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47
47화
짧은 머리에 굵직한 수염, 불만이 가득 담겨 있는 눈, 나이는 사십에 가까워 보였다.
명문 가문에서 체계적인 훈련을 받으면 20대 초중반, 빠르면 10대 후반에 마나가 몸에 깃들어 기사 시험을 넘볼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사병들은 아무리 칼 밥을 먹고살아도 평생 마나가 깃들지 않는 자들이 태반이다.
그저 그런 귀족 가문의 자제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이 짧은 머리 사내는 그저 그런 귀족에 포함되어 보인다.
“왜? 정곡을 찔리셨나?”
말 한 번 섞어 보지 않은 폴 아이드를 아무리 욕해 봤자 분노의 감정은 티끌만큼도 올라오지 않는다.
그러나 진짜 가츠 아이드라면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진짜 가츠 아이드처럼 행동해야 한다.
가브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걸음을 옮겼다.
생각보다 다부진 몸에 안광이 예사롭지 않자 사내가 살짝 움찔했다.
“너는?”
“나? 나는 대갈라문트 자작가의 베로 갈라문트 님이시다. 이름 들으면 뭐 좀 달라질 줄 알았나?”
“베로…….”
가브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의 얼굴에 손을 뻗었다.
그때, 뒤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아이드 씨?”
베로가 의식하지도 못하게 코앞까지 다가왔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가브는 손을 거두고는 뒤돌아서 목소리의 주인공을 확인했다.
“오, 역시 맞네요. 같은 생활관이었어요? 반가워요. 이게 다 무슨 인연이야!”
그는 소매치기를 당했던 후작가의 자제, 린 바레스였다. 앞으로의 행보에 귀족의 인맥은 중요하다. 가브는 그답지 않게 살짝 입꼬리를 올리며 린을 반겼다.
20대 초반의 린 바레스는 처음 느꼈던 인상대로 세상의 때가 묻지 않은 청년이었다.
그는 밖에서의 인연을 빌미로 가브 옆에 자리를 잡고 대화를 나눴다.
거대한 제국이라고 해도 후작의 수는 스물을 넘지 않는다.
남작과는 하늘과 땅 차이의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후작가다.
아까는 시험 응시 때문에 어쩔 수 없었지만, 이렇게 인연이 됐으니 끈끈하게 이어 간다.
가브는 그의 말에 성의껏 반응했다.
“……그러면 남은 과목을 거의 다 만점을 받아야겠네요?”
“네.”
“와…… 걱정 안 돼요?”
“네.”
“난 엄청 걱정되는데, 이번에 못 붙으면, 쫓겨날 수도…….”
가브가 대답을 끊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자, 린이 작은 목소리로 설명을 이었다.
“아, 제 어머니가 셋째 부인이시거든요……. 검술 교육 받는 것도 엄청 눈치 보면서 받았어요.”
“아…… 네.”
둘째도 아니고 셋째 부인의 아들. 왜 쓸데없이 관용적인지, 왜 생활관 내 다른 사람들이 아부하지 않는지 한 번에 이해가 됐다.
가브는 고개를 한 번 크게 끄덕이고는 자리를 폈다.
“휴식은 최선의 준비입니다.”
“아, 맞죠. 네, 저도 얼른 잘 준비 해야겠네요. 가츠 씨도 내일 시험 잘 보십시오!”
린은 순진한 눈망울로 한 손을 들어 주먹을 꽉 쥐며 응원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기사 연병장 입소 이틀째.
두 번째 시험을 보는 아침이 밝았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연병장 앞에 응시자들이 모두 모였다.
그 수는 대략 일흔 명, 여자 응시자도 열 명은 되어 보였다.
단상에 중년 감독관이 올라서서 응시자들을 둘러보며 외쳤다.
“예비 기사분들, 반갑습니다! 두 번째 과목은 벽돌 나르기입니다. 줄을 맞춰 저를 따라오시기 바랍니다.”
“벽돌 나르기?”
“단순노동인가?”
“딱 보면 몰라? 근력 시험이잖아.”
감독관은 응시자들을 데리고 기사 연병장을 빠져나와 서문을 통과하고 바깥의 가까운 돌산 앞에 멈춰 섰다.
그곳에는 기술자들이 일정한 크기로 깎아 놓은 벽돌 수백 개가 쌓여 있었다.
오는 길에는 보조 시험관들 열 명 정도가 드문드문 서 있었다. 꾀를 부리지 못하도록 감독하는 역할인 듯했다.
