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Extra’s Academy Survival Guide RAW novel - Chapter (177)
엘테 상회 탈환전 (6)
성창룡 벨브로크를 잡기 위해서는 테일리 맥로어의 검성식이 필요하다.
나를 고질적으로 괴롭혀 왔던 고민이다.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은 테일리 맥로어가 그만큼 강해져서, 벨브로크를 마무리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다만, 이미 은 꼬일 대로 꼬여 버려서, 더 이상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
테일리의 성장세도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더딜 것이 분명하다.
성창룡 벨브로크 토벌은 사실상 내가 이 세계에 넘어와서 맞이해야 할 모든 시련을 마무리하는 격의 사건이다.
만약 테일리가 벨브로크를 감당할 수 없다면, 거기서부턴 완전히 내가 감당해야 할 일이 되어 버린다. 벨브로크를 제때 처리하지 못하면 일어날 대참사는, 내 입장에서도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벨브로크의 부활이 아켄섬에서 제대로 마무리되지 못하고, 대륙 본토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순간… 이 제국과 대륙에 미칠 피해는 내 선에서는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당연히 향후 내 미래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겠지.
모든 걸 테일리한테 맡겨 두고 나는 얌전히 졸업장이나 따자는 계획은 애먼 옛날에 다 망해 버렸지만… 아무리 그래도 벨브로크는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는 적이다.
그렇기에, 나는 기도할 수밖에 없다.
부디 테일리 맥로어의 스펙 상태가 조금이라도 더 멀쩡하기를.
* * *
커다란 철장으로 둘러싸인 지부의 뒷마당은 밤의 어둠에 휩싸여, 누구의 시선에도 닿지 않는다.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의 뒷문을 두어 번 두드리자, 안에서 인부가 문을 열었다.
조용하게 열린 문 너머에는 현재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를 물밑에서 완전히 장학한 듄 그렉스의 모습이 보였다.
그 뒤에는 리엔나 비서와 더불어서 듄 쪽에 붙은 상회 직원들 모습의 면면이 보였다.
그중에는 로르텔에게 충성 서약을 했던 직원들도 몇 보여서, 꽤 묘한 광경이다.
“생각보다 화끈하시군요, 에드 선생님.”
듄이 보았을 광경도 그리 받아들이기 쉽진 않았을 것이다.
밧줄에 꽉 묶인 아일라를 난폭하게 끌고 온 나와, 그 뒤에 다소곳이 서 있는 예니카의 모습.
정보력에서 뒤처질 게 없는 듄이기에, 왜 예니카가 나와 함께 있는지에 대해 굳이 의문을 가지진 않았다.
어지간한 일에는 가담을 해 주는 예니카다. 다만, 이런 식으로 사람을 대놓고 납치하는 일까지 가담할 거라곤 생각하지 못했는지… 듄은 은근하게 웃음을 짓는 것으로 당황한 얼굴을 지워 버렸다.
“읍…! 읍…!”
입이 천으로 막혀 버린 아일라가 뭐라 읍읍대며 소리를 치려 했지만, 그게 언어가 되어 전달되는 일은 없었다.
“포박해.”
듄의 뒤에 서 있던 상회 직원들이 아일라의 양팔을 잡아끌었다. 완전히 저항 의지를 잃은 아일라는 그대로 상회 직원들의 손에 이끌려 내부 깊숙이 잡혀 들어갔다.
“이런 일에 손을 뻗치실 줄은 몰랐군요. 저 소녀에게 뭔가 있습니까?”
“여러 고위 마력… 특히 성위 마력에 특출난 감응을 타고난 애야.”
“성위 마력 말입니까?”
그대로 듄과 함께 복도로 걸어 들어가면서, 우리는 대화를 쭉 이어 나갔다.
우리 뒤쪽으로 복도를 따라 예니카와, 상회 인부들, 리엔나 비서가 따라 들어왔다.
나는 손을 들어 올려서 슬쩍 힘을 끌어 올렸다.
불사조 반지의 반동은 긴 휴식으로 어느 정도 무마되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그 기운이 남아 있어 마력을 끌어내기 힘들게 만든다.
그러나, 아주 약간 마력의 낌새를 내비치는 정도는 정신을 집중하면 할 수 있다.
―휘익.
