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43
43 사연 없는 음악가는 없다.
* * *
늦은 저녁.
“교수님, 그럼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그래. 오늘도 수고가 많았어. 악기 만질 때보다 논문 쓰는 게 더 힘들지?”
“아닙니다. 교수님께서 직접 지도해주시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꽤 할 만합니다.”
“허허. 그렇다면 다행이고.”
강유한 교수는 조교가 가방에 전공서를 넣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봤다. 그러다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혹시 오늘 잠깐 시간 있니. 오랜만에 맥주나 한잔하고 싶은데.”
“어···. 저는 좋습니다. 교수님, 혹시 차 가지고 오셨습니까?”
“나중에 택시 타고 돌아가면 되잖니. 걱정 안 해도 된단다. 그냥 학교에서 가볍게 한잔하자는 의미였어.”
‘무슨 일이 있으신가?’
조교는 오늘 있었던 일을 떠올려 보면서, 강유한 교수님을 따라 학교를 걸었다.
해거름의 한국대는 잔잔했다.
산에 있는 학교다 보니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고, 약간 선선해진 날씨는 하루의 피로를 씻어주는 듯했다.
살짝 언덕진 길을 지난 그들은 한 편의점에 도착했다. 학교가 큰 편이라 이렇게 중간중간에 편의시설들이 있었다.
맥주 두 캔과 땅콩 안주 한 봉지.
계산을 마친 강유한 교수는 편의점 바깥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능숙하게 세팅을 마친 조교가 먼저 건배 제안을 해왔다. 강유한 교수는 그와 캔을 가볍게 부딪쳤다.
음대 근처에 있는 편의점이라 지나가는 학생 중 몇몇은 강유한 교수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했다.
강유한은 애써 웃으며 그들을 반겼지만, 속으로는 영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 한서진 레슨이 끝난 뒤.
강유한은 김재영 학생을 학교로 불러봤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 잠깐만 시간을 내달라는 핑계로.
서진이에게 들었던 말이 계속 신경 쓰였던 탓이었다.
김재영 학생은 피아노과 4학년 중에서도 꽤 촉망받는 인재였다. 국내 굵직한 콩쿠르에서 입상한 경력도 있고, 독일 대학과 이야기가 잘 돼 유학도 거의 확정이 난 상태였다.
강유한이 직접 연말 리사이틀 자리를 소개해 준 것도 모두 그를 믿었기에 진행한 일이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강유한 교수는 학교를 다시 찾아온 김재영의 왼손을 다짜고짜 잡아봤다.
그리고 그 결과···.
김재영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움켜쥐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강유한은 순간적으로 화를 냈다.
왜 그걸 숨겼냐고.
어쩌려고 그랬냐고.
아무 대답도 못 하는 20살 초반의 학생을 끌고 강유한은 한국대 부속 병원으로 달려갔다.
검사에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다.
알음알음 알고 지내던 의대 교수들이 있었기에 약간의 편의를 제공받은 덕분이었다.
검사 결과는 허무했다.
방아쇠수지증후군.
손가락 내부 굴곡건 조직에 염증이 생기는 질환.
서진이가 말했던 것처럼 건초염은 아니었지만, 피아니스트에게 있어 그에 버금가는 심각한 질환이었다.
의사의 촉진과 초음파 검사 한 번에 너무나 쉽게 진단이 내려졌다.
그 이야기를 들은 재영이는 곧바로 무너졌다.
아이는 의사 앞에서 눈물을 흘렸고, 내게 하소연했다.
‘교수님···. 제가 평생 해온 게 피아노입니다. 그런 제게 있어 지금은 가장 중요한 순간이 아닙니까. 리사이틀도 있고 유학도 있습니다. 이 시기에 다짜고짜 쉬어버리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교수님께서 제일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
‘그래서 무서웠습니다. 아픈 걸 참아도 보고, 마인드 컨트롤도 해보고, 진통제도 먹어 봤습니다. 하지만···.’
‘재영아.’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제 인생이 달려있는 해입니다. 정신력으로 이겨 낼 수 있습니다.’
‘······.’
‘교수님!’
강유한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어지는 의사의 설명으로는 수술밖에 답이 없다고 했다. 일반인이라면 약물 치료를 시도 해 볼 수도 있지만, 손이 예민한 피아니스트에게는 선택지가 없다고 했다.
