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28)
128 화 생색.
생색.
들켰다. 들켜 버렸다.
이리도 쉽게? 이 사내는 말살성전단인가? 그렇다면 이 사내를 죽여야 하나? 지금 당장? 아직 아무런 죄도 확인 못 한 이 사내를 내 안위를 위해 죽여야 하나?
내 머릿속에 들어찬 온갖 고민들. 저마다 시끄럽게 떠들어 대던 고민들은 불과 몇 초도 지나지 않아 일제히 침묵했다.
반짝이는 검날. 시끄럽게 울부짖던 고민들은 눈앞의 위협을 맞이해 이성과 본능에 제자리를 비켰다. 눈앞에 사내는 내가 악신의 숭배자인 걸 깨닫자마자 문답무용으로 검집의 검을 휘둘러 왔다.
턱을 젖힌다. 다행히 사내의 신체 능력은 내가 예상했던 범주 내에 있었다. 부패의 문을 사용하지도 않은 나보다 조금 느린 수준. 그리고 그때.
시간이 제멋대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내 몸이 느려지고, 검날이 빨라진다.
새빨간 피가 튀었다. 뒤에서 날카로운 비명들이 들려왔다. 검날은 내 턱 깊숙한 곳 뼈를 베어 내며 눈까지 이어지는 깊숙한 검흔을 남겼다. 한쪽 안구가 모조리 뭉개진 탓에 거리감이 무너졌다.
피와 살점들. 오롯이 내 것인 것들이 쏟아지면서 시간이 돌아왔다. 느려졌던 몸이 제 상태로 돌아와 이제야 뒤로 물러났다.
“하악.”
아릿한 고통. 다행히 사내가 권능을 걸었던 것은 나와 그가 있던 공간 그 자체였다. 갈라진 턱과 뭉개진 안구가 빠르게 재생을 시작했다.
“감히 마르낙 사제님을!!! 이 개자식아!!!”
다키아의 성난 목소리와 함께 선명한 뇌전이 대기를 불사르며 사내를 향해 덮쳐들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결과는 같았다.
느려질 리 없는 뇌전이 느려진다. 왜곡된 시간 속에서 사내는 정확하게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아직 부상의 회복이 덜 끝났는데.
사내의 왼손에는 대체 어느새 꺼내 든 것인지 모를 얇고 긴 쇠꼬챙이가 들려 있었다.
막아야 하는데. 막아 내야만 하는데. 도살자. 도살자를 꺼내야 했다.
오른팔의 팔찌가 갈라지며 톱날로 가득한 도살자가 튀어나왔다. 아니, 튀어나온다. 한없이 느릿하게.
푹.
도살자가 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기다란 쇠꼬챙이는 이미 내 심장을 찌른 뒤였다.
관통당한 심장과 함께 정신이 암전했다.
***
빠악!
골까지 울리는 충격. 얻어맞은 내 몸이 바닥을 굴러 바닥에 처박혔다.
– 이 등신 새끼가 진짜!!! 와!!! 그걸 그렇게 다 당해 주는 거냐? 응? 너 사실 그냥 다 귀찮아서 죽고 싶은 거지? 응? 그치?
흔들리는 골을 겨우 진정시키고서 눈을 뜨니, 나는 언젠가 찾아왔던 그 언덕 위에 존재했다. 저번과는 달리 언덕의 밑에선 그 어떠한 군세의 충돌도 없었다. 오롯이 나와 갑옷으로 전신을 둘둘 만 존재, 임페트로만이 있었을 뿐.
그는 진녹색 귀화를 일렁이며 나를 향해 소리쳤다.
– 애초에 방금 그 자식은 ‘난 굉장히 수상쩍고 여차하면 무력의 사용도 불사하겠소’란 분위기를 풀풀 풍겨 대면서 등장했는데, 그 자식이 어떤 능력을 지녔는지도 모르고 그놈 간격 안으로 들어가? 너 이 새끼 진짜 아주 멍청하기만 한 줄 알았는데, 멍청하다는 단어한테 미안해질 정도로 얼빠진 새끼였잖아! 이거!
