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68)
아니 이보세요, 예니카 씨 (1)
로스테일러 가문에 대한 소식이 퍼지자 클로엘 황실은 그야말로 난리를 한번 치렀다.
로스테일러 가문의 가주, 크레핀 로스테일러가 일으킨 참극에 의해 고위 귀족이 몇이나 죽었고, 로스테일러 영지와 저택 부지는 초토화되었으며, 잘못하면 그대로 황실에까지 악신의 영향이 미칠 뻔했다.
긴 세월 동안 클로엘 황실의 최측근으로서 힘을 써 왔던 로스테일러 가문과, 그 가주 크레핀의 몰락.
안 그래도 로스테일러 가문의 구성원은 클로엘 황실의 이런저런 곳에서 나름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는 기사단 관리 계원이나 사용인 관리자 같은 중간 관리자부터, 황실 자문회 의장이나 최고 의전 관리인, 수석 재판관에 이르는 중직에 이르기까지… 로스테일러 가문이 뿌리를 박은 곳은 꽤 많았다.
크레핀의 입김에 의해 자리를 받은 자들이었으나, 크레핀 로스테일러의 죽음과 그의 악행이 알려지면서 모두 일시적으로 직무를 정지당하게 되었다.
황실의 여러 요직들에 동시다발적으로 공석이 발생하게 되자, 그 대리 업무자들이 업무를 맡아 처리하게 되면서 여러 행정 처리들이 삐걱거리게 되었고… 결국 긴급회의까지 소집되었다.
“자리가 많이 비어 있군.”
“로스테일러 출신의 인재들은 모두 황실 별관에 모아 두었습니다.”
황실의 핵심 인사들이 모여서 상황을 논의하는 황실 긴급회의.
중심에 앉은 클로엘 황제 앞에는 아치형으로 회의석이 펼쳐져 있었지만, 꽤나 많은 공석이 남아 있었다.
황실 내부의 대소사를 주관하는 궁내관은 빈자리의 주인들을 클로엘 황제에게 읊어 주었다. 대부분이 로스테일러의 이름을 달고 있었다.
클로엘 황제의 앞으로는 황실 권력의 적통한 후계자가 될 세 황녀의 자리가 마련되어 있었고, 그 뒤로는 각각 황실 기사단장, 집사장, 제독, 재상 등 권력의 구심점을 차지하고 있는 자들이 잔뜩 앉아 있었다.
사실상 클로엘 제국의 향방을 결정하는 자들이 모여 앉은 회의였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이유는 다들 잘 알고 있겠지. 로스테일러 영지에서 일어났던 참극과, 그 뒷 수습을 논하기 위한 자리다.”
회의를 주관하는 클로엘 황제는 점잖은 어조로 이야기했다.
“모두들 내게 보고하고 싶은 것들이 잔뜩 쌓여 있겠지. 향후 로스테일러 가문의 향방에 대한 것도 논해야 할 테고. 상을 받아 마땅한 자에겐 상을 내리고, 벌을 받아 마땅한 자에겐 벌을 내려야 할 테지.”
클로엘 황제와 가장 가까이 앉아 있는 세 황녀.
셀라하, 페르시카, 페니아. 각자 다른 표정을 지은 채, 회의장의 중심에 앉아 서로 간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클로엘 황제는 이미 직감하고 있었다. 자신의 세 딸은 권력의 구심점에 있었던 이 로스테일러 가문에 대해 각자 다른 방식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황가의 적통한 후계자 셋을 중심으로, 그 뒤의 여러 황실 권력자들이 줄을 대고 있는 광경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권력 구도를 단편적으로 보여 주고 있는 것만 같다.
이번 건은 쉽게 결론이 나지 않겠군.
그런 생각을 하며, 클로엘 황제는 회의의 시작을 알렸다.
일반적인 평민은 근처에도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고귀하고도 중요한 회의 자리.
제국의 향방을 결정하는 그 자리의 뒤쪽 구석에는, 한 소녀가 마녀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앉아 있다. 셀라하가 현장에서 확보해 온 증인이자, 메뷸러를 토벌하는 데에 일조한 일등 공신이었다.
왜소한 체구로 다리를 꼰 채, 푹신한 의자에 누워 있다시피 앉아 있는 소녀. 입고 있는 교복도 헐렁헐렁해서 위엄이라곤 찾아볼 수도 없고, 모자도 너무 커서 얼굴을 다 가려 버린다.