수술 후 빠르면 1년, 늦으면 3년까지도 재활이 필요하다고 했다.
이 아이가 그동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를 떠올리다 보니, 강유한의 마음은 무너져내릴 것만 같았다.
“······ 교수님?”
그때 조교가 강유한을 불렀다.
회상에 잠겨있던 강유한은 머리를 세차게 흔들었다.
“나한테 뭐라고 했니?”
“몇 번이나 불렀는데 대답도 안 하셨습니다. 대체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
강유한은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리고 병원에 갔었던 일을 조교에게 털어놓았다.
어차피 숨길 수도 없는 이야기다.
중간에 탈락해버린 학생이 생긴다면, 다른 학생에게 기회가 주어져야 하는 법이니까.
리사이틀과 유학 건.
그건 이제 재영이가 아닌 다른 학생이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이게 순리였다.
강유한의 모든 설명을 들은 조교는 한숨부터 내뱉었다.
“아이고···. 그러면 재영이는 그거 얼마나 숨겼답니까?”
“한 달 정도 됐다더구나. 심해진 건 최근 일주일이었고.”
“그래서 레슨을 일요일로···.”
“미뤘던 거겠지. 그사이에 나을 줄 알고서.”
“······.”
최근 한 달 사이, 강유한은 김재영 학생이 그저 일종의 슬럼프를 겪는 줄 알았다.
음이 뭉개지기 시작했고 집중력이 떨어졌다.
피아니스트라면, 중요한 시기에 그런 안 좋은 변화를 한 번쯤 겪게 되는 거라고 생각했다. 과거의 강유한도 그런 적이 있었다.
그래서 더 격려했고, 가르쳤고, 집중하라고 소리쳤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는 통증을 참은 채로 연주를 하고 있었다.
‘이제는···. 나도 더 이상 나이를 속일 수가 없는 건가. 아니, 이것도 다 핑계겠지.’
강유한은 그저, 학생의 상태를 빨리 알아차리지 못한 자신이 무척이나 실망스러웠다.
“그런데 교수님, 한서진 군이 그 사실을 제일 먼저 알아챘다고 하셨죠. 단지 재영이 연주를 잠깐 들은 것만으로요. 교수님도 모르셨는데···.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러게 말이다.”
조교의 말대로 이 사건의 실마리를 준 사람은 한서진이었다.
“서진이가 한 말이 있었지. 자기가 아는 사람이 있었다고. 그래서 추측이 된 거라고. 그런데 그게 도통 뭔 소리인지는 모르겠구나.”
“주변에 이런 병을 가진 사람을 본 적이 있다는 의미가 아닐까요.”
“글쎄다. 이게 그렇게 단순한 건지도 잘 모르겠구나.”
“······?”
서진은 김재영 학생의 음악을 듣고 안타까움이 느껴졌다고 했다. 음악만 듣고 연주자의 감정을 정확히 읽어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강유한 교수가 들었던 것과 똑같은 감정을.
음악 감상과 평론에 평생 몸을 담은 사람이면 모를까, 올해 겨우 만 12살의 초등학생이 한 말이라고 하기엔 믿기지가 않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이건 대체···.’
강유한은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김재영 학생의 일로 심력이 소비된 상태라서 그런지, 한서진에 대한 생각을 깊게 이어갈 수는 없었다.
‘정말로···. 나이 때문인지도 모르겠구만.’
조교와 맥주 한 캔을 더 마신 강유한 교수는 학교로 택시를 불렀다. 그리고 조교와 함께 탑승했다.
그리고 “누구한테 꼰대라고 소문내면 안 된다. 그러면 너무 속상할 것 같아서 말이다. 나 아직 젊거든.”이라고 가벼운 농담도 했다.
조교는 하하 웃으면서도, 재영이에 대한 걱정을 깊게 하지 말라는 말을 강유한에게 건넸다. 이런 일을 종종 봐오시지 않았느냐면서.
돌아가는 길 중간에 조교를 내려줬다. 조교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꾸벅 숙이곤 터벅터벅 골목으로 들어갔다.
택시 안은 금방 조용해졌다.
