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161
161 악보만으로도
* * *
이야기가 끝났다.
어느새 함박눈은 그쳐있었다.
뽀득뽀득 눈이 밟히는 골목길을 지나 대로변에 나오자 깔끔하게 정비된 길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곳 인도를 따라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어 저렇게 서두르고 있는 걸까.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겠다.
우리도 그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면 내일 ⌜월광⌟하고 이야기를 나눠보도록 하마. 너하고 ⌜DreamSounds⌟가 계약이 돼야 네게 곡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네.”
내 계약 대행은 ⌜월광⌟의 박훈 과장님께서 직접 처리해주시기로 했다.
그랜트 이사님께는 카페에서 그 이야기를 전달해드렸을 뿐이었다.
오늘 많은 이야기를 듣게 됐다.
그랜트 이사님 입장에서 보자면 과거의 이야기.
하지만 나는 처음 듣는, 오늘의 이야기였다.
무인도에서 밀러 아저씨는 본인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해주시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내게 포커스를 맞춰서.
나와 내 가족과 내 친구와 내 음악을 걱정해주셨다.
그때의 나는 어려서 밀러 아저씨를 신경 써드리지 못했다.
부모님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던 때인데 어쩔 수가 있나?
그런데 지금은······.
그때 아저씨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나눠봤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후회라기보다는 일종의 아쉬움 같은 거였다.
밀러 아저씨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고 있었다.
정말로 멋지게 음악을 하셨던 분.
서서히 잊혀져가는 와중에도 그의 이름을 떠올려주는 사람이 아직도 있다.
유럽에서.
미국에서.
그리고.
이곳 한국에서도.
내가 있는 한 그가 잊혀질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
그에게 음악을 배웠고.
그렇게 그의 음악은 내 안에 깃들게 됐으며.
나는 앞으로 평생동안 음악을 할 생각이니까.
그랜트 이사님과 함께 건널목 앞에 섰다.
차로 데려다주시겠다는 걸 거절했더니, 지하철역까지만이라도 배웅을 해주시겠다고 하셨다.
“오늘 같은 날은 차보다 지하철이 훨씬 빠르거든요.”
“그럴 만도 하겠구나.”
눈 때문에 슬슬 차가 막히기 시작한 도로.
서울의 도로를 바라보던 그랜트 이사님께서 질문을 해오신다.
“그런데 네가 ‘지금’은 더 신경 써야 할 일이 있다고 했었지. 혹시 그게 무엇인지 물어봐도 되니?”
나는 곧바로 대답을 해드렸다.
“피아노요. 올해에도 콩쿠르에 나가게 됐거든요.”
“피아노? 올해에도?”
“네. 누구와 비슷한 길을 걷고 있는 것 같죠?”
“······.”
그때, 신호등이 바뀌었다.
건널목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이 우루루 길을 건너기 시작한다.
그런데도 그랜트 이사님은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봤다.
덕분에 나도 제자리에 서 있어야 했다.
5. 4. 3. 2. 1.
신호등 아래 숫자 카운트가 끝나며 빨간불이 들어왔다.
“올해에는 퀸 엘리자베스에 나갈 거예요. 작년엔 에틀링겐에서 우승했으니까 또 앞으로 나아가야죠. 저는 음악에 욕심이 있는 사람이라서요. 그래서 어떤 것도 포기할 수 없어요.”
“······.”
“그런 저와 계약하셔도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카페에서 이미 끝난 이야기.
하지만 다시 한번 질문을 던져봤다.
그랜트 이사님은 나를 바라보시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리셨다.
“너는 정말로 밀러와 비슷한 길을 가려고 하는구나.”
“맞아요.”
“하지만 어떤 하나만 성공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야. 최고의 자리로 가면 갈수록 점점 더 어려워질 테고. 그래도 할 수 있겠니?”
“네. 저는 할 수 있어요.”
“······.”