표정조차 알 수 없는 그 소녀는 그렇게 회의실 구석에서, 조용히 앉아 이야기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듣고 있었다.
* * *
아켄섬 선착장은 규모가 별로 크진 않다.
대부분의 교통량은 맥세스 대교 쪽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통 섬이라고 하면 배로 왔다 갔다 하는 경우가 많지만, 아켄섬의 경우에는 그 교통 흐름의 구조 자체가 특이했다.
범선이 왔다 갔다 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규모의 인구가 거주 중인 것은 아니고, 대부분의 물자는 대교를 통해서 받을 수 있다.
가까이에 붙어있는 자훌 백작령이나, 자그마한 무역 도시 벨락스로부터 물자를 공급받는 만큼, 굳이 해로를 이용할 유인이 적다. 규모를 생각해 보면 상단의 마차를 이용하는 것이 물류 단가가 더 싸게 먹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아켄섬 선착장은 귀가할 때 해로를 이용하는 일부 학생들이나, 먼 땅으로부터 희귀 상품을 공급받는 일부 상인이 아니면 잘 사용하질 않았다.
―끼익, 끼익.
해수면이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바닥이 평평한 바지선도 덩달아 위아래로 흔들렸다.
그 위에 착지한 직스 에펠슈타인은, 그대로 뒤로 돌아서 자그마한 여객선 위에 올라서 있는 엘카의 몸을 받아 주었다.
“으, 으으… 멀미 때문에 죽는 줄 알았어.”
“역시 다음부터는 마차를 타는 게 좋겠다. 배가 더 빠르긴 하지만, 엘카 네 컨디션에 너무 악영향이 많이 가잖아.”
“이번엔 짐이 많았으니까 어쩔 수 없지….”
엘카 이슬란은 어깨를 감싸고 있는 세미 로브 자락을 움켜쥐면서 머리를 털었다. 여전히 어지럼증이 좀 남아 있지만, 길었던 여정에 비하면 후유증은 적은 편이었다.
북방 초원 지대에서부터 제국 서쪽의 해안까지 마차를 타고 달리고, 거기서 배를 타고 아켄섬까지 곧바로 오는 여정. 확실히, 마차만으로 올 때 비하면 시간이 많이 단축되었다.
“나는 여기서 인부들한테 짐을 좀 받아서 갈게, 먼저 로레일 관으로 가서 쉬고 있어.”
“아니야, 됐어. 선착장에 올라가서 쉬고 있을 테니까 일 마무리되면 같이 가자.”
직스는 걱정되는 듯한 얼굴로 엘카를 잠시 보았으나, 엘카는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그를 격려한 뒤 어지러운 몸을 이끌고 선착장 방향으로 향했다.
그러나, 몇 걸음 나가기도 전에 익숙한 얼굴을 보고 엘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나, 예니카 선배님.”
그 말을 듣고 무거운 짐을 받아들고 있던 직스도 고개를 돌려 그쪽을 보았다.
엘카와 직스가 착지해 내려온 바지선의 반대쪽에는, 단출한 짐가방 하나를 들고 다른 배에서 내려온 예니카가 있었던 것이다.
감청색 스커트 위에는 새하얀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고, 팔은 걷어붙인 채 짐을 끙끙 나르는 모습이었다.
“어라… 직스랑… 엘카구나….”
“일찍 귀교하셨군요. 예니카 선배님. 저희야 항상 개학 전에 학회를 들르느라 몇 주 일찍 오긴 하는데….”
엘카 이슬란은 학생 도서관을 관리하는 사서 일을 하면서 마법 서적 학회에서 연구도 함께 일삼는 학자였다.
그렇기에 학기 초에 붐비는 마법 서적 수요를 피해서, 조금 일찍 와서 연구 준비를 끝마쳐 놓는 것이다.
직스는 딱히 일찍 올 필요는 없지만, 어차피 엘카가 오는 김에 같이 일찍 귀교하는 습관이 있었다.
“예니카 선배님은 고향 일 도우신다고 항상 빨리빨리 귀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리고 최대한 늦게 귀교하셨던 것 같은데, 올해는 별일이시군요.”
“아, 그, 그게….”
예니카는 직스의 말에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얼버무렸다.
