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6
16 소동
* * *
다음 날 아침.
“안녕히 다녀오십셔.”
“······.”
“······.”
어머니와 아버지가 서로를 쳐다보신다. 그러곤 내게 오늘은 무리하지 말고 집에서 쉬라며 간단히 인사를 건넨 뒤 집을 나가셨다.
그렇게 덜컥거리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혔을 때.
– 서진이 쟤 뭔가 많이 바뀐 것 같지 않아?
– 그러니까. 뭔가 40대 아저씨 말투를 따라 하는 초등학생 같아졌다니까.
– 갑자기 어른스러워졌어. 원래도 그랬는데 더 그렇게 돼버렸어.
– 거기에 영어는 원어민처럼 잘하고. 나 싱가포르에서 엄청 놀랐잖아. 우리가 애한테 관심이 없었나?
– 아냐. 서진이 원래 학교에서도 열심히 하는 애였잖아. 성적도 늘 좋았고. 그게 지금 빛을 발한 거겠지.
– 그런가? 아! 병원 로비에서 했던 트로이메라이 연주도 멋있었어. 살짝 밖에 못 보긴 했지만. 많이 늘은 것 같던데. 그렇지?
– 노력이 슬슬 결과로 나타나고 있다고 봐야겠지.
– 그러면···. 우리 아들 너무 멋진 거 아냐?
– 그건 원래 그랬다니까.
“······.”
나는, 건축한 지 25년이 지났는데도 항상 최상의 방음을 자랑하는 아파트의 얇디얇은 현관문을 향해 다시 한번 소리쳤다.
“안녕히 다녀오십셔!”
잠시 후, 어머니의 딸꾹질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의 “그, 그래!”라고 하는 어설픈 외침도 들린다. 그리고 나서야 복도는 조용해졌다.
두 분은 아침 일찍부터 일터로 향하셨다.
대한민국에 사는 맞벌이 부부가 거의 한 달 가까이 한국에서 자리를 비웠다.
그동안 밀린 업무가 얼마나 많을지는 상상을 안 해 봐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뭐···. 원래도 바쁜 분들이셨지만.’
나는 식탁 위에 올려진 20만 원부터 회수했다.
이번 사고로 인해 잃어버린 내 물건들이 많았다. 대부분 미얀마 해 어딘가를 떠돌고 있을 텐데 그걸 찾을 순 없을 테고.
이 돈은 필요한 게 있으면 마음대로 사도 된다는 허가가 떨어진 부모님이 주신 용돈이었다.
‘20만 원이면 생각보다 큰돈인데.’
밀러 아저씨와 지내면서 노래 한 곡에 작곡비를 얼마를 받아야 하는지, 저작권료는 대략 얼마가 들어오는 지 등의 이야기는 많이 들었지만, 그건 아직 내게는 먼 이야기였다.
초등학교 6학년인 나로서는 이 정도만 해도 인생 최대의 수입(?)이라 볼 수 있었다.
‘뭔가 부자가 된 것 같네.’
이걸로 뭘 할까?
일단 파바에서 초코 소라빵이라도 사 먹을까.
아니면 황금올리브 치킨.
허니버터칩은 잘 있으려나.
“쓰읍.”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도 모르게 침이 고여버렸지만, 그렇게 허투루 쓸 돈은 아닌 것 같았다.
일단은 보류다.
나는 내 방으로 들어가 책상 서랍 맨 위 칸에 20만 원을 넣어놨다.
그리고 다른 서랍들을 뒤적거려 봤다.
참고로 지금은 방학 기간이다. 나는 이번 여름방학을 이용해서 마스터클래스에 참가하기 위해 싱가포르 비행기를 탔던 거였고. 그게 어느새 25일이 훌쩍 지나버렸다.
한 마디로 개학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
그렇다면, 예중 입시를 준비하는 나로서 꼭 해야 하는 게 있었다.
나는 책상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을 뒤적거려봤고, 마침내 책장에서 원하는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여름방학 생활 안내.
쉽게 말하면 방학 숙제다.
예중 입시는 초등학교 내신이 반영된다.
그리고 방학 숙제 중에는 내신에 반영이 되는 숙제들도 꽤 있었다.
