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hidden second life of the soldier RAW novel - Chapter (61)
61화
“전부 다.”
내 말에 집무실은 정적에 휩싸였다.
그런 정적을 깬 건 헤겔이었다.
“크하하하! 웃음을 주려 한 거라면 성공이다. 우리를 전부 상대하겠다고?”
“왜? 자신이 없으신가?”
“······네놈의 무성한 소문이 한낱 음유시인의 상상력에 불과한 이야기라는 것을, 증명해주마.”
콧방귀를 뀐 헤겔이 기사들을 돌아보았다.
“누가 저 녀석과 싸워보겠느냐?”
“제가 놈의 콧대를 꺾겠습니다.”
“아닙니다. 제가······!”
기세등등한 기사들은 당장이라도 나를 짓밟겠다는 듯 이를 드러냈다.
“순번만 정해. 전부 상대해줄 테니까.”
“오만한 놈. 후회하게 해주지. 따라와라.”
* * *
피의 모래는 성안의 연무장에서 준비되었다.
이곳의 비무장 바닥은 단단한 흙이나 벽돌로 이루어져 있지 않고, 발이 푹푹 꺼지는 모래사장에 가까웠다.
‘사막의 환경을 일부러 조성한 건가?’
내가 몸을 풀며 모래의 깊이를 살폈다.
“피의 모래라니. 제이드, 대체 무슨 생각인 거야?”
“맞습니다. 제이드님. 위험합니다.”
그러는 사이 내 뒤에선 위즐과 이예르가 안절부절못했다.
물론 저러는 행동은 이해가 됐다.
피의 모래는 정말 극단적인 결투의 한 종류 아니던가.
왕자의 사자로 온 내가 비참한 패배를 맞이한다면, 그것도 큰 문제니까.
“제이드. 저래 보여도 델토로 가의 기사들이라고!”
“괜찮아. 문제없어.”
그러자 위즐은, 이번에는 구경 온 내 대원들을 찾아가서 호소했다.
“이봐 너희도 말려야 하는 거 아닌가? 제이드의 공적은 들었지만, 전투와 결투는 다르다고!”
하지만 대원들의 반응은 전부 태평했다.
“음? 걱정 마. 제이드가 질 리 없지.”
“대장은 지금까지 무패거든.”
심지어 자기들끼리 얼마 만에 이길 수 있는지 돈을 걸고 내기하고 있었다.
‘하긴 그동안 잡은 게 얼만데.’
놀 웨이브, 웨어울프 부대, 흑마법사, 레드 혼 타우로스, 회색 트롤.
수많은 역경을 뚫고 이겨냈으니 대원들에게 이 전투는 작은 시련에 가깝게 느껴질 것이다.
물론 대부분의 싸움은 철저하게 대비하거나, 상성으로 싸워 이겼던 것들이다.
근데 그렇다고 내가, 대충 싸웠던가?
‘그럴 리가.’
나는 항상 사선을 넘어왔고, 피를 토하며 검을 휘둘렀다.
한계에 닿을 때까지 말이다.
물론 상대는 일대일 전투에서 최고로 여겨지는 기사들.
내게도 도전은 도전이다.
‘1회차에서 넘지 못한 벽을, 이 순간 넘을 것이다.’
나는 긴장보다 설렘을 느꼈다.
그간 내 고생을 입증할 기회를 맞이한 기분이었으니까.
몸을 풀며 기다리자 기사들이 무장을 마치고 내 앞으로 나섰다.
“각오는 되었겠지?”
조지라고 불렸던 막내 기사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나 그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 보이는 녀석은 중무장한 갑옷 대신 얇은 가죽 갑옷을 착용했다.
모래사장에서 쉽게 움직이기 위함인 듯했다.
“다른 분들께서 몸을 풀 필요도 없겠지. 고작 선전용으로 위명을 떨친 네 녀석을 무릎 꿇려주마!”
대충 한 귀로 흘려듣고 있자, 헤겔이 입을 열었다.
“피의 모래를 시작하겠다. 규칙은 간단하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상대를 쓰러트릴 것. 이 자리의 모두가 증인이 되어줄 것이다!”
크게 소리친 헤겔이 나를 보며 작게 말했다.
“1왕자님께서 보냈다고 하니 목숨을 취하지는 않겠다. 다만 멀쩡히 끝날 거라곤 생각 마라!”
대꾸하는 대신 씰룩 웃고 있는 조지를 바라보았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놈이 자세를 숙였다.
팟!
녀석이 먼저 달려드는 것으로 전투의 시작을 알렸다.
“왕자의 이름으로 왔다고 해서 손속을 봐주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병사!”
녀석은 달려들면서 검을 뽑아 수평으로 세웠다.
검으로 관통하려는 듯 쇄도하는 녀석을 향해.
나는 발로 모래를 차올렸다.
“뭐, 뭐야! 이 비겁한!”
눈에 모래가 들어간 녀석이 속도를 잃으며 균형이 무너졌다.
이건 명예로운 기사의 결투가 아니다.
할퀴고 깨물어도 상관없는, 승자만이 중요한 전사의 결투이었으니까.