슬쩍 올라오는 검붉은 마력의 기운에, 듄은 눈가를 휙 좁혔다.
듄의 뒤를 따라오던 상회 직원들도 마른침을 삼켰다. 마법에 문외한인 사람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명확하게 드러나는… 성위 마력이었다.
“성위 마법을 쓸 줄 아십니까?”
“그래. 다만, 상급 성위 마법 연구는 혼자서는 못 해. 다소… 비윤리적일 수는 있지만, 감응력이 좋은 희생양이 필요하지.”
사실 아일라를 납치한 이유는 그런 게 아니다. 단순히 테일리 맥로어를 자극해서 그의 그릇 밑바닥까지 가늠해 보기 위해서다.
허나, 그렇다고 대놓고 말할 수는 없으니 따로 가져다 붙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글래스트 교수가 그랬듯, 아일라의 성위 마력 감응은 좋은 명분이 된다.
“지금은 몸 상태가 썩 좋지 않아서 제대로 연구를 진행하긴 힘들지만… 방학이 끝나기 전에 아일라를 확보해 놔야지. 일단 개학하고 나서 학사 일정에 참가하기 시작하면 아일라의 부재가 더 크게 티 날 테니까.”
그렇게 말하며, 듄 쪽을 슬쩍 쳐다보았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어디 가서 당당하게 말할 건 못 된다. 사람 하나를 잡아다가 연구 희생양으로 쓴다는 건… 공론화되면 반드시 후폭풍이 생기거든.”
“학사에서도 가만히 있지는 않겠군요. 멀쩡히 학사 생활을 하던 학생이 납치당했다고 한다면요.”
“그래. 그래서 난 이 소식이 절대로 외부로 퍼져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아일라는 그저 방에 혼자 있다가, 갑자기 홀연히 사라진 거야. 가출이 되었든, 뭐가 되었든.”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내 약점을 네게 내비쳤다….’라는 것을 피력하기 위함이다.
사실 약점도 아니다. 어차피 납치당한 아일라조차도 한통속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신뢰 관계는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쥐고 있을 때 생겨난다.
상대가 나쁜 마음을 먹으면 내 계획이 어그러진다. 그런 확신이 있을 때, 비로소 상대를 믿고 모든 걸 맡긴다.
“엘테 상회쯤 되는 집단이 되면 여자애 하나 감쪽같이 감추는 건 일도 아니겠지?”
내가 그리 묻자, 듄은 은근하게 웃었다.
“상회 지하에 비어 있는 방만 스무 개가 넘어갑니다. 대부분은 인부의 쉼터나, 물품 보관소로 활용하는 곳이지만… 문을 잠그면 감쪽같이 감옥이 되지요.”
“내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당연합니다.”
그렇게 듄과 함께 지하실 쪽으로 쭉쭉 내려갔다.
맥세스 대교와 바로 맞닿는 금싸라기 땅에, 총 4층 규모로 세워진 엘테 상회 실베니아 지부.
부지도 넓고, 건물 규모도 꽤 있는 편이라… 이 건물 내부를 다 뒤져서 아일라를 찾아낸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본격적으로 지하 공간이 한 번에 드러났다. 여러 재고 물품들이 꽉꽉 들어차 있는 방이 지하실을 따라 쭉 늘어서 있었다.
그 중간쯤에 있는 깊은 방문을 열고, 인부들이 아일라를 확 밀어 넣었다.
“읍!”
신음성을 내며 바닥을 구른 아일라는, 그대로 인부들을 올려다보았다. 우락부락하게 생긴 사내가 여럿이나 모여서 노려보고 있으니 아무래도 무서운지…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방 상태는 꽤 좋군.”
“사람 하나 수용하기엔 이만한 곳이 없죠. 밖으로 소리가 새 나가는 일도 없으니, 외부에서 알기는 힘들 겁니다.”
나는 바닥을 구르고 있는 아일라 쪽으로 가서 몸을 낮춘 채 쭈그려 앉았다.
“미안하게 됐구나, 많이 당황스럽겠지.”
능청스럽게 이야기하며, 나는 아일라의 상태를 확인했다.