나는 그 책자를 빠르게 넘겨봤다.
무슨 미션이 많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과거의 내가 이걸 대부분 끝내놓았다는 것. 내 이름이 쓰여있는 한 파일에 일목요연하게 숙제가 정리돼 있었다.
몇 개의 내용은 보충해야 할 것 같았지만, 그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진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이게···. 맞나?”
뭔가 벙찌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무인도에서 그 치열한 생존을 하면서, 3년 반 정도를 밀러 아저씨와 지냈다.
날짜로 치면 1200일이 넘는 시간.
그것도 24시간 내내.
참고로 밀러 아저씨는 엄청난 지식인이었다. 물어보면 모르는 것이 없었고 특히 음악에 관련된 건 백과사전 수준이었다.
그 시간 동안 내가 아저씨에게 배웠던 건,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영미 분석철학이라든지,
정적분과 급수의 합 사이의 관계,
미국 다문화주의의 현실과 교육체계에 있어 개선 방안이 무엇이 있을지에 대한 토론.
이런 거였다.
그런데 갑자기.
‘무엇이든 넣을 수 있는 마법 주머니가 2개 있습니다! 그런데 빨강 주머니에 손을 넣으면 짜잔! 3배가 됩니다! 찡끗 (。•̀ᴗ-) 마법의 힘이죠.’로 시작하는 수학 문제를 보고 있자니 두통이 몰려오는 것 같았다.
“미치겠네···.”
나는 괜스레 집에 있는 PC로 대한민국의 의무교육 기간을 검색해봤다.
안타깝게도 대답은 한결같았다.
중학교까지는 닥치고 졸업해야 한다고.
[그게 싫다면 부모님이 다른 학교에 가게 될 수도 있는데 괜찮음? 어? 여기서 학교가 뭐냐고? 넌 그것도 모르니? 교도소임. ㅋ ^^]라는 친절한 답변도 보게 됐다.오랜만에 보는 지식인 글은 꽤 매콤했다.
“하아.”
앞으로 한 학기는 더 다녀야 할 초등학교 6학년 2학기 수업에 벌써부터 눈앞이 깜깜해지는 것 같았다.
예중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교과과정보다도 음악과 피아노를 심도 있게 배울 수 있는 곳이니까.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음악가 선생님들도 많다고 알고 있다.
내가 지금까지 노력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렇게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아등바등 발버둥 친 결과, 나는 어찌 됐든 국내 소규모 콩쿠르에서 3위를 달성했다. 그 부상으로 싱가포르에도 가게 됐던 거였다.
참고로 콩쿠르에서 입상하면 입시에서 가산점이 있다.
한 마디로 약간의 여유는 벌어 놓은 셈.
거기에다가 나는 내신도 무난했고, 가을에 치르게 될 예중 실기 시험도 꽤 열심히 준비를 해놨었다.
저번에 트로이메라이를 무난하게 연주할 수 있었던 걸 떠올려 보면, 틈틈이 연습만 하면 예중 정도는 쉽게 붙으리라.
“······.”
어···.
그렇겠지···?
밀러 아저씨와 오랜 시간을 지내다 보니, 내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을 못하게 됐다.
정확히 말하면 자기 객관화가 잘 안됐다.
참고로 그 아저씨는 쇼팽 콩쿠르 파이널라운드 진출자다.
쇼팽 콩쿠르 파이널라운드.
즉, 전 세계에 내놓으라고 하는 당대 피아니스트가 모두 모인 장소에서 최소 12등을 했다고 보면 된다.
거기에 빌보드 HOT 100에 1위 곡도 썼던 작곡가.
당연하게도 밀러 아저씨는 내게 원하는 요구치가 항상 높았고, 나는 겨우겨우 그 요구에 따라가는 게 전부였다.
더군다나 무인도에서는 나무로 조각된 가짜 피아노만 있었다.
아저씨가 꾸준히 지도를 해주시긴 했지만, 그에게 완벽하게 피아노를 배웠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어느 정도 레벨일까.
“······.”
쓰읍.
살짝 생겨버린 불안감 때문에 집에 있는 피아노 앞에 일단 앉았다.
