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60
160 그를 통해서
* * *
그랜트는 멍하니 한서진을 바라보다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추측이 모두 틀렸다고 봐야겠지······.’
이제 겨우 10대 중반 정도 됐을 법한 아이.
저 아이 나이와 마크 밀러가 AC162 사고를 겪었던 그 시기만 비교해보더라도 자신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추측을 했었는지 알 수 있었다.
‘저 아이가 갓난쟁이였을 때 밀러에게 음악을 배웠을 리는 없을 테니까.’
그렇다면, MJ에게 밀러의 음악이 ‘직접적’으로 이어진 건 아닐 것이다.
‘아마 그의 음악을 듣고 영향을 받았겠지.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
사실은 그 또한 놀라운 일이었다.
누군가의 음악을 듣고, 그의 음악을 표현해낸다?
멜로디나 트랙을 베껴 썼다면 모를까.
완전히 다른 전개로 곡을 만들면서 음악이 주는 힘, 그리고 음악의 방향성을 비슷하게 가져갈 수는 없다.
제아무리 베토벤의 음악을 열심히 들었다고 해서 그의 음색을 가진, 완전히 새로운 곡을 만들 수 있는 작곡가는 이 세상에 없다.
제아무리 밀러의 음악을 열심히 들었다고 해서 그의 음색을 가진, 완전히 새로운 곡을 만들 수 있는 작곡가는 이 세상에 없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 소년은 그걸 해내고 있었다.
밀러와 직접 만나보지도 못했을 이 앳된 소년이 밀러의 음악을 이어가고 있었다.
이건, 소름이 돋을만한 일이었다.
거기에다가.
‘마크 밀러조차 40이 넘고 나서야 곡에 이런 느낌을 줄 수 있었는데······.’
밀러에게 직접 음악을 배우지 않았는데도, 이런 곡을 쓸 수 있는 이 소년이 그랜트는 정말 놀랍기만 했다.
한편으로는 말로 표현을 못 할 만큼 기대가 되기도 했다.
그랜트는 미국에서 날고기는 프로듀서와 작곡가들을 수없이 만나왔다.
빌보드에서 혁혁한 성과를 내고 있는 이들.
하지만 MJ만큼 어린 작곡가는 단언컨대 한 명도 없었다.
하물며 그들이 MJ만큼 어렸을 땐, MJ가 지금까지 발표한 곡 정도 되는 노래는 만들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것이다.
MJ가 그동안 발표했던 곡은 총 6곡.
그중에서 허투루 쓴 곡은 단 하나도 없었고, 모두 기준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랜트가 보기에, 만약 미국에서 활동하는 가수와 MJ가 협업을 했다면 빌보드에 차트인했을지도 모르는 곡들이었다.
지금 실력도 대단하지만, 무한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아이.
‘저 나이엔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불세출의 천재야.’
그랜트가 그런 생각들을 정리하고 있을 때.
건너편에 앉아있던 한서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랜트 이사님. 그런데 제 나이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요.”
“······!”
설마, 이 아이가 어디에서 독심술이라도 배워온 것일까?
그러한 의문을 가지기도 잠시.
한서진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지금 이사님께서 아무 말도 없이 계신 시간이 벌써 3분이 넘어가요. 아마 제 나이를 짐작해보고 여러 생각이 드셨던 모양이에요. 지금까지 저와 만났던 분들 대부분이 이사님과 비슷한 반응을 보여주셨었거든요. 그래서 이사님 생각을 알 수 있었어요.”
“······.”
완벽한 영어 발음을 구사하면서도 어려운 어휘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는 아이.
놀라운 일이 끝없이 생기는 가운데, 그랜트는 애써 마음을 진정시켰다.
저 소년이 하고 있는 말.
그 안에 핵심이 들어있었으니까.
그랜트가 예상하고 있던 말을, 소년이 그대로 내뱉는다.
“저는 MJ로 활동하면서 전면에 나설 생각이 없어요. 최소한 지금은요. 그 이유는 이사님도 예상하셨겠지만······.”
“홍보에 활용되기 싫다?”
소년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언젠가 제 정체가 밝혀지긴 하겠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거든요. 그러니 MJ가 10살이든 50살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을 거예요.”
“그게 네가 익명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였구나.”
