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90
90화
붉은달 기사단의 협회 습격 직후.
철퍽, 철퍽, 철퍽.
울창한 숲, 거대한 덩치의 사내가 가녀린 체구의 여인을 업고 무겁게 발을 옮기고 있다.
혼절한 세실리아를 업은 발튼이다. 그는 발을 내딛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중얼거렸다.
“주군께, 주군께 가야 해……. 주군께…….”
그때 피 묻은 발자국을 추적해 온 무리가 그의 길을 막아섰다. 그들은 협회를 습격했던 귀족의 사병이나 붉은달 기사단은 아닌 듯 보였다.
발튼은 나무에 조심스럽게 세실리아를 기대어 놓고 반쯤 감긴 눈으로 그들을 노려보았다.
“와라, 내 아직 너희의 머리통을 부술 힘은 있으니…….”
도적들은 그를 보고 마치 치명상을 입은 불곰과 같은 기세를 느꼈다. 아슬아슬하지만 건드리면 목숨을 다할 때까지 몸을 불사를 기세.
그들은 섣불리 다가서지 못하고 주춤거렸다.
“덩치도 크고, 싸움도 꽤 할 것 같네.”
“위험해 보이는데…….”
“그럼 좋지. 검투사로 팔면 딱이네. 뭐 해? 쏴.”
그들은 발튼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다. 바로 허리춤에서 대롱을 꺼내어 마비 독침을 쏘았다.
퓩, 퓨슉, 퓩!
“와, 질기네.”
“물건이구만요.”
서 있는 것만으로도 힘든 상황에서 발튼이 독침을 피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발튼은 독침을 열 방 넘게 맞고서야 그 자리에 두 무릎을 꿇었다.
* * *
발튼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온몸이 꽁꽁 묶인 채로 수레에 실려 가는 중이었다. 발튼이 굴러서 수레 아래로 떨어지자, 도적 한 명이 다가와 검을 목에 갖다 댔다.
“덩치 이제 깨어났네. 그럼 걸어야지.”
그 말에 다른 도적이 발튼에게 다가와 목에 굵은 밧줄을 걸었다. 발튼은 그 도적에게 다급히 물었다.
“세실리아는! 세실리아는 어디 있지!”
“뭐야, 뭔 소리야, 이 새끼가? 세실리아가 뭐야?”
“같이 있던 여자…….”
발튼은 몸이 꽁꽁 묶이고 목줄까지 찬 상태였지만 뿜어내는 살기는 야수의 그것과도 같았다. 도적은 흠칫하며 물러나 중얼거렸다.
“씨벌, 깜짝이야. 우리가 봉사자도 아니고, 이미 뒈진 년을 데리고 오겠냐? 그냥 버렸지.”
“주, 죽었다고……?”
“그래, 뒈진 지 한참 됐더만.”
“세실리아가…… 죽었다고…….”
발튼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 무엇인지 몸소 느꼈다. 주군 가브에게 대들면서 세실리아를 쫓아갔던 때가 떠오른다. 결국 그녀를 지키지 못하고 자신만 살아남았다.
자신과는 다르게 훨씬 오래전부터 세실리아와 가브가 함께했다는 것을 느낄 때마다 질투했던 때가 스쳐 간다.
그녀를 지키지 못했으니 가브가 자신을 미워할 것이라는 생각이 가득했다.
이제 세상에 세실리아는 없다. 이미 축 처진 몸을 업고 다닐 때부터 세실리아의 죽음을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발튼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미안합니다. 죄송합니다.”
도적들은 발튼의 이상행동에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돌연 입을 쩌억 벌리자 그에게 달려갔다.
“야! 저 새끼 잡아!”
콱!
발튼은 바로 혀를 깨물어 자살을 시도했다. 도적들은 다급히 발튼에게 달라붙어 말려들어 가는 혓바닥을 잡았다.
발튼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나무에 몸이 단단히 묶여 있는 상태였다. 이번에는 입에 재갈까지 물려 있어 자살조차 할 수 없었다.
‘난 살아 있을 자격이 없어.’
발튼은 아사를 선택했다. 그는 아무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천천히 찾아오는 죽음을 기다렸다.
퍽, 퍼벅, 퍽, 퍽!
한편 발튼에게서 멀지 않은 곳에서 여인들이 몰매를 맞고 있었다.
“으으읍, 으으!”
‘너 때문에 이게 뭐야, 이년아!’
“아우…… 우웁, 우.”
‘조용히 해라, 아가리 찢어 버리기 전에.’
탈출에 실패한 세실리아 덕분에 마차 안에 있는 여인들은 모두 재갈이 물렸다.
손발도 다시 묶였지만 세실리아의 눈동자는 선명하게 반짝였다. 그 짧은 시간에 얻은 정보는 많았다.
도적은 총 서른 명이 넘지 않는다는 것과, 발튼이 살아 있다는 것, 주변은 수풀과 나무만 가득한 울창한 숲이라는 것이다.
