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00
100 묵묵히
* * *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17번.
템페스트.
베토벤의 비서 신들러가 베토벤에게 이 곡을 이해할 단서를 달라고 했을 때.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어보라고 했던 말 때문에 생긴 표제다.
⌜템페스트⌟는 고전주의 극의 요건인 ‘삼일치 법칙’을 잘 따른 작품이다.
하나의 사건.
하루의 시간.
한 곳의 장소.
폭풍우에 휩쓸려 난파된 배의 사람들이 외딴섬에 도착하며 생긴 일들을 그린 작품.
마법으로 일어난 폭풍은 이들의 죄를 응징하기 위함이었고,
이들을 벌하기 위해 마법을 일으킨 마법사 프러스페로는 결국엔 그들을 용서하게 된다.
셰익스피어의 마지막 작품인 ⌜템페스트⌟는 희곡이었다.
그의 희곡을 읽은 베토벤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청력을 잃은 것에 대한 분노를 표하고 싶었을까.
아니면 모든 것을 용서한 극 중의 인물처럼,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관용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됐을까.
베토벤은 이에 대해 딱히 언급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건 추측일 뿐이었다.
음악가가 해야 하는 일은 여기서부터 출발한다.
같은 악보를 보고, 이를 어떻게 풀어갈지는 스스로 결정해야 한다.
해석이란 그런 것이었다.
베토벤의 삶을 바라보고.
작곡할 당시를 상상해보고.
그곳에 나를 대입한다.
또는 나에게 베토벤을 투영시킨다.
음악가 100명이 있다면 100명의 이야기가 있다.
비슷한 이야기가 있을지언정 같은 이야기는 있을 수 없다.
그렇게 나는 수학 문제처럼 ⌜템페스트⌟를 풀어갔다.
템포와 다이내믹(셈여림)은 어떻게 할지.
터치는 어떻게 할지.
그렇다면.
건반에 터치할 때 손가락은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손가락을 세워서?
완전히 펴서?
반쯤 구부려서?
그렇다면 손은 건반에서 언제 떼야 하는가.
페달은?
반쯤 밟으면 되나?
끝까지 밟을까?
아니면 베토벤이 남긴 지시사항 몇 개를 과감하게 바꿔본다?
그것도 일리가 있다.
이 음악을 만든 것은 베토벤이지만, 이 음악을 표현하는 것은 나였으니까.
모든 음표에는 뜻이 있다.
25분가량을 연주해야하는 ⌜템페스트⌟의 음표 하나하나에는 전부 의도가 들어가 있었다.
각자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이 있다.
그걸 해석하고 결정하는 건 연주자가 해야 할 일이었다.
고로, 내가 연주하고 있는 ⌜템페스트⌟는 나의 폭풍이었다.
베토벤이 길을 제시해줬고, 그 길을 걸어가야 하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연주해야 할 폭풍이었다.
어느새 1악장이 끝나버렸다.
보통 악장이 끝나면 연주자는 잠깐 숨을 고른다.
악장마다 연주자가 실어야 할 감정이 다르니까.
하지만 나는 쉼 없이 곧바로 2악장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직접 겪어본 사람은 알고 있다.
시작된 폭풍은 잠깐의 여유조차 허용하지 않는다는 걸.
아다지오(Adagio, 천천히)의 느린 속도로 아련한 선율을 연주하고 있는 지금도.
폭풍은 계속 이곳에 있었다.
나의 이야기에는 근간이 있다.
입 밖으로 꺼낼 수는 없는 이야기.
하지만 음악으로는 보여줄 수 있었다.
음악가는 자신을 드러낼 줄 알아야 한다.
과감하게.
날 것 그대로.
밀러 아저씨가 내게 했던 이야기다.
나는 그의 말을 손가락 끝에 새겼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이행한다.
이 음악은 내 음악이었다.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고유한 거였다.
아무리 강유한 교수님이라고 하더라도 내 손끝의 방향을 틀게 할 수는 없었다.
3악장이 시작됐다.
명확하면서도 반복적인 리듬과 화음이 홀 전체에 울려 퍼진다.
조금 더.
조금만 더.
내 욕심은 끝이 없었고, 그걸 그대로 쏟아냈다.
이 음악의 종장을 향해서.
‘괜찮아.’
이제는 이미 결말을 알고 있는,
폭풍의 끝을 향해서.
