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08
108화
가브는 힐 아슈에게서 알아낸 것들이 많지 않았다. 10년 전 이후로는 암흑 속에서 살았기 때문이다.
그랬기에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은 교주로 추측되는 궁정 마법사 아민이 눈을 보이게 해 준다는 명목으로 자주 들러서 몸을 살폈다는 것, 그리고 친오빠인 론 아슈가 무언가를 마시게 한 후에 어둠 속에 잠들었다가 깨어나기를 반복했고, 그 이후에 지금 상황이 되었다는 것뿐이었다.
“일단은…… 먹어라.”
말투와 눈빛이 처음부터 아무런 변화 없이 평온하여 진실인지 거짓인지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의 정황을 보면 딱 들어맞는 것은 사실이었다.
가브는 그녀를 풀어 주지 않고 직접 빵을 먹여 주었다. 먹다 보니 망토가 조금 흘러내려 안의 새하얀 살이 훤히 드러났다.
그는 시선을 돌려 이엘에게 보았다가 에런에게 향한 뒤 세실리아에게서 멈췄다.
“옷을 좀 입혀야겠군.”
“옷은 내가 사 왔는데? 내가 입힐게요.”
에런이 나섰다. 그러나 가브는 손바닥을 펼쳐 보이며 그녀를 멈춰 세웠다.
“안 돼.”
가브에게 이렇게 직설적인 거절을 받아 본 적이 없는 에런은 순간 굳어 버렸다. 세실리아는 일부러 에런과 눈을 마주하며 그녀가 들고 있던 옷을 빼앗아 짐마차 안으로 들어갔다.
“저 살쾡이가 더 얄미워.”
힐 아슈는 몸 안에 마기를 품고 있어 헤딘과 같은 리치로 의심했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결과 산 사람에 가까웠다.
직접 그녀의 손바닥에 상처를 내 보니 일반인보다 빨리 아물기는 하지만 자연 치유였고, 헤딘처럼 피를 탐하지도 않았으며, 식사 후에 토하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배변 활동이 활발했다.
가브는 힐 아슈를 바로 옆에 앉혀 두고 빤히 바라보았다.
“왜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나요?”
힐 아슈는 마기를 다룰 줄 모르는 듯했다. 그러나 사람의 시선에는 힘이 있어 그것을 느낀다고 했다. 가까이에서는 꽤 정확하게 위치를 파악할 정도였다.
힐은 뭐가 재밌는지 손발이 묶여 있는데도 항상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재미있나, 지금이?”
그녀는 입술에 묻은 빵조각을 혀로 날름 먹고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어둠에서의 시간은 꿈처럼 몽롱했지만 매우 길었어요. 지금 이렇게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맛있는 것을 먹는 게 너무 행복해요.”
힐 아슈, 환상에서 보았던 그녀와 인격이 다른지는 확신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끔찍한 것을 부르는 매개체임은 분명하다.
그녀가 살아 있는 한 그것이 언제고 이 세상에 도래할 수 있다는 위험은 언제나 도사린다.
‘이 세상을 위해서라면 눈앞의 소를 희생시키는 것이 맞다…….’
가브는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들었다. 힐 아슈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가만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각-.
그녀의 몸을 옥죄고 있던 밧줄이 끊어졌다. 그 순간 시종일관 미소를 띠고 있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워낙 찰나기에 가브는 그것을 보지 못했다.
가브는 그녀의 목에 단검을 갖다 대고 낮은 목소리로 협박했다.
“앞으로 내 주변에서 10미터 이상 떨어지지 마.”
“왜요?”
“알 필요 없다.”
슥-.
힐은 돌연 하얀 손을 들어 가브의 얼굴을 만졌다. 몸에 마기가 가득한 주제에 손은 늦봄처럼 따스했다.
“뾰족뾰족하다.”
탁.
가브는 그녀의 손을 매몰차게 쳐 내고는 짐마차 밖으로 나갔다. 나가면서 자신의 턱수염을 손으로 한번 쓸었다.
대의를 위한 소의 희생, 지금까지 이 손에 수많은 피를 묻혔지만 그런 선택을 해 본 적은 없다. 그녀를 죽이면 무조건 그 위험이 사라진다는 보장도 없으니 어려울지언정 신념을 지킨다.
검사에게 신념이 사라지면 살인마일 뿐이다. 힐을 죽이는 순간 자신도 마물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 * *
가브 일행은 마을을 피해 가다가 무역의 도시 가드리아 앞에 멈춰 섰다.
“렘.”
렘은 짐마차 뒤쪽에서 슬그머니 나타나 가브에게 묵례했다.
인원이 여덟 명이나 되고 가브와 세실리아를 제외하고는 익숙지 않아서 걸음걸이조차도 부자연스러웠다.
“예, 주군.”
“마차를 팔고 그 돈으로 낙타를 사 와야 한다. 헤딘은 어리고, 여인들은 무시당할 수 있으니 네가 직접 거래해야 한다. 할 수 있겠나?”
