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Nebula’s Civilization RAW novel - Chapter 156
156화
코프릭의 모습을 한 고르디우스는 사원 안에서 숨을 죽이며 시간을 보냈다.
그때 사제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외젠 님 살려주십시오!”
달려오는 게 아니라 도망치고 있는 것이었다.
고르디우스는 처음 듣는 이름에 의아해졌지만, 사제를 구해 주지는 않았다.
고르디우스가 가진 능력은 크게 보면 두 가지였다.
한 가지는 연극적 재능으로, 주로 엘다르가 높은 소영역으로 구축한 예술에서 비롯된 스킬이 근간이었다.
다른 한 가지는 성운이 만든 몸을 기반으로 하는 지능, 그리고 그 지능을 통해 구축되는 재빠른 추론이었다.
고르디우스는 코프릭의 뇌를 갉아먹어 죽이긴 했지만, 그 기억까지 모두 가지게 된 것은 아니었다.
나머지는 고르디우스가 오로지 추론을 통해서 본래 코프릭과 그 주변 인물들이 어떤 관계에 있었는지, 코프릭이 어떤 존재였는지를 역산해 낼 뿐이었다.
그리고 이 계산에 따르면, 라크샤사 사제라는 것은 그냥 살아 움직이고 대화할 수 있는 음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라크샤사들은 자신이 팽골리안들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착각이었고, 과거 코프릭은 라크샤사들을 결코 그렇게 대한 적이 없었다.
‘그리고 저 사제 뒤에 달려드는 것이 거슬린다.’
결국 사제는 바닥을 굴렀다. 커다란 까마귀 하나가 나타나더니 사제를 자신의 발톱으로 움켜쥐었다.
그리고 비명을 지르는 사제의 머리부터 쪼아 먹었다.
고르디우스는 이 큰 까마귀가 외젠이며, 코프릭과 유사한 격을 가진 수호자라고 추측했다.
-오랜만이군, 외젠.
외젠은 힐끔 고르디우스를 보았다가 한입에 라크샤사를 삼켰다.
외젠이 말했다.
-너한테 살가운 말을 다 듣다니, 별 일이군.
고르디우스는 자신의 판단에 착오가 있음을 알았다.
본래의 흑표범은 팽골리안이건 라크샤사건 심지어 다른 수호자건 동료라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것이다.
-요즘 이 동네가 퍽 시끄러워서 말이야…
-소란스럽다라…
외젠이 커다란 기둥으로 이루어진 사원 복도를 걸으며 말했다.
-겨우 그 정도 표현을 하는 걸 보면, 역시 다른 지역 소식은 못 들었나 보군?
-다른 지역?
외젠이 말했다.
-지금 북부만이 아니라 동부와 서부 모두 난리가 났지. 물고기들이 움직이는 건 물론이고 서부와 동부에서도 침입자들이 나타나서 말이야.
-침입자들?
-그래. 아마 바다 건너… 다른 대륙에서 온 모양이더군.
-흐음.
물고기는 아마 딥원을 말하는 것일 터.
고르디우스는 물고기에 대한 이야기 말곤 이것이 성운에게서도 들은 적 없는 새로운 정보임을 알았다.
외젠이 말했다.
-위대한 아슈라다께서 걱정하고 계시지. 그래서 각 지역의 수호자들에게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는지 궁금해하시더군. 특히나 북부는 제물로 바쳐야 할 팽골리안 수호자가 있지 않나? 위대한 아슈라다 님이 기대하고 계시기도 하고.
고르디우스가 말했다.
-아슈라다 님에게 전해. 걱정 마시라고. 그 침입자들이 생경한 무기를 들고 오긴 했지만 숫자가 적고, 팽골리안은… 그저 팽골리안일 뿐이지. 놈들을 일거에 잡아들일 계획이 있으니…
-잠깐, 너 방금 ‘아슈라다 님’ 이라고 한 건가?
고르디우스는 긴장했다.
또 말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이 망할 흑표범 놈은 위아래란 것이 없었구나!’
고르디우스는 이대로 외젠을 공격해 죽일지, 아니면 외젠에게 공격당해 잡아먹힐지 고민했다.
둘 다 고르디우스에게는 괜찮은 방법이었지만, 현재 야천을 믿는 필멸자들의 계획이 어그러질지도 몰랐다.
