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38
138화
트롤과 석면의 신이자 과거에는 얽고 설키는 신이라 불렸고 이제는 속선이라 불리는 신의 신전은 황량했다.
신전에 들어서는 거대한 기둥들 중에는 곧추 선 것보다 기울어지거나 넘어진 것이 더 많고, 그 옆으로는 원래 온전했을 건물의 잔해들이 즐비했다.
본래는 완전했을 건축물의 부분, 그런 부분들 사이에 껴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부서진 돌조각, 그런 돌조각들 사이에서 균형을 갖추었던 나무 조각, 그리고 보다 세심히 살핀다면, 코를 찌르는 악취를 쫓아 어두운 그늘 아래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이따금 보이는 잔해에 깔려 죽은 썩은 사체들까지.
이런 잔해들을 지나치면 사람들이 오갈 수 있도록 멀끔히 치워진 넓은 공터가 나오고, 그 공터 끄트머리에 속선을 암시하는 미로 문양의 넓은 석판만이 놓여져 있었다.
석판에 그려진 미로는 복잡하게 얽힌 속선이 가진 속성을 의미하는 동시에, 무너진 신전의 불규칙성, 동시에 혼란 속에서 질서를 찾아내 정돈한 신전 그 자체를 암시하기도 했다.
이것이 속선의 대신전이었다.
새로운 석면의 왕이자 속선교의 최고 사제로 군림한 레딘 비알 오서는 자신의 아버지 데르말딘 비알 오서에게서 왕위를 빼앗기 위해 왕궁의 절반을 무너트렸고, 그 폐허를 신전이라고 불렀기 때문이었다.
“신을 위한 역사는 오늘 새롭게 쓰여지리라.”
모두 등 뒤에서는 레딘을 미친 트롤이라고 불렀지만, 감히 앞에서 그리 부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석면의 모든 이들이 레딘이 새롭게 만든 질서를 따랐다.
사람들은 레딘이 제 아버지의 명을 듣고 만굴로 떠나갔다가 무슨 일을 겪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레딘이 만굴에서 잠깐 동안 실종될 당시, 그와 같은 시기에 만굴의 수많은 사제들이 신의 뜻을 따른다는 말 한마디만 남기고 감쪽같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데르말딘 비알 오서, 즉 레딘의 아버지 또한 레딘이 트롤의 신인 속선이 아닌 코볼트의 신인 창류에게 회유되었다고 의심했고, 그것을 빌미로 레딘을 처벌하려고 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렇지 않았다.
레딘이 만굴에서 무슨 일을 겪었던 간에, 그것은 속선의 뜻 안에 있었음이 밝혀졌다.
속선의 사제들이 그 사실을 증언했고, 레딘 그 자신이 왕성을 무너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찬탈하는 것으로 증명했다.
석면은 재빠르게 새로운 질서를 받아들였다.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과거 데르말딘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아둔한 이들이거나, 혼란을 틈타 자신의 영역을 넓히고자 하는 기회주의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은 신에게 선택받은, 어쩌면 속선과 창류, 두 명의 신에게 선택받은 레딘에게는 그저 명성을 널리 알릴 기회에 불과했다.
레딘은 속선의 대신전을 자신의 궁전으로 삼았다.
별다른 일이 없다면 속선을 상징하는 비석 앞에 앉거나 비석을 바라보며 서 있었다.
많은 이들이 레딘을 범상한 왕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이미 알아차리고 있었기에 레딘의 기행은 쉽게 받아들여졌다.
레딘 또한 자신이 그토록 얽매여 있었던 과거들이 이제 와선 보잘 것 없다고 느꼈다.
‘어머니의 복수? 아버지에 대한 진실? 그런 것이 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레딘에게 진정한 실감을 주는 것은 바로 속선의 명령이었다.
정확히는 그 명령을 따르는 것, 더 정확히 하자면 얼마나 빠르고 신속하게 속선의 의도대로 명령을 수행하는가에 달려 있었다.
레딘은 속선의 의도를 자신이 수행할 때마다 일종의 쾌감을 느꼈다.
이 쾌감은 속선의 명령을 해석하고 고민해서 다른 결론을 도출해내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받아들이고 즉각적으로 수행할 때 더 커졌다.
레딘으로서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은 ‘신실함’이라고 불리는 고유 능력치 덕분이었다.
이 능력치를 가진 개체는 능력치의 정도에 따라 플레이어를 믿고 의지하는 정도가 강해지고 플레이어의 의도를 수행하는데 있어 적극성도 커졌다.