디지털 피아노.
피아노 전공자들이 흔히 치는 어쿠스틱 피아노와는 타건 감이 확연히 다른 피아노다.
그래도 상황상, 이 전자 피아노는 최선의 선택이었다.
방음 문제 때문에, 소리를 줄이거나 헤드셋을 쓰고 조용히 칠 수 있는 피아노는 이것뿐이었으니까.
나는 핑계를 대기 싫었고, 실제로 그런 것에 개의치도 않았다.
‘뭘 먼저 쳐볼까.’
나는 피아노 옆 책장에 꽂혀있는 악보 중 아무거나 하나를 집었다.
나도 모르는 사이 콧노래가 저절로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호흡을 길게 뱉으며 피아노 건반을 타건했다.
* * *
“흐흥~”
5살 정도 된 꼬마 여자아이가 콧노래를 부른다.
꽤 신났는지 주변 사람 눈치도 살피지 않는다.
그 모습을 인자한 미소로 지켜보던 할아버지는 아이에게 질문을 던졌다.
“수연아. 그렇게 좋니?”
한수연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오랜만에 집으로 돌아 가니까요! 그리고 오빠도 오랜만에 보고요!”
“서진이···. 그래. 살아서 천만다행이지.”
“그러니까요. 어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그동안 걱정하느라 혼났다니까요? 안 그래요?”
“그러게 말이다. 그런데 수연아.”
“네?”
할아버지는 무릎을 꿇으며 수연이와 눈높이를 맞췄다.
“그동안 할아버지 집에서 지내는 건 어땠니? 2층에 마련한 수연이 방도 수연이가 좋아하는 하늘색으로 꾸민 데다가 큰~ 곰돌이 인형도 있었는데.”
“······.”
한수연은 올망똘망한 눈을 몇 번인가 껌벅거리다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래도 전 우리 집이 더 좋아요.”
“왜?”
“어···. 그거야 우리 집이니까요? 아! 그렇다고 할아버지 집이 나쁘다는 건 아녜요! 여긴 무슨 궁전 같잖아요! 그리고···. 그게···. 그게···. 어···. 할아버지 집엔 오빠도 없고···. 엄마랑 아빠도 없고···. 또···.”
당황하는 손녀의 모습을 바라보던 그는, 하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알았다. 이만 가보자.”
한수연의 할아버지인 송길섭은 손녀를 데리고 집 지하에 있는 주차장으로 향했다.
고급 세단 차량 앞에 서 있던 정장 차림의 남자는, 둘을 발견하곤 꾸벅 인사를 했다.
“어디로 모시면 될까요?”
“딸네 집으로 가야겠지. 주소는 알고 있나?”
“네. 저번에 내비에 입력해뒀습니다.”
“그래. 가지.”
차에 탑승한 이들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정장 차림의 남자는 뒷좌석에 탄 두 명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고, 송길섭 또한 그저 창문 밖을 바라봤다.
차가 이동하면 이동할수록 점점 작아지는 건물이 보였다.
낡고, 허름한 곳으로 점점 이동한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송길섭은 손녀의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할아버지?”
“왜 그러니.”
“할아버지는 부자예요? 우리 집보다 훨씬 좋은 집에 사시잖아요. 저는 그런 집은 드라마에서만 봤었거든요. 재벌 집 막내 손녀 이런 거요.”
“······.”
“할아버지가 조금 전에 제게 했던 질문이 그런 걸 물어보셨던 것 같았어요. 부자로 사는 게 좋은지 아닌지, 선택해보라고. 제 생각이 맞는지 갑자기 궁금해졌어요.”
“······.”
당돌한 손녀의 질문에 송길섭은 자연스레 미소가 지어졌다.
다만 송길섭은 손녀에게 아니라는 대답을 해야만 했다.
“우리 집안이 재벌은 아니란다. 하물며 이 할애비는 부자도 아니지. 세상에는 돈 많은 사람이 참 많거든. 그에 비할 수는 없구나. 이 할애비는 그저···.”
그 순간,
자동차 안 내비게이션에서 도착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기사는 아파트 주차장 적당한 곳에 차를 세웠다. 그리고 차에서 내려 뒷문을 연다.
