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39
139 이 공간에서
* * *
무대 위에서 소년이 연주를 이어가고 있다.
서정적이면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공간을 가득 채운다.
소년의 작은 움직임 하나에 선율이 가야 할 길을 찾는다.
객석에 있는 사람들은 그 장면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무 말도 없이.
소년의 연주에 존경을 표한다.
연주는 서서히 마무리되어갔다.
많은 것들을 보여줬던 그의 연주가 마지막 음을 끝으로 허공으로 사라진다.
소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리허설을 마친 소년은 제일 먼저 스승에게 향했다.
연주에 대한 피드백을 구하고, 그것을 기록하고 받아들인다.
가족들은 소년을 반겨줬다.
이쁘장한 여자아이가 제일 먼저 소년을 꼭 끌어안아 준다.
소년은 그 여자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미소로 답한다.
부모님은 소년에게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너무나 이상적인 모습에 객석의 사람들은 그들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그들 중, 카네기홀 관계자 한 명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오늘 리허설은 안 볼 걸 그랬어.”
“동감이야. 하지만 이건 우리 일이잖아.”
기본적인 연주 평가.
이걸 하기 위해 이들은 1차 리허설부터 객석에 나와 있던 것이다.
“저 아이의 본 공연을 바로 보게 됐다면 감동이 몇 배로 다가왔을 텐데 말이야.”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이 공연을 첫 번째로 볼 수 있는 건 또 다른 특혜잖아?”
“하긴. ‘특혜’라고 부를 만큼 특별한 연주이긴 했어.”
“그런데 저 아이가 올해 13살이라고?”
“나도 놀랐어. 에틀링겐 우승자라고 해서 ‘그런가 보다.’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는데 믿기지가 않네.”
“대체 어떻게 저 나이에 저런 연주를 하는 거야?”
“천재. 나는 이 생각밖에 안 들어.”
“맞아. 정말 엄청난 연주였어.”
매주 매주, 한 주도 빠짐없이 공연이 이루어지는 카네기홀.
누군가는 이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꿈을 이뤘다고 하겠지만, 이곳에서 일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연주자들이 다 비슷비슷하게 보이기도 한다.
그런 그들이 하나같이 호평을 쏟아냈다.
이건 무척이나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의 총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 그레이 디렉터는 팀원들의 평가를 종합하며 멀리 떨어진 객석을 바라봤다.
⌜Schmid⌟의 관계자들이 모여있는 곳.
그곳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는 것 같았다.
“훌륭하군요. 멋진 연주였습니다. 로저스 디렉터의 판단이 맞았던 것 같아요.”
머리가 하얗게 센 노년의 여성이 멀찍이 있는 소년을 바라본다.
로저스 디렉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아이는 흔한 에틀링겐 우승자가 아닙니다. 언제나 상상 이상의 연주를 하는 피아니스트죠.”
노년의 여성.
⌜Schmid⌟의 이사 중 한 명인 그녀는 로저스에게 사과부터 했다.
“미안해요. 처음엔 13살의 아이가 오히려 카네기홀 공연에 부담만 느끼지 않을까, 라는 걱정을 했었어요. 그러다가 무너지는 경우도 종종 봤으니까요. 하지만 그건 기우였네요.”
“사실 지금 저 아이에게 카네기홀은 매우 ‘적당한 무대’죠. 그리고 앞으로 저희가 무조건 잡아놓아야 할 연주자입니다.”
“저도 동감이에요. 그런데 저 아이, 내년에 퀸 엘리자베스에 나간다고 했었나요?”
“네. 맞습니다.”
그녀는 눈을 빛냈다.
하지만 그 기색은 찰나에 사라져버렸다.
“그렇군요. 저 아이에 대한 지원은 절대로 아끼지 마세요. 여차하면 회사 내에서 내 이름을 팔아도 상관없으니까요.”
“알겠습니다.”
로저스의 대답을 들은 백발의 여성은 아이를 다시 한번 쳐다봤다. 그러곤 홀연히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을 빠져나갔다. 곧이어 ⌜Schmid⌟의 직원들 몇몇이 그녀를 따라 나갔다.
객석에 남은 로저스 디렉터는 조금 전 아이가 보여준 연주를 곰곰이 떠올려봤다.
대체 무엇이 저 아이의 연주를 특별하게 만들었을까.
연주를 할 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어떤 마음가짐으로 피아노 건반을 터치하는 걸까.
많은 의문들이 스치듯 지나갔다.
‘저 아이의 연주가 대단하다는 것을 빼고는······.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구나. ’
로저스는 한서진이 있는 곳을 슬쩍 바라봤다.
베를린에서 처음으로 만난 아이.
콘체르트하우스와 함께 보여준 협연의 여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저 아이는 또다시 상상 이상의 공연을 보여주려고 하고 있었다.