이런 레딘 비알 오서는 이제 새로운 명령을 받았다.
-수행할 일이 있다.
“사도, 레딘, 듣고 있나이다.”
-이 일은 어렵고 힘들다.
“제 목숨을 걸겠나이다.”
-그렇다 해도 어려울 것이다.
“제가 쥐고 있는 모두의 목숨을 걸겠나이다.”
속선, 위즈덤은 그것으로도 불충하다고 생각했지만 이제는 어찌할 수 없었다.
-야천의 사도, 라크락을 죽여라.
“받들겠나이다.”
레딘은 답을 하고 나서야 속선의 말을 이해했다.
사도 라크락, 거수 사냥꾼, 천둥 도마뱀, 첫 번째 선택받은 자, 신살자.
하지만 어차피 거절을 한다거나 항변을 한다는 선택지는 레딘에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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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운은 무너진 아시엔 성의 성벽 틈을 보았다.
성벽을 지키고 있던 신단염의 병사들은 도망치고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이들도 있었다.
‘하나는 크람푸스… 아니, 위즈덤의 창조물인가?’
성운으로서는 몇 번인가 안면이 있었던 녀석이었다.
위즈덤은 거의 대부분의 창조물을 유인원으로 만들었고, 오스트로라고 부르는 저 창조물 또한 그랬다.
다만 오스트로가 유난히 낯이 익는 이유는, 오스트로가 위즈덤의 ‘파괴자’였기 때문이다.
창조물 유형 중 가장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는 파괴자는 거대한 크기와 압도적인 물리력으로 적 군대를 덮치거나, 공성전에서 성벽을 무너트리거나, 적 도시에서 테러를 일으키거나, 또는 같은 창조물을 상대로 공격할 때 쓰였다.
이를테면 성운의 파괴자는 사마귀를 닮고 괴력 스킬이 붙은 스라티스였다.
오스트로는 유인원 중에서도 고릴라를 닮았다.
단지 위즈덤의 취향을 암시하는 새하얀 색상의 털에, 파괴자 유형이 일반적으로 취하는 ‘더 많은 팔’ 옵션 덕분에 팔이 한 쌍 더 달려 있을 뿐.
‘크기는 45m 정도인가? 전보다 조금 더 커졌어. 레벨 차이는 거의 없고… 스킬에선 스라티스가 유리하니 딱히 문제는 없어. 하지만 오스트로는 그냥 눈속임이었군.’
일반적이라면 오스트로 같은 거체가 눈속임에 불과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성운은 이번엔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받기는 했어. 좀 더 적극적인 행동을 보여 줄 수 있었는데도 뭔가 한 발 물러서면서 준비가 덜 된 것처럼 굴었지. 이제 알 것 같군.’
성운이 바라보는 것은 일련의 부대였다.
외견만 봐서는 성운도 익히 아는 부대와 크게 다르진 않다.
철을 두드려 만든 갑옷을 장비하고, 대부분이 엘크 위에 올라타 있다.
굳이 면갑을 까뒤집어 보지 않아도 트롤일 테고, 대부분이 석면의 개국 공신의 후손인 귀족일 것이다.
게다가 석면을 상징하는 복잡한 미로 문양의 천을 가슴과 엘크에 두르고 있는데, 저걸 두르고 있다면 성기사단이란 의미였다.
‘속선의 성기사들. 저 정도라면 꽤 부대라고 밖에 평할 수 없지. …그게 아니야.’
성운은 성기사단을 이끄는 이를 바라보았다.
석면의 왕, 레딘 비알 오서.
레딘은 자신의 엘크를 타고 아무것도 두려울 것 없다는 듯 아시엔 성의 무너진 성벽 위에서 나타났다.
레딘은 흑린군을 내려다보며 외쳤다.
“너희는 두려운가?”
“아닙니다!”
그 말에 200여기 남짓한 성기사들이 환호를 보냈다.
적은 숫자임에도 주눅 들기는커녕 자신감이 하늘을 찔렀다.
“야천의 군대가 두려운가?”
“아닙니다!”
“야천의 사도가 두려운가?”
“아닙니다!”
레딘이 외쳤다.
“내가 바로 속선의 사도다!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이 있다면…”
당연하지만, 흑린군을 지휘하고 있던 바센 라크 오라즌은 적의 사기가 올라갈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발포하라!”
