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ealing Life of a Musical Genius RAW novel - Chapter 52
52 한 걸음
* * *
⌜TEST⌟의 녹음이 끝났다.
녹음실엔 뭔가 폭풍이 지나간 것만 같았다.
녹음 마무리 단계가 되었을 때, 갑자기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랐다는 한서진.
한서진은 조금 과해 보였던 코러스 파트의 트랙 수를 과감하게 줄여버리겠다고 했다.
신인 작곡가들이 흔히 하는 실수가 몇 가지 있다.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것은 음악을 너무 빈틈없이 만든다는 것.
대중음악에서 노래란 결국은 가수가 부르게 돼 있다. 그런데 신인 작곡가들이 작곡할 때는 나중에 보컬이 들어올 거라는 걸 미처 생각 못 하고 과욕을 부리는 경우가 있다.
⌜TEST⌟에도 그런 면이 살짝 있었다.
오히려 ⌜TEST⌟는 MR 자체로 거의 완성이 되어있는 곡이었다. 보컬 없이 연주곡으로 써도 될 정도로 퀄리티가 훌륭했다.
다만, 이런 곡은 보컬이 부르기에 굉장히 어렵다고도 할 수 있었다.
권설하의 기량을 100으로 놓고 본다면 ⌜TEST⌟는 110이 있어야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는 노래였다.
그러다 보니 녹음이 끝난 뒤에도 약간의 아쉬움이 남아있었다.
여기서 보통의 경우라면 믹싱으로, 후처리로 해결을 한다. 강제로 ⌜TEST⌟의 레벨 밸런스를 조절하거나 톤 밸런스를 다듬어 보컬을 돋보이게 만든다.
업계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방식.
그런데 한서진은 곡 자체를 아예 권설하에 맞춰 바꿔버렸다. ⌜TEST⌟의 악기를 과감하게 몇 개나 삭제해버렸다.
여기서 트랙을 몇 개 줄이는 게 뭐 대단한 일이냐고 볼 수도 있다.
하지만 편곡이라는 것은 언제나 곡 전체의 밸런스를 고려하면서 해야 한다.
완성된 곡을 괜히 손댔다간 엉망이 돼버리기 일쑤다.
예를 들어 4인 밴드 곡에서 갑자기 베이스나 리듬기타를 빼버린다면? 심각하게 빈약한 곡이 된다.
그 최소한의 밸런스를 지키면서, 트랙 수를 줄이고, 한 시간 만에 녹음까지 끝낸 게 한서진 작곡가였다.
이와 같은 일을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작곡가가 대체 몇이나 있을까.
시간이 충분히 주어진다면 모르겠지만, 이렇게 현장에서 즉석으로 이런 일을 할 수 있는 작곡가는 극히 드물 것이다.
‘편곡에 대한 이해가 뛰어나다고 봐야 하나?’
오정희는 소파에 앉아 기타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한서진을 슬쩍 쳐다봤다.
‘조금 전에 편곡할 때도 기타로 테스트를 했었지.’
어린아이.
저 나이에 이 많은 걸 대체 어디서 배웠을까.
작곡 하나만 해도 어느 정도 레벨이 되기까지 몇 년이 걸리기도 한다. 편곡도 디렉팅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한서진은 이미 전부 프로 레벨이라고 볼 수 있었다.
심지어 한서진은 자신이 실수한 부분조차 금방 인정했다. 그리고 곧바로 수정까지 해버린다.
음악가들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고집 같은 것도 없었다. 한서진은 이 녹음실에 있는 모든 걸 자기 지식으로 만들어갔다. 습득력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더군다나 디렉팅은 오늘이 처음이라고 했었지···.’
믿기지 않는 일들이 한두 개가 아니다.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재라도 되는 건가?’
그때, 권설하가 오정희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녹음실에 있는 사람들과 한 명 한 명씩 인사를 마치고 돌아온 모양.
오정희는 설하를 보고 피식 웃었다.
“오늘 잘하더라. ⌜sweet pea⌟ 때보다 훨씬 좋았어.”
“디렉터님 덕분이죠.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사실, 저기 있는 한 작곡가가 다 했지.”
권설하는 소파 방향을 슬쩍 보며 미소를 지었다.
“서진이는··· 저도 볼 때마다 놀라고 있어요. 음악에 대한 건, 저보다 훨씬 많이 아는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더라. 어른들이랑 조율하는 방법도 잘 알고 있고. 말하는 것도 아이스럽지 않고. 금방 성장하겠어. 물론 지금도 잘하지만 말이야.”
“분명 그러겠죠.”
“오늘 곡, 나중에 믹싱할 것도 별로 없을 거야. 이번 녹음본은 사실상 완성본에 가까우니까. 마스터링 정도만 신경 써서 하면 될 것 같네.”
권설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실제로 조금 전 박훈 과장님과의 대화에서도 이런 이야기가 나왔었다. 원본이 좋으니 믹싱에 기댈 필요가 없는 곡이 만들어졌다고.