‘이제는··· 나도 베토벤처럼.’
강렬하고 격렬하게 건반을 눌렀다.
폭풍은 언젠가 지나간다.
연주도 언젠간 끝이 난다.
‘이 일을 희곡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됐으니까.’
연주가 끝났다고 그 연주가 의미 없는 것은 아니다.
이별을 맞이했다고 해서 만남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만남은 만남만으로도 그 의미가 있다.
그를 만나 지금의 내가 있지 않나.
그것만으로도 무척······ 감사했다.
관객들은 이 연주를 곧 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매 연주를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그렇게 된다면 이 순간은 영원해질 테니까.
끝나지 않는 연주가 내 안에 만들어지는 것이다.
코다 끝자락의 화음을 마지막으로.
한 점을 향해 달려가던 연주가 어느 순간 멈춰버렸다.
내가 관객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전부 마무리됐다.
피아노에서 흘러나오던 멜로디는 저 멀리 어디론가 가버렸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여기까지였다.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온 건 그때였다.
아니면······.
내가 잠시 다른 생각을 하느라, 관객들의 외침을 이제서야 들은 걸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와아아아아아아!!!”
“브라보!!!”
콘서트장을 방불케 하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콩쿠르에서 흔치 않은 일.
다음 참가자가 기다리고 있는 콩쿠르의 특성상 적당히 박수를 쳐주는 게 관례라면 관례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있었다.
연주자에게 보낼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보여주고 있다.
관객들은 1번의 무대를 ‘단순한 콩쿠르’로 넘길 수 없었던 것이다.
“놀라운 연주였어! ⌜템페스트⌟를 이렇게 역동적으로 해석한 피아니스트는 처음 보는군!”
“숨이 막혔었다니까? 이번 콩쿠르는 수준이 대단한 것 같구만.”
“하하하. 숨 쉴 겨를이 없긴 했지. 악장과 악장 사이를 전부 붙여서 연주할 줄이야. 덕분에 완벽한 하나의 곡이 됐다고 봐야겠지.”
“에틀링겐 역사상 이런 연주자가 있었나? 13살이라고 들었는데.”
“맞네. 최연소 참가자지.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지는 걸 직접 보게 됐구만!”
“운이 좋다고 봐야겠지.”
콩쿠르 관계자들은 관객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진땀을 빼고 있었다.
관객 중에서는 유독 짙은 미소를 짓고 있는 사람도 한 명 있었다.
프랑스의 젊은 거장.
바로 클로에 로랑이었다.
‘소름이 돋는 연주였어. 깜짝 놀랐네. 탁월한 해석과 정확한 계산도 놀라웠고. 무엇보다······’
클로에 로랑은 조금 전, 소년이 한 박자 늦게 자리에서 일어났던 걸 떠올렸다.
‘완벽하게 몰입하고 있었다고 봐야겠지. 무섭네. 저 나이에. 이미 거장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하고 있네···.’
보통 콩쿠르 참가자들은 곡을 연주하기에 바쁘다.
해석이 별로라거나 곡에 끌려가기만 한다는, 그런 의미가 아니었다.
준비해 온 곡을 완벽하게 연주하려고 하다 보니, 다른 부분을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콩쿠르란 대개 그런 법이니까.
하지만 저 소년은 그 이상을 보여주고 싶어 했다.
음악을 단순히 들려주는 것만이 아니라, 음악을 통해 이야기를 걸어왔다.
‘당신의 폭풍이 무엇인지 묻고 있는 것 같았지. 그게 희극인지, 비극인지도.’
소년의 음악을 듣고, 문득 자신의 과거를 떠올렸던 클로에 로랑은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인데. 거기에다가 코다를 희망적으로 마무리한 걸 보면······.’
소년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전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젊은 거장은 소년을 바라보며 연신 눈을 빛냈다.
1층 심사위원석의 분위기도 비슷했다.
그들은 관객들의 환호 속에 숨어 자기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천재. 이 이상의 표현은 없을 것 같습니다.”
“저도 동감합니다. 동양에서 불세출의 천재가 나온 것 같네요.”
“마에스트로 호프만이 왜 그렇게 자신만만했었는지 알겠어요. 직접 들어보면 알 것이다···. 그 말에 모든 의미가 포함돼있었네요.”
“저 아이. 아직 다른 콩쿠르에는 출전한 경력이 없었죠?”