강유한 교수는 오늘 있었던 일을 복기해봤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한 아침.
놀라움이 멈추지 않았던 점심.
씁쓸함만이 남은 저녁.
그리고 정말 신기한 것은···.
이 모든 중심에 한서진이 있었다.
“천재라···.”
강유한은 나지막이 혼잣말을 뱉었다.
그는 택시 밖의 야경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 * *
며칠 뒤.
새로 산 노트북으로 ⌜TEST⌟의 미디 작업을 완벽히 마무리했다. 틈틈이 뉴튜브에서 강의를 봤던 게 큰 도움이 됐다.
스마트폰 앱이 아닌 PC 미디 프로그램으로 만든 최종 완성본.
나는 차리나 대리님께 곧바로 톡을 보냈다.
[나 : 메일로 첨부파일 보냈습니다. 이러면 녹음실에서도 쓸 수 있는 미디 파일이 된 거죠? 한 번 확인 부탁드릴게요.] [차리나 대리님: 우앗! 잠시만요!]15분 정도가 지났을 무렵.
차리나 대리님으로부터 아예 전화가 왔다.
– 와! 대박! 진짜로 전부 다 끝내셨네요? 사실 저희가 도와드릴 수도 있었는데! 회사의 다른 프로듀서님께 살짝 보여드렸더니 이 정도면 충분히 실무에서 쓸 수 있다는 답변을 받았어요. 일단 오케이에요!
“다행이네요. 그러면 다른 사항은 없는 거죠?”
– 네. 딱히 별일은 없어요. 지금 과장님께서 외부 미팅 중이시긴 한데 어떻게 될지는 아직 모르는 일이라서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 별말씀을요.
어쨌든 내가 ⌜TEST⌟에서 할 일은 정말로 끝난 듯싶었다.
요 며칠 사이에 나는 ⌜TEST⌟의 가사도 완성해 ⌜월광⌟에 보냈다. 반신반의한 상태로 찔러나 보자는 의미로 보냈던 거였는데 박훈 과장님께서는 “이거네!!!”라며 꽤 반기는 기색이었다.
그렇게 나는 작곡과 편곡, 작사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강유한 교수님을 뵙기 전에는 피아노에 전념하느라, 그 후에는 ⌜월광⌟ 일을 하느라 조금 바쁘게 지내긴 했다.
그래도.
“여유가 좀 있네.”
생활이 루틴화되어가다 보니 힘들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내게 음악은 솔직히 놀이와 다를 바가 없었다.
실제로 무인도에서도 음악 덕분에, 밀러 아저씨가 있었기에 버틸 수 있었다.
지금은 내가 만든 음악이 점점 완성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내가 평생 연습해 온 피아노도 강유한 교수님께 조금은 인정받았다.
이 모든 것들은 내게 엄청난 만족감을 줬다. 그래서 오히려 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차리나 대리님이 오늘 새로 보내준 PDF 파일을 열어봤다.
그동안 꾸준히 피드백을 주고받은 덕분에, 점점 ⌜TEST⌟와 어울리는 보컬의 목록이 많아지고 있었다.
“이 중에서 내가 마음대로 고를 수 있으면 좋겠지만···.”
내가 그럴 레벨이 되진 않았다.
지금은 그저 최대한 안목을 넓게 가지면서 열심히 내 의견을 말해보는 수밖에 없다.
나는 가수들의 노래를 스마트폰으로 하나씩 찾아 듣기 시작했다.
R&B를 중점으로 부르는 가수.
아이돌 출신의 댄스 가수.
밴드로 먼저 데뷔했던 인디 가수.
정말로 다양한 개성을 가진 가수들.
⌜월광⌟이 보내준 가수들은 기본적으로 실력이 굉장히 뛰어났다. 하지만 그에 비해 인지도가 낮아 보이는 사람들도 많아 보였다.
‘연예계에서 뜨는 게 어렵긴 한가 보네.’
밀러 아저씨도 내게 항상 말했었다. 가수 지망생 만 명이 있으면 살아남는 건 하나가 될까 말까라고.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음악을 듣다 보니 어느새 12시가 됐다.
3시간 넘게 노래만 듣고 있었다.
