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76)
나의 악당들 076화
20. 혼란의 도시(5)
나와 엘렌의 다음 목적지는 교회였 다. 엘렌의 치료와 강령술사 루크에 대한 보고 때문이었다.
노점용 천막과 가판대가 어지럽게 널브러진 시장을 지나 소금성 쪽으 로 향했다. 교회는 소금성 뒤쪽에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까 보았던 대로, 소금성은 반쯤 작살난 모양새였다.
네 귀퉁이의 궁탑 중 둘이 무너져 있었고, 건물 전체가 약간 기우뚱해 보였다.
피사의 사탑도 아니고, 저렇게 위 험해 보이는 장소에 성주네 일가가 갇혀 있단 말이지? 울카르 왕자도 어지간히 독한 양반이구만.
그렇게 생각할 즈음 시야에 들어온 것은 성주의 공방이었다.
성주의 공방은 원래 커다란 마당을 세 개의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모양 새였다. 그런데 지금은 지진 때문인 지 건물 한 채는 완전히 무너져 있 었고, 나머지 한 채도 반쯤 기울어 기와를 와르르 흩뿌린 채였다.
“아, 맞다.”
공방에 의뢰 넣어놨었는데. 선금으 로 금화를 두 장이나 냈었지.
나는 엘렌에게 양해를 구하고 공방 으로 향했다.
공방에 찾아온 비극에도 불구하고, 장인들은 건물의 안팎에서 무뎌진 창날을 벼리거나 찌그러진 투구를 펴는 등 분주해 보였다.
접객을 담당하던 도제인 일튼 역시 도 다리를 절며 모래가 찬 나무통을 굴리고 있었다.
“일튼!”
“어어, 포이닉스 씨?”
앳된 얼굴의 도제는 날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며칠간 안 보여서 죽은 줄 알았다 느니, 지진 때문에 난리도 보통 난 리도 아니었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나눈 뒤 본론을 꺼내었다.
“내가 의뢰했던 물건, 받을 수 있 겠냐?”
“아, 그게요…. 잠시만요.”
일튼은 다친 다리를 끌고 그나마 멀쩡한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그렇 게 오 분쯤 지났을까? 녀석은 묵직 한 갑옷을 어깨에 짊어진 채 낑낑거 리며 나타났다.
“이거야?”
“네. 좀 무겁긴 한데… 포이닉스 씨라면 괜찮을 거예요.”
나는 곧장 일튼의 도움을 받아 갑 옷을 입어보았다.
새로 주문한 갑옷은 ‘갬비슨’, ‘호 버크’, ‘코트 오브 플레이트’를 겹쳐 둔 물건이었다.
풀어서 설명하자면…….
여러 겹의 아마포를 채워 넣은 누 비갑옷 위에, 허벅지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사슬갑옷을 걸치고, 철판을 덧댄 코트를 입는다고 생각하면 된 다.
“오, 진짜 꽤 묵직한데.”
당연히 전에 입던 갑옷보단 훨씬 무거웠지만 그만큼 듬직하게 느껴졌 다.
내가 지금껏 입었던 갑옷들은 하나 같이 고대제국 시절의 유물을 흉내 낸 판갑(板甲)이었다. 철의 상태가 그리 뛰어난 편은 아니라서 곧잘 우 그러지거나 찢어지곤 했다.
반면 이번에 산 갑옷은 질이 훨씬 좋았다.
리벳으로 고정한 철판은 단조와 담 금질을 거친 강철이었고, 후드가 달 린 사슬갑옷은 큰 고리와 작은 고리 를 촘촘히 엮어서 빈틈이 없었다.
누비갑옷 안쪽엔 복대를 연상시키 는 널찍한 허리띠를 덧대었는데, 거 기 달린 고리 장치가 어깨의 하중을 허리로 분산시켜주었다.
“마음에 드세요?”
“어, 완전. 너무 좋아.”
마감이나 빛깔, 재질이 딱 봐도 공 들여 만든 티가 나는 갑옷이었다. 나는 갑옷을 입느라 벗어두었던 벨 트에서 돈주머니를 끌렀다.
“얼마 주면 되냐?”
“선금 빼고, 금화 넉 장이요.”
“금화 넉 장?”
어, 돈이 부족하네.
난 엘렌을 슬쩍 돌아보며 물었다.
“야, 엘렌. 나 갑옷 사는 데 공금 쓴다?”
“그러든가.”
“•••뭐야, 이렇게 흔쾌히?” 내가 놀란 표정을 짓자 녀석은 작 게 코웃음을 쳤다.
“호위가 튼튼해야 마법사도 안전한 법이야. 그런 것 때문에 뭐라고 할 까 봐?”
“이야, 공금으로 장갑 산다고 하니 까 거품 물고 발작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뭐라고?”
“아, 아냐.”
