때마다 주사위는 계속해서 움직였다.
4가 나오기도 했고 다시 1이 나오기도 했다.
“멈춰, 스노우맨!”
“내가 한 거 아니라고!”
“흥! 너밖에 없어! 어째서 주사위에게 불복하는 거야!”
쿠궁!
도르르.
주사위는 힘없이 굴러, 그들에게 다른 면을 드러냈다.
6.
6의 눈이 나왔다.
주사위가 드러낼 수 있는 최고의 숫자.
신들은 작금의 상황에 침묵했다.
강설은 느껴지는 시선에 진동이 시작된 곳을 흘겨보았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였다.
“이봐, 스노우맨. 난 단순해서 이런 것밖에 할 줄 모른다. 이렇게, 두들기는 일밖에는.”
뻗어 나온 송곳니가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쟈마드? 쟈마드야?”
“너. 감히 내 악몽을 들여다보다니, 간도 크구나.”
“…돌아가, 주사위는 1이 나왔어.”
“아니, 나는 그것에 동의한 적 없다.”
쿵!
쿠우웅!
쟈마드가 계속해서 어두운 공간을 두들겼다
“이따위, 이따위 주사위가 뭐라고!”
“하지만 그게 규칙인 걸.”
“규칙? 세상에 규칙 같은 게 어딨나? 너 바보냐?”
“뭐?”
“너 뭐냐고.”
“나? 나는….”
강설은 순간적으로 스노우맨이라고 대답할 뻔했다. 어째서 이제야 이런 의문을 떠올린 것일까. 갑자기 눈 주변을 짓누르는 눈사람 가면이 답답하게 느껴졌다.
‘나는….’
강설은 쟈마드에게 대답했다.
“강설이야. 강설.”
“그랬군. 강설, 너에겐 뭐가 현실이냐? 이 끔찍한 놈들과 주사위를 굴리는 그곳이 현실인 거냐?”
“아니, 아니야.”
“그럼 뭘 망설이는 거지?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가끔은 이 몸처럼 단순하게 살아야 할 때도 있는 법인데 말이지.”
가면을 쓴 신들이 강설의 팔을 붙잡고 말했다.
“이봐, 스노우맨! 정신 차려! 뭐 하는 거야!”
“주사위는 1이었다고, 규칙을 지킬 거지? 응? 늘 잘 준수해 왔잖아!”
강설은 이 순간, 깨닫고야 말았다.
오래전부터 이들에게 이 말을 전했어야 했음을.
그가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는 어른이 된 순간부터.
스윽.
투우우욱…
강설은 눈사람 가면을 벗었다.
홀가분함과 자유로움, 그 언저리에 있는 감정이 그에게 휘몰아쳤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재미없어.”
“…뭐?”
“아, 아니지? 우리랑 있을 거지?”
강설은 무표정한 얼굴로 답했다.
“이제 이런 거, 재미없어.”
이제야, 어른이 되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어른이.
“이딴 시시한 건 너네끼리 해.”
팍!
그는 주사위를 집어 던졌다.
쟈마드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쿠구구궁.
이 어두운 공간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강설은 세상 모든 것에서 적의를 감지한 이유를 알아차렸다.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스스로가 가면을 쓰고 거부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는 뒤로 돌아 자신의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등을 보이면 등만 보여주는 그림자. 하지만 그가 바라보면 마주 보는 것 또한 그림자였다.
그곳에, 쟈마드가 웃고 있었다.
강설이 그에게 말했다.
“나가자.”
신들이 반발했다.
“어딜!”
“규칙을 어겼으니 나쁜 어린이는 벌을 받아야겠지!”
치지지지직!
“크아아아아악!”
강설의 목이 다시 시커멓게 타올랐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기억, 신들에게 추방당하기 전, 목을 움켜쥐었던 번개의 고리.
그것이 다시금 재현되어 강설의 숨통을 조여왔다.
“커허어어억….”
“세상은 규칙이 존재함으로 완성된다. 규칙이 없는 세상은 혼돈 그 자체임을 모르느냐!”
그때, 강설의 그림자가 부서졌다.
콰지지지직!
쟈마드가 그 안에서 튀어나와 이제는 강설과 같은 위치에 똑바로 설 수 있었다.
“그랬군, 목 근처의 새까만 자국은 이것 때문이었어. 이제야 네 모든 걸 알게 되었다. 강설.”
“하아… 하아….”
“그 소감은… 아주 흥미로워, 묻겠다. 네가 앞으로 이루려는 것은 무엇이냐?”
“케헥… 케헥….”
“일단 이 성가신 고리부터 치워야겠군.”
번개의 신은 그의 말을 비웃었다.
“하하! 그건 네 힘으로는 못 부수는 거야!”
“그것도 규칙이냐?”
“그래, 규칙이다.”
“그럼, 그 규칙을 거부해주마.”
“…뭐?”
쟈마드가 강설의 목을 조르는 번개의 고리를 붙잡았다. 그리고 힘줄 돋은 팔로 그것을 뜯어냈다.
빠직…
빠지지직!
“말도… 안 돼….”
“규칙은 겁쟁이들끼리 만든 약속이야. 네놈들의 모든 걸 거부해주마. 강설! 말해라! 네 소망이 무엇이냐!”
강설이 숨을 헐떡이다가 호흡을 바로 하고 쟈마드를 똑바로 응시했다.
“복수. 오직 복수를 원한다.”
“크하하하! 너무 소박한 것 아니냐? 신들에게 버림받은 자가 그런 소박한 꿈이라니.”
“복수를 위해, 나는 신이 되겠다. 그들과 같은 눈높이로 그들을 벌하겠다.”
어른이 된 그가 일어섰다.
“나는 신이 되겠다.”
쟈마드가 씨익 웃으며 주먹을 내밀었다.
“그렇다면 자격이 있다. 이 몸이 만물의 왕이 되는 그 여정에 함께할 자격이. 널 이 몸의 영광스러운 여정에 함께하게 해주마.”
강설 또한 웃으며 쟈마드의 커다란 주먹에 인간의 작은 주먹을 가져다 대었다.
툭.
“웃기는군. 내 승천의 길에 널 이용하는 거다.”
“흥! 뭐가 됐든 우리의 뜻이 일치한다는 거군.”
쟈마드의 눈이 붉게 타올랐다.
그는 이 모든 짓을 벌인 신들을 보고 있었다.
“그럼, 이곳에서 나가도록 하지.”
이제 이들은 신들이 만든 규칙을 거부하는 자들이다.
쟈마드가 작게 중얼거렸다.
“내가 선택한, 진짜 형제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