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131)
131 화 은원.
은원.
“결국 처리했군.”
다음 날 아침, 안식의 나팔수가 무미건조한 말투로 내게 말을 걸어왔다.
“예.”
그는 정확하게 노인의 시체가 있었던 장소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망자의 흔적이 정말로 미약하군. 집중하지 않으면 도저히 찾아낼 수 없을 정도로. 그런데 네 손으로 직접 죽였나?”
“그랬습니다.”
“그렇군.”
그 대답을 끝으로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침묵을 지켰다. 침묵이 어색해질 때쯤, 그는 손가락을 뻗어 내 가슴을 쿡 하고 찔렀다.
“어쩔 수 없는 이유가 아니라면 웬만해서 사람을 죽이지 마라.”
“그것도 신이 전하라 시켜서 하신 겁니까?”
“아니.”
새하얀 가면이 좌우로 천천히 흔들렸다.
“그저 개인적인 충고다. 누군가를 죽인다는 건, 네가 모르는 사이 은원(恩怨)의 실을 떠안게 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다. 마치 길을 걷다 마주치는 거미줄처럼. 그러니 누군가를 죽일 때는 언제나 고민하고 또 고민해라.”
“기억은 해 두겠습니다.”
“기억을 하든, 잊든 그건 네 선택이니 굳이 내게 답할 필요는 없다. 그럼 나는 이만 가 보지.”
“그럼 다음 기회에 뵙죠.”
두꺼운 장갑을 뒤집어쓴 손이 내 어깨를 툭 하고 두드렸다.
“망자의 한이 바스러질 만큼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야 또 만나길 바라지.”
그는 그렇게 소리 없는 나팔을 불며 망자들과 함께 떠났다.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던 다키아가 내 어깨를 쿡 하고 찔렀다.
“두 분, 대체 언제 그렇게 친해지신 거예요?”
친해? 저 안식의 나팔수랑 나랑?
“저는 친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오히려 저 인사는 다신 안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아닙니까?”
다키아는 고개를 갸우뚱하곤 대답했다.
“제가 듣기엔 오래오래 잘 먹고 잘살란 인사로 들렸는걸요.”
다키아의 해석도 일리가 있었다. 안식의 나팔수는 망자의 시신을 거두는 역할인 만큼 그와 엮이지 않는 삶이야말로 어찌 보면 죽음과는 가장 거리가 먼 삶이 아닐까.
그런데 갑자기 웬 덕담이지? 내가 그에게 딱히 해 준 것은 없었던 것 같은데, 노인의 죽음을 두고 고민하던 모습 때문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냥 말뜻 그대로 만날 때마다 귀찮은 일이 생기니 그냥 오래오래 보지 말자는 게 그의 진심이었던 게 아닐까?
나는 복잡미묘한 기분을 느끼며 저 멀리 멀어져 가는 망자의 무리를 지켜보았다.
안식의 나팔수와 이별 후, 우리는 지젤과 함께 지도를 보면서 그녀가 알아내 온 좌표들을 대략적으로 지도 위에 표시하고 최적의 동선을 그려 넣었다.
“이렇게 둘러보려고 하는데 어떻습니까?”
나는 우리가 열심히 선을 이어 그려 낸 지도를 지젤에게 내보였다.
“어디 봐.”
침낭 위에 누워 있던 지젤은 붕대로 감겨 있는 손을 뻗어 지도를 확인하곤 곧장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정말 이대로 가려고?”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많지. 아주 많지. 야! 쟈멜!”
“으, 응?”
갑작스럽게 이름을 불린 쟈멜이 두 눈을 끔벅이고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어, 왜?”
지젤은 쟈멜을 째려보곤 한쪽만 드러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 다른 사람들은 북제국에 온 적이 없어서 이 대충 만들어진 지도만 보고 이 맛이 간 동선을 그려 넣었을 거라 이해가 가. 근데, 넌 아니잖아! 야! 너 나랑 같이 북제국을 돌아다닌 거 벌써 다 까먹었어? 응? 내가 너 믿고 여기 이렇게 누워 있던 건데!”