렘이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짧은 기간에 렘의 성격을 파악한 에런이 뒤에서 거들었다.
“기껏 변장시켜 줬는데 왜? 다 같이 가요.”
그녀의 말대로 가브는 잿빛 머리를 검게 물들이고 후드를 깊게 눌러썼고, 세실리아는 긴 머리를 틀어 올리고 코와 입을 가리는 면사를 둘렀다.
발튼은 산적 같은 수염을 깔끔하게 깎고 하얀 사제복을 입었다. 세실리아는 그의 행색을 보고 마주칠 때마다 변태 같다고 놀렸다.
가브는 렘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대답했다.
“아니, 발각되면 사막을 건너지 못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위험요소를 줄이는 방법이 있는데 선택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누가 해수 아니랄까 봐…….”
그때 렘이 주먹을 꼭 쥐고 고개를 번쩍 들었다.
“하겠습니다, 낙타 구매.”
가브는 믿음직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를 몰고 가는 렘은 긴장으로 얼굴이 잔뜩 굳어 있었다. 그러나 그 특유의 싸늘한 기운과 뱀파이어 같은 외형으로 인해 모르는 사람이 보면 더 무서울 뿐이었다.
에런은 렘의 옆에 앉아 작게 속삭였다.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걱정 말고 옆에 서 있기만 해요.”
“……예.”
에런은 몰랐다, 렘을 가장 긴장하게 만드는 것은 그녀의 귓속말이라는 것을.
가드리아까지는 아직 수배령이 닿지 않았는지 입구에서 검문검색을 하는 병사들은 없었다. 수배지 전단이 돌아다니는 것도 보지 못했다.
가브를 데려올까 했지만 이미 먼 거리이기에 일정대로 에런 일행만 시장으로 들어갔다.
가브의 예상대로 렘의 굳은 표정은 상인들에게 통했다. 에런이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제값에 마차 두 대를 처분했고 낙타를 구매하러 가는 길이었다.
낙타 시장을 둘러보는 길에 선한 인상의 사내가 에런 일행에게 접근했다.
“저기, 혹시 사막을 건너려고 하시오?”
에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사내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붉은 가죽갑옷에 허리춤에는 검이 채워져 있다.
에런이 뒤에 선 렘에게 힐끗 눈짓을 주자 렘은 눈치 빠르게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그녀는 도도하게 턱을 들어 올리며 답했다.
“그런데요?”
“아하, 우리가 실수로 낙타를 생각보다 많이 구했거든요. 다시 장사꾼에게 되팔기엔 차액도 만만찮고, 소량의 수고비만 주신다면 낙타도 빌려드리고 사막을 안전하게 건너게 해 드리리다. 어떻소? 괜찮은 제안 아니오?”
이엘은 의심 어린 표정을 지었고, 에런은 한쪽 입꼬리를 미세하게 올렸다.
“몇 마리나 있는데요?”
“오신다면 짐을 옮겨서 두 마리를 비워 드리지요.”
“아니, 전부 몇 마리냐고.”
갑작스러운 반말에 사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가 금세 펴졌다.
“아하, 다 해서 여덟 마리입니다. 인원은 스물이고요. 안전 걱정은 마시오. 우리가 붉은전갈 용병대입니다.”
대륙의 정보를 다뤘던 에런조차도 들어 보지 못한 용병대인데 얼굴에 자부심이 대단하다.
“우리 일행은 일곱 명인데.”
사내는 두 손을 활짝 벌리며 환하게 웃었다.
“아유, 여러분 같은 미녀분들이 동행해 주신다면 언제나 환영이죠.”
“남잔데. 아무튼 물어보고 결정할게요.”
남자라는 말에 사내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에런은 옷자락을 잡아당기는 이엘의 손을 떼어 내고는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브를 만나기 위해 외곽으로 가는 길.
이엘이 뒤따라오는 붉은 가죽갑옷의 사내를 힐끔거리며 에런에게 속삭였다.
“언니, 저 사람들이 나쁜 사람들이면 어쩌려고 그래요? 수상한데.”
에런은 자신보다 머리 하나만큼 작은 이엘의 정수리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톡 치고는 웃었다.
“너는 쟤네가 무섭니?”
“그야 당연히…….”
이엘은 말을 하다 말고 어둠 어딘가 있을 렘과 헤딘에게 시선을 주었다. 가브까지 갈 것도 없이 이들만 있으면 용병 스무 명쯤은 사실 일방적인 학살이 가능하다.
“이, 이엘 누님. 왜 그렇게 봐요? 미, 민망하게.”
“아냐, 그냥 고마워서.”
무서워할 것은 저들이 아니라 이들이었다.
에런 일행은 성 밖에서 기다리던 가브와 마주했고, 세실리아와 힐 아슈를 발견한 사내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기쁨을 참아 냈다.
