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ammer RAW novel - Chapter 501
1화. 모르스 대공
“또?”
차분하게 들려오는 반문에 심장이 쫄깃해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10대…… 아니 9대 기사 중에서도 최강급에 속하는 초인이자 제국의 대공이면서, 마계 대전에서 지대한 공을 세운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으니까.
자신이 아무리 7대 신성이니 뭐니 하며 불린다 해도, 마치 보름달과 반딧불처럼 아득한 차이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할 수 있다, 할 수 있어. 샐먼 폰 루센트. 넌 할 수 있어.’
지금 원조를 받지 않으면, 가문이 망한다.
빌어먹을 형과 욕심 많은 아버지가 인중신(人中神)과 마찰을 빚는 바람에 몰락하기 시작한 가문에는, 새롭게 나타난 재앙에 대응할 힘이 없었으니까.
“예. ‘그을음 괴물’들이 영지를 파괴하고 있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제발!”
쿵.
샐먼은 간절한 마음을 전하려 바닥에 머리까지 찧어 가며 애원했다.
“역시나, 대마법이나 오러가 아니면 통하지 않던가?”
“예. 폭뢰를 비롯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봤지만, 하나도 통하지 않았습니다! 제발, 제발 도와주십시오, 대공 각하!”
쾅.
쩌저적.
그는 대리석 바닥을 부술 기세로 거듭 머리를 박아 가며 진심으로 호소했다.
폭풍의 기사로 불리는 자신의 골이 울릴 정도의 충격으로.하지만 역효과였다.
“그, 바닥 비싼 건데. 거참…….”
“죄, 죄송합니다 각하! 얼마든 배상하겠사오니 부디 자비를…….”
“커흠. 뭐, 배상하란 얘기는 아니었고. 아무튼 다급하다는 것은 알겠다. 내 잠시 중요한 볼일을 보고 바로 루센트 영지로 갈 터이니, 너무 걱정 말게.”
“가, 감사합니다. 각하!”
쿵.
“비싼 거라니까.”
“죄, 죄송합니다.”
쿵.
“……너 일부러 그러는 거냐?”
“절대, 절대 아닙니다!”
다시금 관성적으로 머리를 박으려던 샐먼은 아차 하는 마음에 가까스로 동작을 멈췄지만.
조아린 고개 아래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됐다. 마도 기사가 움직여 준다면, 우리 영지는 산 거야.’
그런 기쁜 마음을 담아 조심스레 고개를 들어 보는데.
“허어……. 세상이 어찌 되려고 자꾸 이런 일이…….”
마도 기사, 혹은 모르스 대공으로 불리는 아르곤 ‘모르스’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집무실 밖으로 나서는 것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보니 살짝 의문이 들었다.
‘그을음 괴물보다 먼저 처리해야 할 중요한 일이 뭘까.’
모르긴 몰라도, 자신이 짐작할 수 없는 중대한 사건이 또 있는 것 같았다.
그을음 괴물은 일반 영지에서야 지대한 위협이지만, 오러익시더이자 대마법사인 모르스 대공에게는 큰 문젯거리가 아닐 테니까.
그리고 그런 샐먼의 짐작이 맞는 듯, 집무실 밖으로 나선 아르곤 모르스는 바람처럼 움직여 어디론가 향하고 있었다.
* * *
‘이제 곧, 이제 곧……!’
아르곤은 오러와 버프 마법까지 동원해 가며 미친 듯이 내달렸다.
그렇게 도착한 별관.
‘금발 엘프’가 검은 머리의 아기를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그 엘프는 아르곤과 눈이 딱 마주치자마자 화들짝 놀라 아기를 내밀었다.
“아!? 가, 각하? 아기씨 막 깨셨어요. 어떻게 딱 맞춰서……!”
“아뿌?”
검은 머리 아기가 엘프 유모에게 안긴 채 까만 눈을 빛내며 고개를 갸우뚱하는 순간.
아르곤의 입가에 주체할 수 없는 미소가 번졌다.
“우리 공주님, 깼어요? 아빠가 보고 싶어서 한달음에 달려왔지요. 우쭈쭈쭈쭈.”
“꺄아~!”
유모에게 받아든 아기에게 아르곤이 얼굴을 비비자, 똘망똘망한 눈동자의 아기가 방긋 웃으며 조막만 한 손으로 아빠의 얼굴을 토닥였다.
“그리 좋으세요?”
“그럼요. 10년 만에 얻은 아이인데요.”
“아기씨가 너무 영리하셔서, 벌써 말도 조금씩 하시던데요.”