“이력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에틀링겐이 찾은 아이가 되겠네요.”
“허허. 좋습니다. 무척 좋네요.”
그리고.
그들 중간에서 말을 아끼던 요나스 브란트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필이면 지금이라니. 하늘이 이토록 무심하다고 느껴진 적은 없었는데······.’
안나 베커의 스승인 요나스 브란트는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관객들의 환호를 받고 있는 무대 위의 소년을 바라봤다.
소년은 무척이나 담담해 보였다.
한편, 1층 구석 자리에 서서 무대를 지켜보고 있던 안나 베커는 두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
애써 관객들의 환호성을 무시하며 백스테이지 쪽으로 돌아갔다.
‘뭔데. 뭔데. 뭔데. 대체··· 뭐냐고!’
안나 베커 역시 단번에 소년의 실력을 알아봤다.
소년의 연주는 단순히 잘하고 못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소년은···.
‘어떻게······ 너는 벌써부터 선생님들과 비슷한 연주를 하고 있는 건데!’
벽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나보다 한 살 어리면서. 어째서. 어떻게?’
차라리 연주를 듣지 않을 걸 그랬다.
하필이면 제비뽑기에서 3번을 뽑았다.
그 탓에 곧 무대에 올라가야 한다.
참고로 2번 참가자는 대기실에서 이어플러그를 낀 채로 악보만 보고 있었다.
그게 조금 무식해 보였다.
그래서 그걸 보고 피식 웃기도 했다.
‘내가 그렇게 했어야 했나.’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지금이라도 악보를······.
안나는 문득, 자신이 아침에 악보를 집에 두고 온 것을 깨달았다.
이미 완벽하게 외운 악보였으니까.
더 이상 볼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안나는 서둘러 스마트폰으로 해당 악보를 검색했다.
지금은 이렇게라도 악보를 봐야 할 것만 같았다.
그렇게.
입술을 살짝 깨물며 작은 스마트폰 화면으로 악보를 보고 있을 그때.
“너······.”
1번이 자신의 앞을 스윽 지나갔다.
아무 말도 없이.
눈길조차 주지 않는다.
그의 모습에 안나는 눈물이 핑하고 돌았다.
‘처음부터··· 나를 신경 쓸 이유가 없었던 거야···.’
대기실로 돌아온 안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정신없이 스마트폰으로 악보를 봤다.
시간의 흐름은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3번. 안나 베커. 준비해주세요.”
“······.”
벌써 2번 연주가 끝나버렸다.
안나 베커는 무대 위로 올라갔다.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그 모습을 봤는지, 관객들이 잠깐 웅성거리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주저앉을 수는 없어.’
안나는 곧바로 피아노 앞에 앉았다.
인사를 할 여유도 없었다.
안나 베커는 눈물을 한 방울 뚝 하고 흘리며.
이를 악문 채로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어느 때보다 무거운 선율이 홀 전체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저녁.
에틀링겐 궁전 안으로 두 남자가 터벅터벅 걸어왔다.
둘둘 말린 거대한 종이 두루마리를 들고서.
콩쿠르 참가자들은 숨을 죽였다.
출입 허가를 받은 기자들은 그들을 향해 연신 카메라 플래시를 터트렸다.
한 남자가 종이 두루마리에 달린 끈을 게시판에 걸었다.
잠시 후.
남자가 손을 놓는 순간.
“와!”
콩쿠르 참가자 중 몇몇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반응은 각양각색이었다.
결과를 확인하고 눈물을 터트리는 이들.
미친 듯이 환호성을 지르는 이들.
옆 참가자와 손을 잡고 눈조차 못 뜨는 이들.
에틀링겐 콩쿠르 본선 1차 진출자 40명 중, 절반만 본선 2차에 올라갈 수 있다.
“후우. 다행이네. 나는 안나 네가 1차에서 떨어지는 줄 알았잖아.”
“······ 나도 그러는 줄 알았어.”
이변은 없었다.
20명의 명단 중 최상단에는 에틀링겐 최연소 참가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한서진. 대한민국. 1번.
그 아래엔 안나 베커와 루이스 볼프의 이름도 쓰여 있었다.
동양의 소년은 그 명단을 스윽 한번 보고는 제일 먼저 걸음을 옮겼다.
기자들의 질문에 간단히 답변을 해줄 뿐 소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