그때, 신호등이 다시 바뀌었다.
이번엔 내가 먼저 건널목을 건너기 시작했다.
조금 뒤쪽에서 그랜트 이사님께서 나를 따라오는 게 느껴졌다.
뒤를 돌아봤다.
신호등 아래 숫자 카운트는 이제야 20초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여유롭게 남아있는 시간.
시간은 많이 남아있었다.
그랜트 이사님은 나를 보며 말을 이어가셨다.
“네가 밀러와 비슷한 음악을 만들 수 있는 이유를 알 것도 같구나. 너는 그를 닮았어. 마치 그에게 가르침을 받은 것처럼 말이다.”
“······ 그런가요.”
“최소한 내 눈엔 그렇게 보인다. 참으로 신기한 인연이구나. 너와 밀러는.”
“······ 그럴지도 모르겠어요.”
그랜트 이사님께서는 나를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다고 하셨다.
⌜DreamSounds⌟의 이사로서가 아니라.
그레이슨 그랜트로서 한서진이라는 음악가를 후원해주고 싶다고 말이다.
“우리는 음악을 만드는 사람이지. 그러니 그 외의 것들은 그렇게까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
“알고 있어요. 저는 이미 그렇게 하고 있기도 해요.”
“그래. 그러면 우리 앞으로 잘해보자꾸나.”
내게 손을 내밀어주시는 그레이슨 그랜트.
나는 그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 * *
다음날.
⌜DreamSounds⌟와 계약이 마무리됐다.
내가 원하는 대로 ⌜월광⌟과 ⌜DreamSounds⌟, 그리고 MJ가 엮인 계약이었는데 수익 배분은 오히려 내게 조금 더 유리해졌다.
⌜월광⌟ 입장에서는 뜻하지 않은 저변 확대와 미국에서 MJ가 성공했을 때, 한국에서 생길 낙전수입에 관심이 있는듯했고.
⌜DreamSounds⌟는 MJ 노래의 북미 판권을 얻은 데에 만족했으며.
MJ는 전반적으로 수익 배분 지분이 늘어 만족했다.
윈윈윈.
다행히 욕심을 부리는 사람은 없었다.
계약이 끝나자마자 그랜트 이사님께 ‘미완성곡’ 파일을 전달해드렸다.
정리가 되어 있지 않은 악보도, 일단은 필요하다고 하시길래 악보 프로그램으로 옮겨 함께 넘겨드렸다.
작곡은 마무리가 됐고, 편곡과 작사 작업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곡.
앞으로 시간만 투자하면 완성이 되는 곡이었다.
그랜트 이사님은 이 노래를 세 번 정도 들으시곤 평가를 해주셨다.
“어떤 풍경이 그려지는 곡이구나. 감상적이면서도 아름다운 노래. 다만, 요즘 트렌드에 맞는 곡은 아니지.”
“순전히 제 감정을 넣어 만든 곡이니까요. 만약, 이사님께서 이 곡이 마음에 안 든다고 하시면 새롭게 작곡할 생각도 있어요. 워커 가수님 의견을 물어보면 더 좋아질 테니까요.”
“아니다. 오히려 이런 곡이라 워커도 더 좋아할 거다. 나는 무척 마음에 드는구나. 슬픔과 그리움으로 시작해서 행복과 치유로 끝나는 곡. 서사가 있는 노래야. 정말로 좋구나.”
아직 가사가 없는, 노래만 듣고서 내 의도를 알아차리시는 분.
그랜트 이사님은 이 곡으로 워커 가수님을 설득해보시겠다고 했다.
워커 가수님이 ⌜DreamSounds⌟ 소속이 된 것은 맞지만, 내 곡을 부르겠다고 확정을 해주신 상황은 아니라고.
하지만 그랜트 이사님은 자신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런데 작사는 영어로도 가능하겠니? 미국에서 발표할 곡이라 반드시 영어 가사가 필요한데 말이다.”
