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Game Director Returns from Hell RAW novel - Chapter (183)
183화. 오픈 월드 (3)
맵의 컨셉 발표가 끝났다.
이제부터 개발 과정에 있을 고난들이 개발진들의 골머리를 아프게 하겠지만, 그렇다고 더 나은 길이 있음에도 편의를 빌미로 물러설 수도 없는 일.
팀원들을 믿고 나를 믿으며 나아갈 수밖에 없다.
또한, 그러기로 다짐했으니 지금은 맵 이외의 문제를 바로 해결해야 할 터다.
“일단은 캐릭터죠.”
RPG 게임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다.
주어진 공간(맵)에서 특정한 역할(캐릭터)을 부여받아 과제를 해결(플레이)하는 것.
개중 지금은 과제 해결에 앞서 그것을 수행할 캐릭터를 정하는 단계인 것이다.
“이번 게임에서는….”
말꼬리를 늘리자 팀원들이 긴장한다.
특히 긴장하는 것은 유미와 혜지다.
그리고 모션을 담당할 김배석 씨다.
아마 헬릭4처럼 하나의 캐릭터에 수백 수천 개가 넘어가는 모션을 삽입해 그 연결과 부드러움을 강조하는 방식을 생각하는 것이겠지.
확실히 그러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이 게임에선 굳이 그럴 필요가 없지.’
헬릭5의 컨셉은 압도적인 자유로움이다.
그런 만큼 캐릭터의 설정부터 그것을 플레이하는 유저에게 맡기는 게 가장 이상적인 그림이 아니겠나.
헬릭 5의 메인 서사는 ‘지옥에 관한 탐구’였다.
그러니 유저로 하여금 자신이 어떤 탐구자가 될 것인지를 스스로 정하게 하는 것이다.
쉽게 말해 그렇다.
“커스터마이징 한 번 더 합시다.”
“앗….”
전유미의 깊은 탄식이 뒤따라붙었다.
나는 되물었다.
“괜찮지 않아? 3에서 해봤으니까 이번엔 조금 더 쉽게 할 수 있을 거잖아.”
이번 게임의 커스터마이징 및 캐릭터 설정에서 중요한 점은 하나다.
캐릭터의 성별과 나이, 그에 따른 특징을 크게 부각하여 각 분류별로 ‘특화’라는 속성을 심어주는 것이다.
예를 들자면 판타지를 배경으로 한 게임에서 각 플레이어블 캐릭터의 종족별 특성이 나뉘는 일을 들 수 있겠다.
자세한 방향성은 더 고민을 해봐야겠으나, 기본적으로 노인 캐릭터에겐 ‘연구’ 보정을 줄 생각이고 어린 캐릭터에겐 ‘학습’ 보정을 주는 형태가 될 터다.
물론 이렇게만 말하면 다들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겠지.
게임이라는 것 자체가 캐릭터의 외형이 아닌 플레이 방식이 중요한 오락이니 말이다.
순차적으로 들어가 보자.
이제 캐릭터를 정했으니 그것으로 과제를 해결하는 방법.
즉, 게임의 알파이자 오메가인 플레이에 대해 논할 때였다.
“골자는 헬릭 시리즈에서 벗어나지 않아. 다만 전보다는 더 자유로울 뿐.”
“그 말은…?”
“무기 빌드 시스템을 모티브로 적용할 생각이에요. 대신 가지 수나 성장 방향성은 훨씬 다양해지겠죠.”
직원들이 의아해한다.
특히 의문이 짙은 것은 오픈 월드라는 장르를 아는 명규 형이었다.
“전투 중심 게임이야? 무엇보다 오픈 월드에서 한 가지 무기 종류를 강제하는 플레이는 독이 될 텐데?”
당연한 소릴.
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아직 하지 않은 말을 덧붙였다.
“그 시스템을 가져온다는 얘기였지 무기 빌딩을 하는 건 아니에요.”
삑―!
빔 프로젝터를 넘겼다.
그러자 보이는 것은 발표용으로 만든 빌딩 시스템의 예시였다.
그것은 중심부에서부터 뻗어나온 줄기들이 거대한 가지를 뻗어 완성한 마인드맵이었다.
