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42
42 에스프레소
* * *
낭만주의 시대의 대표 작곡가 프란츠 리스트.
피아노의 시인이라 불리는 쇼팽과 더불어 피아노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이다.
리스트는 당대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리던 파가니니에게 많은 영감을 받았는데, 그의 연주회를 본 리스트가 ⌜바이올린 협주곡 2번 3악장⌟의 테마를 피아노로 편곡한 작품이 ‘라 캄파넬라’였다.
라 캄파넬라(La Campanella).
이탈리아어로 종소리라는 뜻.
그 소리를 표현하기 위해 리스트는 오른손이 높은음을 반복적으로 치도록 만들어놨다.
오른손 손가락 중, 단 세 개의 손가락만 사용해서.
마치 종소리처럼 들리도록.
파가니니의 바이올린 협주곡에서도 3개의 현이 주로 사용된다. 그 특징을 살리기 위해 리스트는 오른손의 사용을 일부러 제한한 것이다.
그 때문에 연주자는 쉴 새 없이 오른손을 움직여야 한다. 바이올린이었다면 운지를 바꿔 연주를 쉽게 이어 나가면 되지만, 피아노는 건반과 건반 사이를 쉴 새 없이 이동해야 한다.
이 곡에서 피아니스트가 여유를 가질 틈 따위는 없었다.
한서진 역시 여유가 별로 없었다.
그는 본능적으로 라 캄파넬라를 연주하고 있을 뿐이었다.
한서진의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그런데도 그의 손은 더욱더 빠르게 움직였다.
듣는 사람이 이 연주를 진짜 종소리로 착각하게끔.
이미 시작돼버린 종소리가 도중에 끊기지 않도록.
한서진은 필사적으로 악보를 앞질러 갔다.
리스트는 자신의 기량을 한껏 뽐내기 위해 이 곡을 만들었다.
당시 파가니니가 악마의 바이올리니스트라 불렸던 것처럼, 리스트 역시 피아노의 왕이라 불렸었다.
피아노의 기교를 단번에 끌어올린 인물. 리스트는 파가니니의 음악을 단순히 모방한 것은 아니었다. 자신만의 언어로 화려한 피아노의 특성을 살려서 파가니니의 음악을 재창조했다.
파가니니와 마찬가지로 리스트 역시 비르투오소적인 면모가 있던 것이다.
비르투오소(virtuoso, 거장).
당대 최고의 연주자를 부르는 호칭.
강유한 교수는 한서진의 연주를 들으며, 그에게서 다시 한번 거장의 느낌을 받았다.
물론 그의 연주는 아직 익지 않았다. 테크닉적으로 봤을 때 한서진 보다 뛰어난 피아니스트는 대한민국에 한 트럭 넘게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에겐 특유의 기풍이 있었다.
어디서 쉽게 배울 수조차 없는 자신만의 스타일.
‘유럽······ 거기에······ 미국적인 느낌까지 섞여 있나?’
미국 출신 최고의 피아니스트를 꼽는다면, 단연 아루투르 루빈스타인과 반 클라이번 정도가 먼저 언급될 것이다.
한서진과 이제 두 번째 만남을 가진 강유한 교수. 정확한 것은 아무것도 알 수 없었지만, 강유한은 한서진에게 분명 그런 느낌을 받았다.
그래서 신기했다.
이런 기풍을 갖게 되는 게 결코 쉬운 일이 아닌데.
대체 이 아이가 어떻게 이런 연주를 할 수 있는지.
하선이를 사사하며 뉴튜브를 본 게 전부라는 아이가 대체 어떻게 벌써 자신만의 음악 세계를 구축하고 있는 걸까.
강유한 교수가 지금까지 가르쳤던 그 어떤 학생도 스스로 음색을 만들어내진 못했다.
그 아이들은 결국 누군가의 아류가 되고 말았다.
한국에서는 그게 어느 정도 먹힐지 모른다.
하지만 세계의 관객들은 언제나 오리지널을 원했다.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피아니스트가 되는 것.
그걸 결정짓는 것이 자신만의 스타일이라 부르는 기풍이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벌써부터 그런 기색을 내비치고 있으니···.’