솔직히 이번 건은 내가 잘못한 게 맞기는 했지만, 막상 저렇게 쏟아져 나오는 구박을 듣고 나니 저도 모르게 반발심이 생기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째서 임페트로의 앞에 서기만 하면 조금 어려지는 기분일까.
나는 겨우 쥐어짜 낸 변명을 툭 하고 내뱉었다.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 하! 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 감당? 가아아아암당?
폭소를 터뜨린 그는 한참을 꺽꺽대며 웃고는 손가락을 뻗어 내 가슴을 쿡쿡 찔렀다.
– 너 이 새끼, 너 지금 심장에 구멍 뚫리고 있는 중인 거 알지? 요즘은 심장에 구멍을 뚫리는 걸 ‘감당’이라고 표현하냐? 응? 그놈이 애초에 네 몸에 대해서 정확히 몰라 일부러 무기에 신성을 담지 않아서 산 거지. 걔가 지금 당장 꼬챙이에 한 줌의 신성이라도 담았으면 넌 그냥 아주 여기서 죽은 거라고!!! 이 등신아!!!
나는 내 가슴을 자꾸만 찔러 대는 손가락을 툭 쳐 내고는 임페트로를 노려보았다.
“그럼 제가 대체 어떻게 해야 했다는 겁니까?”
– 어쭈! 너 이 새끼! 지금 눈을 부라린 거야? 이 나한테?
오래된 갑옷이 제멋대로 일그러지며 기괴한 미소를 그려 냈다. 그는 키득키득 웃었다.
– 암, 사내 새끼라면 그 정도 성깔은 있어야지. 그런데…
빡!!!
턱을 얻어맞은 내 몸이 허공을 훨훨 날아 그대로 바닥에 또 한 번 처박혔다. 아팠다. 진짜 너무 아팠다. 나는 눈물이 핑 도는 걸 겨우 참아 내고는 자리에서 빠르게 일어섰다.
“뭡니까! 대체 왜 치시는 겁니까!”
임페트로는 주먹을 까딱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 성깔이 있는 건 좋은데, 자고로 네 이빨을 드러낼 때는 상황과 상대를 가려 가면서 해야지. 네가 있는 성깔. 그거 당연히 나한테도 하나쯤은 있지 않겠냐? 응? 내가 설마 우쭈쭈 하며 달래 주기라도 하려고 널 이리로 부른 것 같아? 받아.
그는 허공에서 아무런 장식도 없는 한 자루의 검을 꺼내더니 내게 집어 던졌다. 날아오는 검을 받아들자, 임페트로의 양손에는 나를 공격했던 사내와 똑같은 종류의 무기가 들려 있었다.
왼손에는 쇠꼬챙이를 닮은 무기와 나머지 한 손에는 평범한 한 자루의 장검.
임페트로는 쇠꼬챙이를 까딱대며 말을 꺼냈다.
– 너랑 마주친 그놈은 ‘틀어진 시계’를 숭배하는 사제 놈이야. 그놈들이 쓰는 권능은 아주 간단해. ‘감속’과 ‘가속’.
그가 쇠꼬챙이를 놓자, 일렁이는 신성과 함께 쇠꼬챙이의 추락이 느려졌다. 쇠꼬챙이는 거의 정지에 가까운 상태로 허공에 못 박혔다.
“…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 여기는 현실이 아니니까. 흉내 정도는 낼 수 있지. 별로 대단한 건 아냐.
그는 쇠꼬챙이를 다시 집어 들고는 그걸 마치 지휘봉처럼 휘두르며 말을 이어 나갔다.
– 상대는 느려지게, 나는 빨라지게. 권능을 제외하면 그저 잘 단련된 인간일 뿐인 놈들이지만 권능 자체가 무척이나 성가신 놈들이지. 특히나 놈들과 근접전에 돌입하는 건 그다지 현명한 판단이 아니야.
“그럼 어떻게 상대해야 합니까?”
– 상대라… 흐음…
낮은 읊조림. 그 읊조림과 동시에 사나운 불길이 끝이 보이질 않는 대지를 뒤덮었다. 그는 그 불길을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잠깐 잊고 있었지만 임페트로는 마법사이기도 했지.