“사실, 지금은 제가 더 집중해야 할 일이 있거든요. 그렇다면 이사님과 제가 나눠야 할 이야기는 ‘음악’에 대한 거겠죠. ‘지금’ 우리가 해야 할 ‘음악’에 대해서요. 조금 전까지 이사님께서 생각하고 있을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어요.”
“······.”
“그렇죠?”
“······.”
그랜트는 소년에게 한 방 먹은 것 같았다.
한평생을 음악 업계에 몸담아왔던 그랜트는 순간, 어디에 숨고 싶어질 지경이었다.
천재. 어린 나이.
그런 것에 시선을 뺏겨 본질을 잃었다.
지금 그랜트가 MJ를 만난 건, 함께 음악을 해보자고 제안하기 위해서였다.
그렇다면.
가수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어떤 곡을 만들고 있는지 물어보고, 조건에 대해 말을 해야 했다.
그런데 그랜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멍하니 시간만 보냈다.
그랜트는 진심으로 사과했다.
“미안하구나. 나도 본능적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네 어린 나이를 보고 ‘불세출의 천재’일 거라는, 놀랍다는 생각만 했었던 것 같구나.”
“아니에요. 자주 있는 일이라서요. 그게 기분 나쁜 것도 아니고요. 오히려 고마운 일이죠. 저를 좋게 봐주시는 거니까요.”
“그래도 사과는 제대로 해야겠지. 네게 실례를 범한 것 같구나. 내 다시 한번 사과하마.”
“······.”
아이가 그랜트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투명하면서도 맑은 아이의 눈.
그랜트는 이 소년이, 이 나이대의 아이들과 확실히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러니 그런 음악을 만들 수 있던 거였나?’
아이는 그제야 미소를 살짝 지었다.
“그러면 그랜트 이사님. 본론에 들어가기에 앞서 제가 먼저 질문을 하나 해도 될까요?”
“그래. 뭐든지 물어봐도 괜찮다. 내가 아는 범주 내에서는 솔직히 대답해주마.”
아이는 안주머니에서 명함을 하나 꺼냈다.
박훈 과장을 통해 MJ에게 전달해줬으면 좋겠다고 했던 그랜트의 명함.
아이는 Mark라는 글자를 가리키며 뜻을 물어왔다.
그랜트는 솔직히 대답했다.
“그건 마크 밀러라는 작곡가의 ‘마크’라는 뜻이었단다. 나는 네가 밀러와 연관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그리고, MJ가 밀러의 동료이거나 그에게 음악을 배운 제자일 것이라 추측했었다고도 말이다.
“물론 이 추측은 완전히 틀렸지만 말이다. 네 나이를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일이지.”
“······.”
순간적으로 손가락을 까딱이는 아이.
하지만 그랜트는 그 모습을 보진 못했다.
“그런데 혹시 너는 밀러를 알고 있지 않니? 네가 밀러를 직접 만나지는 않았다고는 해도, 음악을 듣고 영감은 받았을 것 같아서 말이다. 결국엔 Mark라고 쓴 명함을 보고 나를 만나자고 하기도 했고. 내 생각엔 그럴 것 같은데 어떠니?”
“······.”
아이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카페 창문 너머를 바라보며 잠시 시간을 보냈다.
함박눈이 내리고 있는 서울.
두꺼운 외투를 입고 있는 사람들은 우산을 푹 눌러 쓴 채 서둘러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이는 그들을 바라보다가 불현듯 대답했다.
“그는 멋진 프로듀서였으니까요. 그의 노래를 종종 듣곤 했어요.”
많은 의미가 포함된 말.
아이는 밀러를 과거형으로 표현했고.
밀러에게 영감을 받았냐는 질문에는 긍정의 대답을 해준 것이다.
그래서.
그러한 대답을 들었기에······.
그레이슨 그랜트는 아이와 함께 창밖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어줬다.
“그렇구나. 그를 알아봐 줘서, 잊지 않아 줘서 고맙다.”
“······ 네.”
“밀러, 그는 훌륭한 음악가였단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너와 직접 만날 수도 있었을 테고. 그러지 못하는 세상이라 조금은 아쉽구나.”
“저도 조금은······. 아쉽네요.”
하염없이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가 그랜트를 바라본다.
아이는 그랜트에게 밀러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물어봤다.
그랜트는 생각에 잠겼다.
옛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했으니까.
한참을 그러고 있던 그랜트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밀러하고는 조금 인연이 있었지······.”
.
.
.
오늘은 우여곡절이 많았다.