나는 슬슬 잘 준비를 했고, 음악 앱을 종료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전율이 일어날 것 같은 목소리가 스마트폰에서 흘러나왔다.
‘누구지?’
살짝 높은 음역대.
맑은 목소리.
정확한 가사 전달력.
가수의 감정이 노래에 그대로 묻어나왔다.
지금 재생되고 있는 곡은 컨트리 팝이었다.
유쾌한 멜로디와 대비되는 묵직한 가사가 특징인 노래였는데, 그걸 능숙하게 표현해낸다.
침대에 걸터앉아 이 가수의 노래를 전부 찾아 듣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깨달았다.
⌜TEST⌟라는 곡을 쓰면서 상상했던 가수의 목소리.
그 목소리에 굉장히 가까운 보컬이었다.
가수의 프로파일을 확인하기 위해 PDF 파일을 다시 열어봤다. 그리고 나는 그녀의 사진을 한참 동안 보고 있어야 했다.
‘어디서······ 본 적이 있던가?’
기시감이 들었다.
하지만 도저히 생각이 나지는 않았다.
내가 예전부터 알고 있던 가수는 아니었다. 그녀의 노래는 하나같이 처음 들어보는 노래였다. 예능에서도, 티비에서도, 영화에서도, 이 가수를 본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디에서 봤을까?
이 기시감은 왜 느껴지는 걸까?
나는 여러 고민을 하면서,
그 가수의 프로파일을 빤히 바라봤다.
* * *
강원도 강릉시의 어느 외딴집.
바다가 얼핏 보이는 주택의 마당으로 자동차가 들어왔다.
주차를 마친 남자는 서둘러 운전석에서 내렸다. 자동차 뒷문을 열어 뒷좌석에 있는 그녀에게 목발을 건넸다.
남자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반대로 여자의 표정은 그렇게 어둡지만은 않았다.
“고마워요. 여기까지 데려다줘서. 이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아녜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이었는데요. 조금 도와드릴까요?”
“괜찮아요. 앞으로 익숙해져야죠.”
여자는 남자가 건넨 목발을 받아 단번에 일어섰다.
조금 휘청이나 싶더니 금방 중심을 잡는다.
“봐요. 아무렇지도 않잖아요.”
“······.”
“그동안 고마웠어요. 앞으로 매니저 일은 계속한다고 했었죠?”
“······ 네.”
“잘되길 기원할게요. 팀장까지 달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버텨서 잘 된 분들이 많으니까요.”
“그러면···. 누나도 조금 더 버텨보시지 그랬어요. 분명히 앞으로 더 잘 될 수도 있는데···.”
여자는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저는 할 만큼 했잖아요. 이만 가봐요. 저희 부모님께서 매니저님 보면 괜히 안 좋은 소리할 수도 있어요.”
“······.”
“그동안 즐거웠어요.”
여자는 목발을 짚고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남자는 그녀의 뒷모습을 한참 동안 지켜봤다.
현관 앞에 선 여자가 차임벨을 누른다. 남자는 그제야 자동차에 올라탔다. 차에서 들리는 우웅거리는 배기음. 자동차는 금세 자취를 감췄다.
그때 현관이 열렸다.
여자는 활짝 웃으며 그들을 반겼고,
“어머니, 아버지. 저 왔어요.”
여자의 부모는 눈물을 흘리며 그녀를 맞이했다.
“그래. 잘 왔다. 잘 왔어.”
“우리 딸. 수고했다. 몸 아픈 데는?”
“발목만 조금 아픈 게 전부예요. 이 정도면 양호하죠.”
“이 녀석아! 그게 양호라니! 네가 십 년 넘게 해온 가수 생활을 접게 됐는데···. 그게 양호야?”
“여보. 설하도 오죽 답답하겠어요? 그만 하세요.”
“아이고···.”
“저 진짜로 괜찮다니까요? 이것 보세요.”
여자는 목발을 잠시 내려놓고, 부모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진심을 다해 말했다.
“저, 싱가포르에서 비행기 사고 났을 당시만 해도 두 분 영원히 못 보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렇게 살아 돌아왔잖아요. 지금은 이것만으로도 만족해요. 정말로요.”
AC 2505편에 탔었던 그녀.
권설하는 조금은 힘들게···.
부모님 앞에서 활짝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