명규 형의 눈이 큼지막하게 커졌다.
“…아!”
나는 곧장 말했다.
“네, 무기 빌드가 아니라 ‘성장 빌드’죠.”
화면에 떠올라 있는 문자들은 어떤 무기가 아닌, ‘학문의 종류’를 논하고 있었다.
이름을 붙이길 ‘학파’.
다시 이르길, 헬릭5는 지옥을 탐구하는 학자들의 이야기였다.
* * *
탐미의 지옥은 그들을 가둔 거대한 땅덩어리 내부에서 여러 구획을 돌아다니며 연구를 이어가는 학자들의 지옥이었다.
그런 배경이 지옥의 특성과 더불어 지며 생긴 묘한 해프닝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다른 시공간을 살아온 학자들의 만남’이었다.
물론 썩 유쾌하고 반갑게 이뤄지는 만남은 아니었다.
―부처가 무엇이오? 쯧… 철학을 한다는 인간이 우상숭배를 한단 말이오?
―뭣이…! 천문학을 모른다는 말인가!
―이보게! 당장 그 말을 취소하게! 연금술은 엄연한 왕실의 정식 학문일세!
애초에 이곳에 떨어진 인간이라는 것부터가 제 학문에 미쳐 무언가를 희생시킨 사람이라는 증거였다.
그 정도로 제 학문에만 미쳐있는 인간들이 다른 학문을 인정하거나 평생의 노력이 부정당하는 일을 가만 견딜 수 있겠나?
높은 확률로 싸운다.
그냥 주먹다짐이 아니다.
이곳은 지옥이고, 이들은 죄를 지은 죄수다.
꽈직!
―흥! 땅이 둥글다 말하는 정신병자는 돌멩이로 찍어 죽여야지!
싸우면 대체로 어느 한쪽이 죽는다.
물론 죽어도 다시 살아나는 것이 지옥의 생리이긴 하다만은, 그리 죽고 죽인 인간들이 어찌 다시 얼굴을 맞대고 웃으며 볼 수가 있겠는가.
탐미의 지옥은 지옥 그 자체도 끔찍한 문제투성이었으나, 그 외에도 다른 학파의 사람들도 경계해야 하니 어찌 보면 살육의 지옥만큼이나 인간에 대한 불신이 쌓이는 곳이 되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사람과 지옥을 모두 경계하는 일이 어찌 인간으로서 힘들지 않을 수 있겠나.
머리 좋은 양반들은 그 속에서 한 가지 묘수를 떠올렸다.
―이보시오. 당신은 생물을 연구한다고 했지?
―그렇소만?
―그렇다면 나와 힘을 합칩시다! 나는 연금술을 연구하는 자요! 우리끼리 힘을 합친다면 저 간악한 종교쟁이들로부터 우리 몸을 지킬 수 있을 것이오!
동맹이다.
학문의 성격이 비슷한 이들끼리 힙을 합쳐 세력을 만든 것이다.
한둘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탐미의 지옥 전반에 그런 흐름이 일었고 결국 학파 문화가 탄생하게 되었다.
여하튼, 학파라는 것이 갈린다는 것은 이만하면 이해가 되리라.
원론으로 돌아가 이 ‘학파’의 존재가 탐미의 지옥을 살아가는 그들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말해보자.
그것은 이론적 학문에 큰 관심이 없는 내가 봐도 참 신기한 광경이었다.
각 시대의 이론과 사고가 얽히고 발전하며 꽃 핀 새로운 이론, 그것이 지옥이라는 공간의 비현실적 특수성과 얽히며 기적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러 예시가 있었다.
우선 연금술사, 화학자, 생물학자들이 주축이 되어 만든 ‘유라스 학파’.
―자, 이걸 보시오! 자색 지옥의 ‘시간 줄기’와 백색 지옥의 ‘무아의 관’을 재료로 만든 올가미요! 이게 있다면 우리는 저 빌어 처먹을 종교쟁이들을 백치로 만들 수 있는 게요! 물론 죽고 되살아나면 원래대로 돌아오겠지만!
그들은 지옥의 각 생태와 그것들의 구성성분을 연구하여 이 공간을 탐구하려 했다.