동시에 나는 다리에 마력을 불어넣어 도약한 후, 놈의 턱을 향해 주먹을 휘갈겼다.
빡!
마력을 듬뿍 넣은 주먹이었다.
“컥!”
녀석의 턱이 마구 흔들렸고, 벌어진 입 사이로 새하얀 이빨 하나가 튀었다.
힘을 잃은 놈의 복부를 향해 무릎을 차올렸다.
풀썩.
새우마냥 허리가 구겨진 조지의 눈이 풀렸고, 입에 거품을 물며 주저앉았다.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특수한 결투 ‘피의 모래’에서 승리했습니다.] [단 10초 만에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사건은 소문이 되어서 당신의 명성을 드높일 것입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한 번의 승리로 얻은 것이 많았다.
‘하급 기사 초입의 실력인가.’
나는 고개를 돌려 주변의 반응을 살폈다.
“······방금 그건?”
“마, 마력을 실어서 한순간에 제압한 것 같습니다. 이예르님.”
위즐과 이예르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겨우 이해한 듯했다.
대원들은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리고 마지막.
헤겔을 중심으로 다섯 기사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나는 녀석들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다음.”
피의 모래는 이제 시작이었다.
* * *
델토로 남작가의 기사들은 하급 초입에서 중급 초입의 실력을 지닌 오러 유저들이었다.
변방의 남작가의 가신들 치고는 상당한 실력자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역시 전사의 혼을 가진 동부인들이라고 해야 할까?
두 번째로 나선 기사 코셰프.
세 번째 기사 이가람.
네 번째 기사 데인.
기사들은 가면 갈수록 더욱 상승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고, 최대한 힘을 비축하려던 나 역시 세 번째부터는 검을 뽑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컥! 내, 내가 지다니······.”
델토로 남작가의 기사 이아곤이 무릎 꿇었다.
박살 난 그의 검이 모랫바닥을 뒹굴었다.
“후우.”
마력을 실은 마기 포식자가 이아곤의 검을 집요하게 노렸고, 놈의 검을 부수고 나서야 승리를 인정받을 수 있었다.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특수한 결투 ‘피의 모래’에서 승리했습니다.] [5번 연속으로 결투에서 승리했습니다.] [이 사건은 소문이 되어서 당신의 명성을 드높일 것입니다.]“후우─.”
메시지가 시야에 떠올랐지만 나는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는 데에 집중해야 했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기사 이아곤은 과감한 전사 그 자체였다.
중간중간 모래를 차올리거나 다리를 가격하더라도 우직하게 밀고 들어오는 중검.
똑같은 내려 베기라 하더라도 그 위력과 속도가 남달랐다.
일부러 검을 한 군데만 노리지 않았다면 꽤 위험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올리며 고개를 들었다.
푸른 수염의 기사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겁 없는 하룻강아지인 줄 알았더니. 제법이군.”
그의 말을 뾰족했지만, 그 어투에는 노기와 적의가 줄어든 것을 알 수 있었다.
줄어든 자리에는 호승심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긴장감까지도.
“로이암의 젊은 시절을 보는 것 같군. 거침없으면서도 노련하군. 재미있겠어.”
로이암이라면 동부 최고의 기사 중 하나로 불리는 이.
저자 나름의 극찬인 듯했다.
씨익 웃은 헤겔이 천천히 내 앞으로 걸어왔다.
“인정한다. 만용은 아니라는 것을.”
처음에는 나를 무시했던 그였다. 그런데 지금은 인정하고······ 즐기는 듯했다.
이 역시도 동부 전사들 특유의 단순 명료함이었다.
‘이길 수 있을까?’
헤겔을 마주하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이었다.
쩍 벌어진 어깨와 암석처럼 느껴질 정도의 단련된 신체.
그란디스 백작이 10년 정도 젊었다면 이런 분위기를 풍기지 않았을까?
다른 점이 있다면 그란디스 백작가의 솔레른과 미하일이 가만히 먹잇감을 관찰하는 사자라면, 헤겔은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범의 기세라는 것.
스릉.
어느새 헤겔은 먼발치 앞에서 검을 뽑고 있었다.
나 또한 검집에서 마기 포식자를 꺼냈다.
앞의 다섯 기사의 경우에 검술을 읽히지 않으려 최대한 검을 뽑는 걸 지양하려 했다.
저들은 여럿이었지만 나는 혼자였으니까.
괜히 수를 읽혀서 좋을 건 없었으니까.
하지만 헤겔, 저 기사에게는 그런 알량한 마음가짐으로는 승리하지 못하리라는 걸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다.
‘얕볼 상대가 아니다.’
그런 내 생각을 읽었는지 헤겔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어디 한 번 영웅의 실력을 볼까!”
팟!
헤겔이 먼저 달려드는 것으로 결투가 시작되었다.
검을 수직으로 든 헤겔이 쇄도했다.
나는 발로 모래를 찼고, 헤겔의 얼굴로 모래가 튀었다.
하지만 노련한 기사인 헤겔은 가볍게 고개를 돌려 피했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내게 거두지 않았다.
“너무 빤히 보이는구나!”
“칫.”