“다 왔구나. 이 이야기는 다음에 계속하는 걸로 하자구나.”
“네!”
한수연은 차에서 내려 90도로 꾸벅 인사를 했다. 송길섭은 그런 손녀에게 몇 번이나 손을 흔들어줬다.
기사는 수연이를 데리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갔다. 그 모습을 주욱 지켜보던 송길섭은 차에서 내렸다.
송길섭은 아파트를 올려다봤다.
복도식 아파트 구조.
오래된 아파트라는 걸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문득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은, 5층의 어느 집에 저절로 눈길이 갔다.
잠시 후.
5층 집의 어느 현관문이 열리나 싶더니 금방 닫혀버린다.
송길섭은 그제야 다시 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기사가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다.
여러 가지 복잡한 생각을 곱씹으면서···.
* * *
현관문이 열리자마자 무언가 쪼꼬만 물체가 내게 달려들었다.
말릴 새도 없이 내 몸에 딱 달라붙어 “오빠아아으어어아앙!”이라는 괴상한 소리를 낸다. 무슨 수도꼭지도 틀어놨는 지 내 옷은 금방 축축해져 버리고 말았다.
나는 수연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관에 서 있는 남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할아버지는요?”
“바쁘셔서 바로 가보셔야 합니다.”
“그래요.”
“네.”
“그러면 제 안부만 잘 좀 전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아! 마실 거라도 좀 드릴까요? 뭐가 있으려나···.”
“괜찮습니다. 그럼.”
내게 고개를 푹 숙인 정장 차림의 남자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다. 항상 무뚝뚝해 보이는 사람. 몇 번 본 적이 있는데도 한결같았다.
나는, 눈물을 펑펑 흘려 눈이 왕눈이가 된 수연이를 필사적으로 어르고 달래야 했다.
피아노도 쳐주고, 같이 TV도 보고, 인형 놀이도 해주고.
꽤 여유로운 시간을 보냈다.
그렇게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수연이와 제대로 된 대화를 할 수 있었다.
“그동안 할아버지랑 잘 지냈어?”
“응. 그럭저럭 지낼 만했어.”
“그럭저럭? 좋다는 거야? 나쁘다는 거야?”
“아니. 딱 그럭저럭이였어.”
“왜?”
“으응···. 일단은···.”
뭔가 생기다가 만 것 같은 짜리몽땅한 손가락을 꼽으며 수연이는 이유를 말해줬다. 한참을 재잘거린다.
“아무튼 난 여기가 좋아! 그리고 할아버지가 오빠한테 전한다는 말도 있었어.”
“나한테?”
“응.”
수연이는 목을 큼큼하고 가다듬더니, 인상을 살짝 구겨버렸다.
대체 뭘 하나 싶었더니.
“엣헴! 나중에 집으로 돌아가거든 서진이한테 전해라.”
갑자기 할아버지 성대모사를 시작했다.
물론 썩 잘하진 못했다.
“요즘에 기자니 방송국이니 하는 것들 중에 제대로 된 놈들 없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그리고 그런 사칭범도 많은데 특히 조심하고. 보이스피싱에 사기꾼에, 세상이 흉흉하니 여러 번 조심해도 모자람이 없다. 알겠니?”
나는 미소를 띄우며 수연이에게 물었다.
“그게 다야?”
“응! 이게 다야.”
수연이는 원래의 맑은 목소리로 경쾌하게 대답했다.
“나 열심히 외워 왔어!”
“잘했네.”
“히히.”
점심시간이 되었을 무렵 나는 수연이와 볶음밥을 해 먹었다.
내가 요리를 한 건 아니었고, 아침에 어머니께서 데워먹으라고 놔둔 걸 프라이팬으로 다시 볶았을 뿐이다.
테이블에 기댄 채 빼꼼 나를 쳐다보던 수연이는 연신 말을 걸어왔다.
“와. 오빠 요리도 잘했었어? 언제 배운 거야?”
“이런 건 요리도 아냐. 다음에는 내가 말린 생선 굽는 걸 보여줄게.”
“··· 응?”
“기회가 된다면 말이야. 직화로. 그건 꽤 잘하거든. 자. 일단 먹자.”
