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89
89화
“렘…….”
렘을 보자 셀이 은연중에 자랑하던 때가 떠올랐다.
[렘은 천성적으로 은신에 특화되었습니다. 저는 물론 선배님도 은신술만큼은 그를 따라가지 못할 겁니다.]만물은 마나로 이루어져 있고, 한 재주로 어떤 경지에 이르면 그 재주를 부릴 때 마나가 깃든다.
렘은 은신할 때 자신의 몸에 깃든 마나를 주변 환경과 동화시킬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아예 시각적으로 투명해질 순 없지만 바로 옆에 있어도 존재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가브는 렘의 은신술에 놀라면서도 실망을 감추지 못했다. 렘 역시 가브의 반응에 고개를 떨구었다.
렘은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입을 열었다.
“태제의 명으로 카르마 지부에 들렀다가 돌아오는 길입니다. 태제의 행방을 아시는지요.”
저벅저벅.
가브는 느린 걸음으로 렘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려 가브와 눈을 마주쳤고 그 눈빛만으로 대답을 읽었다.
“그렇군요.”
“미안하다.”
렘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두 숨을 쉴 동안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태제가 가브 님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면 전하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
“‘선배님, 저는 제가 원하는 대로 선택한 것입니다. 저의 선택과 결과를 짊어지지 마십시오.’라고…….”
말투, 표정, 생김새까지 비슷하다 보니 마치 셀이 직접 눈앞에 있는 것만 같았다. 가브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보며 렘은 말을 이었다.
“대신 저를 책임지라고 하셨습니다.”
“뭐?”
“주군으로 모시겠습니다.”
“셀이 그런 말도 했다고?”
렘은 단호한 눈으로 가브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비아 신께 맹세코, 진실입니다.”
“네가 신을 믿었던가?”
“…….”
무미건조한 회색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결백을 외친다. 눈가가 붉고 물기가 어린 모습이, 마치 양손검으로 과일을 깎듯이 썩 어울리지 않는다.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기에 더욱 그의 슬픔이 와닿았다.
가브는 본능적으로 이 침묵과 공기를 참을 수 없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는 말을 돌렸다.
“여기까지는 어떻게 찾아왔지?”
“붉은달 기사단의 집무실에서 자료로 확인했습니다.”
“그래…….”
렘에게는 갈 수 있는 곳이 없는 듯했다. 그의 존재를 알았더라면 시간 낭비할 것 없이 그레이의 별장을 이 잡듯이 뒤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렘은 할 말을 끝내고 바로 고개를 숙이고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그대로 있었다. 가브는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가 입을 열었다.
“가라. 나는 누군가의 주군이 될 수 없다.”
“그림자는 주군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받아 주시지 않는다면, 자결하여 태제를 모시러 가겠습니다.”
렘은 빈말이 아니라는 듯이 바로 품에서 날카로운 단검을 꺼내어 경동맥에 정확히 찌르려고 했다. 가브는 다급히 그의 손목을 잡아챘다.
“골치 아픈 놈이군. 그러면…… 나의 동생, 이엘에게 가라. 가서 그 아이를 위해 살아라.”
렘은 단검을 내리고 고개를 들었다.
“가브 님 이외에는 주군이 될 수 없습니다. 주군으로서의 명이시라면 따르겠습니다.”
가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렘에게 명한다. 이엘의 곁에 머물러라, 다시 만나면 다음 명을 내리리니.”
렘은 절도 있게 한 손을 심장에 가져다 대며 대답했다.
“예, 주군.”
스윽.
렘은 그대로 일어나 뒷걸음질을 쳤다. 세 발자국, 딱 세 발자국 뒤로 떨어지자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곳에 분명히 있다고 단정 짓고 찾지 않는 이상 보이지 않을 정도다.
가브는 그가 사라진 어둠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먼 곳까지 자신만 바라보고 찾아온 렘, 그는 자신 때문에 주군을 잃었음에도 자신을 원망하지 않고 오히려 따르기 위해 목숨까지 걸었다.
주군을 잃은 슬픔을 삼키던 렘의 눈빛과, 남쪽에서 자신만을 바라보고 있을 이엘이 떠올라 가브는 마음이 괴로웠다.
‘나는 대체…… 무얼 해야 하는가? 아니, 이 몸으로 뭘 할 수 있나…….’
슥.
그때 낯선 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린이었다.
“형님, 여기 계셨어요? 한참 찾았습니다.”
“날 왜?”
“그, 그야…… 거, 걱정돼서요.”