‘천재. 그래.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리는 수식어겠지.’
로저스는 이번 카네기홀 공연의 여파가 상당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무심결에 하면서.
아이가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며칠 뒤.
뉴욕 맨해튼.
세계의 문화를 주도하는 이곳에 여러 음악가들이 하나둘 도착하고 있었다.
아이의 공연을 보기 위해 모인 이들 중에는 프랑스의 젊은 거장으로 불리는 피아니스트도 한 명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파얀스 선생님!”
클로에 로랑이 선생님이라 부른 인물.
쇼팽 콩쿠르 우승자 출신 피아니스트 미하우 파얀스는 로랑을 반겨줬다.
“허허. 오랜만이구나. 연주는 잘하고 있고?”
“그럼요.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필라델피아에 있었는걸요.”
로랑이 20대 초반이라는 나이에 퀸엘리자베스에서 우승한 뒤, 여러 거장들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이곳저곳에 ‘선생님’이 많아진 그녀였다.
“그런데 선생님은 어떻게 미국까지 오셨어요? 주로 유럽에만 계시잖아요.”
파얀스는 솔직히 대답했다.
“강유한의 제자가 카네기홀에서 리사이틀을 한다는데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그리고 유럽 현지에서도 하도 시끄러워서 말이다. 천재를 두 눈으로 봤다고 자랑을 어찌나 하는지.”
“아~ 저도 에틀링겐이랑 베를린에서 그 아이 연주를 모두 들어봤었는데 대단하기는 했어요. 모차르트가 다시 태어난 줄 알았다니까요?”
“봐라! 이렇게 한 마디씩 툭툭 던지니 참을 수가 없었다니까. 거기에······.”
파얀스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드레스덴의 선율에게 재미있는 말을 들어서 말이다.”
“엇. 리히터 바이올리니스트님이요?”
막스 리히터는 파얀스보다 한 세대 아래 거장급 음악가였다.
“그래. 프라하에서 우연히 그를 만났는데 꽤나 신기한 소리를 하더구나. 사실은 그걸 확인해보기 위해 미국에 온 거다.”
“네? 그게 무슨······.”
파얀스는 리히터에게 들었던 말을 떠올려봤다.
만약 이 아이의 연주를 보게 될 기회가 생긴다면, 잊혀진 기억이 돌아올지도 모른다고.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는 음악이 무엇인지 알게 될 수 있을 거라고도 했다.
수수께끼에 가까운 말.
파얀스는 리히터에게 자세한 설명을 듣지는 못했다.
‘어차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답이 나오겠지. 공연 시작까지 얼마 남지도 않았으니까.’
시간을 확인한 파얀스는 슬쩍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만 가보자꾸나. 너나 나나 공연 시간에 너무 딱 맞춰 가면 더 시끄러워질 테니 말이다.”
센트럴 파크 근처에 있는 카페에서 나온 두 사람은 카네기홀로 장소를 옮겼다.
로비는 벌써부터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Schmid⌟ 기획 공연의 원칙상, 온라인 예매를 하기 힘든 사람들을 위해 당일에 현장에서 티켓을 살 수 있게 해둔다.
보통 15% 정도.
그래서 인기가 있는 공연의 경우, 온라인 예매를 하지 못 한 사람들까지 함께 몰리며 이렇게 북새통을 이루기도 한다.
“어! 파얀스 피아니스트님 아냐?”
“정말? 어디? 어디?”
“오늘 이 공연 보러 오셨나 봐!”
“와. 대박! 진짜네?”
“그 옆에는 클로에 로랑 아냐?”
“맞는 것 같은데? 오늘 공연 진짜로 뭐가 있나? 거장들이 이렇게 몰려오네.”
“CNN에서 천재라는 말을 듣긴 했는데 정말인가 봐.”
“뉴튜브에 올라온 그 아이 연주 괜찮긴 하더라. 거장들 호평이 과장은 아니었나 봐.”
두 피아니스트를 알아본 사람들은 그들에게 사인과 사진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로랑과 파얀스는 팬들의 요청을 최대한 들어줬지만,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더 인파가 몰리는 바람에 결국 보안팀이 정리를 해주기 시작했다.
“저희한테 진작 연락을 주시지 그랬습니까. 그렇다면 경호팀을 붙여드렸을 텐데요.”
“오늘은 그저 관객으로 온 거라 그럴 필요까진 없었네.”
“맞아요. 오랜만에 팬들이랑 이렇게 가까이에서 만나는 것도 좋았고요.”
파얀스와 로랑은 경호원을 따라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의 2층 객석에 자리를 잡았다.
2층에서는 홀 전체가 한눈에 들어왔다.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는 1층 객석.
붉은 벨벳이 깔려 있는 복도를 통해 사람들이 하나둘 들어오고 있었다.