간단히 식사를 해결한 수연이는 무언가 할 일이 있다며 후다닥 자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뽀지락. 뽀지락.
이상한 소리가 나나 싶더니 큰 소리로 나를 부른다.
“드디어 잡았어!”
“어? 뭘?”
“돼지! 내가 죽였어!”
“······.”
알고 봤더니 돼지 저금통을 잡은 거였다.
수연이는 얼마 모으지도 못한 저금통을 반으로 갈라버렸고, 그 전리품 몇 개를 주머니에 넣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오빠, 잠깐 나가자.”
“어딜?”
“슈퍼. 내가 선물 사주려고.”
“선물?”
“응. 오빠 귀환 선물. 따라와. 자~ 일단 저를 따라오세요~ 알겠죠?”
“······.”
나는 얼떨결에 수연이의 손에 잡혀 아파트 앞 상가 슈퍼마켓으로 향했다.
무척이나 의기양양한 수연이.
나는 그 모습을 보다가 괜히 수연이의 머리를 몇 번인가 쓰다듬어줬다.
슈퍼에 도착한 수연이는 내게 아무거나 골라보라며 골든벨을 울렸다.
아주 자신만만하다.
누가 보면 부자인 줄 알겠어.
하지만 저 비루한 돼지 저금통의 사정을 잘 아는 나로서는 아이스크림만 하나 골랐다. 그리고 아이스크림 냉장고까지 키가 닿지 않는 수연이 것도 대신 집어줬다.
무려 2,000원이라는 거금을 쓰신 한수연 회장님은 슈퍼 앞 평상에 당당하게 자리를 잡았다. 손으로 팡팡. 나도 앉으란다. 아예 전세를 잡으셨다.
평상에 내리쬐는 태양은 뜨거웠다.
무인도만큼은 아니었지만, 싱가포르도, 이곳도 더운 건 마찬가지였다.
땀이 삐찔삐찔 흐르기 시작했다. 머리도 점점 익어간다. 수연이 머리 위에 손을 슬쩍 올려봤더니 역시나 따끈따끈하다. 나는 손을 수연이 머리에 그대로 둔 채로 햇빛을 대충이라도 가려줬다.
푹푹 찌는 대한민국.
그래도 여기는 조금.
“시원하네.”
시원했다.
“맞아. 엄청 시원해! 여름엔 아이스크림이 제격이라니까. 그런데 엄마가 많이 먹으면 배탈 난다고 그랬어.”
“그래도 두 개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응?”
“오빠 다 먹었는데.”
“······.”
순간, 도덕적 문제에 빠져버린 수연이는 한참을 고민하나 싶더니 내게 2천 원을 더 내민다.
“이건 비밀이야.”
“그래.”
“내 것도 하나 더 부탁해.”
“당연하지.”
동생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나는, 문득 부모님께 받은 20만 원이 생각났다.
이 중 일부로 동생 선물을 사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더위 때문이었는지.
20만 원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히 떠올랐다.
“기타.”
“응?”
“어쿠스틱 기타를 사야겠어. 집에 있는 피아노로는 부족하니까. 작곡은 그게 더 편하거든.”
“그런데 어쿠스틱 기타가 뭐야?”
“통기타. 이렇게 치는 거. 알겠어?”
내가 대충 흉내를 내주자 수연이는 금방 알아듣는 눈치였다.
수연이는 놀란 눈으로 나를 바라봤다.
“오빠 기타도 칠 줄 알아?”
그리고 그때,
아파트 입구에서 우리 쪽으로 걸어오던 한 남자가 나보다 먼저 대답했다.
“그러게요. 한서진 군. 기타도 칠 줄 아셨나 봐요?”
“······.”
“······.”
그 남자는 우리를 안심시키려는 의도였는지 양 손바닥을 살짝 앞으로 내보였다.
“아, 저는 이상한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KBC 방송국 소속 여진수 조연출로···.”
그리고.
그 남자를 본 똘똘한 우리 동생은 우렁하게 외쳤다.
할아버지께 배운 대로 말이다.
“여, 여기 이상한 사람이 있어요!!! 도와주세요!!! 방송국 사칭범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