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Double Life of a Wicked Woman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춤을 잘 추다가 내가 꺼낸 말에 충격이라도 받은 것인지 카를시아의 가면 사이로 보인 금빛 안광이 아무런 미동도 없이 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미동도 없던 눈동자가 마치 봐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본 것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세닐…?”
그가 불러 달라던 애칭을 조심스레 불러 보자 이내 정신을 차린 것인지 카를시아가 내 어깨를 잡고선 ‘미안하군.’이라는 말만 내뱉은 채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쉬셔야겠습니다. 폐하.”
“…그래,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군. 다음에….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그대.”
‘괜찮다’라는 말이 아닌 ‘그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라는 말이 카를시아의 입에서 나오자 나는 살짝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다시금 바라보았다. 적잖은 충격을 받은 것인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하는 카를시아의 몸이었다.
“…레켈 경을 불러올까요?”
“…아니, 되었다. 미안하군.”
그 말만 남긴 채 머리가 어지러운 것인지 자신의 머리를 살짝 부여잡고선 미련도 없이 고개를 돌리고 회장을 나가 버리는 카를시아였다. 아니, 저렇게 나가면 내가 좀 찝찝하잖아. 괜한 이야기를 꺼내서 두통 오게 만든 것 같다고!
카를시아가 무사히 회장의 문을 나서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깊은 한숨을 쉬며 나는 아라한이 기다리고 있을 테라스로 향했다. 수확제의 밤 때문인지 아니면 황궁이라서 그런지 모르겠다만 꽤 두꺼워 보이는 유리창 너머로 아라한의 모습이 일렁였다.
‘덜컥.’
“라트!”
“엘리…!”
해맑게 웃으며 아라한에게 안기는 나였다. 그리고 그런 나를 꽉 끌어안고선 나의 체취를 확인하듯 한동안 날 안고 있는 아라한이었다.
“폐하께서 엘리에게 애먼 짓 한 것은 없죠?!”
“네, 없어요. 그것보다 갑자기 춤을 추시다가 비틀거리시긴 하시던데.”
“폐하께서요?”
아라한의 되물음에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기억을 찾고자 하며 그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해선 침묵하는 나였다. 이미 때를 기다리라고 했던 아라한이었다.
그런 아라한에게 굳이 그 이야기를 꺼내 봤자 좋은 말이 나올 리는 없을 터. 카를시아 역시 아까의 일을 굳이 아라한에게 시시콜콜하게 이야기하진 않을 것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갑자기 충격받아서 두통이 일어난 걸 어떻게 제국의 재상에게 당당하게 이야기하겠는가.
“흠…. 요 며칠 과로하시긴 하셨지만…. 나중에 황궁의에게 말씀드려 놔야겠군요.”
짐짓 심각한 표정을 짓던 아라한은 혹여나 내 기분마저도 안 좋아질까, 다시금 미소를 지었고 테라스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안 것인지 샴페인을 나르던 집사가 테라스의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한잔, 드시겠습니까?”
“물론이죠!”
나는 한껏 흥분한 표정을 지으며 집사가 들고 온 샴페인 잔을 들어 한 잔은 아라한에게 한 잔은 내 입으로 직행시켰다. 그리고 그 모습에 놀란 집사가 입을 벌린 채 ‘헉…!’ 거리는 것이 찰나의 순간이지만 보인 것 같은데.
“아, 달다~ 집사, 이 샴페인 좀 더 가져다주세요!”
“아, 알겠습니다.”
나의 말에 후다닥 테라스 문을 나선 집사였다.
“엘리, 조금 천천히 마셔요. 그러다가 또 취하실라.”
“어머~ 원래 원만한 연인 관계에서 알코올은 필수라고요!”
“몸 상할까, 걱정인 거예요.”
“그것보다 라트.”
“네?”
내가 부르자 역시나 부드럽게 미소를 짓는 아라한이었다.
‘고놈 자식, 누구 자식인지 참 잘생겼네.’
요리조리 봐도 참 잘생겼다. 짙은 흑발에 짙은 남색의 눈동자는 가면을 써도 가려지지 않을 미모였다.
“크으, 누구 남친인지 잘생겼어.”
“……!”
그리고 무의식적으로 내가 뱉은 그 말에 부끄럼 타는 아라한의 모습도 꽤 재밌었다. 그렇게 열일하고 있는 아라한의 미모에 빠져 있을 때쯤, 아까의 집사가 샴페인 잔을 두어 개 더 들고 와서는 내게 건넸다.
“영애, 여기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역시나 잔을 받고서 그대로 원샷을 해 버리는 나였고 그 모습마저도 귀엽다는 듯 ‘피식’ 웃는 아라한이었다. 여전히 놀란 것 같은 집사지만.
“그럼, 즐거운 시간 되십시오.”
우리에게 고개 숙여 인사하고선 테라스를 나가는 집사였다. 그 뒷모습을 보자 하니 참 측은해 보였다. 이렇게 즐거운 축제 날에도 일이라니. 이건 마치 공휴일에 야근하는 느낌이라고!
“엘리, 그렇게 많이 마시면….”
“에이~ 겨우 2잔인데요.”
“엘리의 한쪽 손에 샴페인이 한 잔 더 있는데요?”
“헤헤헤…. 그렇지만 이렇게 술 마실 날이 얼마나 많다고!! 그리고 성년 되고 처음 마시는 술인걸요!”
그랬다. 내가 처음으로 빙의된 날이 그녀의 데뷔탕트였다. 그것이 엘리자벳의 성년식이었고 그 뒤로 술은커녕 성인이 되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한 것이 없었다. 정확히 따지자면 그놈의 백작 영애의 드레스 자락을 훔친 이야기만 읽었지 이렇다 할 유흥을 못 즐겼다고!