– 나 같으면 그냥 멀리서 통째로 날려 버리지. 애초에 강력한 권능이니만큼 그렇게 오래 사용하지도 못해. 그러니 도저히 피할 수 없도록 모조리 날려 버리는 거지.
“…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내로 부탁드립니다.”
– 네가 달고 다니는 그 마법사 아가씨는 장식이냐? 네가 못 하면 그 은발 머리 아가씨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저놈을 날려버려 달라고 하면 되는 거지. 보니까 네가 조금만 살살 달래면 간도 쓸개도 아주 다 내주겠더만. 야. 너 이 새끼. 설마 고자는 아니지? 응? 나 같았으면…
그는 ‘나 같았으면’에서 말을 뚝 멈추곤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이건 취소. 그냥 못 들은 셈 쳐라.
나는 문득 이 사실을 파고들면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임페트로의 약점을 잡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뭡니까? 갑자기? 설마…”
– 닥쳐. 알려고 하지 마. 아주 묵사발이 나기 싫으면.
하지만 벌어진 내 입은 이미 말을 내뱉은 뒤였다.
“당신 설마 죽을 때까지 평생 혼자 산…”
데구르르.
쇠꼬챙이와 검이 바닥 위를 나뒹굴었다. 그는 언제 생겨났는지 모를 바위 위에 주저앉아서 내게서 등을 돌렸다.
– 안 해. 나 안 해.
“설마 삐지신 겁니까?”
– 어, 그래 삐졌다. 평생을 혼자 살아서 삐뚤어진 내가 아주 단단히 삐졌다!!! 그러니 나는 너한테 상관 안 할 거야! 네가 돌아가서 심장이 꿰뚫리든 머리통이 날아가 버리든, 그 상태로 비참하게 잡혀서 아주 잘게잘게 썰린 고기 조각이 되든 난 절대 상관 안 할 거라고!!!
그는 아무래도 평생을 혼자 살다 죽은 것에 한이 맺혀 있는 듯했다. 나는 잽싸게 그의 등 뒤로 다가가서 등을 두드려 주며 말했다.
“짚신도 제짝이 있다고 언젠가는 분명 천생연분을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 이미 뒈진 놈한테 그게 정말 가능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하는 거냐? 응? 이거 이제 보니 아주 제대로 미친놈이었네?
그의 말이 맞았다. 그의 삶은 이미 끝났고, 마침표가 찍힌 인생은 어떻게 해도 바꿀 수가 없는 법이었다.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틀어진 시계’의 권능이 시간과 관련된 것이라면 시간을 되돌릴 수도 있는 겁니까?”
– 그게 되겠냐?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세월 속에 쌓인 ‘인과’를 깨부수는 거야. 이게 무슨 뜻인지 알아?
“모르니까 물어본 거 아니겠습니까?”
그는 슬쩍 몸을 돌려 내 눈을 바라보았다. 내가 판단한 바에 따르면 그는 나와의 대화 그 자체를 무척이나 즐기고 있었다. 그는 내가 어떤 건방진 소리를 하든, 그의 약점을 들춰 내든 절대 일방적으로 이 공간에서 나를 내쫓는 법이 없었으니까.
– 시간으로 앞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것이야. 왜냐하면 인과란 끝없이 쌓이는 것이기 때문이지. 아무리 자그마한 것이라도 그것의 시간을 되돌린다는 건, 그 안에 쌓여 있는 모든 인과를 무너뜨릴 수 있는 ‘힘’이 필요해. 그것도 무너뜨려야 하는 인과의 양에 따라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 아무리 신들이라고 해도 오래 세월 속에 쌓인 인과를 무너뜨리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고.
“불가능에 가깝다는 건 완전히 불가능은 아니란 거군요. 예를 들어 인과를 감당할 만큼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말이죠.”
– 그래, 이 자식아!!! 무한한 힘을 가진 존재라면 시간을 거스를 수도 있겠지! 그런데 그 어떤 신도 ‘무한(無限)’에 닿지 못했어. 그리고 애초에 무한한 힘을 가졌다면 굳이 시간을 되돌릴 필요도 없지. 지금 당장 자신이 바라는 세계를 만들어 내면 되니까!