뒤에 서 있는 인부들이 못 보게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포박당한 아일라는 은근하게 덩달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이렇게 상황이 흘러가리란 것도 미리 언질을 해 두긴 했다만, 생각 이상으로 난폭하고 음흉한 분위기에 당황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상태를 꼭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의외로 멀쩡해 보인다.
납치당하는 데에도 솜씨라는 것이 있다면… 역시 아일라는 제법 솜씨가 좋은 편인 것이 아닐까…?
그런 실 없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었다.
‘어쨌든 생각 이상으로 고생을 좀 시켰으니, 다음에 뭐라도 도움을 줘야겠다….’라는
“그래서, 로르텔을 어떻게 잡을 생각이냐?”
“고전적인 수법을 활용해야지요. 이 바닥에서 사람을 끌어내리는 방법은 정해져 있습니다. 죄를 뒤집어씌우는 것이지요.”
로르텔이 엘테를 끌어내릴 때와 마찬가지다.
다만, 그때는 엘테의 자업자득도 조금 있었지만, 로르텔은 완전히 억울한 입장이다.
“이쪽은 이쪽대로 계획에 따라 착착 움직이고 있습니다. 실베니아의 다음 학기가 시작되면, 엘테 상회의 패권은 이미 저희 쪽으로 넘어와 있을 겁니다.”
듄은 절대로 자신의 계획을 전부 다 밝히지 않는다. 내 나름대로 약점을 내비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고, 은근슬쩍 속내를 물어도 전체적인 그림을 이야기할 뿐 절대로 구체적인 방법론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래… 다 네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이야기했다. 여기서 더 파헤치려 했다간 괜스레 의심을 살 뿐이다.
“그럼, 로르텔을 한 번 봐야겠군.”
* * *
으리으리한 황실 마차 안에서는 정적이 감돌고 있었다.
루시와 페니아 황녀는 사실 그다지 친한 사이도 아니다. 같은 학년이라는 공통점은 있지만, 언제나 호위를 받으며 다니는 페니아 황녀와, 높은 곳이나 외진 곳에서 낮잠이나 자고 있는 루시가 만날 일이 얼마나 있었겠는가.
어색한 정적 속에 마차 바퀴 소리만 스며들고 있었다.
루시 메이릴이 쌔근거리는 소리와 함께, 페니아 황녀는 불편한 듯 창밖을 계속 내다보고 있었다.
호위 병사들 사이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
어렸을 적부터 병사들에게 호위를 받아 오며 산 페니아는, 그런 쪽 눈썰미는 발달해 있었다.
평소에 페니아를 호위하던 병사들뿐만 아니라 다른 부류의 병사들도 호위대에 달라붙은 것 같다.
마치, 페니아 황녀를 호위하는 것만이 목적은 아닌 듯하다.
‘황녀의 호위대에 수작을 부릴 수 있을 만한 사람은 없는데.’
제국의 황녀를 호위하는 호위대를 아무나 막 데려다 쓰진 않는다. 대부분은 구면이다.
경력도 꽤 되어 연배 있어 보이는 호위대가 가득하다.
반절 정도는 페니아 황녀도 면식이 있는 병사들이다. 그러나 나머지 절반 정도는 페니아 황녀가 알아보기는 좀 힘들다.
황실 기사단 쪽에서 페니아 황녀의 호위로 이렇게 많은 병사들을 보낸 것도 이상했는데, 그 얼굴도 평소엔 못 보던 사람들이란 사실은 다소 혼란스럽다.
그래도 일단 황실 소속의 사람들이니 페니아 황녀에게 별다른 수작질을 하진 않을 것이다.
허나, 그렇다면 왜 페니아 황녀의 호위대에 섞여 들어와 있단 말인가.
“호송대 소속이라고 하네.”
문득, 잠들어 있는 줄 알았던 루시가 테이블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이야기했다.
전조조차 없이 갑자기 날아든 전언. 페니아 황녀는 당혹스러운 얼굴로 루시 쪽을 보았지만… 루시는 별다른 대단한 기색도 없이 이야기했다.
“아켄섬에서 잡아갈 죄인이 있어서, 호송대와 함께 왔다고 하는데.”
“네?”
루시는 귀가 좋다.
단순히 청력이 좋은 수준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잠들어 있는 상태에서도 주변에 마력을 펼쳐 사람의 한계를 넘어가는 인지 범위를 가질 수 있다.