“예전에는 영어로 더 많이 작사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더 편할지도 모르겠어요. 가능해요.”
실제로 무인도에서 밀러 아저씨에게 작사를 배울 때는 전부 영어를 썼었다.
그런데 그랜트 이사님은 내 말을 듣고 더 놀라시는 듯했다.
“예전이라고? 네게 예전이라면······.”
“제가 이래 봬도 작곡, 작사 경력이 제법 되거든요. 의외로 데뷔가 늦은 편이라고 볼 수도 있어요.”
“허허허. 서진이 너하고 이야기하고 있으면 도통 믿기지 않는 일 투성이로구나.”
그랜트 이사님은 내일 곧바로 미국으로 돌아가시겠다고 했다.
계약서 건 때문에 ⌜DreamSounds⌟ 본사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있으시다고.
겸사겸사 워커 가수님도 만날 거라고 하셨다.
“⌜DreamSounds⌟ 본사가 LA에 있다고 하셨죠?”
“그래. 항상 따뜻한 곳이지. 한국하고 비교해보자면, 지금 LA는 한국의 가을 정도 되는 날씨라고 생각하면 될 거다.”
“좋네요. 기회가 되면 한번 가봐야겠어요.”
“이번에 나를 따라가도 괜찮은데?”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곡 마무리 작업은 한국에서 하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요. 미국까지는 왔다 갔다 하는 시간도 꽤 오래 걸리니까요. 거기에, 말씀드렸듯이 제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도 있고요.”
“알겠다. 그러면 나는 미국에서 네 곡이 완성되기만을 기다리고 있으마. 그래야 어떤 일이든 시작을 할 수 있을 테니까.”
그랜트 이사님과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나서, 나는 잠깐 홍대에 들렀다.
오랜만에 기타를 실컷 치고 싶어졌다.
⌜대성하자⌟ 형들은 나를 언제나처럼 반겨줬다.
“크흐! 이게 누구야? 대한민국 음악계의 거물 아니야? ⌜월광⌟과 계약하고, ⌜Schmid⌟의 가호를 받으며 이젠 ⌜DreamSounds⌟의 방패까지 얻게 된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
“너무 거창한데요?”
“그런데 팩트잖아?”
“뭐······. 그렇긴 한데요.”
“큭큭. 거 봐. 오랜만이다, 서진아. 그런데 그새 또 큰 것 같다?”
“매일매일 자라야 하는 청소년기니까요. 당연히 그래야죠.”
“초등학교 때 처음 봤는데 벌써 15살이라니······. 이야. 믿기지가 않는다니까?”
내게 어깨동무를 걸어오는 대성이 형.
형이 내민 주먹에 내가 주먹을 맞대고 나서야 나를 풀어주신다.
홍대는 한가했다.
하지만 더 이상 ⌜대성하자⌟가 한가하지는 않았다.
장현필 가수님의 세션 녹음을 ⌜대성하자⌟가 맡게 된 이후, 6집 앨범도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서 여기저기 불려 다니는 곳이 많다고 하셨다.
오늘은 평일이라 홍대에 있는 것뿐이라고.
주말에는 보통 다른 공연장에 불려 다닐 때가 더 많다고 한다.
거기에 종종 방송 촬영을 하게 되는 일까지 있다고 하셨다.
“EBC에서 하는 ⌜공감⌟이라는 음악 프로 알지? 저번에 거기에 나가게 됐잖냐. 서진이 네 덕분에 형들이 출세했다. 출세를.”
“그거야 형들이 잘하시니까······.”
“됐거든? 하여간 고맙다. ⌜대성하자⌟ 출범 이래로 가장 바쁘게 보내고 있어. 잘하면 일성이랑 이연이랑 득수, 알바 그만둬도 될 것 같더라.”
“잘됐네요.”