살짝 돋아난 소름 때문에 강유한은 팔을 긁적거려야 했다.
한서진의 연주는 끝을 향해갔다.
리스트의 의도대로 억제돼 있던 오른손의 제약도 악보 후반부에는 전부 풀려있었다.
왼손과 오른손.
열 개의 손가락이 여든여덟 개의 건반 전체를 아우른다.
점점 고조되는 음악.
화려하게 들려오는 은빛의 종소리.
해 질 녘에 들려오는 유럽의 작은 마을이 떠오른다.
라 캄파넬라의 울림은 불현듯 멈춰버렸다.
이 공간에 남아 있는 건,
한서진의 작은 숨소리뿐이었다.
* * *
‘조금만 더 여유를 가질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내게 연습 시간이 일주일만 더 주어졌더라도 이렇게 아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내 작은 몸은 무척 불편했다.
작은 손으로는 일정 이상의 건반을 한 번에 누를 수 없었다.
난도가 높은 곡을 쳤기에 생긴 불편함.
이건 대중음악을 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나마 피아노의 페달을 적극 활용하면서, 미세한 엇박을 허용함으로써 나는 겨우겨우 리스트를 연주한 거였다.
한 명의 피아니스트로서 내가 원하는 완벽한 연주를 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간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아쉬웠다.
그때, 강유한 교수님이 입을 열었다.
“Bravo.”
“··· 감사합니다.”
그런데도 교수님의 반응은 괜찮았다.
“타고났다··· 라는 말이 네게는 어울리지 않을 수도 있겠구나. 하선이 말에 의하면 넌 열심히 노력한 아이였으니까. 그렇다면 이제서야 네 진면모가 드러나기 시작했다고 봐야겠지. 다른 영재들과는 또 다른 시작점. 너는 항상 그 점을 잊지 말고 강점으로 삼아야 한다. 훌륭하구나. 훌륭해.”
Bravo로 시작된 교수님의 칭찬에 나는 조금 머쓱하게 “··· 네.”라고 대답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진아. 너는 이 곡을···. 아니, 이 악보를 처음 본 게 정말로 이틀 전이 맞니?”
나는 잠깐 생각한 뒤에 대답했다.
“워낙 유명한 곡이다보니 어렸을 때도 들어본 적이 있어요. 파가니니 바이올린 협주곡 2번도 TV에서 본 적이 있고요. 그런데 악보를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허허. 그런데도 어떻게 악보는 보지도 않더구나. 겨우 이틀 만에 완벽히 암보를 해버렸다? 다른 곡을 우선적으로 연습하면서도 그 정도 연주를 해냈다는 건, 나도 믿기지가 않는구나.”
“······.”
나는 그제야 피아노 보면대에 라 캄파넬라 악보가 없는 것을 깨달았다.
어···.
나 방금 어떻게 쳤었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일단 시작하고 나자 연주는 자연스럽게 이어졌다. 밀러 아저씨 덕분에 이런저런 악보를 외웠던 게 습관이 된 걸까?
어쨌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악보를 다 외웠었나 보다.
‘좋긴··· 하네?’
강유한 교수님은 나를 바라보며 연신 미소를 지으셨다.
“막상 본인은 그런 자각조차 못 하고 있었고? 표정만 봐도 다 알겠구나.”
“······ 그렇게 길지는 않은 곡이었으니까요.”
“허허허. 서진아. 대학생 형, 누나들 앞에서는 그런 말은 하면 안 된다. 다들 열심히 하는 애들인데 너처럼 못하는 아이들도 있거든. 여기 한국대에도 말이다.”
“······.”
“너무나 멋진 연주였다. 물리적으로 해결 안 되는 걸 페달로 처리해보려는 노력도 좋았고. 저번에도 말했었지만, 네 연주에서는 거장의 느낌이 났단다. 그래서 리스트를 쳐 본 소감은 어땠니?”
“먼저······”
질문으로 시작된 대화는 곧바로 레슨으로 이어졌다.