‘뭐 하는 사람들이야? 세상의 미녀들을 여기에 다 모아 놨네.’
가브는 에런에게 이야기를 전해 듣고 바로 수락했다. 사내는 콧노래까지 부르며 자신의 용병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브 일행을 안내했다.
그들은 사내가 말했던 대로 붉은 가죽갑옷에 무기를 든 용병 스무 명에 낙타도 여덟 마리나 있었다.
“뭐야, 왜 이렇게 많…….”
덩치가 가장 크고 수염이 덥수룩한 용병대장이 말을 하다가 말고 바로 뒤돌아서 대원들에게 소리쳤다.
“얘들아! 막내가 손님 모셔 왔다! 얼른 가서 짐 들어 드려라!”
“예에!”
“옙, 대장!”
대원들은 금세 자신들의 짐을 옮겨 낙타 세 마리를 비게 하고, 싱글벙글 웃으며 가브 일행의 짐을 빼앗듯이 받아서 낙타 등에 얹혀 주었다.
그들은 두당 40실버, 깎아서 총 2골드를 사막 횡단 보호비로 요구했다. 낙타가 한 마리에 100골드를 호가하니 매우 저렴한 장사였다.
붉은전갈 용병대는 출발하여 사막에 들어설 때까지 웃음을 잃지 않고 과한 친절을 보이며 가브 일행을 모셨다.
그러나 사막 초입부터는 조금씩 아슬아슬하게 선을 밟는 행동이 오갔다.
가령 세실리아에게는…….
“와우, 아주 정복욕을 자극하는 도도함이 가득한 아가씨! 이름이 뭐야?”
“알 필요 없어.”
이엘에게도…….
“이에르 씨, 다음부턴 생리 현상이 있으면 나한테 말해. 저런 비리비리한 것들로 안심이 되겠어? 갑자기 거대 개미라도 튀어나오면 큰일이잖아.”
“괜찮……습니다.”
에런은 물론이고.
“이야…… 에렌 씨는 볼 때마다 이 가, 아니 마음이…… 참 풍성하단 말이야. 그 마음에 얼굴을 파묻고 싶구려.”
“호호, 미치셨나.”
감히 왕의 여동생이라고는 상상도 못 하고 힐 아슈에게도 치근덕거렸다.
“헬 양? 아이고, 앞도 안 보이면서 이런 가녀린 다리로 어찌 사막을 건너려 하오? 안 되겠소. 나한테 업히시오.”
“그럴까요?”
가브는 대원에게 두 팔까지 뻗는 힐 아슈의 손을 잡아끌어 내렸다. 대원은 가브를 째려보며 아쉬워했다.
조금만 더 불쾌하게 하면 아예 낙타값을 치르고 떨어질 생각이었는데, 이후부터는 대원들이 그럴 시간이 없어졌다.
콱- 콱!
-키헤에엑!
본격적으로 사막에 돌입하자마자 거대 개미와 거대 병정개미, 거대 전갈이 거의 쉬지 않고 덤벼들었기 때문이다.
사막 횡단의 적정 인원은 열다섯 명이다. 그것의 두 배에 달하는 인원이기에 미리 걱정했지만 용병대 쪽에서 자신감을 보이며 같이 건넜던 것이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많이 들이닥치자 용병대장의 얼굴에서 여유가 점점 사라져 갔다.
다른 대원들도 같은 생각인지 조금 여유가 있을 때 한두 명이 다가와 대장과 긴밀하게 대화를 나눴다.
“너무 많은가 봅니다. 조를 둘로 나눌까요?”
“열 명이면 아슬아슬하지. 우리가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 있나, 다른 방법이 있는데. 그렇지 않습니까, 대장?”
“그래…… 그렇지. 이제 쓸데없이 힘 빼지 말고 정리하자.”
용병대장의 말에 대원들은 서로 눈을 맞추고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의 습격이 마무리되자, 용병대장이 검을 모래에 닦고 검집에 넣지 않은 채 가브 일행에게 다가왔다.
“어이, 손님들. 진짜로 다 데리고 사막 넘으려 했는데 이 개미 새끼들이 하두 몰려와서 일정이 변경됐어.”
용병대장의 말에 뇌 맑은 힐 아슈는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떤 일정이지요?”
“응, 이쁜아. 시꺼먼 놈들은 여기에 묻고 가는 일정, 다음 일정은 네년들을 마음껏 이뻐해 주는 거니까 조금만 기다려잉. 얘들아! 정리하자!”
대장의 외침에 대원들이 무기를 든 채로 가브 일행을 둥글게 둘러쌌다.
그러나 곧 용병대장은 무언가 이상함을 느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벌써 두 무릎을 꿇고 눈물콧물 질질 짜며 목숨을 구걸했을 텐데, 이 이상한 일행은 뻣뻣하게 서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았다.
너무 무서워서 얼었나 싶었지만 남자들은 물론이고 여자들의 얼굴에도 긴장이나 두려움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뭐지? 싸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