외젠이 웃으며 말했다.
-이제서야 너에게도 충성심이라는 게 생긴 모양이군.
고르디우스는 안도했다.
-힘의 차이가 있다는 건… 인정해야겠지.
-그걸로 충분하다, 코프릭. 난 솔직히 그 침입자들을 막을 수 있다는 자신감보다 너의 태도가 바뀐 점이 더 마음에 드는군. 다음에 또 들리도록 하지.
-마음대로 해라.
고르디우스는 뒤뚱뒤뚱 복도를 빠져나가는 외젠을 보았다.
고르디우스가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 아슈라다는 도대체 어떤 존재인 거지?’
─┼
“더 이상 싸우고 싶지 않다고?”
“에구… 그런 말은 아닌데…”
팽골리안 마고가 바센 라크 오라즌 앞에서 우물쭈물했다.
라크샤사들로부터 대승을 거둔 뒤 이어진 며칠 동안 그보다 작은 규모의 전투가 벌어졌고 팽골리안들은 거듭해서 승리했다.
다만 라크샤사들은 팽골리안이 온다는 소리만 들어도 도망치기 바빴으므로 제대로 된 싸움을 한 것은 아니었다.
바센이 보기엔 그쪽이 더 훌륭한 승리긴 했다.
팽골리안들은 북부 대부분의 지역을 수복하고 라크샤사들을 내쫓는데 성공했는데, 이제 가장 큰 도시인 시울만 탈환한다면, 과거 팽골리안들이 흩어져 살던 모든 마을을 돌려받는 셈이었다.
물론 바센으로서는 거기서 만족할 생각이 없었다.
라크샤사, 정확히는 아슈라다 부족의 라크샤사들은 비록 기술 수준이 낮긴 하지만 거대한 나라를 이루고 있었고, 팽골리안들이 기거하는 북부 지역은 일부에 불과했다.
‘하지만 팽골리안들에겐 이미 과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겠지. 자신들을 억압하던 라크샤사들을 모두 내쫓은 데다 그들로부터 자신들을 지킬 힘도 얻었다.’
단순히 화승총만이 아니었다.
팽골리안들의 등가죽은 단단하고 질기긴 하지만, 라크샤사가 휘두르는 쇠 검과 쇠 창날에는 충분히 상처를 입을 수 있었다.
하지만 팽골리안에게 맞춰 제작된, 강철로 만들어진 갑옷을 입는 것만으로 라크샤사가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 될 수 있었다.
이미 라크샤사들이 총이 없는 팽골리안을 노리고 습격해 봤지만, 중무장한 팽골리안 창잡이들에게 패배한 경우도 있었다.
신체적 격차가 있다지만 그런 문제는 기술을 통해서 메워질 수 있었다.
“계속해서 싸우면 승리할 수 있을 텐데, 팽골리안들이 전투를 버거워하나?”
“그렇지는 않은데요. 다만 더 이상 싸움을 이어나가는 게 그리 효율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효율적이지 않다?”
마고가 주저하다가 말했다.
“전쟁은 낭비지요. 만약 전쟁을 하는 대신, 싸움 없이도 이익을 취할 수 있다면, 전쟁을 하지 않는 게 더 낫겠지요.”
바센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전쟁은 낭비가 맞았다.
“그럼 라크샤사 놈들과 강화를 맺자는 거군.”
“예에. 라크샤사들이라고 해서 머리가 둔하지는 않은데다, 그 뒤에는 아슈라다와 대사원이 있으니… 언젠까지고 승리할 거라구 생각하기는 어려워서…”
바센은 생각했다.
‘이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 당장은 대승을 거두고 있지만 계속 싸움이 이어지면 전선이 커지게 된다. 전선이 커지면 그만큼 도로나, 보급, 탈것이 끄는 수레 따위 기반 시설의 중요도가 올라간다. 하지만 이 땅에는 그런 기반 시설이 거의 없어.’
게다가 바센의 걱정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팽골리안 대다수는 오랜 기간 노예 생활을 해 왔기에 유능한 지휘관이 부족했고, 병력이 늘어날 경우 장비도 현재와 같이 높은 수준을 유지하기 힘들 터였다.
기술을 통해 힘의 차이를 메꾸고 있는데다, 그 승리로 팽골리안 군대의 사기를 채우고 있으니, 계속해서 이기고 있다 한들 사실은 아슬아슬한 상황이었다.