“뭐, 너만이야 하겠냐마는. 싱가포르 공연도 성공적이었다면서? 축하한다. 우리도 언제 한 번 네 리사이틀 보러 가야 하는데 말이야.”
“그러면 한국에서 공연을 한 번 잡아야겠네요. 형들 초청하려면 말이에요.”
“새끼. 말은.”
“진짠데요?”
“됐다. 이놈아.”
대성이의 형의 투박한 말투가 어느 새부터인가 무척 익숙해져 버렸다.
Star 악기점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다가 우리는 Star 라이브하우스로 장소를 옮겼다.
득수 형과 이연 형, 일성이 형이 순서대로 모습을 드러냈다.
정규 공연이 있는 날은 아니었지만, 연습을 겸해서 ⌜대성하자⌟ 형들은 무대에 올라갔다.
나도 무대 한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대성하자 5집 앨범 수록곡에 필요한 키보드는 내가 직접 연주했다.
보통은 MR로 처리한다고 하시는데, 오늘은 특별히 모든 곡을 라이브로 연주하게 된 것이다.
비정기 공연인 만큼, 시간에 맞춰 이 공연을 보러온 사람은 몇 명 없었다.
홍대 거리를 지나가다가, 입간판을 보고서 음료숫값 정도만 지불하고 온 관객들.
그들의 숫자는 20명 정도가 전부였다.
그래도 충분했다.
박자를 쪼개는 드럼과 저음을 담당하는 베이스.
화려한 일렉 기타와 키보드.
그리고 한 명의 보컬이 공연장을 가득 채운다.
⌜대성하자⌟ 공연이 끝난 뒤 나는 30분가량의 솔로 무대를 배정받을 수 있었다.
남아 있는 17명의 관객과 ⌜대성하자⌟ 형들 앞에서.
나는 어쿠스틱 기타로 유명한 팝송을 연주했다.
전부 무인도에서 밀러 아저씨에게 배운 곡들.
관객들과 무대의 거리는 무척 가까웠고.
나는 마스크 한 장만을 쓰고서, 가감 없이 내 목소리를 드러냈다.
음악이 점점 익어간다.
그때 무인도에서 불렀던 노래보다.
조금 앳되긴 해도, 지금의 노래가 더 나았다.
밀러 아저씨에게 더듬더듬 코드를 배웠던 기타보다.
지금의 기타가 더 능숙해졌다.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그 속에서 음악을 했다.
매일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그거면 충분했다.
몇 안 되는 관객들은 내게 큰 환호를 보내줬고, 약속된 공연 시간은 아쉬운 듯 끝이 났다.
관객들이 모두 공연장을 나갔을 때, ⌜대성하자⌟ 형들도 라이브 하우스를 정리하겠다며 무대 아래로 내려갔다.
핀 조명 하나가 무대를 환히 비추고 있는 이곳에서, 무대 위의 계단 진 곳에 털썩 주저앉아 기타 코드를 잡아봤다.
B7에서 B7/F#으로.
B7/F#에서 E7으로.
조금 올드한 느낌이 드는 어쿠스틱 기타의 화음을 들으며.
내게 남아있던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허밍을 해봤다.
아직은 가사가 없는 곡.
그래서 속으로나마 노랫말을 붙여 노래를 불러봤다.
공연장을 정리하던 ⌜대성하자⌟ 형들이 우두커니 서서 나를 바라본다.
묵묵히 아무 말도 없이.
노래가 끝나는 그 순간까지 자리를 지켜준다.
“허. 쟤는 무슨······.”
“매번 놀랍기만 하다니까? 저거 서진이가 새로 작곡하고 있다는 곡 맞지?”
“아마 그럴걸? 기가 막히네. 조금 울컥하기도 하고.”
“저 노래 연주하고 싶어서 오늘 홍대에 왔나 보네. 맞냐 서진아?”
마지막 대성이 형의 외침에 대답을 해드렸다.