파얀스는 무대 중심에 놓여 있는 피아노를 바라봤다.
수많은 조명들의 빛을 있는 그대로 반사시키고 있는 검은색 피아노.
넓디넓은 무대 위에는 별처럼 빛나는 피아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13살의 아이가······. 정말로 이 무대를 가득 채울 수 있을까.’
‘차라리 작은 무대에서부터 차근차근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이게 어른들의 욕심이라면······.’
친구 음악가들의 말을 듣고도 내심 걱정이 되는 파얀스였다.
그의 기색을 눈치챘는지 로랑이 슬쩍 언급한다.
“콘체르트하우스와 협주할 때도 밀리지 않았던 아이예요.”
“로덴이 아이를 배려한 건 아니고?”
“에이~ 로덴 악장님 성격 모르세요?”
“허허허. 그래. 내가 나이가 들면서 걱정만 많아진 것일지도 모르겠구나. 리히터의 퍼즐을 푸는 데에만 집중해도 될 텐데 말이야.”
“대체 그 퍼즐이 뭐길래 그러시는 거예요?”
“글쎄다.”
“으음···.”
그때, 2층 객석에 반가운 사람들이 나타났다.
파얀스가 잘 알고 있는 음악가들.
그들은 파얀스와 악수하며 안부 인사부터 했다.
마지막에 나타난 인물은 강유한이었다.
대기실에서 아이와 함께 있다가 부랴부랴 객석에 왔다고 한다.
파얀스가 강유한에게 묻는다.
“마지막까지 같이 있어 주지 그랬나. 13살이면 그런 게 필요할 나이인데.”
강유한은 그의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지금 서진이에게 필요한 건 내가 아니라네.”
“그럼?”
“혼자서 오롯이 음악에 대해 생각할 시간. 지금 이 순간엔 오히려 그런 게 필요한 아이지. 그 아이는 이미 프로 연주자와 다를 게 없거든. 나는 일부러 그 시간을 만들어 주고 온 걸세.”
“허허. 이 아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나 같이 쉽게 믿기지가 않는구만.”
“자네도 직접 보는 게 빠르겠지. 조금만 기다려보시게나.”
“안 그래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네. 시간이 참 안 가는구만.”
파얀스는 아이작 스턴 오디토리엄을 천천히 둘러봤다.
듬성듬성 비어있던 객석은 어느새 가득 차 있었다.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홀의 구조와 맞물려 반향을 일으킨다.
저마다 목소리를 내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오직 한 명을 기대하고, 오직 한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연주자는.
리사이틀을 하는 피아니스트는.
이 모든 사람을 홀로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홀 안에 있는 스피커에서 경쾌한 종소리가 흘러나왔다.
입장 제한을 알리는 안내에 맞춰 홀이 고요를 찾아간다.
잠시 후, 웅성거림이 완전히 잦아들었다.
파얀스는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초침이 한 칸, 한 칸 움직이며 공연의 임박을 알려온다.
조명이 점점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눈이 서서히 그 어둠에 적응을 해간다.
파얀스는 숨소리조차 죽인 채 가만히 무대를 바라봤다.
일순간 멈춰버린 듯한 이 공간 속에서.
그의 손목에 있는 시계의 초침만이 계속 한 걸음씩 움직였다.
* * *
대기실 문 위에 붙어있는 전자시계가 매초 깜박인다.
19:57:07
19:57:08
19:57:09
19:57:10
19:57:11
시간은 아직 남았다.
시간이란 참 신기했다.
절대 멈추지 않고, 항상 앞으로만 나아간다.
‘가끔씩 뒤로 가는 것도 좋을 텐데.’
19:57:30
그런 일은 없다.
나는 주먹을 쥐어봤다.
이 안에는 아저씨가 쓴 글귀가 들어있다.
더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할 수 있게 됐다.
밀러 아저씨에게 또 도움을 받게 됐다.
이 감정은······.
무척 따뜻하면서도 조금은 그리웠다.
그리고 고마웠다.
나는 잠시 눈을 감았다.
“준비는 됐니?”
“슬슬 나가봐야 한다.”
잠깐이라고 생각했던 시간.
눈을 뜨자 로저스 디렉터님과 그레이 디렉터님이 보였다.
시계를 봤더니 30초가 남아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어요.”
카네기홀의 무대로 향하는 문이 서서히 열린다.
대기실에 있는 형광등의 불빛보다 더 강렬한 무대 조명이 이곳까지 들어왔다.
나는 그 빛을 밟기 전에 잠깐 걸음을 멈췄다.
“······.”
주먹을 다시 한번 꽉 쥔 뒤에야 나는 무대로 나갔다.
사람들의 환호가 쏟아졌다.
박수, 외침, 응원, 격려, 칭찬.