물론 본인이 전적으로 믿는 사람이거나, 딱히 위협이 될 소지가 없는 사람이라면 가까이 접근하더라도 루시는 반응하지 않는다.
다만, 요 며칠 적대적인 자들의 틈바구니에서 지내야만 했던 루시는… 완전히 감각에 날이 서 있는 상태였다.
허술하고 잠에 취한 듯 보이지만, 루시는 언제나 주변 상황을 적확하게 파악하고 있다.
페니아 황녀는 날이 선 루시의 감각에 마른침을 한번 삼켰다. 이렇게 귀를 쫑긋 세운 상태였다는 것은… 기색만으로는 눈치챌 수가 없었다.
지금은 페니아의 아군이다. 그 사실을 되새김질한다.
강대한 무력에, 날 선 감각에, 지식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확실한 상황 판단 능력까지 있다.
아군일 때는 천군만마를 얻은 듯한 기분일지도 모르겠으나, 적으로 돌린다면 어떻게 이겨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상대다.
적으로 돌려서는 안 되는 상대라는 이야기다.
“호송대라고요…? 죄인…?”
“아켄섬에 죄인이 있어?”
“설마….”
에드 로스테일러?
그렇게 독백하자, 루시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잠에 취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눈은, 의외로 또렷하게 뜬 상태였다.
“…….”
“너무 급하게 판단하지 말아요, 루시 메이릴.”
조용히 상반신을 일으킨 루시 메이릴.
마치 거대한 폭발을 몰고 다니는 폭탄이, 제멋대로 심지에 불을 붙인 느낌이다.
페니아 황녀는 불길한 감각이 들어서, 일단 눈앞의 재앙을 진정시키기로 결심했다.
“에드 로스테일러의 호송 여부는 황실 중앙 회의에서도 쉽게 의결 낼 수 없을 정도로 민감한 사안이에요. 황권 세력 중 누군가가 함부로 에드 로스테일러의 신병을 확보하려 했을 리가 없어요.”
그건 정치적으로 제 발을 밟는 행위이다. 고꾸라진다고 해도 누구도 탓할 수 없다.
그 사실을 루시 메이릴도 잘 알고 있는지, 조용히 페니아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거기다가, 당신이 동행한다는 것을 뻔히 아는데… 호송대에 에드 로스테일러를 제압할 인력을 함께 보낼 정도로 아둔한 생각을 하진 않았을 거예요.”
“그럼 죄인이 달리 누가 있는데?”
“글쎄요… 그건… 좀 더 지켜봐야겠어요. 저는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척하면서 호송대 병사들에게 어울려 줄게요.”
페니아 황녀의 호위대에 자기 소속의 호송대를 슬쩍 끼워 넣을 만큼 영향력 강한 인사는 많지 않다.
인사 편성 권한이 있거나, 아니면 그에 준하는 영향력을 발할 수 있는 자.
기사단 단장급, 재상 이상급, 혹은 클로엘 황제의 3대 측근, 아니면…. 세 명의 황권 주자.
그중 하나… 페니아의 심증은 이미 어느 정도 굳혀져 있었다.
“페르시카 언니.”
인사 편성 권한을 쥐고 있는 황실 기사단장은 페르시카의 세력에 붙어 있었다.
만약 영향력을 행사했다면, 페르시카 황녀일 가능성이 컸다.
페니아 황녀가 페르시카의 이름을 거론하자, 루시 메이릴의 시선이 날카로워졌다.
페르시카 황녀는 에드 로스테일러에게 우호적인지, 적대적인지 애매한 인물이다.
대놓고 적대적인 셀라하 황녀나, 대놓고 우호적인 페니아 황녀와는 달리 뭐라 판단하기가 힘들다.
루시 입장에서도 애매모호한 느낌이었으나, 만약 호송대를 이용해 에드 로스테일러를 잡아갈 생각이라면 완전히 의견이 달라진다.
그러나, 아직 섣불리 판단할 수는 없다.
달리는 마차 안.
평화로운 제국의 영토를 가로지르고 있는 모습. 창밖으로는 아름다운 초목의 향연이 펼쳐져 있지만… 두 사람은 그런 풍광을 즐기고 있을 상황이 되지 못했다.