이미 처음의 싸움에서 써먹었으니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지만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다.
얼굴에 달라붙은 모래를 털어낸 헤겔이 다시 달려들었다.
“조금 전의 기세는 어디로 갔느냐!”
쏜살같이 달려든 헤겔이 내 머리를 향해 검을 내려찍었다.
나는 전신의 근육에 긴장을 끌어올리며, 쇄도하는 그의 검을 쳐냈다.
카가가각!
강한 충격이 내 팔을 타고 들어왔고, 그의 검을 겨우 빗겨내었다.
그러나 헤겔은 이제 시작이라는 듯 발걸음을 옮기며 현란하게 검을 휘둘렀다.
어떤 것은 가짜였고 어떤 것은 현혹이었다. 그러다가 진짜가 날아들었다.
캉! 캉! 쩡!
‘빠르다!’
마누스 왕국에서 보기 드문 쾌검.
헤겔은 신체에 마력을 순환하며 힘과 속도를 강화했고, 빠른 검속을 유지했다.
단순하고 정직한 마누스 군 특유의 기사 검법 사이사이에 암수가 녹아들었다.
정직한 내려 베기가 일시에 사선으로 치솟았고, 손목을 노리던 검이 어느새 허리를 노려왔다.
마치 살아있는 뱀의 공격과도 같았다.
그의 공격 하나하나가 매섭고 치명적이었기에, 나는 급급하게 놈의 공격을 막아내어야 했다.
챙! 챙!
전장이었다면, 홀로 일시에 십여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인한 사내다.
동부가 아니라 최전선에 있었다면 이름을 크게 떨쳤을지도 모르는, 훌륭한 실력이었다.
그런데.
‘검로가 보인다?’
발광하는 독사처럼 온갖 경로로 공격해오던 헤겔의 검로가.
점차 눈에 익어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뭐냐, 그 표정은, 긴장한 건가?”
내 당황한 표정이 오해를 산 모양.
헤겔이 무어라 중얼거렸지만 나는 신체의 감각에 집중하기 바빴다.
‘뭐지? 쉽게 따라잡을 수 있을 것 같은데?’
머릿속에 어떤 그림이 그려졌다. 설계도였다. 헤겔이 구사하는 검의 경로.
“합!”
헤겔이 다시 달려들었다.
역시나 그의 검의 흐름이 보였고, 나는 그 흐름에 올라탔다.
몇 합을 빗겨내는 순간, 보였다.
내 가슴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을 쳐냈다.
캉!
강한 파열음과 함께 헤겔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다.
“어찌······!”
회심의 공격이었는지 헤겔의 눈이 커졌다.
‘바로 지금!’
나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의 흉갑 정중앙을 향해 마기 포식자를 내질렀다.
쿡.
세지 않은 찌르기였다.
‘이게 되네.’
헤겔의 눈이 커졌다.
내가 힘을 제대로 주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르는 공격이었다.
“나를 모욕하는 건가!”
헤겔은 내가 여유를 부린다고 생각했는지 얼굴을 구기며 다시 한번 검을 휘둘렀다.
내 눈에 그의 어깨가 들썩이는 것이 보였고, 헤겔의 검 끝이 향하는 방향이 보였다.
나는 그 경로를 다시 한번 빗겨내었고.
카가각!
헤겔의 흉갑을 긁어냈다.
그의 갑옷 한가운데에 긴 수평선이 그려졌다.
그제야 나는 깨달을 수 있었다.
지금껏 내가 이어온 수련들.
끝없이 스탯을 성장시켰고, 수련하며 몸에 새겼던 그 노력이.
지금 보답으로 돌아오고 있다는 걸 말이다.
기억 속에 머물러 있던 1회차 하급 기사의 실력을.
‘이미 넘어도 한참 넘었다.’
“제법이구나!!!”
자신이 당했다는 분함과 기대 이상이라는 표정을 지은 헤겔이 검을 회수했다.
동시에 그의 검에서 푸른 빛이 피어올랐다.
아무리 못해도 중급 기사의 실력은 될 듯했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일그러졌다.
오러를 꺼내다니.
“하지만 기사의 진정한 무기는 바로 이것, 오러다!”
“······.”
“네 녀석이 이것도 흉내 낼 수 있겠는가?”
그래, 피의 모래에서 제한은 없다.
승자와 패자만이 남을 뿐이니까.
‘그렇기에 단순한 승리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긴다면 압도적으로.
쿵! 쿵!
박동하는 심장과 함께 마력이 터져 나왔다.
마기 포식자 위로 마력이 켜켜이 층이 쌓였고, 응축되며 푸른 빛이 피어올랐다.
화륵!
헤겔의 눈이 커졌다.
사방에서 “오러다!” 하는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일개 병사가 오러를 피워냈다는 것이 놀라운 듯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해.’
[특성 – 흑암성의 오러가 발동합니다.]푸른 빛이 점차 색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보라빛이.
아니 불꽃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응축된 기운이 기세를 드높이기 시작했다.
콰아아아──!
비무장의 모래가 천천히 흩날리기 시작했다.
내가 피워올린 오러의 여파였다.
그 여파에, 헤겔의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