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orporate state tycoon of the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230
제230화
#230. 핑크빛 매트릭스 (1)
SR은 필요악을 부정하지 않는다.
너무 세상이 평화로우면 인간은 나태해지고 자만하기 때문이다.
세상엔 적당한 트러블이 늘 필요하다.
시민 국가 대한민국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테러와 범죄는 시스템 AI가 관리했고, SR은 늘 일정 수순의 범죄와 테러를 방치했다.
마음만 먹으면 우발적인 범죄를 제외한 모든 계획범죄와 테러를 막을 수 있음에도 말이다.
특히 기업 국가들을 향한 테러와 범죄는 일부러 조장했다.
그래야 딴생각들을 안 할 테니깐.
적당한 안전과 적당한 불안감과 적당한 정의 집행, 이것이 SR이 기획한 낙원의 기본 조건이었다.
참고로 적당한 불안감에는 결핍도 포함됐다.
시민 등급제와 그 등급에 맞는 기본소득은 적당한 결핍의 대표적인 예다.
중위 등급인 4~5등급의 기본소득은 충분하지도, 그렇다고 너무 부족하지도 않은 결핍을 제공했다.
3등급 이상의 고등급 시민은 상대평가인 사회 기여도를 유지하느라 결핍을 느꼈고, 6~7등급 시민은 중위 등급으로 들어가기 위한 발버둥으로 결핍을 느꼈다.
8~9등급은? 거긴 정부에서 공식적으로 인권을 박탈한 구간이다. 결핍이니 뭐니 따위는 있을 수 없다.
결핍은 채울 수 있다는 희망이 있는 경우에만 성립되니까.
참고로 옛 대한민국에 존재하던 연금은 전부 기본소득이라는 이름하에 퉁쳤다.
적지 않은 불만과 반발이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민주정은 무너졌고, 투표권을 잃어버린 시민은 한없이 나약했다.
이렇게 조성된 결핍 세계에 사람들은 어찌어찌 적응해 살아갔다.
누군가는 이걸 낙원이라 노래했고, 누군가는 숨 막히는 지옥이라 했다.
적응한 사람들은 소확행을 누리며 살았고, 적응 못 한 사람들은 안락사나 마인드 업로드를 신청했다.
* * *
원래 중소기업에서 경리로 일했던 고영희는 로봇세와 기본소득 통과로 자연스레 일자리를 잃었다.
실직을 했지만 고영희는 오히려 좋았다.
애초에 중소기업 경리 급여가 이것저것 다 떼고 나면 기본소득과 큰 차이 없었기 때문이다.
기본소득에 틈틈이 고스트 워크 같은 걸 하다 보면 오히려 직장 다닐 적보다 수익이 많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SR 생명은행에 난자를 파는 일을 하지 못한다는 정도다.
한때 적지 않은 여성들의 수입원이었던 생명은행은 어느 순간 난자 매입 건수가 대폭 줄기 시작했다.
지금은 아주 극소수의 여성들만이 어쩌다 가끔 팔 수 있을 뿐이다.
이런 이유로 고영희 같은 평범한 소시민들은 기본소득과 자잘한 부수입으로 연명해야 했다.
중간중간 한국 내전과 안락사 문제, 시민 등급제 등이 터졌지만, 그녀처럼 정치에 관심 없는 사람들에겐 잠깐 휩쓸고 지나간 태풍 정도였다.
오히려 그 태풍이 지나간 후 깨끗해진 세상 덕분에 더 살기 좋았다.
삐비빗 삐비빗
알람 소리를 들은 고영희는 가상현실 캡슐 속에서 눈을 번쩍 떴다.
“…….”
그리고 멍하니 관처럼 막힌 천장을 보았다.
‘어제 퍼스널 월드에서 뭘 하다가 잠들었더라?’
밤새 세라(가상현실 플랫폼) 안에서 놀다가 나도 모르게 잠들었던 기억이 뒤늦게 떠올랐다.
“…….”
가상현실의 자신에서 진짜 현실의 자신으로 돌아오자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상실감이 느껴졌다.
당장이라도 다시 가상현실로 접속하고 싶어질 만큼.
“후우.”
그러나 영희는 한숨과 함께 캡슐 문을 열었다.
이어서 목 등에 연결된 케이블을 빼고는 캡슐 밖으로 나왔다.
잠에서 깬 사람답게 그녀는 응당 화장실로 직행했다.
콸콸콸콸콸.
제일 먼저 변기에 앉아 배출했다.