괜스레 에드에 대한 소문이 퍼져 나가서, 예니카의 고향 마을은 이미 그녀의 연애담에 대한 뒷얘기가 무성해져 있었던 것이다.
예니카는 이윽고 해탈한 표정으로 눈물을 머금고 이야기했다.
“그냥, 그렇게 됐어….”
“…사연이 있으시군요.”
직스는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다만, 엘카의 짐을 인부들에게 받으면서 스리슬쩍 예니카의 눈치를 볼 뿐이었다.
“뭐, 듣자 하니 이미 귀교한 학생들도 꽤 된다고 하더군요. 방학 중에 귀가하지 않은 학생들도 꽤 많다고 하니…. 지금 학사로 돌아가시면 반가운 얼굴들을 꽤 많이 볼 수 있을 겁니다.”
“응, 그래… 에드도 일찍 돌아와 있을 테고….”
“에드 선배님 말입니까? 올해는 본가로 돌아가셨다는 소문은 들었는데… 벌써 귀교하셨답니까?”
그 말에 예니카는 뭐라 말할지 애매해서 잠시 말을 흐렸다.
로스테일러 가문에 대한 소식은 썩 유쾌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차피 다 알게 될 테지만, 그걸 자기 입으로 주변에 전파하고 다니고 싶지는 않았다.
“흠….”
직스는 그런 예니카의 모습을 보면서, 뭔가 미심쩍은 기분이 들었다. 그대로 마지막 짐까지 다 받아 들고서는, 그중 하나에 걸터앉아서 땀을 닦았다.
“에드 선배님이랑 관계가 잘 안 풀리십니까?”
“그,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아니, 뭐 척하면 척이지요. 근래 들어서 에드 선배님 얘기를 하면 예니카 선배님 표정이 영 좋지가 않으시니까요.”
기묘할 정도로 직감이 좋은 직스다. 이런 부분에서도 묘할 정도로 예리해서, 예니카는 뒷목으로 식은땀을 흘렸다.
“직스, 그런 말을 하면 실례일 수도 있어. 예니카 선배님 일은 예니카 선배님이 알아서 처리하실 수 있도록 배려해 드려야지.”
“어, 그, 그런가? 내가 이런 쪽은 어떻게 처신해야 예의인지 잘 몰라서….”
엘카가 검지손가락을 세우고 직스의 미간을 꾹꾹 누르자, 직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아니, 딱히 폐는 아니야… 다만… 에드랑은 요즘 이런저런 식으로 많이 엇갈렸거든….”
예니카는 짐가방을 내려놓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사실 좀 고민이긴 해…. 나 생각보다 에드한테 부담스러운 사람일까 싶어서….”
의외의 말이 튀어나왔다. 그 말을 들은 직스와 엘카는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잠시 갸웃거리면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부담스러워한단 말입니까? 에드 선배님이 예니카 선배님을요?”
“으, 응…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 싶어서.”
“글쎄요. 저는 좀 의견이 다르긴 한데요. 에드 선배님 성격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니카 선배님이 부담스럽다면 그렇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않으셨을까요?”
해수가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덩달아 흔들리는 바지선의 위. 세 남녀는 가만히 앉아서 생각을 정리하다가, 이윽고 엘카가 침묵을 깼다.
“예니카 선배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는 이유가 있을 거 아니에요?”
“아니, 그간 내 행동을 생각해 보니까…. 이거 완전히… 부담스러운 사람이잖아. 무엇보다, 최근에는 좀… 안 맞물리는 일들이 많아져서….”
예니카 딴에는 에드를 배려한다고 했지만, 수석 자리를 양보한 것은 에드에게는 큰 자존심의 상처가 된 듯하다. 아니스의 조언이 없었다면 깨닫지도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로스테일러 저택에서는 그를 지킨다는 명목으로 동행해 놓고, 그가 큰 상처를 입는 것을 막지도 못했다.
그 이후 퓰란으로 함께 가서 상처를 치료하고 정치적 동향을 살피자는 예니카의 제안조차도, 에드는 한사코 사양한 채 실베니아의 아카데미로 돌아온 것이다.
에드 입장에서는 예니카의 방학 계획을 배려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니카는 에드의 거절이 너무 신경 쓰였다.
“같이 캠프에 들어가 살기까지 하고… 어쩌면 나… 너무 에드를 배려하지 않은 거 아닐까?”