“맞아요. 이 곡은 제가 무대에서 먼저 불러보고 싶었거든요.”
이 노래가 진정으로 전달이 되어야 할 곳은 미국이었다.
미국의 LA.
그곳의 잭 워커라는 가수님에게 내 뜻이 잘 전해지길 바라며······.
나는 다시 한번 기타를 끌어안았다.
* * *
텅 비어있는 공연장.
그 무대 위에 홀로 앉아 있는 남자 앞으로 한 노년의 남자가 터벅터벅 걸음을 옮긴다.
남자는 노년의 남자를 힐끗 보며 입을 열었다.
“세월이 참 빠르죠. 제가 그랜트 베이시스트님을 만난 게 엊그제 같은데 말이에요.”
그랜트는 그를 보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
“그래. 청년티도 못 벗어나던 가수가 어느새 능구렁이가 다 된 걸 보니, 그런 것 같구나.”
“이곳엔 어쩐 일이세요? 어디 멀리 출장 가셨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 일이 잘 마무리됐거든. 그래서 이곳에 와봤지.”
“제 공연을 보신 거예요?”
“그래.”
“어땠어요?”
“확실히 그때보다 능숙해졌더구나. 미국의 어지간한 보컬보다 네가 낫겠어.”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가 최고라고 생각하던 시기는 벌써 지나갔어요. 제겐 이 정도 무대도 충분해요. 노래를 할 수 있는 무대가 있으면 되는 거니까요.”
“다시 한번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 하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니?”
“노래를 하는 사람이라면 그런 마음은 항상 한 켠에 간직하고 있죠. 하지만 그런 방대한 꿈 때문에 이번에 ⌜DreamSounds⌟와 계약한 것만은 아니에요.”
“그러면?”
“글쎄요. 아마 그리움 때문이었을까요? 저도 문득 그때가 떠올랐으니까요. ⌜Desert 21⌟의 오프닝 액트로 활동을 막 시작하던 그때가요. 거기에 지금 제가 딱히 소속사가 있던 것도 아니었잖아요. 그랜트 베이시스트님이라면 믿을만하기도 했고요.”
“싱거운 이유구나.”
“언제나처럼요. 저도 이 업계에 있으면서 알게 모르게 닳고, 또 닳았을지도 모르죠.”
남자는 어쿠스틱 기타를 가볍게 튕겼다.
투명하면서도 맑은 그 기타 소리가 공연장 저 끝까지 울려 퍼진다.
그랜트는 남자 바로 앞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그에게 악보를 건넸다.
“이게 뭐예요?”
“네 신곡.”
“저는 이제 제가 쓴 곡이 아니면 노래하지 않을 거예요. 그랜트 베이시스트님도 잘 아시잖아요.”
“보는 건 공짜인데도?”
그랜트의 어설픈 농담.
결국, 남자는 피식 웃으며 그가 건넨 악보를 받아들었다.
“보기만 할 겁니다?”
“마음대로 하려무나.”
“자신만만하시네요.”
“네가 좋아할 만한 곡이니까.”
“그런 건, 이 세상에 없다니까요.”
“한번 두고 보자꾸나.”
약간의 실랑이 끝에 남자는 악보를 보기 시작했다.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씩.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남자의 얼굴이 일변하기 시작했다.
조금은 심각한 표정으로 악보를 유심히 살핀다.
남자는, 잭 워커는 그랜트를 쏘아봤다.
“밀러 프로듀서님의 악보. 이걸 어디서 찾은 거예요?”
“한국에서.”
“네?”
“새로운 작곡가가 나타났더구나. MJ라는 예명을 쓰는 작곡가. 그가 만든 곡이다.”
그랜트는 워커를 보며 나지막이 다시 물었다.
정말로.
네가 쓴 곡이 아니면 노래하지 않을 거냐고.
“······.”
그랜트의 물음에 워커는 대답도 하지 않고.
다시 한번 악보를 들여다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