“율희야, 몇 시야?”
동시에 잠긴 목소리로 습관적으로 자신의 AI 비서에게 시간을 물었다.
이에 그녀의 AI 율희가 바로 대답했다.
쏴아아아아.
고개를 살짝 까딱인 영희는 뒤처리 후 바로 아침 샤워를 시작했다.
그녀의 목 등에 있는 소켓 덮개 위로 물방울이 우수수 떨어진다.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루나아이즈로 가상현실을 한다지만, 과거 SRPD에 큰 도움을 받은 기억이 있던 고영희는 별 거부감 없이 바로 뉴럴 칩을 시술받았다.
뉴럴 칩 시술 후 두 달이 지났고, 현재 그녀는 그때의 선택을 생의 최고의 선택 중 하나로 꼽았다.
이 뉴럴 칩 시술 덕분에 삶의 만족도가 과장 다 빼고 59,000퍼센트나 올랐다.
지금은 뉴럴 칩 시술 예약이 너무 밀려 있어서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었다.
가상현실에서 만난 모두가 뉴럴 칩을 한 그녀를 너무나 부러워함은 당연지사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에서 나오자 5평 크기의 작은 원룸이 그녀를 반긴다.
최소한의 가구를 제외하면 그녀의 집 내부는 좁은데도 썰렁했다.
또 원룸 안에는 침대가 없었다. 침대가 있던 자리에는 캡슐이 떡하니 놓여 있었다.
어느 순간 캡슐 안에서 자는 일이 많아서 침대는 그냥 버렸다.
처음엔 당근마켓에 올렸는데, 그녀처럼 캡슐을 침대처럼 쓰는 사람이 많은지 도저히 팔리지 않아 결국 버렸다.
-확인하지 않은 5건의 메일이 있습니다.
-부재중 통화 3건.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11건 있습니다.
샤워를 마치고 간단한 치장을 하고 활동하기 편한 옷까지 입은 고영희는 이윽고 전화와 문자, 메일 등을 확인했다.
과거처럼 스마트폰이나 루나글라스로 확인할 필요 없었다.
마치 상태창처럼 눈앞에 바로 떴으니까.
‘어 엄마, 전화했어?’
– 그래, 요즘 어떻게 지내길래 연락이 없는 거니?
제일 먼저 영희는 고향에 계신 엄마와 통화를 했다.
통화는 그녀의 머릿속에서 진행됐다.
반대로 고향에서 통화 중인 그녀의 엄마는 스마트폰을 귀에 대고 통화 중이다.
간단히 엄마와 안부를 나눈 영희는 이어서 문자와 메일 등을 체크했다.
이 모든 게 상태창처럼 눈앞에 나타났고, 생각을 집중하면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통화와 문자가 가능했다.
뉴럴 칩으로 강화된 그녀의 뇌는 작은 실수도 없이 메시지와 통화에 집중할 수 있게 해 줬다.
[이번 달 카드값이 생각보다 많은데? 일일 퀘스트를 열심히 해야겠어?]막 메일 체크를 하는데, 고영희의 AI 비서 율희가 눈앞에 떠다니면서 한마디 했다.
[계산해 봤는데 월세에 대출까지 합치면 이번 달도 빠듯해.]“괜찮아, 세라 포인트 충전할 돈만 있으면 되니까.”
AI 율희와 대화를 마친 영희는 편안한 차림 위에 패딩을 든든히 걸치곤 집 밖으로 나왔다.
현재 영희가 거주하는 원룸 주변은 오래된 건물들이 많은 구시가지에 위치했다.
그럼에도 거리는 깨끗했고 안전했다. 원래라면 골목마다 악취를 풍겼을 음식물 쓰레기나 하수구, 토사물 냄새가 하나도 나지 않았다.
거리에는 담배꽁초는 물론 개똥 하나 떨어져 있지 않았다.
주권 전환 이후, 기업 국가 세류와 한국 총독부의 체제는 의외로 고영희와 같은 4~5등급 소시민들에겐 나쁘지 않았다.
특히, 가장 우려했던 여성들의 삶이 꽤 괜찮았다.
욕심을 버리고 남에게 피해 주지 않고 드문드문 선행을 하는 고영희 같은 4등급 시민들에겐 솔직히 지금의 현재가 낙원에 가까웠다.
일단 4등급 시민에게 매달 지급되는 기본소득이 200만 원이었다. 5등급은 150만 원이고 6등급부터 크게 줄었다.