“그게 제일 좋아요! 모르스라고 다 바보는 아니라는 것을 우리 올리비아가 증명할 거예요! 그치, 올리? 아빠, 해 봐. 아빠.”
“꺄륵! 아뿌?”
“이야아! 역시 우리 공주님, 천재네!”
“루나 마님께서 이걸 보셨어야 하는데. 너무 바쁘셔서…….”
싱글벙글 웃으며 대답하던 아르곤은, 이내 이어진 유모의 말에 살짝 표정이 굳었다.
“쓰읍. 안 그래도, 저도 지금 루센트 영지로 가 봐야 해요. 루미너스 님, 우리 올리비아 잘 부탁합니다. 아마 제가 돌아올 때쯤에는 루나도 돌아오겠지요.”
“예? 설마 또 그을음……?”
“그렇다더군요. 이번엔 루센트 영지 쪽인가 봅니다.”
“……알겠습니다. 뭐, 마탑의 마법사님들과 엘프 레인저들도 있으니 영지는 걱정 안 하셔도 될 겁니다.”
“예, 믿겠습니다.”
싱긋 웃은 아르곤은 아이의 볼에 쪽 하고 입을 맞추더니, 품에서 떼어 놓기 아쉬운 듯 몇 번이나 아이를 들었다 놨다 했다.
“아뿌?”
“씁. 미안, 올리. 아빠 금방 갔다 올게? 미안해.”
“이잉…….”
마치 그 말을 알아들은 것처럼 아기가 투정을 부리는데.
아르곤은 도무지 떨어지지 않은 손길로 아기를 유모에게 맡겼다.
“잘 부탁합니다, 루미너스 님.”
“아, 예. 당연하지요.”
아기를 받아든 엘프 유모가 잠깐 한숨을 내쉬더니, 바로 돌아서려던 아르곤을 불러 세웠다.
“그런데 각하…….”
“예?”
“왜 자꾸 저에게 존대를 하시나요?”
“아…….”
“저는 유모로 이곳에 온 사람입니다. 아무리 종족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아랫사람인데, 그냥 편히 대해 주셨으면 합니다. 그것이 인간의 법도라고 배웠습니다.”
루미너스의 말에 아르곤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럴 수야 없지요.”
“인간의 나라에 온 이상, 저는 철저히 인간의 법도를 따를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사위가 장모님께 반말을 하겠습니까.”
“……!?”
그 말에 루미너스의 눈이 한순간 부릅떠졌다.
“……알고, 계셨나요?”
아르곤은 루나와 꼭 닮은 그녀의 눈매를 응시하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기시감이 들어서 에우리나 장로님께 여쭤봤습니다.”
“……그렇군요. 혹시 루나…… 그 아이도 알고 있나요?”
“마아?”
파르르 떨리는 루미너스의 눈동자를 마주한 아기가 그녀의 볼을 토닥거리는데.
그 모습을 보며 다시 미소를 지은 아르곤이 바로 고개를 저었다.
“모를 겁니다. 아마도…….”
알았다면 난리를 쳤을 테니까.
“아…….”
정말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안도하는 루미너스를 보며, 아르곤은 잠시 망설이더니 말을 이었다.
“계속 자책하시는 거 알고 있습니다. 루나에게 속죄하고 싶어 하신다는 것도요. 그래서 아이를 돌보는 일에 자원하셨다고요.”
“……그런다고 제 죄를 씻을 수 없다는 것은 알아요. 그저 이렇게라도 위안을 얻으려는 것일 뿐이니, 그냥 모른 척…….”
“언젠가 루나도 알게 될 겁니다. 머리는 나빠도 직감은 뛰어난 사람이니까요. 그때는 어떻게 말씀하시려는 겁니까?”
“그거야…….”
루미너스가 입술을 깨문 채로 말을 잇지 못하자, 아르곤은 다시 한숨과 함께 머리를 긁적였다.
“딸에게 미안하시다면, 솔직하게 용서를 구하십시오. 우리 루나, 그렇게 보여도 마음이 여린 사람입니다.”
“…….”
그럼에도 끝내 대답을 하지 못하는 루미너스의 모습에 그는 쓴웃음을 지었고.
“아뿌?”
쪽.
딸의 볼살을 다시 한번 쓰다듬어 주고 입을 맞추더니 곧바로 돌아섰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우리 올리, 손녀 잘 부탁드립니다.”
“빠아!?”
“물론이에요. 무슨 일이 있어도…….”
딸을 꼭 닮은 손녀 올리를 와락 끌어안는 루미너스를 뒤로한 채, 아르곤은 또다시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몸을 날렸다.