자동차 엔진이 고장 났고, 이 시골에서 히치하이킹을 시도해야 했으며, 다행히 친절한 연인을 만나 번화가까지 올 수 있었다.
히치하이킹의 대가로 그 연인에게 준 메트로놈이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음악을 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렇다면 누군가 음악을 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줬으면 좋겠는데. 안 그러면 메트로놈이 불쌍하니까 말이야.’
조금 엉뚱한 생각을 하던 그는 택시 안에서 열심히 위치를 가늠했다.
그렇게 대략 10분이 지났을 때.
“감사합니다. 기사님!”
“네~ 손님, 조심히 가세요~”
마크 밀러는 공연장 입구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늘 무대는 비교적 작은 야외 공연장이었다.
‘예상 관객이 1,000명 정도 된다고 했었지.’
프로듀서로서 이제 막 활동하기 시작한 밀러와 신인 가수의 조합이라고 봤을 때 꽤 괜찮은 무대.
오프닝 액트(opening act, 본공연 전에 분위기를 띄우기 위해 하는 공연)이긴 했지만.
이 정도 규모의 무대에 가수를 내보이는 게 처음인 밀러로서는 의욕이 마구 샘솟고 있었다.
밀러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스태프 목걸이를 차고, 관계자들에게 열심히 인사를 하며 대기실로 향했다.
가수 대기실은 굉장히 구석진 곳에 있었다.
오늘 메인 공연인 ⌜Desert 21⌟ 밴드의 대기실은 찾기도 쉽고, 크기도 크고, 주변에 사람들도 많았지만.
오프닝 액트를 맡은 가수의 대기실은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밀러가 문을 열고 들어가자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청년이 시선을 스윽 돌린다.
밀러와 눈이 마주친 청년.
그는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엇. 프로듀서님! 어떻게 여길 오셨어요?”
“차 타고 왔는데?”
“아니. 그러니까 제 말은······. 어제 다른 가수님 녹음이 있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밀러는 피식 웃었다.
“밤새 운전해서 왔지. 14시간쯤 걸린 것 같네. 막판에 차가 멈춰서 고생했었다.”
“14시간이요? 그 고물차로요?”
“그래. 중간에 내가 엔진을 팍! 내려쳤더니 한번 살아나더라고. 결국 죽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
밀러는 가수 상태부터 체크했다.
유독 연습할 시간이 짧았던 노래.
그래도 성실한 애라 가사도 잘 외웠고, 발성도 좋아서 문제는 없을 것 같았다.
“혹시 궁금한 거 있어?”
“제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해주시는가 싶어서요. 사실, 저 혼자도 할 수 있는 공연이었잖아요. 그렇게 하기로 이미 정해져 있던 거고요.”
밀러는 그를 빤히 바라봤다.
이제 겨우 청년 느낌이 들기 시작한 10대 후반의 가수.
밀러는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 보며 대답했다.
“내가 피아니스트로 활동했었다고 말했었나?”
“네. 꽤 잘 나가셨다고 하셨었죠······.”
“크흠. 그때는 말이야. 나를 챙겨주는 사람이 별로 없었어. 주변에서는 다 나한테 기대만 걸었지. 나 역시 무작정 달려야만 하는 줄 알았고. 실제로 그렇게 했었어. 그때 누군가가 내 옆에 있었으면 더 좋지 않았겠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
“그러니까 나는, 나라도 내 가수를 더 신경 써줘야 한다고 생각해. 내 음악을 완성시켜 주는 사람이 가수잖아. 나는 내 가수가 고마워. 그래서 이렇게 하는 거야.”
“만약······. 제가 성공을 못 하면요?”
“그건 내 능력 부족이지. 네게 맞는 더 좋은 곡을 만들어주지 못한 거니까. 네가 신경 쓸 일은 아니야. 아, 물론 신경이야 쓰이겠지만.”
“······.”
“어쨌든. 지금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이 순간에 집중해. 음악에만 집중해도 될까 말까 한 시간이잖아. 우리는 음악가야. 그 외의 일들은 생각보다 그렇게 중요하지 않아.”
“······ 알겠습니다.”
“그래서. 혹시 궁금한 거 있어?”
“네. 첫 번째 곡, 첫 번째 벌스가 끝나는 부분에서요. 감정을 어떻게 하면 조금 더······.”
창고와 다름없는 대기실에서.