성벽을 깨부수었던 개량 대포들이 레딘과 성기사단을 향해 발포되었다.
순식간에 대포알들이 레딘을 비롯한 성기사단을 휩쓰는가 싶더니, 먼지 속에서 레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건 바로 속선이니라.”
흙먼지가 걷히자 레딘과 성기사단의 모습이 드러났다.
본래라면 대포알에 낙마한 기사들이 바닥을 나뒹굴고 있어야 하건만 레딘과 성기사단들은 대포알이 스치고 지나가지도 않은 것처럼 멀쩡했다.
레딘이 힘껏 고삐를 당기자 엘크가 앞발을 차올렸다.
“돌격하라!”
성운은 인상을 썼다.
‘…사도군.’
성운의 첫 번째 의문은 ‘위즈덤이 어떻게 사도를 가지고 있는가’였다.
‘그렇지만, 뭐. 방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 나름 수를 강구한 건 알겠어.’
사도에 대항하기 위해 사도를 만든다는 건 간단한 논리였다.
단지 사도를 만들기 위해 무얼 희생했는지가 궁금해질 따름이었다.
성운의 두 번째 의문은 ‘왜 레딘만이 아니라 성기사단도 대포알의 피해를 받지 않았는가’였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성운의 머릿속으로 즉각 아이디어가 스쳤다.
‘거의 우연의 일치로 만들어진 라크락에 비하자면, 저 레딘은 후발 주자지. 약할 수밖에 없어. 그러니… 편법을 썼군.’
따진다면 편법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아니었다.
사도의 강함은 사도가 가진 스킬로 결정되고, 사도가 가진 스킬은 사도가 가지고 있는 명성으로 결정된다.
하지만 사도 개인이 가지고 있는 명성의 힘이 약하다면?
‘그러니 단체의 힘을 빌렸겠지.’
레딘 비알 오서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이고 왕위에 오른 뒤 반란군을 제압하고 석면을 평정하는 동안 자신의 힘만으로 수행하지는 않았다.
속선의 성기사단을 자신의 수족처럼 사용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레딘의 명성과 성기사단의 명성은 어느 정도 결합되었다.
사도와 같은 경우 다른 플레이어가 능력치를 마음대로 열람할 수 없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성운은 레딘이 가진 스킬을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성기사단이 레딘과 함께할 때, 그리고 레딘이 성기사단과 함께할 때 서로에게 신앙 레벨과 추가 능력치를 부가하는 스킬이 있을 거야.’
이런 식으로 명성을 붙이는 경우는 시너지 덕분에 숫자를 늘려서 활용할 수 있지만, 활용 폭이 좁아지는 문제가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써먹을 곳은 라크락과의 전투뿐이니 상관없었다는 건가? 합리적이야.’
성운은 이제 지켜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스라티스!’
-…파괴, 섬멸, 살해. 무엇을 원하시는지?
‘살해.’
스라티스.
야천의 가름쇠.
이제 오스트로에 맞먹는 거체를 자랑하고 힘이 500을 넘어선 레벨 24의 괴물은 아시엔 성의 성벽을 무너트리며 팔 넷 달린 하얀 고릴라에게 달려들었다.
한편, 라크락 또한 자신의 후손에게 외쳤다.
“바센!”
“맙소사, 사도 라크락!”
“번쩍거리는 리자드맨을 보면 누구라도 놀라겠지. 하지만 감탄은 나중에 해라.”
바센은 웃음을 터트린 자신의 부관을 째려보았다.
라크락이 말했다.
“봐서 알겠지만, 저들은 사람의 군대로 상대할 수 없다.”
“…그럼?”
“후퇴해라. 하늘에서 멀리 보니, 신단염군이 후퇴하는 것 같지만 후방의 석면군에 합류하고 있다. 본대를 치기 위해서다.”
“서남쪽입니까 북동쪽입니까?”
“서남.”
“알겠습니다.’
라크락은 명민한 자신의 후손을 보고 미소 지었다.
바센의 명령에 의해 흑린군이 즉각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돌격해 오는 레딘과 성기사단에 비하면 턱없이 느렸다.
‘놈이 노리는 건 본대의 진영을 무너트리는 것인가?’
라크락은 적이 뜻대로 하게 둘 생각이 없었다.
“아낙세, 가자! 오늘은 바쁜 날이 되겠구나.”
아시엔 성벽 앞의 너른 들판.
라크락은 레딘에게, 그리고 레딘은 라크락에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