“…가감 없이 말씀드리자면, 예니카 선배님만큼 에드 선배님을 배려하고 사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에드가 느끼는 부담은 완전히 별개잖아…!”
직스는 엘카의 눈치를 스윽 살핀 후 한숨을 푹 쉬었다.
예니카는 자기 객관화가 너무 서투르다. 무엇보다, 예니카 페일로버 같은 소녀가 조금 들이댄다고 해서 싫어할 남성이 세상에 그리 많지는 않을 터다. 에드라고 해서 뭐 얼마나 다를까.
허나, 자기 연인인 엘카를 앞에 두고서 예니카의 외모를 칭찬하는… 그런 섬세하지 못한 행동을 할 수는 없다. 숱한 실패와 좌절 끝에 익힌 처세술 중 하나다.
“에드 선배님을 너무 깎아내리는 것 같기는 합니다만… 어차피 사내놈들이라는 게 다 똑같습니다, 예니카 선배님.”
“…응?”
“거, 여성 분이 좀 적극적으로 들이민다고 해서 휙휙 밀쳐 내는 남자는 그리 많지가 않습니다. 좀 더 자신감을 가지고 들이미셔도 될 겁니다. 단순히 제 의견일 뿐이지만 말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엘카의 눈치를 슥 살피자, 도끼눈을 뜬 채 직스를 쳐다보고 있었다. 묘하게 줄을 타는 느낌이지만, 이 정도까지는 세이프인 듯하다.
“원래 부담 지는 것도 그리 나쁜 기분은 아닙니다. 오히려 나한테 기대는구나 하고 기쁜 생각이 들 때도 많습니다.”
“직스….”
엘카가 직스의 이름을 부르며 빙긋빙긋 웃었다. 다만, 그러다가도 잠깐 슬픈 듯한 표정을 짓고서는 한숨을 푹 쉬었다.
“기분이 썩 복잡해지네… 직스.”
“그리 신경 쓰진 마. 나는 원래 호화로운 삶이랑은 영 맞지가 않았거든.”
둘 사이의 대화를 들으며 예니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직스는 설명이 필요하겠다 싶어서 말을 덧붙였다.
“다음 학기부터는 저도 오필리스관에서 나가거든요. 이미 퇴사 신청서는 수령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응, 그래? 너는 성적이 모자라진 않잖아.”
“그렇긴 합니다만, 이번 학기 들어서 엘카의 천식이 갈수록 심해져서… 이제 좀 가까이 지내면서 보좌해 줄 사람이 필요하거든요. 학생회 일까지 하면서 엘카 곁에 붙어 있으려면, 결국 로레일관의 1인실 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엘카는 우등생 기숙사인 로레일관 소속이다. 엘카의 가까이에 살며 그녀의 생활을 보조하기 위해, 호화로운 오필리스관의 생활을 포기한 것이다.
“뭐, 시설은 오필리스관에 비해선 좀 부족하고, 사용인들의 시중도 받을 수 없으니 사소한 것까지 제가 직접 해야겠습니다만은… 원래 그게 당연한 것이죠. 있다가 없어졌다고 해서, 있는 걸 당연하게 여겨서는 안 되는 법입니다.”
“…너도 힘들겠네.”
“힘드니 뭐니 할 만한 상황은 아니지요. 잔혹한 야생 생활에 비하면 뭐든 간에 다 편하고 좋은 생활이고요.”
직스는 받아서 내려놓은 짐을 전부 체크해 보고, 하나도 빠짐없이 모두 전달받았단 사실이 확인되자, 인부에게 대금을 치렀다.
인상 좋은 선착장 인부는 빙긋 웃으며 직스에게 인사를 하고 떠났다.
그대로 직스는 짐을 하나씩 차곡차곡 챙겨 들었다. 온갖 커다란 목재 가방과 옷 가방들을 한 번에 들어 올리지만 힘들어하는 기색이 없다.
타고난 근력 자체가 대단한 수준이다. 마법부 학생이 아니라 전투부 학생으로 갔어도 별문제가 없을 것 같은 소년이다.