아무리 믹싱 엔지니어가 뛰어나다고 해도 소스가 별로라면 그 노래는 살릴 수 없다.
반대로 소스가 좋다면 믹싱이 어떻든 간에 좋은 결과물이 나오게 되어 있었다.
“설하야.”
“네?”
오정희의 부름에 권설하가 대답한다.
“아마··· 너는 저 아이를 만나려고 그동안 그렇게 고생을 했나 보다.”
“그런 것 같아요. 그리고 모든 걸 떠나서 서진이랑 있으면 무척 편해요. 재미도 있고. 즐겁고. 인연이라는 게 있긴 한가 봐요.”
“있지. 그러니까 더 소중히 여겨야 하는 거고.”
권설하는 한서진이 있는 곳을 다시 바라봤다.
박훈 과장님 앞에서 열심히 기타를 치며 어떤 이야기를 하고 있다. 활짝 웃으며 신나게 떠든다.
그런데 한서진이 들고 있는 어쿠스틱 기타는 연식이 조금 있어 보였다.
‘오랜 시간 연습해서 저렇게 낡았으려나?’
권설하는 아직 한서진에 대해 아는 게 많이 없었다.
앞으로 많이 알아가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AC2505 사고 전까지만 해도 열심히 연습하던 기타.
그 연습을 다시 시작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마침 음악에 대한 욕심도 많아진 상태였으니 타이밍도 좋았다.
거기에.
서진이랑 대화하기에 그만한 주제도 없을 것 같았다.
‘모르는 건 우리 작곡가님한테 물어보면 되겠지.’
권설하는 서진이가 있는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행기 추락 사고로 잃어버린,
어떤 선배에게 선물로 받았던 어쿠스틱 기타를 떠올리면서···.
* * *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구나. 서진이 너도 무리하면 안 되는 시기니 말이다.”
강유한 교수님의 지시에 나는 피아노 연주를 멈췄다.
저번보다 훨씬 빨리 끝난 레슨.
오늘 강유한 교수님은 나를 많이 배려해주셨다.
실제로 레슨 내용의 90% 정도가 내 예중 실기 곡이었으니, 정말 큰 도움을 받은 셈이었다.
나는 그 부분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고, 강유한 교수님은 허허 웃기만 하셨다. 별것도 아니시라면서.
그렇게 연습실에서 나와 돌아가려고 할 때.
“혹시 잠깐 시간 괜찮니?”
“어······ 네. 괜찮아요. 오늘은 별다른 일정도 없거든요.”
“그거 다행이구나.”
강유한 교수님은 내게 산책을 제안하셨다.
한국대의 길은 무척 아름다웠다.
벌써부터 알록달록 색깔이 변하고 있는 나무들이 몇몇 보였다. 중간중간 보이는 연못엔 야트막한 분수들이 포물선을 그리고 있었다.
강유한 교수님은 어떤 건물 사이에 있는 계단으로 향하셨다. 30개? 40개? 그 정도 되는 계단을 오르자 널찍한 공터에 벤치가 주르륵 있는 공간이 나타났다.
언덕 아래로는 한국대의 전경이 훤히 보였다. 이곳에 모여 있는 학생들은 저마다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교수님은 능숙하게 자판기에서 커피를 한잔 뽑으셨다. 그리고 내게도 권하신다.
‘으음···.’
나는 고민하다가 우유를 골랐다. 자판기 우유. 저번에 우연히 먹어 봤는데 이게 또 별미다. 달달해서 맛있다.
나와 강유한 교수님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각자 종이컵을 홀짝거렸다.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시간은 꽤 오랜만이었다.
‘무인도에서는 틈만 나면 강제로 멍을 때려야 할 때도 많았는데.’
최근엔 믹싱과 마스터링에 대해 박 과장님과 피드백을 주고받느라, 그리고 피아노 연습을 하느라 바빴다.
강유한 교수님은 허공을 보며 담담히 이야기를 시작했다.
“음악이라는 건··· 연습만으로 되는 것도 아니거든. 그래서 이렇게 자연을 보고 즐길 줄도 알아야 한단다. 우리가 아는 작곡가들도 모두 이런 곳에서 영감을 얻게 된 거니까. 바람, 햇빛, 별, 계절, 풀 내음, 산, 바다··· 끝이 없지. 서진이 너는 그런 걸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구나.”
나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지금 가지고 있는 음악적 영감 역시 대부분 무인도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그곳에서 있었던 일들.
밀러 아저씨와 보낸 시간.
그런 게 원동력이 됐다.
교수님 말씀처럼 가끔씩 이런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번엔 강유한 교수님 목소리 톤이 무거워졌다.
“혹시 저번에 내게 말해줬던 것 기억하니? 김재영 학생의 왼손에 대한 것 말이다.”
“······ 아! 그분은 어떠시대요? 아프신 건 맞았어요?”
나는 곧바로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501호 연습실 앞에서 들었던 연주.
그걸로 내가 추측했었던 이야기.
이어지는 강유한 교수님의 대답은 안타깝기도 했지만, 어느 정도 희망적이기도 했다.