“시험은 단순합니다. 여기에 있는 벽돌을 서문에서 나올 때 보았던 성벽을 보수하는 곳까지 옮기면 됩니다. 나르는 방법은 자유입니다. 단, 기구는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뭐야, 그게 무슨 자유야?”
“집에서 의자 한 번 안 나르던 내가 벽돌을…….”
“젠장, 이게 기사랑 무슨 상관이 있는 거야?”
가만히 응시자들의 불만을 듣던 감독관이 고개를 돌렸다.
“과목에 불만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빠지시면 됩니다. 시험은 여기에 있는 벽돌을 모두 나르면 종료됩니다. 만점은 첫 번째와 마찬가지로 10점입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하겠습니다.”
“앗, 아, 시팔…….”
“아오, 무거워.”
벽돌은 두 팔로 한아름에 들어가는 크기로, 그 무게가 70킬로그램은 되는 듯했다.
이곳에서 목적지까지는 대략 30분, 열 개만 옮겨도 하루가 지나갈 것이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한숨을 푹푹 쉬며 벽돌을 어깨나 등에 짊어지고 옮기기 시작했다.
‘벽돌 옮기기라…….’
고된 훈련을 거쳐 몸에 마나가 깃들게 하고 기사에 도전했다고 해도, 전투에 관련된 행동이 아니면 마나가 활성화되지 않는다.
즉, 이런 단순노동에서는 마나 없이 본래의 체력만으로 승부를 봐야 하는 것이다.
누군가의 말대로 이건 기사의 덕목에 어울리지 않는다. 단순히 근력 시험이 아닐 것이다.
매년 과목이 달라져 점수에 중점을 두는 게 무엇인지는 미리 알 수 없다.
가브는 벽돌을 짊어지고 걸으며 생각에 잠겼다.
“아얏.”
그때, 한 여인이 비틀비틀 걸음을 옮기다가 바닥의 돌을 밟고 발목을 삐끗했다.
그 옆에 있던 린 바레스가 자신의 벽돌을 내팽개치고 재빨리 다가가 그녀를 살핀다.
“괜찮아요?”
“아…… 네. 감사합니다.”
여인이라고 해도 단련된 신체이다 보니 금방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멀쩡하게 걸었다.
그때, 길목에 서 있는 시험관 중 하나가 린을 바라보다가 서류에 무언가를 적었다. 가브는 그 모습을 놓치지 않았다.
‘저거다.’
가브는 그 뒤로 힘겨워하는 자들과 함께 나르고, 부상당한 자들을 앞장서서 살폈다.
그 모습에 베로 갈라문트가 지나가며 이죽거렸다.
“혼자서는 못 드니 계집애처럼 둘이서 하나를 옮기는 거냐? 아니면 뭐 어차피 안 되는 거, 여기서 여자 하나 꼬시기로 경로를 바꿨나? 크큭.”
가브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주변에 시험관이 있는 것을 눈치채고는 손을 들어 한번 휘적거렸다.
“훠이.”
“뭐? 이 새끼가 지금 나랑 장난하나, 야, 거기 안 서?”
가브는 베로의 말을 무시하며 발에 힘을 주었다.
둘의 모습을 보며 시험관은 서류에 열심히 체크했다.
그렇게 아침부터 해가 떨어질 때쯤에야 모든 벽돌을 날랐다.
“예비 기사님들 오늘 수고 많으셨습니다. 식사하시고 들어가면 각 생활관 욕실에 따뜻한 물을 준비해 놨으니 푹 쉬시고, 내일 시험 때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끝났다아!”
“아오, 등 쑤셔.”
“미치도록 힘들었다. 검술 수련보다 더 힘들다니.”
점수는 바로 발표되지 않았다.
마지막 날에 생활관 앞에 과목별 점수가 붙는 방식이다.
45점 미만은 알아서 불합격이라고 판단하면 되는 것이다.
시험 때문에 점심이 제공되지 않아서인지 저녁은 매우 푸짐했다.
오죽하면 바로 맞은편에 앉은 베로가 시비도 걸지 않고 먹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우웁. 아, 너무 급하게 먹었나.”
그는 갑자기 안색이 변하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두리번거리다가 식판을 가브의 식판에 턱 겹쳐 올렸다.
“야, 이것 좀 버려.”
“어? 베로 씨, 이게 뭐 하는 겁니까?”