나는 공금 주머니에서 금화를 꺼내 다 문득 의아해져서 일튼에게 물었 다.
“근데, 이게 끝이냐? 투구랑 방패 는? 이것저것 많이 주문했는데?”
“아, 그게요….”
일튼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곤 한 숨을 내쉬었다.
“죄송합니다, 포이닉스 씨. 물건들 을 지킬 수가 없었어요.”
“뭐?”
사정을 들어보니, 며칠 전 성주를 가둬 버린 왕자가 공방을 한차례 털 었다고 한다. 장비들을 모조리 털어 서 징집된 민병대를 무장시킨 것이 다.
그 과정에서 내가 주문해 둔 물건 들도 죄다 징발당해버렸단다. 갑옷 은 들인 정성이 너무 아까워서 몰래 숨겨 뒀다나.
“방패는? 그건 일반인들이 쓸 만한 물건이 아닐 텐데.”
내 물음에 일튼은 무너진 건물의 잔해를 가리켰다.
“그건 저기 묻혀 있어요. 건조실 겸 창고였는데, 눈 깜짝할 새 무너 지는 바람에 장인분들도 몇 죽었거 든요…. 물건을 건질 새가 없었어 요.” “이런….” 나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끄덕 거렸다.
“뭐, 그럼 어쩔 수 없지. 그럼 그 냥 남는 물건으로 줘.”
“좋은 물건은 없을 텐데, 괜찮으시 겠어요?”
“갑옷이라도 지켜줘서 고마운데, 더 바라면 욕심이지. 아, 칼집도 하 나 줘라.”
일튼은 공방 여기저기를 돌아다니 며 찌그러진 투구와 헤진 장화, 낡 은 원방패 따위를 구해다 주었다. 장갑이랑 각반은 남은 게 없다고 해 서 포기했다.
그래도 구멍 난 부츠를 갈아신고 사슬 후드 위에 코받이 달린 투구를 눌러쓰니 전에 없는 안정감이 고개 를 들었다. 맨살을 드러내고 다니는 동안 간절히 원했던 바로 그 안정감 이었다.
내가 금화 넉 장과 은화 두 닢을 건네자, 일튼은 금화만 받고 은화는 돌려주었다.
“갑옷 빼곤 다 폐품이나 마찬가진 데, 그냥 가져가세요.”
“그래도 되냐?”
“네. 포이닉스 씨도 징집당하셨죠? 가서 도적놈들이나 싹 쓸어버려 주 세요.”
얼핏, 앳된 도제의 눈에 살기가 일 렁거 렸다.
“•••그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녀석의 어깨 를 두드려주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 난 게 있어 엘렌을 가리키며 질문했 다.
“아, 쟤가 입을 만한 갑옷은 없 냐?” “엘렌 님이요?”
일튼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자, 엘 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설마 나한테 갑옷을 입으라는 거 야‘?”
“어. 완전무장까진 아니더라도 급 소 몇 군데 정돈 가렸으면 좋겠는 데.”
엘렌은 도리질하며 단호한 투로 말 했다.
“절대 안 입어. 무겁고 걸리적거리 는 쇳덩이를 걸치고 어떻게 마법을 써?”
“그래?”
나는 일튼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 여 보였다.
“가볍고 안 걸리적거리는 갑옷 없 냐? 가죽이나 천으로.”
“어, 글쎄요. 엘렌 님에게 맞는 게 있을지는……. 시종들이 훈련용으로 입는 갑옷이 좀 있긴 한데,”
“땀내 나는 것도 싫어!”
“어…. 어쩌죠?”
“신경 쓰지 말고 보여줘.”
약간의 잡음이 있긴 했지만 결국 엘렌의 갑옷도 한 벌 샀다.
거무튀튀한 가죽조끼였는데, 사실 상 질긴 평상복에 가까웠다.
사냥터에서나 쓸 법한 물건이었지 만 조금이라도 무거우면 엘렌이 질 색팔색개발광을 떨어대서 선택지가 별로 없었다.
참고로, 조끼 하나에 금화 한 장이 었다. 북방의 희귀한 괴물인 ‘테네 브 타란두스’의 가죽으로 만들었다 나.
저번에 석궁도 그렇고…. 엘렌 녀 석, 일부러 비싸고 고급스러운 물건 을 고르는 건 아닌지 의심스럽다.
남은 돈은, 음, 공금이 금화 네 장 에 은화 두 닢, 개인 돈이 금화 세 장에 동전 다섯 푼인가.
주머니가 아주 홀쭉해졌구만. 그 와중에 엘렌은 돈주머니를 잃어버려 서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
교회에서의 치료비가 부족하면… 에이, 그땐 패물함 팔지 뭐.
“잠깐, 잠깐만요. 얼마라고요?”
“금화 일천 장이라고 했네.”
성마른 중년 사제님의 말에 나와 엘렌은 입을 쩍 벌렸다.