파아아아아앙!
칠채색(七彩色)을 휘감은 유성이 되어 하늘을 가로지르는 아르곤.
좀 전까지 장모 루미너스와 아내의 일을 고민하던 그의 머릿속은 어느새 다른 문제로 가득 차 있었다.
지금 자신이 향하는 목적지, 루센티아에 나타났다는 괴물.
‘그을음이라…….’
자신의 아내, 루나가 지금 영지에 없는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으니.
아마도 에스티나를 제외한 9대 기사들은 모두 대륙 전역으로 흩어져 그 그을음 괴물들을 잡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벌써 그 이상한 것들이 출현한 지 3년이 넘었다. 처리해도 처리해도 점점 늘어나기만 하는데, 타이니는 어디로 갔는지 연락도 없고…….’
인중신 타이니 모르스와 그 반려가 엘븐하임에서 모습을 감춘 지도 어언 3년이었다.
괴물보다 더 괴물 같은 그 부부가 잘못될 리는 없을 거라 믿지만.
아무래도 상황이 상황인 만큼 불안감이 커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을음인지 뭔지, 쌍놈의 새끼들. 내가 우리 딸 다시 잠들기 전에 처리하고 돌아온다.”
아르곤은 애써 별거 아니라는 듯 소리치며, 그저 비행 속도를 높이는 데만 집중했다.
자연스레 그의 아래로 보이는 산과 들판이 빠르게 멀어져 갔고.
이내 목적지, 루센트 백작령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 그오오오오오!!
콰아아아아앙!
그 중심에서 날뛰고 있는 괴물의 모습도.
– 고오오오오오!
쿵.
꽈아아아아아앙.
거대한 인간 같은 형상의 그림자가 발을 내딛는 순간, 3층짜리 건물이 그대로 풍비박산이 났다.
다행히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비명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피한 걸까? 아니면…….’
모두 잡아먹힌 걸까.
아르곤은 거인 형상의 시꺼먼 괴물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 끌 필요 없겠지.”
다짐하듯 꺼낸 말과 함께 가볍게 꺼내든 애병, 마기아(Magia)가 허공에 빠르게 거대한 문자를 그렸다.
[極大消滅(극대소멸)] [增幅(증폭)] [强化(강화)]번쩍.
우우우우웅.
칠채색의 동대륙 문자가 허공에서 강렬한 빛을 뿌리며 진동하더니, 갑자기 한줄기 빛살이 되어 거인의 머리 위쪽 상공으로 사라지듯 쏘아졌다.
그러더니 이내.
번쩍.
꽈아아아아아아앙!
하늘에서 나타난 거대한 규모의 빛살이 그대로 거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그 모든 것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 그오오오오오오오!!!
거인의 텅 빈 눈동자가 그제야 아르곤을 응시하지만.
놈이 볼 수 있는 것은 차가운 비웃음뿐이었다.
“그대로 뒈져라, 새꺄.”
그리고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번쩍.
우르르르르릉.
쾅!
거대한 빛살이 사위를 찬란히 비추며 백열하더니.
– 그으으……?
파스스스스스.
검은 연기가 뭉쳐진 듯했던 거인의 몸이 그대로 부서져 내리기 시작했다.
루센트 영지 한가운데서 모든 것을 박살 낼 듯 날뛰던 괴물이 순식간에 사라지는데.
그 흔적은, 그야말로 티끌 하나 남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히 아르곤의 마법이 만들어 낸 결과가 아니었다.
“칫.”
파아아아앙.
흩어져 가는 거인에게 빠르게 다가간 그가 놈의 몸을 구성하던 한 자락의 그을음을 잡아채 보지만.
예전에도 그랬듯, 그을음은 미약한 무게감도 존재감도 없이 사라져 갈 뿐이었다.
“이것들은 정말…….”
어디선가 불쑥 나타난 이 괴물들은 인간 혹은 인류에 속하는 생물들만 공격한다.
그리고 인간을 잡아먹거나 서로 먹고 먹히며 덩치를 불려, 조금 전처럼 엄청난 거인의 형상을 취하기도 한다.
그런데 그런 괴물을 처리하면, 정작 먼지만큼의 잔해조차 남지 않았다.
“대체 너희들은 어디서 나타난 거냐…….”
답이 없는 물음을 허공에 던져 보지만, 이번에도 역시나 작은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때.
– 오오! 인중신의 종자, 마도 기사다!
– 불굴의 신, 타이니를 경배하라!!
까마득한 아래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목소리에, 아르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외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