가브는 헛웃음이 나왔다. 자신이 어쩌다가 저 비극의 주인공이 걱정하는 사람이 되었나 싶었다.
“가자.”
“예, 형님.”
가브는 숙소로 돌아가고자 걸음을 뗐다. 앞서가는 린의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자가 신성력을 쓰던데.”
“아, 이미 만나자마자 신성력을 쏟아부어 주셨죠. 그런데…… 뼈까지 맞추고 붙이는 건 불가능한가 봐요. 그래도 통증은 많이 가라앉았어요……. 앗.”
린은 골목길을 벗어나 큰길로 나가기 직전에 멈칫했다. 가브가 그를 지나쳐 나가려고 하자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저, 조금 있다가 나가요.”
린의 눈동자가 떨리고 있었다. 가브는 그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이곳의 범죄자들과 달리 검은 휘장에 판금갑옷을 제대로 갖춰 입은 기사 두 명이 보였다.
턱.
린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들이 비틀거리는 취객과 부딪힌 것이다.
기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취객의 머리채를 잡고 배에 주먹을 꽂았다.
퍽!
“읍, 우웨엑!”
취객은 그 충격에 허리를 접으며 토악질을 해 댔다. 그러자 그 더러운 토사물이 기사의 갑옷에 그대로 묻었다.
기사는 분노에 주먹을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이, 이 쓰레기가…… 감히!”
퍽, 퍽, 퍽! 퍼석! 쾅!
기사는 그를 넘어트리고 발로 가슴과 얼굴을 무자비하게 밟았다.
얼굴이 함몰되고 가슴이 가라앉았지만 사람들은 옆에서 지켜만 볼 뿐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바닥에 누워 있는 취객은 백인대원 중 한 명이었다.
어깨를 부딪힌 것만으로 목숨을 거둬 갔다. 가슴이 얕게 움직이는 것을 보면 아직 숨은 붙어 있지만 평생 불구로 살 거나 얼마 못 가서 죽을 것이다.
린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다가 기사들이 아예 보이지 않자 입을 열었다.
“저들이 검은사자 기사단이에요, 세 개 요새를 관리하는…….”
검은사자 기사단은 장벽의 군인들에게 가장 두려운 존재다. 요새를 지키는 그들은 옥지기 기사단이라고도 불리며, 장벽 수비단을 개미 목숨보다 쉽게 본다.
“……이곳을 탈출하려면 저들을 뚫고 나가야 해요. 간신히 문지기들을 뚫고 나가도 기사단이 금세 추격해 오죠.”
가브는 두려움이 가득 담긴 린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물었다.
“너도 돈을 받지 않았나? 다들 저곳에 들르던데.”
가브가 가리킨 곳은 창녀촌이었다. 린은 고개를 숙이며 얼굴을 붉혔다.
“다녀……왔습니다.”
소년으로 보았는데, 그도 남자는 남자였다.
* * *
이엘은 이곳에 자신이 갇힐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하녀들과 함께 아이드성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
멜론과 위케리스, 특무대와 일반 사병들은 다른 곳으로 끌려갔다.
간수의 얘기를 들어 보면 처형되지는 않고 어딘가로 팔리는 듯했다.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이엘의 마음은 처량했다.
끼익.
옥을 관리하는 관리장이 있다. 갑옷을 보면 기사급인 듯했다. 그가 들어서면 하녀들은 긴장한다.
“거기 너, 나와.”
“예, 예? 저, 저요?”
기사는 문을 열고 하녀 한 명을 가리켰다. 이번이 세 번째다. 하녀는 미지의 두려움에 이엘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떨었다.
이엘은 그녀를 뒤로 숨기며 기사에게 물었다.
“이들을 대체 어디로 데려가는 거지! 말이라도 해 줘!”
기사는 얼굴을 찌푸리며 손을 휘휘 저었다.
“귀하게 자라셔서 상황 파악이 잘 안 되시나 봅니다. 신경 끄시고 얼른 옆으로 꺼지세요.”
“말해 주기 전엔 절대 못 데려가네.”
“아이 썅, 안 비켜?”
옆으로 치우려 해도 이엘이 힘을 주면서 버티자, 기사가 손을 들어 그녀의 따귀를 갈겼다.
짜악!
“꺄윽!”
기사의 힘이 담긴 따귀에 이엘은 고개만 돌아간 것이 아니라 아예 옆으로 엎어졌다.
그사이 기사는 하녀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거칠게 끌고 나갔다.
“아, 안 돼! 아가씨, 아가씨!”
“제, 제이렌!”