‘마물의 습격이 한 번만 오면…….’
그때 잠깐 봤던 발튼의 상태는 자신보다 훨씬 안 좋아 보였지만, 둘 다 풀려난다면 이 정도 인원은 충분히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세실리아는 재갈을 풀어 주는 식사 시간만을 기다렸다.
‘젠장.’
그러나 이제는 아예 방법도 달라졌다. 아예 마차에서 여인들을 꺼내어 사내 무리가 보는 앞에서 식사를 하게 하는 것이었다.
먹을 것은 감자도 아닌 먹다 남은 음식물 쓰레기들. 그래도 회복과 근력을 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했다.
여인들이 손발이 묶인 상태로 바닥에 있는 음식들을 핥아먹는 모습을 보며 그들은 온갖 음담패설을 퍼부었다.
“어우, 자세가 참.”
“아주 먹음직스럽게 먹네.”
“이야, 저년은 먹는 것도 전투적이야. 죽겠네, 아주 그냥.”
하지만 약속이라도 되어 있는지 여인들을 직접 건드리는 사내들은 없었다.
세실리아는 고개를 돌려 발튼을 찾아보았다. 눈이 퀭하고 눈빛에는 생기가 없다. 몸 여기저기는 상처투성이에다가 제대로 치료도 받지 못하고 고름이 줄줄 흐르고 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모르지만 그 큰 덩치가 바짝 말랐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야위어 있다.
저러니 어제 그런 난리를 피웠어도 못 본 것이다.
그때 이마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발튼의 앞에 서서 입에 물을 한 모금 담았다가 침을 뱉듯이 뿌렸다.
푸우우-.
발튼은 얼굴에 물이 뿌려졌어도 아무런 반응 없이 가만히 있었다.
“뭐야, 물도 안 처먹어?”
“대장, 이 새끼 금방 죽겠는데요? 그냥 버릴까요?”
“아냐, 뒈질 때 되면 먹겠지. 이런 덩치는 찾기도 힘들어. 쓸데가 얼마나 많은데. 가자.”
“그런가? 예~.”
슥슥, 삭삭, 슥슥.
이동하고 있는 마차 안, 세실리아는 밧줄을 마차 모서리에 역으로 튀어나온 곳에 열심히 비벼 댔다. 이빨 빠진 여인은 그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우으, 아우으웁.”
‘그렇게 백날 비벼 봐라. 그게 풀리나, 미친년.’
뚝.
“업.”
몸에 마나가 깃들어 있는 사람은 일반인의 상식을 깨트리는 일을 해낸다.
세실리아는 금세 팔을 옥죄는 밧줄을 근력으로 끊었다. 그리고 발목의 밧줄을 풀려는 순간, 마차가 멈춰 섰다.
끼이익.
마차 문이 열리며 사내들이 여인들을 끌어내렸다.
넓은 공터, 주변을 두르고 있는 울타리, 낮은 높이의 목책, 수십 개의 천막. 세실리아는 이들의 목적지에 도착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그때 이마에 흉터가 있는 사내가 가까이 다가와 세실리아의 볼을 손등으로 쓰다듬으며 말했다.
“에휴, 얘는 진짜 아쉽다. 돈이고 뭐고 확 그냥……. 이미 늦었지, 뭐. 아…… 보내려니까 더 아쉽네.”
세실리아는 사납게 고개를 돌려 사내의 손길을 뿌리쳤다. 사내는 군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가자.”
세실리아는 사내들을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며 펼쳐지는 광경에 절망했다.
‘젠장…….’
언뜻 보이는 수만 해도 백 명이 넘어 보인다. 대부분이 허리춤이나 손에 무기를 들고 있다.
곧이어 검은색 가죽갑옷을 입은 중년인과 마주했다. 그는 음욕이 가득 담긴 눈으로 여인들을 쭉 둘러보다가 세실리아와 눈이 마주쳤다.
“호오…….”
그 반응에 흉터 사내가 앞으로 반 발자국 나서며 손을 비볐다.
“각하께서 좋아하실 줄 알았습니다. 알레트 인근 숲에서 잡아 온 특상급입니다.”
“그래, 아주 좋구나……. 데려와라.”
중년인은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그의 명령에 옆에 있던 호위병 사내가 고개를 절도 있게 숙이며 대답했다.
“예, 바로 준비시키겠습니다.”
“아니, 준비 말고 바로.”
“아, 예. 알겠습니다.”
준비는 여자 노예들에게 시켜 몸을 씻기는 것을 말한다. 흉터 사내는 눈쌀을 찌푸리며 중년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저 변태 영감탱이, 하여튼……. 아, 시펄 부럽네.’
그는 호위병의 어깨에 둘러메인 세실리아를 보며 한 번 더 입맛을 다셨다.
세실리아는 가장 크고 넓은 천막 안으로 이동되었다. 안에는 천막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급 카펫과 장식품이 이곳저곳에 걸려 있었다.