“어쨌든, 제가 감히 예니카 선배님의 고민을 재단할 순 없겠지만… 크게 영양가 없는 고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
“예. 원래 사내들 사고방식은 사내들이 더 잘 아는 법 아니겠습니까. 진짜로 여성 분에게 부담을 느끼거나,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사내들 반응은 그런 거랑은 좀 다릅니다. 진짜 적신호는… 좀 더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법이지요.”
직스 입장에서는 말을 고르게 된다. 사실 직스라 해서 남 연애 관계에 왈가왈부할 정도로 잘 아는 인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허나, 최소한의 보장 정도는 해 줄 수 있지 않은가.
“뭐, 눈을 맞추지 않는다든가, 억지로 단답으로 대화의 흐름을 끊으려 한다든가…. 정말 대놓고 적나라하게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든가…. 어쨌든 사내놈이 보내는 적신호는 그런 식으로 딱 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예니카 선배님이 걱정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은은하고 알기 어려운 방식으로 표현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으음….”
“그러니까, 자신감을 좀 가지십시오. 에드 선배님은 충분하리만치 예니카 선배님에게 매력을 느끼고 있으실 겁니다.”
그렇게 화끈하게 결론을 지어 버리고, 직스는 짐을 다 챙겨 든 뒤 선착장으로 향하는 길에 발을 올렸다.
“뭐, 밀고 당기고 줄을 타는 것도 중요한 일이겠습니다만… 의외로 단순 무식하게 밀어붙이면 생각보다 쉽게 무너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렇게 해서 안 되면 저렇게도 해 봐야 하는 게 만사의 법칙 아니겠습니까.”
“그건… 맞는 말이네….”
“그러니까 힘내십시오, 예니카 선배님. 좋은 결과 있을 겁니다.”
그리 말하고, 직스는 짐을 챙겨 든 채 선착장 위로 떠났다.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며 힘을 실어 주는 것은 덤이었다.
그 뒤를 쫄래쫄래 따라붙는 엘카도 예니카 쪽을 휙 보더니, 양 주먹을 앙증맞게 움켜쥐고서는 파이팅을 외쳐 주었다.
바지선 위에 홀로 남겨진 예니카는 잠시 자기 짐가방을 내려놓고 심호흡을 했다.
이윽고 주먹을 꽉 움켜쥐고선, 몸에 힘을 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확실히 직스의 말에 틀린 것은 없었다.
자존감이 낮아서 좋을 게 없지 않은가. 에드 성격에 예니카가 부담스러웠다면 진즉에 그리 이야기해 주었을 것이다.
그 사실에 용기를 얻어, 예니카는 좀 더 가벼워진 걸음으로 북쪽 숲 캠프를 향해 나아갔다.
* * *
“안녕, 에드! 나 좀 일찍 돌아왔어!”
이제는 예니카도 집처럼 느끼는 곳이 이 북쪽 숲의 캠프였다.
사실, 제아무리 집같이 편안한 곳이라 한들… 퓰란에 있는 진짜 본가보다 편할 수는 없을 터다.
허나, 이번 방학에 한해서만큼은 정말로 이 캠프로 돌아오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눈물지은 채 고향을 뛰쳐나오는 예니카에게, 손수건을 흔들며 마중 보낸 부모의 심정은 안타까울 일이지만… 이제 막 연심이라는 것에 눈 뜬 사춘기 소녀에게는 너무 가혹한 공간이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에드랑 같이 캠프 생활을 하는 쪽이 좀 더 정서적으로 안정이 되어 가는 기분이 든다.
예니카는 짐 가방을 싸안고 화색이 된 얼굴로 활기차게 인사를 했다.
불가에는 오랜만에 보는 에드 로스테일러가 부지깽이로 모닥불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어지간한 기본적인 일들은 벨이 다 처리해 주고 갔기 때문에, 에드는 온전히 휴식하고 몸을 회복하는 데에만 신경을 집중할 수 있었다.
그렇기에 많이 호전된 모습으로 앉아 있는 에드를 보자, 예니카는 일단 크게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허나, 그 뒤로 이제는 완공된 로르텔의 별장이 보인다.
온전히 에드와 예니카의 공간이었던 캠프에 새로운 건물이 하나 세워진 것은 썩 달갑지 않다. 툴툴대며 입술이 비죽 튀어나오게 만들지만, 어쨌든 지금 로르텔은 아켄섬에 돌아올 수 없는 상태다. 그녀는 상단의 일이 너무 바빠서, 학기 중이 아닐 때는 언제나 올덱에서 일을 몰아서 처리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온전히 에드와 예니카만이 남아 있는 캠프다. 그 사실이 오히려 더 부각이 되는 기분이라, 예니카는 종종걸음으로 불가에 가서 앉았다.