기사는 하녀를 끌고 나왔고 간수는 다시 옥문을 잠갔다. 이제 이곳에는 이엘과 하녀 한 명밖에 남지 않았다.
“어떡해…… 제이렌까지……. 아가씨, 저 어떡해요? 어디로 끌려가는 걸까요……?”
이엘은 화끈거리는 뺨을 부여잡고 아무런 말도 해 주지 못했다.
‘오라버니…… 저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엘은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며 하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며칠 후, 기사가 다시 옥에 들어왔다. 이엘은 벌떡 일어나 하녀를 뒤에 숨기고 벽에 바짝 붙었다. 습관적으로 품을 더듬었지만 가브가 준 테라의 이빨은 옥에 들어올 때 빼앗기고 없었다.
끼익-.
“안 돼. 절대 못 보내. 이 아이를 데려가려면 날 죽이고 가라.”
“아가씨…….”
기사는 가소로운 듯이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
“걱정 마십시오, 귀족 아가씨, 오늘은 당신이야.”
“……뭐?”
“놀라긴. 특별히 아가씨는 어디로 가는지 알려 줄까? 저기 사막 너머 왕국에 한 귀족의 노예로 가게 될 거야. 여기에 있던 그 누구도 널 찾지 못할 거니까 거기서 새로운 주인한테 예쁨받으면서 잘 살아.”
기사가 가까이 다가와 가녀린 두 손목을 묶는데도 이엘은 충격에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다. 그녀는 가만히 있다가 눈시울을 붉히며 고개를 들었다.
“나,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기면 오라버니가 가만히 있지 않을 텐데?”
“착각도 자유야. 이봐, 저 멀리 최북 전선에서 그 잘난 오라버니가 네 소식을 들을 수 있을 것 같아? 죽었다 깨어나도 못 들어. 너는 처음부터 이렇게 팔릴 처지였어. 그래도 다행이라고 생각해. 쟤네는 다 군 사창가에 팔렸으니까.”
기사는 이엘의 손목을 묶은 줄을 잡아끌었다. 이엘은 멍한 얼굴로 반항도 하지 못하고 그에게 끌려갔다.
“아가씨! 아가씨!”
그 소리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엘은 바로 옆을 지나치는 간수를 발로 차며 그의 검을 뽑았다. 그리고 앞장서서 가는 기사에게 검을 휘둘렀다.
퍽!
“아.”
머리를 향해 휘둘렀지만 기사가 키도 크고 이엘의 두 손목이 묶여 있어 제대로 힘을 받지 못하여 치명상을 주지 못했다.
기사는 머리에 피를 흘리며 뒤돌아서 이엘을 살기 어린 눈으로 노려보았다.
“이 미친년이! 넌 그냥 돈이고 뭐고 내 손에 뒈져야겠다!”
기사는 줄을 잡아당기며 이엘에게 주먹을 뻗었다. 큼지막한 주먹이 꽂히면 이엘의 연약한 얼굴은 함몰되거나 아예 터져 나갈 것이다.
“꺄아악!”
하녀도 이를 예상하며 비명을 내지를 때였다.
퍼석!
머리 터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엘은 자신이 눈을 감은 것인지, 죽어서 눈이 어두워진 것인지 헷갈렸다.
스으윽.
눈을 가리고 있던 핏물이 내려가자 그제야 상황을 확인할 수 있었다.
“너, 너는…….”
눈앞에는 검은 후드를 깊게 뒤집어쓴 진갈색 눈동자의 소년이 서 있었다.
쿠웅-.
바닥에는 머리가 사라진 기사의 시체가 쓰러져 있었다.
소년은 이엘을 보며 두 검지의 끝을 마주하고 빙글빙글 돌리다가 옆에 넘어져 있는 간수를 발견했다. 가까이 다가가 한 손으로 간수의 머리를 잡는다.
퍼석-.
두개골의 강도가 만만치 않건만, 소년은 마치 달걀을 깨트리듯이 손쉽게 머리를 터트렸다.
그러곤 다시 수줍은 표정으로 이엘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이엘을 잘 지켜라. 자, 잘 지켜라. 주, 죽을 위기에 처하면 쓰라고 했어요, 스승님이.”
소년, 헤딘은 마치 장난하듯이 검지와 중지로 이엘의 손목을 묶은 줄에 가위질을 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손가락 굵기의 줄이 깔끔하게 잘려 나갔다.
이엘은 전에 성에서 보았던 모습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던 헤딘의 모습에 아무런 말도 잇지 못했다.
헤딘은 검지로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나, 나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