둘은 오직 음악에 집중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점점 나아지는 보컬의 목소리에 밀러는 미소를 지었다.
‘하면 되네. 오늘 꽤 괜찮은 무대가 될지도 모르겠어.’
리허설까지 무사히 마치고 한숨을 돌리고 있을 그때, 스태프가 대기실로 들어와 관객들의 입장을 알려줬다.
메인 공연을 할 ⌜Desert 21⌟은 조금 더 천천히 준비해도 되겠지만, 오프닝 액트는 지금 움직여야 했다.
가수가 무대로 나간다.
밀러도 그의 뒤를 따라갔다.
무대 중간에 서서 공연 스태프와 함께 가수의 장비를 체크해줬다.
밀러는 슬쩍 관객석을 바라봤다.
헤드라이너가 밴드이다 보니 전석이 스탠딩석으로 만들어져있었다.
꽤나 자유로워 보이는 분위기.
어느 정도 찬 객석은 공연의 시작을 알리고 있었다.
“와아아~”
⌜Desert 21⌟을 보러온 관객들은 ‘예의상’ 환호를 해주고 있었다.
무명 가수의 대우는 언제나 열악하다.
어디 공연장에 혼자 가서, 혼자 공연을 하고 오라고 한다.
관객들의 반응도 그렇게 좋지만은 않다.
그래서 밀러는 오늘 무리를 해서라도 이곳까지 와준 것이다.
‘나라도 이렇게 해줘야지.’
가수는 밀러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됐다는 뜻.
그의 눈빛에는 어느새 열정이 가득 차 있었다.
“그래. 그거면 됐다.”
“저 잘할 수 있어요. 곧 성공도 할 거고요.”
“그래.”
“두고 보세요. 이곳 사람들 모두 제 팬으로 만들 거니까요.”
“좋네. 그럼 잘하고 와라.”
“네. 알겠습니다.”
밀러와 스태프는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일이 뜻대로 된다면 좋으련만.
모든 것이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다.
가수가 막 노래를 시작했을 때, MR이 툭하고 끊어졌다.
밀러가 곧바로 스태프에게 이유를 물었지만, 그는 고개를 저을뿐이었다.
장비 문제인 것 같다며.
오프닝 액트니까 일단 무대에서 내려오라며, 본 공연까지는 고쳐놓겠다며, 대수롭지 않게 말한다.
음악은 어렵다.
음악만 해서는 음악을 할 수가 없었다.
피아노 연주를 하고 싶었는데 손목이 말을 듣지 않았다.
대학교에서 작곡을 배워 프로듀서로서 가수를 키우고 싶었지만, 현실의 벽은 높았다.
무명.
성과없는 작곡가.
클래식계보다 대중음악계가 더 야속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사소한 일에 좌절하고 있을 이유는 없었다.
마크 밀러는 그런 사람이었다.
“지금 MR 재생 장치만 문제가 있는 거죠? 마이크랑 스피커는 잘 되고 있으니까요.”
“그렇긴 하죠?”
“그러면 반주는 제가 직접 하겠습니다. 마이크만 하나 더 주세요.”
“네?”
“어차피 정비할 시간이 필요한 거 아닙니까? 저희가 시간을 끌어드리겠습니다. 나중에 저희한테 밥이나 사세요.”
“······.”
무대 위의 가수는 잠깐 머뭇거리다가 아무런 반주가 없는데도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최선을 다해서.
묵묵히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내보인다.
관객들은 그런 그를 대수롭지 않게 바라봤다.
오프닝 액트.
그냥 지나가는 가수.
외롭디외로운 감정을 느끼고 있을 그가 있는 무대 위로······.
마이크 하나와 어쿠스틱 기타를 챙겨 든 마크 밀러가 올라간다.
가수가 반주 없이 노래를 부르며 밀러를 바라본다.
밀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바닥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는 노래에 맞춰 기타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손목이 아프긴 하지만······.’
피아노를 칠 때보단 참을만했다.
밀러는 이를 악물며, 기타 코드를 짚어나갔다.
심심하기만 하던 노래에 활기가 생긴다.
밀러의 반주를 가만히 지켜보던 가수가 씨익 미소를 짓는다.
그는 목놓아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Beautiful Day⌟.
아름다운 기타의 선율과 함께 보컬의 감정이 폭발하듯 튀어나온다.
공연장의 분위기가 일순간 바뀌었다.
“뭐야?”