“어, 일찍 왔구나. 예니카….”
예니카를 맞이해 주는 에드는 확실히 건강 상태가 더 좋아진 것 같다.
예니카가 ‘응, 응.’ 하며 빙긋 웃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얼굴만 보아도 어찌나 반가운지, 마치 꼬리를 흔들어 대는 강아지처럼 뽈뽈 다가가서, 모닥불을 사이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어깨가 들썩들썩 들리는 기분이었다.
“그러고 보니, 방학이 끝나려면 얼마 남지 않았지….”
“응, 에드는 잘 지냈어? 많이 걱정됐어.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봤을 땐 정말 크게 다쳤었잖아.”
“그래….”
에드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숙인 채 애꿎은 모닥불을 쿡쿡 찌르고 있었다. 여기서 예니카는 묘한 기색을 느꼈다.
“그래도 방학 동안 잘 쉰 것 같아서 다행이야! 이제 방학 끝나고 학기 시작하면 쌓인 일정이 잔뜩 남아 있는데 다시 힘내야지!”
“응, 그렇지….”
거기까지 이야기하고 나서 예니카는 에드의 표정을 살폈다.
묘하게 예니카와 눈을 맞추지 않으면서, 깊은 생각에 빠진 듯이 모닥불과 예니카를 번갈아 쳐다보고 있었다.
에드 로스테일러는 깊은 고민에 빠졌을 때 유독 그런 모습을 많이 보이곤 했다. 주변 상황에 그때그때 적절한 대처를 하면서도, 사고 한편은 그 고민에 할애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 특별한 일도 아니었지만, 에드의 뒷목을 타고 묘하게 땀방울이 흐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렇게 눈치가 좋은 편이 아닌 예니카가 알아챌 정도다. 에드의 기색은 누가 봐도 명백하게 이상했다.
― ‘뭐, 눈을 맞추지 않는다든가, 억지로 단답으로 대화의 흐름을 끊으려 한다든가…. 정말 대놓고 적나라하게 부담스러워하는 표정을 짓는다든가…. 어쨌든 사내놈이 보내는 적신호는 그런 식으로 딱 티가 나게 되어 있습니다.’
문득, 직스가 흘러가듯이 내뱉었던 말이 예니카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누가 보아도 에드 로스테일러는 지금 명백하게 부담을 느끼고 있는 것만 같다.
사실 이제 와서 예니카를 상대로 부담스러움을 느끼는 것도 이상한 것이 아닌가. 그동안 부대끼고 산 시간이 얼마인데.
허나, 사람에 대한 인식의 변화란 언제나 순식간에 벌어지는 일이다.
예니카는 마른침을 삼키고 눈을 부릅떴다.
‘나 진짜로… 부담스러운 사람인가…?!’
사실 자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연심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에드와 부대끼고 살았지만, 관계의 재정립이라는 명목으로 괜스레 존댓말을 써 보거나, 거리를 벌려 보려 했던 사람 또한 자신 아니던가.
제삼자의 객관적인 눈에서 보기에는 쓸데없는 고민으로 발을 동동 구르며 호들갑을 떠는 그 나이대의 소녀일 뿐이다. 하지만 본인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진지하다.
에드의 사소한 반응 하나하나에 이렇게 일희일비해서야 평생을 가도 관계의 주도권이란 것을 쥐어 볼 수가 없을 터.
허나, 방법이 없다. 예니카 페일로버란 소녀가 원래 이렇다. 이런 천생 소녀로 태어난 것을 누굴 탓하란 말인가.
“예니카. 내가 할 말이 있는데.”
“네! 뭐예요?!”
“…갑자기 왠 존댓말이냐…?”
“응! 뭔데?!”
사고의 맹점을 찔러 들어오듯, 갑작스럽게 침묵을 깨고 들어오는 에드의 말에 예니카는 혀를 씹을 뻔했다.
모닥불 너머로 보이는 에드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예니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에드의 말을 경청했다.