툭.
그녀는 가장 안쪽에 꽤 넓은 침상에 눕혀졌다. 약간 상기된 얼굴로 그녀에게 고개를 돌린 중년인은 돌연 인상을 찌푸렸다.
“재갈 풀어.”
“예.”
호위병들이 재갈을 풀고 어정쩡하게 서 있자 중년인은 직접 손을 들어 검지로 천막 입출구를 가리켰다.
“구경하게? 나가.”
“예, 각하,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오랜만에 재갈이 풀린 세실리아는 입을 쩍쩍 벌리고 양옆으로 움직이며 턱관절을 풀었다.
그 모습에도 중년인은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음을 흘리고는 훨씬 더 끈적해진 눈빛으로 다가왔다.
“오…….”
그는 세실리아의 발끝부터 머리까지 세심하게 뜯어보며 진심 어린 감탄을 내뱉었다. 그러고는 손등으로 어깨부터 아래로 천천히 쓸어내리며 중얼거렸다.
“아름답구나, 아름다워. 자갈 사이의 진주처럼 빛나더구나.”
중년인이 개소리를 늘어놓는 사이, 세실리아도 그의 몸을 자세히 훑어보았다. 근육은 전사들처럼 많지 않지만 옅은 마나가 느껴진다.
최근에는 몸을 단련하지 않지만 전에는 기사급으로 몸에 마나를 쌓은 자로 추측된다.
세실리아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두 손과 다리를 요염하게 뻗었다.
“안 풀어 주시나요? 더 즐겁게 해 드릴 수 있는데.”
“앙큼한 것. 도망이라도 치고 싶은 게냐?”
그녀는 몸을 앞으로 숙여 오히려 중년인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가 입술을 달싹였다.
“밖에 있는 사내가 몇 명인데 감히 도망을 꿈꾸겠습니까? 전 그렇게 멍청하지 않습니다.”
숨소리가 깊이 섞인 달콤한 속삭임에 중년인의 얼굴이 황홀감에 젖어 들었다.
“아하…… 나에게 잘 보인다라……. 얼굴만큼이나 현명하구나. 그래, 한번 재주를 부려 보거라.”
그는 품에서 검은 보석이 박힌 고급스러운 단검을 꺼내어 그녀의 다리와 손목을 옥죄는 밧줄을 단숨에 잘라 냈다.
“멍청이.”
“뭐?”
세실리아는 바로 중년인의 엄지를 잡아 꺾어 단검을 빼앗고는 발로 그의 머리를 후려쳤다.
터덕!
중년인은 나름대로 마나가 깃든 신체를 가졌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그 틈에 팔을 들어 방어했다.
쉭.
그는 팔을 내리자마자 목을 향해 뻗혀 오는 단검에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더 몰아쳐야 했지만 세실리아는 옆구리에서 느껴지는 끔찍한 통증에 멈칫했다. 중년인이 이곳의 머리로 보이니 인질로 삼아서 탈출하려 했건만, 지금 몸 상태로는 빠르게 제압하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이, 이 건방진 년이!”
중년인이 재빨리 천막 끝에 걸려 있는 검을 들었다. 그의 외침에 밖에서 대기하던 호위병 두 명이 안으로 들어왔다.
“칫.”
세실리아는 중년인을 포기하고 발을 틀어 호위병들에게 달려들었다. 아직 검을 뽑지 못한 그들이 당황한 사이, 그녀는 돌연 몸을 낮춰 그들의 발목을 들어 올려 자빠트렸다.
쿠궁!
세실리아는 호위병 둘을 금세 쓰러트리고 천막 밖으로 튀어 나갔다. 그러곤 이 천막에 들어오기 전에 확인했던 발튼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도적들은 바로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하고 그녀를 멀뚱멀뚱 바라보기만 한다.
그때 천막을 나온 중년인이 분노 가득한 목소리로 외쳤다.
“저년 잡아!”
“잡, 잡아라!”
“덮쳐!”
그제야 도적들이 무기를 뽑아 들며 세실리아를 쫓았다. 그녀는 마치 도둑고양이처럼 그들의 손길을 교묘하게 빠져나가며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저 멀리, 아름드리나무에 홀로 묶여 있는 발튼이 보인다. 그는 이 난리에도 초점이 없다. 세실리아는 악을 쓰며 소리쳤다.
“이 오크 새끼야! 정신 차려!”
번뜩!
그녀의 외침과 동시에 발튼의 두 눈이 확 떠졌다.
그는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수십 명의 도적들에게 쫓기면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세실리아를 발견했다.
썩은 동태 같던 눈동자에 생기가 채워지고 불길이 솟구친다.
“우, 우으으아아아아!”
뚜둑, 뚝, 찌지직!
지진이 일 것만 같은 포효와 함께 굵은 밧줄이 아름드리나무에 파고들더니 이내 모두 뜯겨 나갔다.
애초에 밧줄 따위로는 그의 몸을 속박할 수 없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