“노래 좋은데?”
“갑자기 MR이 끊기더니 기타 연주라고? 연출이었던 건가?”
“와! 대박이다!”
관객들이 반응을 해준다.
그 소리가 무대 위까지 전해졌다.
밀러는 스르르 눈을 감았다.
내가 뛰어들지 않아도 세상은 잘 돌아간다.
하지만 내가 뛰어드는 순간, 세상은 어떻게든 바뀌게 되어있다.
태어나서 한 번이라도 파장을 만들어내 본 사람은 그 사실을 알 수밖에 없었다.
밀러가 평소에도 가지고 있던 신념.
그에 보답이라도 하듯.
“와아아아아아!!!”
“대박!!! 가수가 누구라고?”
“잭 워커? 목소리 엄청 좋다!!!”
“나이도 어린것 같은데. 사실 천재 가수 아냐?”
“그런가 봐! 오늘 괜찮은 가수 한 명 알게 됐네!”
관객들은 가수에게 열혈이 환호를 보내주고 있었다.
‘이거면 됐지.’
밀러는 왼쪽 손목 통증을 참아가며, 잭 워커의 마지막 노래까지 반주를 해줬다.
작곡할 때 가끔씩 기타를 치는 건 괜찮아도, 편히 연주할 정도로 손목이 좋지는 않았다.
그래도.
“의미가 있었지?”
“밀러 프로듀서님! 대박이었어요! 프로 연주자인 줄 알았다니까요?”
“말은.”
“진짜라니까요?”
밀러에게 격려를 보내준 사람은 잭 워커뿐만이 아니었다.
장비를 정비하는 데 시간이 필요했던 ⌜Desert 21⌟ 밴드의 베이시스트가 대표로 인사를 하러 왔다.
모든 공연이 끝난 다음에 말이다.
“저희 공연에도 MR이 쓰이는 노래가 있었거든요. 큰일 날뻔했습니다.”
“저희가 먼저 발견해서 다행이었죠. ⌜Desert 21⌟ 공연, 정말 멋있었습니다.”
“아닙니다. 잭 워커 가수의 공연이 더 멋있었죠. 그 무대를 ‘직접’ 만든 밀러 프로듀서님의 역할도 빛이 났고요.”
⌜Desert 21⌟의 밴드 전원은 오프닝 액트 공연을 전부 지켜봤었다고 했다.
문제가 생겼다고 해서 무대를 확인하러 왔다가 끝까지 공연을 보게 됐다고.
“틈틈이 기타를 배운 게 이런 곳에 쓰일 줄은 몰랐네요.”
“멋진 연주던데요.”
“밴드맨이 보기엔 어설프기 그지없겠지만요.”
“하하하. 유쾌한 분이시네요. 그런데 조금 전, 워커가 부른 노래를 전부 만드셨다는 게 진짜인가요?”
“제가 전부 만든 곡은 3곡입니다. 나머지 3곡은 제가 편곡에 참여했을 뿐이죠.”
“대단하네요. 특히 오프닝으로 불렀던 ⌜Beautiful Day⌟. 굉장히 인상적이었습니다. 2절만 들어본 게 전부긴 하지만요.”
“아직은 많이 부족합니다. 하지만 점차 나아질 겁니다.”
“네. 분명 그럴 겁니다.”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꼭 함께 작업해봤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밴드 음악을 만들 수 있다면 말이죠.”
“그렇다면 그 약속, 저도 잊지 않고 있겠습니다. 저도 ⌜Desert 21⌟과 한 번쯤 작업을 해보고 싶었으니까요.”
연락처를 주고받은 둘.
밀러는 그랜트에게 인사를 했다.
“무엇보다 워커를 많이 신경 써주셔서 감사했습니다. ⌜Desert 21⌟의 오프닝 액트라니. 워커도 많이 고마워하고 있을 겁니다.”
“그런 것 같더라고요. 좋은 가수입니다. 실력이 있어요. 분명 금방 뜨게 될 겁니다.”
“네. 분명 그럴 겁니다.”
“그런데 밀러 프로듀서님은 뒤풀이에는 참여 안 하신다고 했었나요? 워커에게 그렇게 들었는데요.”
“아, 제가 내일까지 LA에 가봐야 해서요. 바로 공항으로 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바쁘시네요.”
“좋은 일이죠.”