목표는 ‘지옥에서 고통받지 않고 사는 법의 연구’였다.
과정에서 나온 것이 바로 ‘지옥 파편’이라 불리는 도구들이다.
그러니까, 게임으로 아이템 제작을 통한 플레이를 추구하는 이들이라 볼 수 있겠다.
다음으로 천문학자, 유학자, 그리고 신학자들이 모여 만든 ‘하델룬 학파’.
―내가 깨달아버렸소! 이곳은 땅이 곧 하늘이오. 그리고 우리는 땅에 발을 디디고 있으니 하늘을 빛내는 별일 것이오! 결국 흐름을 되짚어 붙든다면 이렇듯 몸에 주님의 은총이 깃들게 할 수 있는 것이지!
―오오…! 이 무슨 아름다운 광채가…!
―자, 잠깐! 저 친구의 몸이 불어나고 있지 않나? 악, 으악! 터진다!!!
그들은 탐미의 지옥에서 일어나는 여러 자연 현상들을 연구해 그것에 간섭하는 방법을 터득한 이들이었다.
내가 보기로, 가장 마법 같은 일을 한 사람들인데 단점이라면 그들의 연구 대다수가 위력적인 만큼의 리스크가 있었다는 것이었다.
목표는 지옥의 통치자가 되는 것.
신을 대리한다는 목적 하에, 목표가 다른 모든 이들을 적으로 간주해 발아래 두는 것이다.
유저로 치면 전투 위주의 플레이를 하는 이들에게 적합할 터.
다음으로 물리학자, 공학자, 지질학자들이 모여 만든 ‘콜번 학파’.
―행성을 뒤집어 내부에 우리를 박아둔 모양새다. 땅을 계속 파다 보면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도 몰라.
―황색 지옥의 지반이 특히 연하지. 하지만 깊이가….
그들은 지옥의 광물과 지질을 분석해 여러 공업 도구를 발전시켜나가는 이들이었다.
목표는 지옥에서의 탈출.
그들은 모든 집단 중 가장 우직했으며, 가장 유별난 사고방식을 지닌 이들이었다.
유저들 또한, 벽을 깨거나 땅굴을 파 움직이는 등 별난 방식의 플레이를 추구하는 이들이 이에 어울릴 것이다.
위의 세 가지가 바로 탐미의 지옥을 주름잡는 3강이다.
그 외에 소수의 마음 맞는 이들끼리 만든 군소 학파가 있었고, 또한 어느 무협지처럼 고독하게 연구를 이어가는 한 사람과 그 진전을 이어받는 제자 단둘밖에 없는 학파도 있었다.
이것이 바로 탐미의 지옥을 오픈 월드 게임으로 만드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저것들을 캐릭터 성장으로 구현한다면….’
세 학파 중 하나를 고르거나 소수 학파… 즉 히든 피스를 찾거나 해서 다양한 형태로 플레이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저들의 생리나 권력 및 경쟁 구도를 메인 스토리에 엮어 표현한다면 썩 그럴싸한 내러티브가 완성될 것이다.
그 판단이었다.
그리고, 실제 기획 및 계산 단계에 들어선 오늘 나는 확신했다.
‘할 만해.’
할 만한 정도가 아니라, 컨텐츠로서 모험과 보상, 그리고 성장이라는 측면을 학파 싸움 및 각 학파의 연구 심화로 엮어버린다면 게임이 한층 더 확실하고 직관적인 그림으로 완성된다.
* * *
게임 컨셉에 대해서는 의심이 없다.
다만, 내 확신이 언제나 옳으리란 장담은 자칫 오만으로 발전할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었기에 이 시기면 항상 하는 게 있었다.
“딴지 걸어 보세요.”
바로 타인의 부정적 피드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 일은 주로 기획팀 내부에서 일어난다.
“보완이 필요한 점이나 독이 되리라 생각하는 점. 아무거나 다 말해도 됩니다.”
화상 회의, 모니터 너머로 직원들이 빵긋 웃는 게 보였다.
내 욕하는 게 그렇게 즐거울까.
섭섭한 마음이 잠시 일었고 이내 들어온 질문에 그것은 씻은 듯이 지워졌다.
―그럼 제가 질문해도 되겠습니까?