마차 바퀴 소리가 퍼져나가는 내부에서, 둘은 서슬 퍼런 긴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아켄섬에 도착하거든, 무언가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질 것만 같다.
페니아 황녀는 어떤 방식으로든지 루시를 자극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선 에드 로스테일러 또한 자극해선 안 된다.
그 사실을 유념하며, 긴장 상태를 유지해 나갔다.
마차는 이미 자훌 변경백을 지나고 있었다. 이 영지를 지나 남서쪽 해안에 도달하면, 아켄섬으로 향하는 맥세스 대교가 눈에 들어오게 된다.
아켄섬 도착이 머지않았다.
새벽녘의 찬 공기도 사라져 가고, 천천히 오전의 활기가 서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 * *
―쿵!
회주 대리 로르텔 케헬른의 집무실.
문을 열고 들어왔을 때, 로르텔은 완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언제나 몸에 두르고 다니는 갈색 로브의 모자를 완전히 푹 눌러 쓴 채, 의자에 손이 뒤로 묶인 채로 미동조차 없었다.
집무용 책상에는 간단한 식사가 준비되어 있었다. 손이 묶인 상태로도 먹을 수 있는 빵이나 건어물 따위가 올라와 있었다.
그러나, 로르텔은 단 한 조각도 입에 대지 않았는지… 조용한 상태였다.
“…….”
서슬퍼런 독기마저도 피어올라 오는 것 같은 광경.
로르텔의 최측근이었던 상회 직원은, 집무실까지 날 안내하면서도 한없이 긴장한 상태였다.
자기가 직접 뒤통수를 친 우두머리의 앞에 나가는 것도 멋쩍은 일인데, 상대는 포박당한 뒤로 말 한마디조차 없이 서늘한 냉기를 품고 있다.
마치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복수의 칼날이 바로 목을 꿰뚫어 버릴 것 같은… 그런 살기가 느껴진 것일까.
언제나 능구렁이나 여우 같던 로르텔의 그런 차가운 모습은 제아무리 산전수전 다 겪은 상회 직원들일지라도 등골이 서늘해지게 만드는 것이다.
오히려 로르텔이기에, 그런 갭에서 오는 공포감이 더욱더 진하게 느껴진다.
같은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목 안으로 진득한 진흙이 흘러들어 오는 것 같다.
칼끝을 걷는 기분.
이번 기회에 완벽하게 제압하지 않으면, 로르텔은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않을 거라는 그 서슬 퍼런 감각.
“나가 계시겠습니까?”
“그, 그럴까요?”
배려라고 하긴 뭣 하지만, 내가 그렇게 제안하자 상회 직원은 덥석 받아들였다.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용무 끝나시면 나오십시오.”
그렇게 말하며 상회 직원은 얼른 집무실 문을 열고 나갔다.
쾅 하고 집무실 문이 닫히고, 눈앞에는 집무용 테이블 뒤에 묶여 있는 로르텔 케헬른의 모습이 보인다.
언제나 고고하게 앉아 여유로운 모습으로 상회를 진두지휘하던 모습과는 달리, 완전히 포박되어 버린 모습은 유폐 직전의 여왕과도 같다.
나는 그대로 내부로 터벅터벅 걸어 들어와서 집무용 책상의 맞은편에 앉았다.
로르텔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식사를 전혀 안 했군.”
내가 그렇게 넌지시 이야기를 던져 보았지만, 로르텔은 여전히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절이라도 한 것일까 싶지만, 이따금씩 느껴지는 인기척을 보면 정신은 멀쩡하다.
“왜 왔어요?”
이윽고, 긴 정적을 깨고 로르텔의 청아한 목소리가 올라왔다.
“비웃으려고?”
목소리에 날이 서 있다. 그 모습은 마치 원수를 앞에 둔 자가 악에 받쳐 내는 목소리다.
꽉 억눌린 말에는 온갖 감정이 서려 있다. 허나, 울부짖을 수도 포효할 수도 없기에… 조용히 목소리를 내리깐 채 말하는 것이다.
“혼자 앉아서 생각해 봤어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에드 선배님이 제 편을 들어 얻을 이득이 없어요.”
로르텔 케헬른은 이 자리에 앉아,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다.
혹시라도 에드 로스테일러가 로르텔 케헬른의 편을 들면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을까.