그의 돌발 행동에 옆자리에 있던 린이 나섰다.
베로는 인상을 확 찌푸리며 위협적으로 한 손을 들어 올렸다.
“뭐? 씨팔, 사생아 새끼가 어딜 나대? 뒈질려고, 아오.”
“뭐, 뭐요……?”
린은 생전 처음 느껴 보는 모욕감에 충격을 받아 말을 잇지 못했다.
베로는 한 번 더 인상을 쓰고는 배를 부여잡으며 식당을 나갔다.
아무리 서자라고 해도 감히 자작가가 후작가의 일원에게 이런 쌍욕을 퍼붓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베로는 린의 처지와 실력을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가브는 그의 어깨를 한 번 툭 치고는 두 개의 식판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혀, 형님…….”
언제부턴가 형님이라고 부르는 린이었다.
통통한 볼살에 깨끗한 피부를 지닌 막냇동생 같은 린에게는 퍽 어울렸다.
어차피 기사 임명을 받고 작위가 달라지면 서로 호칭이 달라지겠지만, 지금은 그가 제시하는 대로 대해 줬다.
“아픈 사람이 이상한 말 한다고 일일이 신경 쓰는 거 아니야. 먹고 와.”
가브는 그렇게 말하고는 식판을 놓고 식당에서 나갔다.
린은 그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런 놈이 맡긴 식판을……. 형님은 마음도 어깨처럼 넓으시구나.’
푸득, 푸드드득.
식당 옆 화장실, 배 안에서 용솟음치던 것을 배출해 낸 베로는 한결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이 씨, 문 닫혀 있으면 알아서 딴 데-.”
콰직!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무 문이 아작 나며 한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뭐, 뭐야, 너는-!”
가브는 아직 바지도 올리지 못한 베로의 멱살을 잡아 번쩍 들어 올렸다.
베로는 지금 느껴지는 어마어마한 악력에 순간 잘못 건드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서를 빌려는 찰나 세상이 거꾸로 돌았다.
퍼억!
찝찝한 열기와 코를 마비시킬 것만 같은 악취, 어둠 사이로 꿀렁이는 무언가와 꿈틀거리는 구더기들이 보인다.
머리가 변기 아래에 박힌 것이다.
“우우웨엑!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퍽, 퍽!
아슬아슬하게 끼어 있던 어깨가 점점 안으로 들어간다.
베로는 이러다 똥통에 빠져 죽겠다 싶어 다급히 소리쳤다.
“너, 이 씨팔! 아이드 가문 멸문시켜 버린다, 이 개새끼야!”
퍼억!
“끄아악!”
이윽고 어깨가 완전히 안으로 빠졌고, 베로의 몸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턱.
그렇게 구더기와 인사할 만큼 얼굴이 가까워졌을 때 기적처럼 추락이 멈췄다.
발목을 잡고 있는 단단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위에서 중저음의 목소리가 신탁처럼 들려왔다.
“여기 빠져 죽으면 시체는 언제 발견될까?”
“제발…… 제발 살려 줘……. 시발…….”
“1년? 2년? 여긴 시험 때 외에는 잘 사용하지 않으니 어쩌면 다 썩어 없어질 때까지 아예 발견이 안 될 수도 있지.”
“내가, 내가 뭐든지 할게, 할게요. 꺼내 주…… 우웩.”
“나는 네가 그냥 시험만 열심히 봤으면 좋겠군.”
“그러겠습니다. 선생님 눈에 절대 띄지 않고…… 우아악!”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베로의 몸이 쭉 뽑혀 올라갔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는 진흙 같은 것이 살짝 묻어 있었다.
가브와 얼굴을 마주했지만 악취와 공포에 얼이 빠져 덜덜거리고만 있다.
가브는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려다가 멈칫하고는 입을 열었다.
“그래, 착하다.”
가브는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가 뒤돌아서 화장실을 벗어났다.
베로는 너덜거리는 문을 닫고 한참이나 그곳에서 나오지 않았다.
* * *
셋째 날이 밝았다.
“세 번째 시험은 대련입니다. 무기는 종류에 따라 상성이 있어 공정한 평가를 하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무투술로 대련을 진행합니다. 이번 과목은 만점 20점입니다.”
‘20점…….’
가브의 눈은 비장하게 빛났다.
그 옆의 린은 망연자실한 표정을 짓고 있었고, 뒤의 베로는 가브의 뒷모습을 보며 이를 덜덜 떨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