선임 기획자인 지석 씨였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지석 씨가 말을 시작했다.
―학파 가입을 통한 성장 시스템 자체는 이쁜 그림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헬릭5에는 안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왜죠?”
―성장 방향성이 강제되니까요. 자유도 높은 오픈 월드라면 상기한 여러 학파의 비전들을 유저가 자유롭게 습득할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의기양양하게 말을 마친 지석 씨가 내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좋은 질문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발표 중간에 조금 조신 것 같다.
“흠.”
말을 흘리자 호수 씨가 대신 지석 씨에게 설명했다.
―…학파는 자유롭게 옮길 수 있습니다. 여러 학파를 동시에 가입할 수도 있고요. 그만큼 시간을 더 투자해서 여러방면으로 성장하면 되는 것이니까요.
―…앗.
지석 씨의 입이 오므라들었다.
슬금슬금 화면 너머로 내 눈치를 보는 듯하다.
뭐, 설명한 게 많으니까 한 번에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쳐도 되겠지.
어차피 자료 공부로 한 번 더 외울 텐데 지금 시점에서는 이래도 괜찮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지석 씨 말대로 헬릭5의 묘미는 자유도에서 오도록 설계해야죠. 시스템이 유저의 선택을 강요하는 일은 최대한 피하는 겁니다.”
그렇기에 학파의 중복 가입이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게 마구잡이로 학파를 늘리는 일은 역시 그냥 둘 수 없다.
“책임이 따라야 자유죠. 그게 아니라면 방종이고.”
유저는 뭐든 선택할 수 있다.
다만, 그 선택은 유저 본인의 몫이어야 한다.
“적대적 NPC를 도입합니다.”
헬릭5에는 한 번 학파에 가입하면 경쟁 학파에 적대적인 관계가 형성된다.
즉, 유라스 학파에 가입하면 그들이 종교쟁이라며 욕하는 하델룬 학파의 npc들이 선제공격 몬스터로 설정되어 버린다.
그걸 뚫을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박쥐 짓을 하면 되는 겁니다.”
바로 ‘첩자’ 시스템이다.
“한 번 학파에 가입하고 다른 학파로 가려면 학파를 상징하는 모든 아이템을 벗고 가야 합니다. 또한 특수한 아이템을 통해 학파의 흔적은 몸에서 지워야 해요. 아직 학파에 들지 않은 것처럼 행동하는 거죠. 그렇게 타 학파에 가입. 비전을 다각도로 수집하는 형태가 될 겁니다.”
원한다면 그런 방향도 가능하다.
아니면 하나만 진득하게 팔 수도 있는 거고.
아, 예외의 경우가 있긴 하다.
“히든 피스로 분류되는 숨겨진 학파의 지식은 엑스트라 루트로 따로 생성시킬 겁니다. 적대적 페널티도 어지간하면 안 붙일 거고. 모험에 대한 보상에는 리스크가 없는 게 좋으니까요. 애초에 그런 것들은 사이드 퀘스트나 숨겨진 던전을 통해서만 습득할 수 있게 할 거라 설정적으로도 문제는 없죠.”
그에 지석 씨가 잠시 눈치를 보다, 이내 질문했다.
―…하나만 더 질문해도 됩니까?
“예.”
―혹시 3대 학파 중 두 개에 동시에 가입했다가 들키면요?
핵심적인 질문.
서로가 앙숙인 3대 학파는 비전 공유를 극도로 꺼린다.
그걸 이미 시스템에 녹일 거라고 확정시켜둔 상태.
게임의 퀄리티를 위해서라면 그 부분도 묘사를 해야 했고, 이미 생각해둔 바가 있었다.
생각해보라 플레이어가 두 비전을 함께 들고 있는 걸 해당 진영 NPC에게 인식시켜 버린다면?
답은 뻔하지 않나.
“둘 다 적으로 돌리는 거죠. 맵 돌아다니기는 힘들겠네요. 3대 학파 NPC는 어딜 가나 있을 테니까.”
물론, 그런 플레이를 즐긴다면 권장하는 바다.
아마, 제임스 같이 몰살 루트를 즐기는 놈이라면 좋다고 먹고 다닐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