내 감정을 동요할만한 무언가가 쏟아진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런 것에 흔들리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는 바는 하나였으니까.
나는 객석 전체를 바라보기 위해 고개를 높이 들었다.
너무나 감사한 이들.
그들을 눈에 담으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내가 첫 번째로 연주할 곡은 모리스 라벨의 ⌜거울⌟이었다.
Maurice Ravel – Miroirs, M.43 for piano.
5개의 피아노곡으로 구성된 모음곡.
음악가의 예술적 영혼에 비치는 여러 가지 형상을 표현한 작품이었다.
나는 피아노 건반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약간 차가운 건반의 느낌이 손에 그대로 전달된다.
흰 건반 위에 볼록 튀어나와 있는 검은 건반이 손을 간지럽힌다.
온몸의 감각이 예민해진다.
눈을 감아봤다.
내 눈앞에 보이는 그때의 풍경이 나를 그곳으로 안내한다.
바람, 햇빛, 바다내음.
내 다채로운 감정조차 그곳에서 시작됐다.
나 역시 음악 안에서 모든 답을 찾을 것이다.
나는 양손을 높게 들어 올린 뒤, 건반 위에서 일순간 모두 놓아버렸다.
부드럽게 시작되는 내림 라장조(D Flat Major)의 선율이 관객들에게 닿길 바라면서······.
내 안에 있던 ⌜거울⌟을 선보였다.
* * *
대기실 문 위에 붙어있는 시계의 초침이 움직인다.
7시 57분 7초.
7시 57분 8초.
7시 57분 9초.
7시 57분 10초.
7시 57분 11초.
시간은 아직 남았다.
시간이란 참 신기하다.
즐거운 일을 하면 금세 지나가 버린다.
에틀링겐 콩쿠르에서 우승하고 3년.
여러 무대에서 공연을 이어오다가 정신을 차려봤더니, 이곳까지 오게 됐다.
소년은 양손을 꽉 쥐었다.
‘오늘 공연을 보러온 관객들이 행복했으면 좋겠어.’
‘슬픔이 있다면 오늘 내 연주를 듣고 털어낼 수 있었으면 좋겠어.’
이 뜻이······.
그들에게 제대로 전달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준비됐어?”
“슬슬 가봐야 해.”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소년 옆으로 두 사람이 다가왔다.
카네기홀의 관계자 두 명.
마크 밀러는 눈을 떴다.
시계를 봤더니 30초가 남아있었다.
‘딱 적당한 시간이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카네기홀로 향하는 문이 서서히 열린다.
무대의 강렬한 조명이 대기실 안까지 들어온다.
밀러는 그 빛을 유심히 쳐다봤다.
주먹을 다시 한번 꽉 쥐고서 무대로 나갔다.
“와아아아아아!!!”
“밀러!!!”
사람들의 환호가 쏟아진다.
밀러는 잠깐 자리에서 멈추어 섰다.
그리고 문득 뒤를 돌아봤다.
‘착각인가?’
지금 감정이 동요되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다시 집중했다.
밀러는 관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나서 피아노 앞에 앉았다.
밀러가 첫 번째로 연주할 곡은 모리스 라벨의 ⌜거울⌟이었다.
Maurice Ravel – Miroirs, M.43 for piano.
5개의 피아노곡으로 구성된 모음곡.
밀러에게는 루틴이 있었다.
수많은 공연장을 다니면서 생긴 루틴.
리히터는 가끔씩 이걸 보고 비웃기도 했지만.
‘이래야 마음이 편한걸.’
밀러는 피아노 건반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약간 차가운 건반의 느낌이 손에 그대로 전달된다.
흰 건반 위에 볼록 튀어나와 있는 검은 건반이 손을 간지럽힌다.
온몸의 감각이 점점 예민해진다.
눈이 스르르 감긴다.
상상 속의 풍경이 밀러의 감정을 한껏 끌어올렸다.
다채로운 감정이 일어났다.
밀러는 생각했다.
앞선 연주자들의 음악이 이어져 ⌜거울⌟이 이곳 카네기홀에서 또다시 연주될 수 있던 것처럼.
언젠가.
‘나 역시 누군가의 거울이 되어줄 수 있으면 좋겠네.’
밀러는 양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한 아이가 양손을 높게 들어 올린다.
두 사람의 손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일순간 건반 위에 떨어진다.
부드럽게 시작되는 내림 라장조(D Flat Major)의 선율에 관객들 모두가 귀를 기울인다.
음악가의 예술적 영혼에 비치는 여러 가지 형상을 표현한 작품.
같은 장소.
다른 시간.
그리고.
같지만 다른 음악.
은은하면서도 따뜻함이 느껴지는 라벨의 ⌜거울⌟이······.
이 공간에서나마 잠시 머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