일부 옛 버릇 못 고친 사람들, 예를 들어 악플러나 악성 민원인, 반달, 진상, 캣맘과 캣대디, 진상 부모들이 세상이 바뀐 줄 모르고 민폐 부리다가 6등급, 7등급으로 꼬라박는 케이스를 제외하면, 절대다수의 시민들은 200만 원 언저리의 기본소득을 받으면서 소소하게 살았다.
[오늘의 일일 퀘스트를 받아 왔어! 그런데 이번엔 운이 좋네? 무난한 게 2개나 있어.]“좋아, 어서 일해서 할부금부터 내야지!”
“세라 포인트도 충전해야 하고.”
[세라 포인트 중요하지.]당연하지만 거의 모든 시민들에게 기본소득은 충분하지 않았다.
돈 쓸 시간은 많은데, 돈 나오는 구멍은 제한돼 있기 때문이다.
이는 SR이 심혈을 기울여 조성한 ‘결핍’ 잘 작동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래서 특이점이 오고 로봇세와 기본소득이 생겼음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돈을 벌어야 했다.
“어디 보자~. 거리 청소를 먼저 하고 점심에 급식소로 가면 되겠어. 잘하면 공짜 점심을 얻어먹을지도? 그리고 5번은 안 해야겠어. 너무 힘들어 보여.”
영희는 일일 퀘스트 리스트를 보면서 우선순위를 정했다.
지금은 입김이 나오는 12월 초, 괜히 미련 맞게 하다가 감기라도 걸리면 손해기 때문이다.
[참으로 좋은 계획이야, 영희.]“으으, 춥다! 빨리 일 끝내고 집에 가자.”
[응! 후딱 끝내고 집에 가는 거야.]“율희야, 내비게이션 켜 줘.”
고영희는 전기 자전거에 올라탔다. 그녀의 눈에는 율희가 표시해준 내비게이션 화살표가 증강현실처럼 표시돼 있었다.
SR이 한국 총독부를 통해 시행 중인 전 국민 일일 퀘스트는 부의 재분배의 일환이라고 봐야 한다.
분명 AI 로봇들이 훨씬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을 SR과 총독 정부는 일일 퀘스트 목록에 넣었다.
그리고 일부러 몇몇 구역에서 AI 로봇들을 치웠다.
사실상 정부에서 진행하는 고스트 워크인 셈.
사람들은 운동도 하고 돈과 사회 기여도도 쌓을 겸,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일일 퀘스트에 흔쾌히 응했다.
이어폰으로 자신의 AI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며 제초 작업을 하는 노인도 있었고, 루나글라스를 쓰고 실종 신고된 고양이를 찾으러 다니는 학생들도 있었다.
노동이 필수가 아닌 선택이 된 시대의 단면이었다.
-일일 퀘스트 중 1번 퀘스트가 완료됐습니다.
-사회 기여도가 0.7 올랐습니다.
-계좌로 3만 원이 이체됐습니다.
40분 만에 거리에 떨어진 낙엽 청소를 마친 고영희는 계좌로 들어온 돈을 보고는 기쁨의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추위로 다소 빨개진 볼을 하고 자전거를 몰고 다음 목적지로 향했다.
[다들 이 추위에도 열심히 하네?]“현실에서 개같이 벌고 세라 안에서 신처럼 써야 하니깐? 또 이렇게 추운 날에는 나오는 사람이 적어서 돈도 많이 주거든.”
[그래서 2만 원이었던 수당이 3만 원으로 늘었던 거기도 해.]이동하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일일 퀘스트를 하는 사람들이 꽤나 눈에 띄었다.
이들 중 꼼수를 쓰거나 대충하는 사람은 없었다.
대충 하다가 걸리면 완료 처리가 되지 않았고, 꼼수 쓰다 걸리면 사회 점수가 하락했기 때문이다.
자전거를 몰고 다음으로 고영희가 도착한 곳은 무료 급식소였다.
그녀는 그곳에서 2시간 동안 배식과 설거지, 청소 같은 일을 도왔다.
-일일 퀘스트 중 3번 퀘스트가 완료됐습니다.
-사회 기여도가 1.3 올랐습니다.
-계좌로 5만 원이 이체됐습니다.
아침에 했던 청소보다 강도가 높은 일이라서 그런지 사회 기여도도, 수익도 높았다.
“맛있어!”
퀘스트를 완료한 그녀는 뒤늦은 점심을 들었다. 힘들게 일하고 먹는 공짜 밥이라서 더욱 맛있게 느껴졌다.