듄의 편에 붙지 않고, 로르텔의 편에 붙음으로써 무언가 득될 것이 있다면… 에드 로스테일러는 자신의 편을 들 수도 있다.
허나, 로르텔 케헬른은 현명하기에 금방 깨달았을 것이다.
이해타산의 관점에서 생각해보면 에드 로스테일러가 로르텔 케헬른의 편에 서서 얻을 수 있는 이득이란 것이 전혀 없다.
“축하드려요. 저랑 친하게 지내시길 잘했어요.”
다만, 야속하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리라.
지난 2년의 시간 동안, 여러 곳에서 부대끼고, 정을 붙여왔던 시간들이… 이해타산이라는 벽 앞에서 전부 무의미해진다는 것이.
“덕분에 흑자 보셨네요.”
제아무리 뼛속까지 상인이라 할지라도 사람이다.
특히, 로르텔 케헬른은 누군가에게 이렇게까지 정을 줘 본 적이 없다.
가족도, 친구도, 믿을 만한 동료도 없이 홀로서기 했기에… 그런 관계를 갈망했던 소녀다.
상실에 의한 아픔도 처음으로 느껴 보았을 것이기에.
그 배신감 또한, 내 선택이 합리적인 것이란 걸 알고 있음에도 걷잡을 수 없었을 것이다.
로르텔 케헬른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관계의 상실이라는 것에서 오는 공포와 아픔이란 것을 이해했을 것이다.
타산적인 관계 속에서만 살아온 소녀에게 그것은 처음으로 겪는 아픔이었을 터.
그 사실에 묘한 죄책감이 들고 말지만, 당장 내 쪽에서 고를 수 있는 선택지도 그리 많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확실하게 이야기해 주는 것뿐이다.
“넌 지금… 뭐냐?”
그래서, 다소 뜬금 없는 말을 내뱉었다.
여전히 로브 모자의 그늘 아래에서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로르텔은 미동조차 없다.
“엘테 상회의 회주 대리냐? 실베니아 아카데미의 마법부 차석이냐?”
영문도 모를 질문을 던져 대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그래도 나는 멈추지 않았다.
“아니면 어린 나이에 자수성가한 거상이냐? 내 마공학 용품을 보급해 주는 동업자냐?”
“…….”
“지금 시점의 너는… 아무것도 아니야. 그 무엇도 아니지.”
그녀가 확실하게 긍정할 수 있는 것은 아마… 이것 하나뿐일 터다.
“너는 로르텔 케헬른이야.”
나는 목재 의자에 구부정하게 앉은 채로, 별것 아닌 듯하면서도 대단히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한다.
“애석하게도, 지금에 와선 이유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다.”
“무슨 이유요?”
“내가 널 구해야 할 이유.”
나는 허리춤에서 단검을 꺼내들었다.
로르텔이 뭐라고 반응하기도 전에, 손목을 포박하고 있는 밧줄을 휙 베어 버렸다.
날이 바짝 서 있는 단검에 의해 밧줄은 아무렇지도 않게 썰려 나갔다.
로르텔의 손은 완전히 자유로워졌다. 이제 발을 묶고 있는 밧줄만 베어 버리면 된다고 생각한 순간―― 로르텔이 고개를 휙 치켜들었다.
고개를 든 로르텔은―― 의기양양하게 웃고 있었다.
“어머나.”
“야, 너….”
“이렇게 흡족할 수가.”
애시당초 로르텔은 상심하는 일도, 고뇌하는 일도 없이….
그저 가만히 앉아서, 내가 여기에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을 뿐이다.
다만, 능구렁이를 수천 마리는 잡아먹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음흉한 그녀답게… 상심한 듯이 고개를 푹 숙이고서는 내 말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왜요? 내가 선배님을 의심했을까 봐?”
다른 이유는 없다. 그저 로르텔 너라서 구한다.
그 말을 듣고 싶었던 것일까.
여우처럼 음흉하게 웃으며, 로르텔은 자유로워진 팔로 모자를 천천히 걷어 올렸다.
한없이 행복한 듯 올라와 있는 입꼬리가, 그녀의 들뜬 기분을 방증한다.
“기다리다 죽을 뻔했어요.”
“…….”
“다리도 너무 꽉 죄여서 아파요. 빨리 풀어 주세요.”