사설은 길지 않았고 우리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강유한 교수님은 내게 아주 디테일한 부분까지 알려주셨다. 어떻게 손가락을 사용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프레이즈 별로 페달을 어디까지 밟아야 하는지. 어깨의 움직임. 손가락 번호. 자세. 시선. 호흡.
무인도에서 밀러 아저씨에게 음악을 배우던 때가 어렴풋이 떠올랐다.
‘그때도 이렇게 자세히 알려주셨었는데.’
여러 생각이 나는 바람에 감정이 살짝 흔들리기도 했지만, 나는 강유한 교수님의 말씀을 하나도 빠짐없이 머릿속에 넣었다. 악보에도 꼼꼼히 기록했다.
11시에 시작된 레슨은 어느새 3시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이렇게 신나게 음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 본 건 밀러 아저씨 다음으로 강유한 교수님이 처음이었으니까.
교수님은 내 질문에 하나도 빠짐없이 답을 해주셨고, 종종 내게 답을 구하는 질문도 하셨는데 그럴 때면 식은땀이 흐르기도 했다.
‘여기 프레이즈에서는 왜 강세를 약하게 줬니? 지시에 따라 앞선 마디보다는 훨씬 강했어야 할 텐데.’
‘저는 뒷부분에 더 대비를 주고 싶었어요. 포르티시모를 위해서 한 박자 쉬어간 거였죠.’
‘하지만 이러면 72번째 마디와 별 차이가 없게 되지. 만약 서진이 네 의도대로 가려는 거였으면 첫 도입부부터 달라져야 한단다. 관객들에게 예고를 해줘야 하거든. 한번 그렇게 해보겠니?’
‘······.’
정말 만만치 않은 레슨이긴 했다.
“이쯤이면 된 것 같구나. 그런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나? 이런. 배가 고프겠구나.”
“조금은 그러던 참이었어요.”
나는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빼지 않았다.
강유한 교수님은 껄껄 웃으시더니 나를 1층 카페로 데려가 주셨다. 나는 샌드위치와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고, 강유한 교수님은 에스프레소를 한 잔 시키셨다.
종이로 포장된 설탕을 2개 잘라 잔 안에 톡톡 털어 넣으신다.
‘에스프레소. 저건 뭔 맛이려나?’
“맛을 한 번 보겠니?”
“······ 그럼 살짝 만요?”
“허허허.”
참고로 나는 이런 상황에서 절대로 빼지 않는다.
예전에 아이스 아메리카노 정도는 마셔본 경험이 있다. 맛이 없어서 그냥 안 먹는 것뿐이지 커피(우유)는 보통 잘 먹는다.
심지어 여기엔 설탕도 뿌리지 않았나.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에스프레소 잔에 입을 살짝 가져다 댔다.
그리고.
“······ 으으음.”
인상을 쓰며 곧바로 잔을 돌려드렸다.
“대체 이걸 왜 드십니까. 딱 사약 맛인데요?”
교수님은 나를 보다가 박장대소를 하셨다.
“마치 사약을 먹어 본 적이 있는 것처럼 말하는구나.”
“만약 사약이 있다면 분명히 이 맛일 거예요.”
“그래도 뒤에 남는 단맛은 좋지 않니? 나는 이탈리아 유학 시절에 습관이 들어서 아직까지 에스프레소를 마시곤 하는데, 그때가 떠올라 항상 기분이 좋아지거든.”
교수님은 단숨에 에스프레소를 입에 털어 넣으셨다.
‘음···.’
나는 그냥 샌드위치를 냠하고 베어 물었다. 그리고 오렌지 주스를 한 모금. 크흐! 천국의 맛! 대체 왜 저런 쓴 음료를 먹는 걸까. 역시 사람의 입맛은 천차만별인가 보다.
교수님과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제자들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왔다.
일정이 바쁠 때는 한국대를 잠깐씩 떠나실 때도 있다는 교수님. 하지만 이렇게 한 학기씩 한국대 붙어 있으면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게 낙이라고 하셨다.
강유한 교수님은 오늘 내 바로 앞에 레슨했던 학생에 대한 이야기도 슬쩍 꺼내셨다.