“그러면 밀러 프로듀서님에 대한 궁금증은 워커에게 물어봐야겠습니다. 오늘 무척 인상적이었거든요. 노래도. 기타 연주도. 그 무대의 모든 분위기도요.”
“저도 무척 즐거웠습니다. 음악은 언제나 저를 즐겁게 만들어주는 것 같습니다.”
가볍게 미소 짓는 밀러.
그는 그랜트와 악수를 한 뒤 공연장을 빠져나갔다.
그랜트는 뒤풀이에서 워커와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워커와 밀러의 인연이 시작된 이야기부터.
오늘 밀러가 14시간에 걸쳐 이곳에 오게 된 이야기까지.
바쁜 일정에도 가수를 챙기는 멋진 프로듀서라면서, 오히려 밀러를 잘 부탁한다는 소리까지 듣게 됐다.
그날 이후, 그랜트는 밀러와 직접적으로 엮이게 되는 일은 없었다.
서로 바쁘기도 했고, 각자 해야 할 일이 명백히 달랐으니까 말이다.
잭 워커는 ⌜Beautiful Day⌟로 주목받기 시작하면서 계속해서 가수 활동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몇 년이 흘렀을 때.
잭 워커는 빌보드 HOT 100, 17위에 당당히 이름을 올린다.
다만, 그 곡의 프로듀서는 마크 밀러가 아니었다.
잭 워커와 밀러의 인연은 1집에서 끝나게 된다.
그 당시 밀러는 프리랜서 신분으로 에이전시를 통해 이런저런 레이블에 불려 다닐 때였고, 잭 워커 역시 레이블에 꼼짝 못 하던 시절이었다.
흔한 일.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모든 걸 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여기에서 조금 아쉬운 점은 잭 워커의 빌보드 HOT 100, 17위가 커리어 하이 성적이었다는 것.
원 히트 원더라고 할 수도 있고, 그 정도 성적으로 무슨 원더냐며 그렇게 보지 않는 이들도 있었지만······.
워커는 데뷔하는 해에 프로듀서에게 배웠던 것처럼.
지금까지도 묵묵히 자신만의 음악을 하며 활동을 이어 나가고 있었다.
.
.
.
그랜트는 카페 창문 너머를 바라봤다.
낮에 시작된 이야기는 어느새 저녁이 되어서야 끝나가고 있었다.
“그때 무대에서 봤던 밀러의 기타 연주와 워커의 목소리가 내 기억 어딘가에 남아있더구나. 나도 몰랐는데 말이지. 모두 멋진 아티스트들이었어.”
12월.
그랜트는 어떤 작은 공연장에서 잭 워커를 우연히 만났다.
그를 설득해 지난 주에 ⌜DreamSounds⌟와 단기 계약을 맺었다.
워커가 신인이었을 그땐 보컬도 조금 어설펐고, 밀러에게 받은 곡도 조금은 어설펐다.
하지만 그 둘이 함께 있었던 그 순간이 그날 공연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처럼 보였다.
워커는 밀러와 함께했기에 더욱 성장할 수 있던 가수였다.
지난달에 잭 워커와 만나게 되며 그 당시의 마크 밀러가 떠올랐다.
치유의 음악을 만들던 밀러.
그는 서서히 대중들에게 잊혀져가고 있었다.
그리고······.
밀러와 비슷한 음악을 만드는 MJ.
그랜트는 이 모든 것에서 확실한 가능성을 봤다.
“네가 영향을 받았다는 밀러에 대한 이야기는 하나도 빠짐없이 네게 해줬다. 내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이게 전부지. 이제 네 대답만 남았구나.”
“······.”
“⌜DreamSounds⌟와의 계약. 잭 워커와의 작업. 모든 건 네 결정에 달려 있단다.”
“······.”
“그래서 어떻게 하겠니?”
어느 새부터인가 조용히 눈을 감고 있던 소년이 서서히 눈을 떴다.
“잭 워커 가수님의 노래는 저도 음원 사이트에서 가끔씩 듣곤 했어요.”
“그러니.”
“네.”
밀러가 작곡한 노래를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들어왔던 소년.
한서진은 담담히 대답했다.
“그분은 이미 제게도 익숙한 가수니까요. 분명 멋진 노래가 만들어질 거예요.”
“그렇다면······.”
“해볼게요. 그러고 싶어요.”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마크 밀러를 통해서.
MJ와 ⌜DreamSounds⌟의 첫 단추가 마침내 꿰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