나는 단검을 들어 올린 채 허리를 푹 숙였다. 행여나 로르텔의 발목이 다칠까 봐, 신중하게 단검을 밧줄 쪽으로 들이밀고 있을 때였다.
“에드 선배님이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얼추 알고는 있었어요. 협상 계약서를 읽어 보고 나니 알겠더라고요. 정말로 에드 선배님이 듄 쪽으로 붙을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제 앞에 얼굴을 드러낼 필요도 없었겠죠.”
“허탈하다. 상심에 빠져 있을 거라고 생각했건만.”
“아핫, 선배님. 선배님도 은근히 음습하시다니까. 배신당해서 우울에 빠져 있는 소녀에게 너 배신 안 당했으니까 걱정 말라고… 그런 희망을 불어넣는 상상이라도 하셨어요?”
로르텔은 헛숨을 휙 흘리면서 여유롭게 웃었다.
“애석하게도 그런 일은 없네요. 선배님 얼굴 처음 봤을 때부터 아 다 속내가 있구나, 하고 가늠이 끝나 있었으니까.”
“에휴, 됐다. 내가 뭘 말하겠냐. 일단 발부터 풀고, 탈출로부터 생각해야 된다. 아마 곧 있으면 테일리가 들이닥칠 거야.”
“또 뭔가 술수를 벌여 놓고 오셨네요. 알았어요. 일단 침착하게 생각부터 정리하죠.”
그렇게 말하며, 천천히 로르텔의 발목을 묶은 밧줄을 베어 냈다.
뭐, 다 이런 법이다. 얼마나 드라마틱한 일이 일어나겠는가.
상인들의 세계가 늘 그렇듯, 대단히 엄청난 시련일 것 같아도 어떻게든 솟아날 구멍은 있는 법이다.
로르텔도 그 사실을 모르진 않았기에…. 아무런 동요조차도 없었던 것이다.
역시나, 언제나 침착함을 유지하는 이성의 화신이다. 내가 생각했던 로르텔 그대로다.
괜스레 감정 정리할 필요도 없겠지. 일단 다음 움직임부터 얼른 브리핑하는 것이 맞다.
시간을 제법 절약했구나.
―타악.
―쿠당탕!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습격당했다.
몸이 그대로 뒤로 쭉 밀리면서, 바닥에 뒷머리를 찍었다. 약한 통증이 올라왔지만, 그보다 날 더 놀랍게 한 건 내 품 안에 뛰어든 로르텔의 모습이었다.
몸이 자유로워지는 순간, 로르텔은 내 가슴께에 얼굴을 박고 확 끌어안긴 것이다.
그 여파로 나무 바닥을 뒹굴고, 정신을 차려보니 품속에 박힌 로르텔은 자기 얼굴을 내 몸에 비벼 대고 있었다.
“…….”
“…….”
나는 뒷머리를 스윽 쓸면서, 차가운 나무 바닥의 냉기를 등으로 느꼈다.
“다 가늠하고 있었다면서.”
“알고 맞는다고 해서 매가 아프지 않은 건 아니더라고요.”
그게 뭘 의미하는지 굳이 캐묻지는 않았다.
로르텔 케헬른을 배신하는 모습. 듄 쪽에 붙어서, 그녀를 팔아넘기고, 내 득을 챙기며… 그녀를 완전히 버려 버린 미래.
상상해 보면, 완전히 불가능한 미래는 아니었다.
그 사실이 더 사무쳐서, 로르텔의 등골은 더 서늘해졌을지도 모른다.
“한 가지 확실한 건….”
품에 파묻힌 로르텔은, 그간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모습이다.
언제나 냉철하던 그녀가 이렇게까지 유약해진 모습은… 아마 앞으로도 보기 힘들겠지.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단 거예요.”
나는 더 말하지 않고, 조용히 로르텔의 뒷머리를 슥슥 쓰다듬어 주었다.
“…미안하게 됐다.”
내 쪽도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구구절절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한동안 그렇게… 집무실 바닥에 붙어서 누워 있어야 했다.
―콰앙! 쾅!
―쿠궁! 쿠웅!
상회 정문으로부터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온 것은 그다음 일이었다.
대지를 흔드는 거대한 진동이, 집무실 바닥에까지 그대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