벌떡 일어선 그가 바닥에 떨어뜨렸던 검과 쇠꼬챙이를 주섬주섬 주워 들었다.
“화는 다 풀리셨습니까?”
– 주위에 여자나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 네놈에게 애초부터 이해를 구한 적 없다! 이 복 터진 개자식아! 검이나 들어!
그가 쇠꼬챙이를 치켜들자, 분위기가 일변했다.
자세, 동작, 가벼운 발끝 하나까지. 임페트로에게서 방금 내 가슴에 구멍을 뚫은 사내의 분위기가 풍겨 왔다.
“따라 하시는 겁니까?”
– 두 눈으로 보면 당연히 따라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니냐?
지극히 재수 없는 말을 내뱉은 그가 나를 똑바로 직시했다.
– 잘 들어. 이 틀어진 시계를 숭배하는 ‘어긋난 초침’ 놈들과 근접전을 하는 방법을 가르쳐 출 테니. ‘권능’이란 자고로 신이 내려 준 ‘신성’이 세상의 법칙을 왜곡하는 것. 지금부터 네가 할 건 그 권능이 발현되는 걸 최대한 방해하는 거야.
“어떻게 말입니까?”
– 방법은 아주 간단해. 네 주변에 의미 없는 신성을 흩뿌려서 주변을 모조리 둘러싸 버리는 거지. 다른 사제 놈들한테는 불가능한 방법이지만, ‘우리’는 가능해. 우리 부패의 아들은 한 시대에 둘 이상 존재하지 않으니까. 이 방법을 체득하면 적어도 웬만한 사제들의 권능은 네 육체에 한해서 무시할 수 있을 거야. 물론, 지극히 비효율적인 방법이라 너나 나라고 해도 오래 쓰지는 못해. 다음번에 비슷한 놈을 보거든 마법사 아가씨한테 부탁해서 그냥 날려 버리라고.
방법은 아주 잘 알았다. 하지만 다른 문제가 있었다.
“그 신성을 흩뿌리는 건 어떻게 합니까?”
– 그건 이제부터 네가 재주껏 해내야지.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시간이 느려졌다. 한없이 느려진 시간 속에서 임페트로의 손에 들린 쇠꼬챙이만이 자유롭게 움직였다.
암녹색 귀화가 일렁이며 그의 투구가 일그러진 미소를 그려냈다.
– 될 때까지 죽어 가면서 말이야.
***
꿰뚫었다. 아니, 꿰뚫기 일보 직전. 기다란 꼬챙이가 살들을 게걸스럽게 헤집기 시작한 그때. 폭발적으로 흘러나온 신성이 권능을 흩뜨렸다. 어긋난 시곗바늘이 제자리를 되찾자, 마르낙은 거침없는 발길질로 사내의 옆구리를 걷어찼다.
퍽!!!
예상치 못한 일격. 자신이 권능이 깨질 거란 상상은 꿈에도 못한 사내는 빈 옆구리에 그대로 공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그는 그대로 허공을 훨훨 날아 바닥에 처박혔다.
“큭.”
마르낙은 신음을 내뱉으며 쉬이 일어나질 못하는 사내를 보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오는 감격의 눈물을 집어삼켰다.
몇 번. 이 한 방을 위해 대체 몇 번을 죽은 건지 몰랐다. 중간부터 세는 걸 포기했으니까. 게다가 진짜 힘들었던 건 죽음이 아니라 쉴새 없이 떠들어 대며 구박을 해 대는 임페트로의 입이었다.
“마르낙 사제님!”
‘살해!!!’
– 괜찮으십니까!
어느새 다가온 동료들. 임페르토는 마침내 기술을 완성해 낸 마르낙을 향해 마지막으로 당부했었다.
– 돌아가면 그냥 아주 쉽게 해낸 것처럼 연기해. 원래 호수 위 백조는 자신의 발길질을 드러내지 않기에 고고한 법이니까. 이럴 때 아니면 언제 또 잘난 척하겠냐? 그치?
마르낙은 그의 가르침에 따라 그저 빙그레 웃으며 동료들에게 말했다.
“별거 아니었습니다. 일단 저분을 포박부터 하도록 하죠. 저분한테도 들을 이야기가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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