특히 아슈라다나, 다음에 만날 것으로 생각되는 수호자 코프릭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었다.
흰 거미 힐로브는 코프릭에 대해서 어째서인지 ‘걱정할 것 없다’고 말했지만, 팽골리안들이 묘사하는 코프릭은 꽤나 무시무시한 존재였다.
‘그래. 전쟁을 이쯤에서 끝내고 우리 탐험대는 본연의 임무로 돌아가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그동안 몇 가지 정보를 접하기도 했지. 이미 흑린에선 연락선을 통해 얘기된 군선들이 준비 중일 터. 흑린과 라크샤사들이 전쟁을 해야 된다면 팽골리안들을 이용할 것이 아니라 직접 하는 게 옳겠지.’
바센이 말했다.
“그 말이 옳아, 마고. 놈들에게 강화 제의가 먹히는지 보자고.”
팽골리안 사절이 라크샤사의 북부 중앙 도시인 시올로 갔다.
사절단은 자신들에 대한 대우가 전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라크샤사들은 다소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지만 귀족 라크샤사를 대하듯 사절단을 대했고, 광장에서 만난 평민 라크샤사들은 팽골리안을 보고 겁을 내기도 했다.
북부 총독 아쿨다가 이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다.
팽골리안의 조건은 간단했다.
하나, 시올을 포함한, 아직 팽골리안들이 공격하지 않은 도시와 마을에 노예로 사로잡힌 모든 팽골리안들을 해방할 것.
둘, 본래 팽골리안의 것이었던 도시 시올을 비우고 떠나갈 것.
셋, 그리고 더 이상 돌아오지 않을 것.
이 조건에 대한 보상은 더 간결했다.
‘더 이상 공격하지 않겠다고? 겨우 그 약속만으로 그런 조건을 내건 것이냐?’
아쿨다는 속으로 분에 차올랐다.
하지만 아쿨다는 유능한 라크샤사 귀족이었고, 자신의 정치적 수완으로 그 자리까지 올라간 인물이었다.
“그대들의 조건을 받아들이지. 단…,”
사절단이 불안해하며 아쿨다의 말을 기다렸다.
아쿨다가 웃으며 말했다.
“앞으로 팽골리안들과 좋은 관계를 해 나가고 싶군. 과거를 모두 잊을 수는 없겠지만 반성하는 모습을 보일 테니, 그 기회를 주었으면 한다. 그런 뜻에서 강화를 맺을 때 팽골리안들과 팽골리안을 도와주었다는 저 바다 너머의 사람들을 초대해 큰 축제를 열고자 하는데, 어떠신지?”
사절단은 이에 대해 흔쾌히 승낙하고 신이 나서 돌아갔다.
사원 뒤에서 아쿨다와 사절단 사이의 대화를 엿들었던 코프릭, 정확히는 코프릭의 몸을 빼앗은 고르디우스가 말했다.
-설마하니 정말로 팽골리안과 강화를 맺을 생각은 아니겠지?
그 말에 아쿨다가 무슨 말이냐는 듯 고르디우스를 보았다.
“물론입니다. 적들의 수뇌부를 도시 한 가운데 포위해서 공격할 수 있는 기회가 있는데 이를 놓칠 수는 없지요.’
고르디우스는 웃어 보이며 말했다.
-그야, 그렇지. 하지만 저들의 수뇌부를 공격하면 다음에는 결코 대화를 제안해 오지 않을 텐데, 걱정이 되지 않으냐?
“저는 팽골리안들과 대화를 한 게 아닙니다. 대화라는 건 동등한 격이 있을 때만 성립하는 거지요. 게다가 코프릭 님이 도와주신다면 저들에게 다음은 없을 겁니다.”
-그래, 끝을 내야지.
고르디우스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지. 대화라는 건 동등한 격이 있을 때만 성립하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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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신전 제2 회의실.
별칭은 전술 회의실.
이 공간에는 방을 가득 채우는 탁자가 전부였다.
그리고 이 탁자 위에는, 모형으로 만들어진, 하지만 실제로 움직이는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이 인형들은 플레이어가 입력해 놓은 값에 따라 움직였으며 그와 비슷한 능력치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모의 전투, 즉 워 게임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다.