저번 주에 성공적으로 수술을 받았고, 어느 정도 시간만 흐르면 충분히 피아니스트로서 복귀할 수 있을 거라고 하셨다.
그나마 다행인 내용이었다.
“내 학생이었는데 그걸 여태껏 몰라봤다니···. 나도 나이가 들긴 들었구나. 네게는 큰 빚을 졌다.”
나는 놀라서 곧바로 반론했다.
“빚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세요. 제가 이렇게 교수님께 레슨 받고 있는 것만 해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내 잊지는 않으마. 그리고 네게 물어볼 말이 하나 있는데···.”
“네?”
강유한 교수님은 나를 빤히 바라보시다가 인자하게 웃으셨다. 그리고 다시 종이컵에 입을 가져다 대셨다.
“아니다. 그건 다음에 이야기 하자구나. 지금은 네 입시가 먼저니까. 설화. 꼭 붙길 바라마. 너라면 문제없을 거다.”
* * *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이른 아침.
나는 조금 일찍 눈을 떴다.
그런데 나보다도 먼저 일어난 사람들이 있었다.
거실에 나가보니 어머니와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분주하셨고, 심지어 수연이도 눈을 비빈 채로 나를 맞이해줬다.
아무 말도 없이 일단 내게 손을 내미는 수연이. 내가 손을 맞대자 “오빠 오늘 화이팅. 시험 잘 보고와.”라며 하품을 한다.
부모님도 내게 격려의 말씀을 해주셨다.
너무 부담가질 필요가 없다고.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데···.’
오히려 나보다 가족들이 더 걱정이었다.
아침을 먹고,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오늘 무대는 100% 블라인드 테스트라 콩쿠르 무대에 갈 때처럼 정장을 입을 필요는 없었다.
가벼운 평상복.
이거면 충분했다.
시간이 됐을 때 나는 아버지를 따라 주차장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오늘 집에서 수연이를 케어하실 예정이었다.
차를 타고 도로를 달렸다.
중간에 창문을 살짝 열어 바람을 쐤다.
매연 냄새는 퀘퀘했지만 기분은 조금 좋아졌다.
설화 예중으로 들어가는 골목.
거기엔 벌써부터 차가 가득했다.
그때, 지이잉하고 톡이 하나 도착했다.
어젯밤부터 난리법석을 피우고 있는 한 초등학생이었다.
[하은 : 너 어디야? 나는 운동장 도착!] [나 : 설화 들어가는 골목이 막혀서 대기 중이야. 좀 걸릴 것 같은데?] [하은 : 야. 그러다가 괜히 늦겠다. 그냥 걸어와. 거기선 5분도 안 걸려.] [나 : ??? 우리 시험까지 한 시간 반이나 남았는데 뭐가 늦어?] [하은 : 뭐··· 그런데··· 그냥 수다나 떨고 있자고. 내가 심심해서 그런 건 아니고. 긴장이나 풀면 어떨까 해서.] [나 : ······.] [하은 : 크흠. 하여튼 기다리겠음! 심심하지는 않은데~ 그냥 그러네~]톡을 보고 피식 웃다가 아버지에게 먼저 가봐도 되냐고 여쭤봤다. 아버지는 흔쾌히 오케이를 해주셨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몇몇 학생들과 우연히 시선이 마주쳤다. 오늘 시험 보러 온 애라면 나랑 동갑일 것이다. 무리 지어있는 그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떠들기 시작했다.
“야. 쟤, 걔 아냐? 맨날 콩쿠르 와서 빌빌거리던 애.”
“아~ 맞는 거 같은데? 그런데 이름이 뭐더라?”
“그보다 쟤 비행기에서 떨어졌었다며. 의외로 멀쩡하다?”
“비행기?”
“저번에 뉴스에도 났었던 사고 있잖아. 그거.”
“와씨. 기억났다. 그래도 손은 멀쩡한가 보네.”
“그런데 쟤는 자기가 설화 붙을 거라고 생각한 건가?”
“모르지. 시험 보는 거야 자기 마음이니까.”
“대박이네. 나는 쟤 정도면 지방으로 갈 줄 알았는데.”
예전의 나라면 흔들릴 수도 있는 말들.
하지만 지금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동안 많은 일들을 겪어온 덕분일 지도 모르겠다.
화가 나고 안 나고의 문제가 아니라 신경조차 쓰이지 않았다.
나는 그들을 무시하고 골목길을 걸었다.
학생들은 점점 더 많아졌다.
나를 알아보는 사람의 숫자도 더 많아지는 것 같았다. 가끔씩 들려오는 웅성거림은 분명 나를 향하고 있었다.
길을 걷다가 걸음을 멈췄다. 그들을 보기 위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고개를 들어 건물에 새겨진 글자를 쳐다봤다.
설화 예술 중학교.
이번엔 정면을 봤더니, 저 안에서 내게 손을 흔들고 있는 작은 꼬맹이도 하나 보였다.
자리에 우두커니 선 채로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나는,
가볍게 한 걸음을 내디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