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0
10화
“엘? 혹시 부족합…….”
“미쳤어요?! 저 많은 걸 다 사게?! 나 당뇨병 걸리게 할 생각인가 봐!!”
“당뇨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미친 것도 아닙니다.”
“설마 다른 곳에 이용할 게 필요해서 미리… 막, 뇌물 주는 거 아니죠?”
“…그건 아니라고 미리 말해 두고 싶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한 뇌물이라 해도 될 것 같군요.”
그 말을 끝으로 아라한은 마차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남장의 모습에 시종의 의상을 입은 내가 아라한과 같은 마차에 타려고 하자 몇몇 귀족들은 나를 째려보다시피 했고 그런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그는 나를 에스코트하고 있었다.
“내일… 왠지 다른 이유로 신문에 대서특필될 것 같은데요…….”
“그건 내일 생각해도 늦지 않을 것 같네요.”
라며 생긋 웃는 아라한의 모습에 기가 찬 나였다. 엄마, 이 공작님께서 제가 뺨 맞은 사건이 꽤 충격이었나 봐요. 어쩌죠.
마차의 문이 닫히고 출발하자 아라한은 나의 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부담스러워 창밖을 보며 거리를 구경하니 이윽고 도심의 거리를 벗어나 나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근데 어디 가는 거예요?”
“비밀 장소요.”
“……??”
‘히이잉~.’
말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걸음을 멈추자 마차도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리고 먼저 내려가 손을 내미는 그. 손에 손을 맞잡고 엘리자벳이 발을 내딛자 상쾌한 바람이 세차게 불어 가발이 벗겨지고 말았으니 은은하게 빛나는 적은발이 햇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빛을 자아내고 있었다.
“……와아, 이렇게 넓은 들판은 처음 봐요.”
“…맘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조금 뜸 들이며 이야기하는 아라한의 모습에 나는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고 그제야 가발이 벗겨진 것을 깨달은 내가 머리카락을 만지며 가발의 행방을 찾고 있었다.
“나중에 찾아 드리겠습니다. 어서 케이크를 먹도록 하죠.”
“근데 케이크 먹기엔 배경이 너무 소풍 온 것 같은데요?”
말은 그렇게 해도 내가 행복한 표정을 짓자 덩달아 미소를 짓는 아라한.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참 바보 같게도 가슴이 두근거렸다. 황제를 보며 두근거려야 하는 가슴이 아라한을 보며 두근거리다니.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사실인가.
그런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부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모를 돗자리를 펴고는 아까 산 케이크들을 차곡차곡 정리해 놓았다. 오후에 마시는 차 세트처럼 준비하는 것을 보아하니 오늘 작정하고 밖으로 나온 모양이다.
“원래 케이크 사는 게 일정에 있었나 봐요.”
“케이크를 사는 일정은 있었지만 이렇게 밖에 나와서 먹을 일정은 아니었죠.”
“그런 것치곤 준비가 철저한데요.”
“아까 말했다시피 영애의 저택에 방문할 예정이었으니까요.”
“…사과의 일환으로?”
“뭐, 그것도 있지만 겸사겸사요.”
‘겸사겸사’란 말에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고 그는 또다시 나에게 제안을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수많은 케이크는 그 제안에 대한 뇌물이자 미리 주는 보상인 것 같다. 젠장, 역시 디저트에 넘어가는 게 아니었어!
“며칠 뒤 있을 소보론 후작가의 무도회에 참석해 주실 것을 부탁하려고 했거든요.”
“소보론 후작가라면…….”
누구지. 넌 또 누구냐. 존재감 없는 조연2인가. 책 속에 그런 인물이 있던가.
“예, 생각하신 대로 귀족파 중의 귀족파죠. 그리고 그 누구보다 벨루아 후작가와 가장 가까운 관계인 가문입니다.”
벨루아 후작. 그는 앞서 말한 소보론 후작과 샤롯 영애와는 다른 존재였다. 저 둘이 존재감 없는 조연들이라면 벨루아 후작은 달랐다.