“그… 좀 이상해 보이는 말일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그… 속사정이 있으니까…. 일단 들어 줘라…. 사실 별로 어려운 부탁은 아닐 수도 있는데… 경우에 따라선 어려울 수도 있다….”
“응…?”
“뭐, 구구절절 사정부터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너무… 비겁하다고 해야 할까…. 애초에 너에 대한 예의가 아니니까… 그냥… 가감 없이 말해 둘게….”
“뭐, 뭔데…?”
에드 로스테일러가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이렇게까지 밑밥을 깔아 둔 적이 있던가.
괜스레 긴장이 되어서 예니카는 등을 꼿꼿이 세우고 눈을 부릅떴다.
“그, 있잖냐….”
“으, 응….”
“…….”
“…….”
그러다가, 에드는 결국 부지깽이로 흙바닥을 꾹 누른 채 이야기했다.
“…아니다.”
“뭔데! 뭔데!”
“아니, 됐다. 근래 들어 예니카 너한테 너무 무리한 부탁을 너무 많이 한 것 같고, 이런 건 진짜로 예의가 아니기도 하고… 됐다, 다른 방향성을 찾아볼 테니까…. 그… 잊어라….”
“아니, 말만 해 줘! 뭔데! 뭐야!”
예니카는 자기 허벅지를 꾹꾹 누르면서 에드를 닦달해 댔다. 에드는 난처한 얼굴로 식은땀을 삐질 흘리고선 이야기했다.
“아니, 진짜로 됐다. 나도 양심이란 게 있어서, 이런 식으로 널 이용해 먹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좀 거부감이 든다….”
“우리 예의 같은 거 따질 사이 아니잖아. 에드 부탁이면 다 들어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니까. 그러니까 뭔지 말부터 해 봐, 응?!”
“무슨 부탁이든지 다 들어준다느니 뭐니, 그런 말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니야…. 예니카… 좋지 않아…. 진짜로… 좋지 않아….”
“대체 뭐길래?!”
여기까지 오니 예니카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흙바닥을 꾹꾹 지르밟으며 예니카는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다 문득, 에드의 표정이 다시금 눈에 들어왔다. 무언가 정말로 난처한 듯한, 뭐라 설명하기 힘들어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에드와 가까이 지낸 지도 어느덧 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처음으로 보는 표정이었다.
그 순간, 예니카의 등줄기를 타고 땀 한 방울이 흘렀다.
“에드.”
에드 로스테일러는 예니카 페일로버와 꽤 많이 친해진 사이다. 둘 사이의 벽이랄 것도 많이 허물어져, 서로 간에 다소 무리한 부탁이라도 가감 없이 주고받을 수 있을 정도로 교감했다.
예니카 혼자만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 터다.
그 사실을 서로 간에 잘 알고 있을 터인데, 에드는 유독 더 난처해하고 있었다.
로스테일러 저택에서 일어난 참사에도 동행시킬 정도로, 에드는 예니카에게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그런 에드조차도 말을 꺼내기가 꺼려지는 고민이라면, 대체 얼마나 더 심각하고 진중한 이야기란 말인가.
문득, 호들갑 떨며 웃어넘길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니카는 저렇게 곤란해하고 난처해 보이는 에드의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당장 내일 세상이 멸망한다 해도 침착하게 지금 해야 할 일을 정리할 것 같은 그런 남자다. 그런 에드조차도 저렇게 난처해할 문제라는 것이 무엇일지 가늠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예니카가 해야 할 일은 에드에게 확신을 심어 주는 것이 아닐까.
어떤 시련이 와도 네 편에 서 있을 것이라는 확신. 그렇기에 날 믿고 이야기해 줘도 좋다는 말. 그 굳건한 신뢰를 확언해 줘야만 하는 것이다.
어느덧 예니카의 얼굴에는 진지함이 올라와 있었다. 굳은 신뢰와 확실한 결심을 표하며, 그 어떤 무거운 짐이라도 같이 짊어져 주겠다고 이야기하는 듯하다.
진중한 표정에는 다부진 의지가 깃들어 있었다. 목숨조차도 걸 수 있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기 전에 결사의 각오를 다지는 대장군의 기개와도 같다.
“난 뭐든지 준비되어 있어, 에드. 그러니까…. 괜찮아, 뭐든 부탁해도. 그 어떤 심각한 일이라 해도, 난 에드 편이니까.”
에드 입장에서는 죽을 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