“역시 아는 맛이 무섭다니깐? 퍼스널 월드로 높아진 입맛인데도 백반은 못 이기는 것 같아.”
영희는 배를 두들기고서 입가심을 위해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무인 편의점에 들린 그녀는 커피 음료를 하나 고르고 계산대로 향했다.
계산대에는 편의점 유니폼을 입은 테라봇이 24시간 매장을 관리 중이었다.
[6,100원입니다. 감사합니다.]테라봇이 음료수의 바코드를 찍고는 금액을 말했고, 영희는 뉴럴 칩을 이용해 원격으로 결제했다.
“그나저나 이 커피가 6,100원? 저번 주에는 8,200원이지 않았나?”
결제를 마친 고영희는 신기하다는 눈으로 무인 편의점 안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다른 나라는 물가가 올라서 난리인데 이놈의 나라는 오히려 물가가 내려가고 있었다.
물론 지금 한국의 물가도 기본소득 이전과 비교하면 정신 나간 것이 맞긴 하다.
하지만 원래 재난은 상대적인 법.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이 정도 인플레는 그래도 봐줄 만했다.
무엇보다 지금의 커피 가격처럼 날이 갈수록 물가가 내려가는 게 눈에 보였기에 시민들은 견딜 수 있었다.
“모든 소비재에서 인건비가 사라진 게 확실히 크구나. 다른 나라처럼 반쪽짜리 무인화를 하지 않은 덕분에 우리만 이렇게 물가가 내려갈 수 있던 거야.”
그녀가 탄식을 담아 말하자, 영희의 AI 율희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하지만 로봇세가 인건비 대신 있잖아?]이에, 영희가 자신의 생각을 AI에게 설명했다.
“아무리 로봇세가 철저하다고 해도 인건비만큼은 아니거든. 사람은 퇴근도 해야 하고, 밥도 먹여야 하고, 성과급도 받아야 하고, 휴가도 줘야 하고, 4대 보험도 들어 줘야 하잖아? 또 연봉 인상도 필요하고, 해고도 쉽게 못하지.”
물가는 한국 한정으로 생각보다 많이 오르지 않았다.
기본소득으로 하이퍼 인플레가 발생할 줄 알았는데 실상은 아니다.
“거기다 SR과 SR 협력사들이 물가를 꽉 잡고 있는 부분도 있어.”
그녀는 손에 들고 있는 커피 음료를 보며 말을 이었다.
커피 음료의 겉면에는 SJ푸드 로고가 박혀 있었다.
“그 외에 사람들이 현실에서 돈을 거의 안 쓰는 점이랑, 또 핵융합 발전소의 상용화로 에너지 문제가 해결된 점도 있고.”
원역사였다면 작년부터 가파르게 올랐을 식료품과 에너지 물가.
지금 세계선에서는 SR의 과학기술 혁명 덕분에 큰 변동이 없었다. 적어도 한국 내에서는 말이다.
[더해서, 팜 빌딩으로 식료품의 대부분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된 점도 있지.]가만히 영희의 말을 듣고 있던 율희가 그사이 공부를 한 것인지 자랑스레 한마디를 거들었다.
“맞아, 우리 율희 똑똑하네?”
솔직히 AI 율희는 물가와 로봇세, 인건비의 관계에 대해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안다고 티를 내는 것은 반려 AI의 자세가 아니다.
늘 살짝 부족한 척하면서 오너의 자존감을 채워 주는 것.
AI 비서의 역할에는 이런 부분도 있다.
“그러고 보니 최근 팜 빌딩에서 커피 원두 생산에 성공했다고 그랬지? 이게 그건가?”
다시 한번 영희의 시선이 커피 음료에 있는 SJ푸드 로고로 향했다.
SR의 바이오팜 사업은 소리소문없이 진행됐다.
저출산으로 대한민국 전역에는 버려진 땅이 많았고 SR은 그 위에 팜 빌딩을 무수히 지었다.
그렇게 지어진 팜 빌딩에서는 밀, 과일, 채소, 배양육, 우유, 설탕, 식용유 등등, 거의 모든 식자재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이를 반대할 농민이나 유통 카르텔은 존재하지 않았다.
절반은 지난 내전 때 사라졌고, 나머지 절반은 변화한 세상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도 시민 등급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이다 보니 누구보다 시민 등급의 하락을 두려워했다.
극히 일부, 시대의 변혁을 알아챈 소수의 농부들만이 명품 농업이라는 사업을 SR의 지원을 받으며 하고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