“아니, 고작 치료 한 번 받는데 금 화 천 장이라됴?”
“고작 치료라니? 주교께서 친히 올 리는 회복기도일세. 그야말로 천금 (千金)의 가치를 지닌 게지.”
“그래도 그렇지….”
내가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지 만, 사제님은 엄격한 얼굴로 입을 다물 뿐이었다.
공방에 들른 나와 엘렌은 이후 곧 장 교회로 향했다.
사우스하버의 교회는 천장이 높고 기다란 복도가 십자로 교차하는 모 양을 가지고 있었다.
회칠한 벽과 기둥이 인상적인 실내 엔 고통에 신음하는 부상병들과 이 리저리 바삐 움직이는 성직자들로 가득했다.
원래라면 오랫동안 기다려야 했겠 지만, 왕자의 명령을 핑계로 우린 금세 사제와 마주할 수 있었다.
그에게 은화 네 닢을 봉헌하자 사 제님은 곧장 정화와 치료의 기도를 올려주었다. 하얀빛이 번쩍거리며 몸이 상쾌해지는 경험에 마음마저 경건해지는 것만 같았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사제님이 연 거푸 치료의 기도를 올렸음에도 엘 렌의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던 것이 다.
사제님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흰 완장을 찬 늙은 수녀님을 불러왔다. 수녀님은 엘렌의 몸 여기저기를 몇 차례 주물럭거리더니, -허리의 맥이 끊어졌습니다. 단순 한 상처가 아니라 일종의 장애입니 다.
라고 진단했다.
사제님이 혀를 차며 말하길, 장애 를 고치는 건 주교급 이상의 성직자 에게나 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물론 장애를 고치는 게 기적에 가 까운 일이라는 건 충분히 이해하지 만….
“주교님이 기도 한 번 올리는데 금 화 천 장이라니, 말이 안 되잖아요. 다른 사제님들은 은화 두 닢이면 다 해주시면서….”
“그건 도시가 위험한 상황이니 교 회가 값을 깎아준 것이고. 주교님에 관해선, 교회법에 의한 것이니 어쩔 수 없네.”
“교회 법이요?”
사제님의 설명을 들어보니 미들월 드 전체에서도 주교급 이상의 성직 자는 매우 희귀한 존재였다. 희귀한 만큼 가진 권능도 막강해서 고위성 직자들은 그야말로 기적을 행하는 자들이었다.
물론 이러한 기적은 남발할 수 있 는 게 아니었다. 때문에 고위성직자 들은 왕국이나 교회에 중요한 일이 있을 때를 대비하여 늘 신성력을 남 겨두어야 했다.
왕이나 총대주교-교황 비스무리한 존재인 것 같다-의 명령이 아니면 간단한 치료의 기도도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 지엄한 법에도 예외는 존재했는 데, 신의 도움을 정말로 ‘간절히’ 필 요로 하는 사람이 있을 때는 특별히 자비를 베풀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간절함’을 증명하기 위 해 내보여야 할 증거가 바로 천금, 아니, 천 장의 금화였다.
……X팔, 뭐 이런 개 같은 법이 다 있어?
속으로 쌍욕을 퍼부어댔지만, 감히 교회에서 꼬장을 필 수는 없는 노릇 이었다. 엘렌의 다리를 저대로 둘 수도 없는 노릇이고….
나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품에서 패물함을 꺼냈다.
“당장 금화 천 장은 없고, 이걸로 대신해도 될까요?” “음? 그게 뭔가?” 내가 대답 대신 상아로 된 뚜껑을 열자, 사제님의 눈이 커다랗게 떠졌 다.
우 । n 노란 등불 탓인지 사제의 눈동자가 진한 녹빛으로 물들었다. 성직자에 겐 어울리지 않는 탐욕의 빛깔이다.
“이, 이건…. 대단하군.”
“고대의 패물들입니다.”
“과연.”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상자를 받 아든 사제는 잠시 패물들을 살펴보 았다. 그러더니 일꾼을 시켜 누군가 를 호출했다.
몇 분쯤 지났을까? 지긋한 나이의 사내가 가죽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부르셨습니까, 신부님.”
“와서 이것 좀 봐주게나.”
사제의 말에 사내는 가죽가방에서 돋보기, 유리등, 쇠막대 따위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패물함에서 루비가 박힌 펜던트를 꺼내더니 돋보기를 들이대는 것이었다.
이 아저씨, 설마 보석 감정산가?
내가 의아해하는 와중에도 감정사 는 패물들을 신중히 살펴보고 있었 다.
돋보기로 들여다보고, 유리등에 색 유리를 갈아 끼우며 비춰 보고, 쇠 막대로 표면을 살짝 긁어보는 식이 었다. 문외한인 내가 봐도 전문가의 손길 같다.
…참나. 여기가 교회야, 전당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