귀족파의 수장이자 엘리자벳을 가장 탐탁지 않아 하는 자. 오즈번이 황후가 되기를 적극적으로 미는 자. 그자가 벨루아 후작이었다. 책에서도 엘리자벳의 사형을 제일 처음 제기한 것이 벨루아 후작이었으니- 잠시만. 그럼 그 무도회에.
“벨루아 후작님도 오시나요?”
“아마요. 공동 주최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루시엘라 영애도 참석하게 될 것이고 폐하께서 참석하실 겁니다.”
“루시엘라 영애가요…?”
“예. 초대장을 받은 것 같더군요. 그리고 힘 있는 귀족파들이 한곳에 모이는 자리이니 폐하께선 정체를 숨긴 채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그런 힘 있는 귀족파들이 한곳에 모이는 곳에 오즈번이 참석한다고……? 루시엘라 가문은 중립파가 아니었나. 아니면 제국의 성녀라서 그냥 모든 무도회엔 다 참석해야 하는 건가……?
“근데 폐하께서 정체를 숨기고 참석하실 정도면… 너무 위험하지 않나요?”
“그래서 영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황제가 위험한 거랑 제 도움이 무슨 상관이죠. 제가 보기엔 그 황제 폐하께서 제 도움은 안 받으려고 기를 쓸 것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갈피를 잡지 못하자 그는 조각 케이크 하나를 건네곤 마저 입을 열었다.
“변장한 폐하와 함께 입장해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그렇…… 예?!”
“영애, 귀 아픕니다.”
“뭐…. 뭐라고요?! 같이 입장이라면…….”
“파트너겠죠.”
그러니까 그 파트너가 왜 내가 되고 망할 황제 자식이냐고!! 아니, 물론 황제를 꾀어야 하는 처지긴 한데!! 오즈번 루시엘라도 있잖아!! 게다가 귀족파의 무도회라면서……!! 초대받은 오즈번이랑 같이 가면 되는데 왜 하필 나야.
“……하지만 루시엘라 영애도 있잖아요.”
“첫 춤을 추었다고는 하지만 루시엘라 가문은 중립파입니다. 게다가 귀족파 무도회에 루시엘라 영애가 초대되었다는 것부터 그녀가 황제파가 아닌 귀족파의 손을 들고 있다는 정황으로 볼 수 있죠. 해서 폐하께서는 조심스러운 것입니다. 만약 루시엘라 가문이 확실한 황제파였다면 그녀를 데리고 갔겠죠.”
한마디로 루시엘라가는 황제파와 귀족파 사이에서 줄타기 중이니 충직한 황제파인 빈센트가의 손녀, 엘리자벳을 이용하시겠다…? 하지만 엘리자벳이 아니더라도 황제파 귀족의 영애는 많았다. 굳이 엘리자벳이 카를시아의 파트너가 될 필요는 없을 것 같은데.
“…근데 왜 하필 저죠.”
“파트너 동반 입장만 가능하니까요.”
“그러니까 왜 하필 저냐고요.”
“그거야 영애께서는 폐하를 좋아하시잖아요.”
‘그건 엘리자벳이 그런 거고 난 아니란 말이야!!’
그러나 소리 없는 아우성일 뿐이었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 꼬였지. 아니지, 잘 생각해 보면 잘된 일이었다. 황제가 보는 앞에서 대놓고 오즈번을 괴롭힌다면 더 빨리 죽을지도 모른다. 이미 악녀라고 불리고 있으니 오즈번을 괴롭히고 죽을 때쯤엔 대악녀라고 불릴지도 모르지. 게다가 벨루아 후작에게 안 좋게 보인다면 그는 적극적으로 악녀인 나를 죽여야 한다고 하겠지. 그래, 위기는 기회라고 했어!
“크흠, 그건 그렇지만…. 폐하께서도 알고 계시는 내용이죠?”
“아마도요.”
“…….”
뭐냐, 그 ‘아마도’는. 굉장히 거슬리는 단어 같은데. 굉장히 이제 말할 예정이야, 라는 뉘앙스는 뭐지. 내 착각인가.