“그야 엘리의 몸이 약하니까 아나이스 님도 호른 님도 걱정하는 거 아니겠어요.”
“라트, 저 생각 외로 튼튼해요! 잊었어요? 독 먹고도 살았고 베어리펀이랑 싸워서도 이겼고 폭발 사고에서도 살아남은 엄청난 천운의 여인이라고요!”
“…….”
‘앗, 실수.’
술을 먹으면 저도 모르게 말이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이러다가 정말 해서는 안 될 말까지 나올 것 같은 불안감에 손에 쥐고 있던 나머지 샴페인 한 잔을 바로 원샷하는 나였다.
달콤하고 또 씁쓸한 듯한 샴페인의 목 넘김이 좋았다. 마치 기쁠 때 나오는 엔도르핀이 마구 샘솟는 듯한 느낌이 결국 엘리자벳의 취기를 더 오르게 만드는 듯했다.
“엘리? 정말 괜찮은 거죠?”
그녀가 맨 처음의 샴페인 잔을 한숨에 들이킬 때부터 살짝 걱정이 든 아라한이었다. 엘리자벳이 술에 취하지 않은 상태라면 모르겠지만 이미 한 번 취했다가 그나마 정신이 든 상태이지 않던가. 게다가 자신도 살짝 입을 댄 샴페인은 도수가 꽤 높은 것인지 끝맛이 떫었다.
그제야 샴페인 잔을 들고 온 집사가 엘리자벳의 원샷을 보고 왜 놀랐는지 알 것만 같은 아라한이 깊은 한숨을 쉬며 엘리자벳을 바라보았다.
“헤헤~ 라트으으~.”
“…엘리, 역시 너무 많이 마시….”
“우으~ 라트으으!! 계속 그렇게 잔소리하며어언!!”
이라는 말과 함께 엘리자벳은 제 손을 뻗어 아라한의 두 뺨을 잡고선 이내 자신을 보게 했다. 아라한은 당황스러웠다. 정면에서 본 엘리자벳은 예쁜 건 둘째 치고 술에 취해 풀린 눈동자로 저를 유혹하고 있었으니까.
‘아, 이건 좀 위험한데.’
위험 신호를 감지한 아라한은 최대한 그녀에게 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엘리자벳을 잠시 떼 놓으려고 하였다. 그리고 그 행동을 인지했는지 순식간에 엘리자벳의 입술이 아라한의 입술을 덮치기 시작했다.
“…!!”
갑자기 훅 하고 들어온 말캉한 감촉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아라한은 이내 아까의 위험 신호를 잊었는지 엘리자벳을 끌어안고선 진득하게 키스를 하는 그였다.
“으읍…. 응….”
엘리자벳의 신음에 겨우 정신을 차린 아라한은 조심스레 제 입술을 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예뻤다. 밤하늘의 달을 닮은 듯한 고고한 은안이 저를 바라볼 때마다 미친 듯이 올라오는 충동을 얼마나 억제하고 또 억제했던가.
그러나 그녀는 그런 자신의 마음은 모른다는 듯 또다시 입술을 덮쳐 왔다. 말캉한 감촉의 끝에 남겨진 달콤한 향은 아무래도 아까의 샴페인 때문이겠지.
“엘리…. 저 겨우 참고 있어요.”
“와! 나도 참고 있었는데!! 헤헤헤~ 라트 좋아!”
“엘리가 참고 있는 거랑 조금 차원이 다른 문제라…….”
그래, 차원이 다른 문제였다. 아라한은 그렇게 생각했다. 엘리자벳이 참고 있는 것이 정확하게 무엇인지 모르겠다만 자신이 참고 있는 것은 아주 큰 거사였으니까.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것을 상상하기도 하고 또 해 보고 싶기도 하고 그렇지 않은가.
그런 자신의 마음을 모른 채 계속해서 유혹하는 엘리자벳의 행동에 아라한은 제 이성의 끈을 겨우 붙잡고선 그녀의 어깨를 잡았다.
“너무 취했어요. 돌아가요.”
“우응….”
별다른 말 없이 고개를 얌전히 숙인 채 입술을 삐죽 내미는 엘리자벳의 모습에 아라한은 또 불안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엘리느으으은! 라트랑 더 있고 싶어서 그런 거라고요!”
“…….”
‘다음엔 절대로!! 절대로!! 술 못 마시게 할 거야!’
귀여운 건 둘째고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에게 애교를 부리는 걸 상상하자 순간 이성의 끈이 또 날아갈 뻔한 아라한이었다. 가면을 쓰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애석하게도 그녀의 눈 색은 이미 돌아와서 고고한 은안을 그대로 담고 있었지만 그래도 가면을 쓴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만약 그녀가 가면을 쓰지 않은 채로 있었더라면. 그것도 많은 사람 앞에서 이랬다면.
‘미치겠군.’
그냥 적당히 달래서 속히 그녀를 빈센트 공작저로 보내는 것이 자신과 엘리자벳을 위하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래, 괜히 욕심부리다가 엘리자벳에게 미움을 받는 것보다는 나을 거다.
“후, 저도 그러고 싶답니다. 엘리랑 늘 함께하고 싶은걸요.”
진심이었다. 아라한은 진심을 가득 담은 그 마음이 잘 전달되고 그녀의 꽁한 마음을 잘 달래길 바라며 바람에 나풀거리는 그녀의 가발을 정리해 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라도 한 듯이 고개를 끄덕이던 엘리자벳의 모습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워서. 순간 올라오던 욕망이 이성을 혹여나 끊을까, 서둘러 회장을 벗어나려던 아라한이었다.
그래, 엘리자벳의 그 말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라트으~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요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