성운은 사원을 가리키며 말했다.
“아마 이 사원 앞에서 전투를 하게 되겠지. 물론 이 전면부는 초대받은 바센이나 팽골리안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해서 무장한 라크샤사는 전혀 없을 거야. 반면에 팽골리안들은 최소한의 무장을 하고 갈 테고.”
반대편에 있던 위즈덤이 말했다.
“그럼 이쪽, 몸을 숨길 수 있으면서 최단 거리로 공격이 강행 가능한 사원 뒤쪽에 무장한 라크샤사 부대가 대기하겠군. 숫자는 대충… 2천인가?”
“나름 짜내고 짜낸 숫자겠지.”
“흠, 역시 바센에게 외부에서 공격하게 하는 게 좋지 않나? 함정이라는 건 이미 알려 줬다며?”
성운이 말했다.
“아냐, 그러면 라크샤사들은 도시 외곽을 통해서 효율적인 방어를 추구할 테고 그럼 팽골리안 사상자가 올라갈 거야. 반면에 미리 인원을 넣어 두면 속이고 있다고 믿을 테니 외부 병력은 거의 없지. 오히려 부대가 진입하기 수월해.”
위즈덤이 말했다.
“그럼 결국 문제는 여기, 미끼 역할을 하게 될 바센과 그 팽골리안들이 문제인데, 확실히 살릴 수 있나?”
“얘들이 있잖아?”
“얘들?”
성운이 자신의 품에서 자그마한 인형을 두개 꺼냈다.
하나는 하얀색 거미 인형이고, 다른 하나는 흑표범 인형이었다.
성운은 흰 거미를 외곽에, 흑표범을 사원 위에 두었다.
그러자 흰 거미 인형에는 힐로브의 의식이 연동되고, 흑표범에는 고르디우스의 의식이 연동되었다.
-힐로브 여기 왔나이다.
-고르디우스 여기 있습니다.
그러고선 힐로브와 고르디우스는 둥그런 눈으로 멀뚱멀뚱 제2 회의실 위에서, 거대한 신들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세상을 뒤엎을 수도 있을 만한 크기의 성운이, 먼 산자락 하나를 짚으며 힐로브와 고르디우스를 가리켰다.
“결국 얘네들이 성공적으로 방어를 해낼 수 있을지 알아보기 위해서 이 모의전을 하는 거야. 모의전이 잘되지 않으면 네가 말한 방법대로 하는 거고.”
맞은편에 두 번째 태양처럼 떠오른 위즈덤이 수긍했다.
“그럼, 한 번… 볼까?”
“힐로브, 고르디우스. 움직여.”
-뜻대로.
-기대하십시오.
거대한 흑표범 하나가 사원 뒤쪽에 대기하고 있는 라크샤사 무리를 향해 조용히 다가가 앞발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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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콰직!
라크샤사들의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튀며 허공을 날았다.
라크샤사들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사원 뒤쪽에서 팽골리안들을 습격하기 위해 다른 전사들과 함께 대기하고 있던 아쿨다가 외쳤다.
“무, 무슨 일이냐?”
비명이 계속 이어지는 가운데, 사원 뒤쪽에서 라크샤사 전사 하나가 급히 달려왔다.
전사가 말했다.
“코, 코프릭 님이 미쳤습니다! 저희 라크샤사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뭐라고?”
아쿨다는 정신이 아찔해지는 걸 느꼈다.
뭐가 어찌 된 일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일단 전사들을 뒤로 돌려 피신 시켜라. 내가 코프릭 님과 대화를 한 번…”
“총독님, 큰일입니다!”
다른 지역에서 달려온 전사가 아쿨다에게 외쳤다.
“거대한 흰 거미가 방어선을 뚫고 사원을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전사는 손가락으로 도시 한쪽을 가리켰다.
그 말대로 거대한 흰 거미가 전사들을 도륙 내고 있었다.
“이런, 세상에… 아니, 안 된다.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돼!”
아쿨다는 초인적인 의지로 혼란에 빠진 전사들을 다그치고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힐로브와 고르디우스는 그것이 쓸모없는 일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힐로브와 고르디우스 모두, 이미 모의 전투를 통해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날지 알고 있었다.
둘에게 있어 이것은 싸움이라기 보단 정해진 운명을 수행하는 것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