“내가 유독 아끼는 애제자인데···. 최근에 고생을 너무 하고 있는 것 같구나. 오늘은 음이 유독 뭉개지기도 했고. 벌써 4학년 졸업반이 됐으니 고민이 많아질 때긴 하지만···. 하아. 옆에서 보고 있다 보면 내가 다 안타깝단다.”
“······.”
그의 연주에서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은 나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강유한 교수님의 말에서도 그런 뉘앙스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501호 연습실에서 잠깐 마주쳤던 남자.
그의 얼굴과 그때의 상황이 다시금 떠올랐다.
나는 이 말을 교수님께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금방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그 남자와 똑같이 고생하던 사람을 나는 잘 알고 있었으니까.
욕심을 잠깐 내려놓아야 하는 순간.
그 젊은 남자에겐 지금 그게 필요한 것 같았다.
“교수님. 조금 실례되는 말일 수도 있는데요.”
“응? 혹시 궁금한 거라도 있니?”
“그런 건 아니고요. 교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제자분 있잖아요. 501호 연습실에서 나오셨던 그분이요.”
“아~ 재영이. 걔가 왜?”
“그분요. 제 생각엔···.”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분명 왼손이 아프신 걸 거예요. 약지나 새끼손가락. 그래서 음이 뭉개지는 거고요.”
“······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니? 혹시 걔가 너한테 무슨 말이라도 했었니?”
“아뇨. 저는 그 분의 연주를 들은 게 전부였어요. 그런데도 그런 느낌이 난 것 같아서요.”
“옆에서 늘 지켜보는 나도 그 아이가 아프다는 기색은 못 느꼈었는데···. 그런 느낌이 났다고?”
“저도 추측일 뿐이에요.”
“······.”
나는 무인도에 있을 때를 떠올려봤다.
기타를 칠 때 특유의 버릇을 가지고 있던 분.
습관적으로 손을 만지작거리면서도 내게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던 사람.
하는 수 없이 클래식을 그만뒀던 음악가.
지금 그 남자의 상황은 밀러 아저씨와 무척 비슷해 보였다.
“아마 그분, 건초염이 있을지도 몰라요.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필사적으로 아픈 걸 숨기려고 하는 것 같더라고요. 교수님이 501호로 돌아오기 전에 그분의 연주를 잠깐 들었는데···.”
그의 연주를 들었을 때의 감정을 솔직히 말했다.
“분명 슬픔이 느껴졌었어요. 안타까움도 느껴졌었고요. 하고 싶은데. 할 수 있는데. 어쩌지를 못하는. 그런 느낌이 들어서 슬펐어요.”
“······.”
“교수님, 제가 알던 사람이 있어요. 욕심을 버리고 빨리 치료를 받았다면 괜찮았을지도 모르는 사람이요. 하지만 그 사람은 결국 피아노를 그만두게 됐죠. 저는 그런 사람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
“간단히 한번 확인해 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제가 틀렸다면 오히려 좋은 일일 테니까요.”
“그런데···. 서진아···.”
강유한 교수는 한참 말을 뱉지 못했다.
그러다가 간신히 말을 이어갔다.
“너는 대체 그걸 어떻게 느낀 거니? 잠깐 연주를 들은 게 전부라고 하지 않았니?”
나는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제가 알고 있던 사람이 있었다고요. 그리고 추측일 뿐인걸요. 교수님, 오늘 레슨 감사했습니다. 그리고 샌드위치도 맛있었어요.”
“어? 어···. 그래···.”
테이블을 정리한 뒤에 나는 교수님께 다시 한번 인사를 드렸다.
강유한 교수님은 나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셨다.
버스 안에서 바라본 강유한 교수님의 표정은 뭔가 복잡해 보였다.
학교는 주말인데도 곳곳에 사람들이 있었다.
대부분 학생처럼 보였다.
그들도 나름대로 고민이 있기에···.
주말까지 학교에 나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한국대에서의 첫 번째 레슨을 마쳤다.
집에 돌아가는 버스 안에서 문득 처음 마셔 봤던 에스프레소 맛이 떠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