“크게 뭐라 하시진 않으실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공작님,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건데…. 아까 그 살롱의 의상을 주문한 이유도 무도회 때를 위해 미리 맞춰 주신 건 아니죠…?”
“그건 물론 아닙니다. 물론 폐하께서 붉은색을 싫어하시기에 다른 의상으로 준비해야 한다는 말보다 제가 따로 선물해 드리는 것이 나을 것 같긴 했지만. 그런 불순한 의도는 절-대 아닙니다.”
그 불순한 의도인 것 같은데요. 역시 디저트 가게를 ‘sold out’ 하게 만든 이유도 똑같았다. 내가 이용 가치가 있고 내가 빈센트가의 손녀라서. 그럼 그렇지. 이 사내가 엘리자벳인 나에게 잘해 줄 리가 없다. 다 이유가 있는 것이고 이용할 가치가 있기에 뇌물을 써서라도 움직이게 하는 것이리라. 게다가 황제를 좋아하는 엘리자벳의 마음마저 이용하려 하다니.
“……최악이야.”
아라한의 귀에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게 내뱉은 말은 꽤 씁쓸했다. 케이크는 정말 단데 목으로 넘어가는 크림 맛은 썼다. 아무래도 진한 초콜릿이나 커피가 들어간 것이겠지. 지금 내 심정도 그러했다. 친절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원래 세계에서도 있었던 위선이 이곳 세상에는 없다고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영애…? 맛이 이상합니까?”
“……아니요. 맛있습니다.”
뭔가 유쾌하거나 즐겁지 않았다. 이 사람이든 저 사람이든 나에게 보이는 호의는 모두 이용에 따른 보상이라 생각하니 참 씁쓸했다. 물론 그것이 아닐 수도 있지만 지금 상황만 놓고 본다면 그렇지 않은가.
내가 케이크를 몇 입 먹고 내려놓자 그는 무어라 더 말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았다. 더는 바람은 상쾌하지 않았다. 무거운 중압감을 내는 듯 그늘이 지기 시작했고 나의 이마도 그러했다. 잠시 착각할 뻔했다. 이유 없는 호의는 없다. 아주 잠깐이지만 아라한에게 설렜던 내 맘도 참, 우스웠다.
‘하아, 울적해진다. 그래, 내가 그럼 그렇지. 뭐.’
우리가 케이크를 먹는 사이 바람에 날아갔던 가발을 찾아온 마부는 그것을 나에게 건넸다. 그 가발을 고쳐 써야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머지 케이크는 모두 영애 저택에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이만 일어날까요?”
“…….”
“영애?”
“한 가지만.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
“제가 그 무도회에서 해야 할 역할은 뭐죠. 정확하게 뭘 얻어야 하는 거죠. 분명 이용하기 위해선 그만큼의 이득이 있어야 하는 법이잖아요. 저에게 의상과 케이크까지 준비하면서 원하시는 이득이 무엇인가요.”
“…….”
나의 직설적인 화법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는 것도 잠시. 아라한은 마치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것처럼 반 무릎을 꿇고 나의 손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제가 영애를 기분 나쁘게 한 모양이군요. 죄송합니다. 절대 그런 의도로 말한 것이 아니었는데 오해의 소지가 있었나 보군요…….”
“오해의 소지라…. 그럴 수도 있고 제가 과민 반응일 수도 있겠죠. 공작님의 대답에 따라서.”
“…솔직하게 말씀드리자면. 의상과 케이크 모두 정말 순수한 의도의 선물이었습니다. 영애께서 저로 인해 듣지 않아도 될 말을 들었으며 보았으니까요.”
“……그럼 되었습니다.”
이게 엘리자벳의 감정인지 나의 감정인지 모르겠지만 가슴속 깊은 곳이 욱신욱신하게 아파져 왔다. 알고 보면 그녀가 그렇게 악녀가 된 것도 저런 사람들이 그녀를 이용해서일지도 모르겠다.
호구 이세화가 호구 같은 엘리자벳에게 빙의된 것일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앞으로의 일들이 조금 더 쉬워질 것만 같은 생각이 문득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