“헤헤헤…”
쟈멜은 어색하게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게… 나는 그냥 네가 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해서 기억이 잘 안 나는데…”
“하…”
지젤은 자신의 머리를 집고는 다시 드러누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진짜 못살아 정말. 쟈멜, 펜 하나만 건네줘.”
“응!”
그녀는 몸을 일으켜 쟈멜에게 펜을 건네받고는 날 힐긋 바라보곤 지도 위에 선을 죽죽 그려 넣기 시작했다.
“잘 봐. 여기는 이 지도에선 대충 산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대충 그려진 거랑 다르게 진짜 높은 산맥이거든? 아드스 산맥이라고 들어봤어?”
“처음 듣습니다.”
“그래, 모를 거라 생각했어. 대충 아드스 산맥이 어떤 곳인지 설명해 주면, 여기는 북제국의 가장 뜨거운 여름날에도 녹지 않는 눈이 꼭대기에 쌓여 있는 곳이야. 어떤 데인지 감이 와?”
만년설이 쌓여 있다는 거네.
“그대로 넘어가는 건 무리겠군요.”
“맞아. 정확히 말하자면 가능은 한데 너무 위험하고, 굳이 그런 수고를 들일 필요는 없다는 거지.”
지젤은 우리가 그려 놓은 선 위에 작게 ‘X’ 표시를 그려 넣고는 지도엔 표시되어 있지 않은 산맥의 외곽을 따라 둥글게 돌아가는 곡선을 그려 넣었다.
“이게 돌아가는 것같이 보이지만, 중간에 넓은 강이 있거든? 정확히는 운하인데. 운하가 뭔지는 알아?”
그녀는 혹시나 내가 자신의 말을 이해 못 할까 봐 엄청나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면 내 상식과 지적 수준을 가늠하고 있는 것이거나.
“웬만한 용어는 다 알고 있으니, 굳이 그렇게 매번 물으실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다행이긴 한데… 대신 나중에 딴소리하긴 없기다?”
“예.”
“하여튼 여기는 북제국을 관통하는 판트라 운하가 있어서 해상 무역이 활발하게 이뤄지거든?”
“배를 구해서 운하를 따라 이동할 생각이군요. 해상 무역이 활발한 만큼 배를 구하기도 쉬울 거고요. 더군다나 해상 무역이 활발하다면 많은 돈이 오갈 테니, 북제국의 귀족들이 눈에 불을 켜고 지켜보는 덕에 치안도 나쁘지 않겠죠.”
“어, 음… 그래, 맞아.”
지젤은 두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헛기침을 몇 번 하고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운하를 따라 이동하면서 주변의 좌표들을 대충 수색하면 될 거야. 대신 그러면 몇 군데 못 들르는 위치가 생기기는 하는데, 이곳들은 너무 외진 곳이라 일단 운하로 이어진 강이 거치는 도시 주변을 모조리 수색하고 나서 찾아가는 편이 훨씬 시간이 절약되지 않을까 싶어. 어때?”
어쩌고 자시고, 여기서 제대로 된 북제국의 지리를 아는 사람이 지젤밖에 없었다. 쟈멜도 알기는 아는 듯했지만… 큰 도움이 되지는 않을 것 같고.
고개를 돌려 다키아를 바라보자 그녀는 경탄이 담긴 눈으로 지젤을 지켜보다 입을 열었다.
“친구인 쟈멜하고는 다르게 엄청 똑 부러지네요?”
쟈멜하고 비교하는 한마디에 지젤은 아주 질색하는 표정을 짓고서 빠르게 답했다.
“칭찬은 고마운데, 쟈멜하고 비교를 하면 누구라도 똑 부러진 사람이지 않을까 싶은데.”
“야! 너 진짜 자꾸 나한테 그럴래?”
“그럼 내가 뭐 틀린 말 했… 아야!!! 왜 다친 사람을 꼬집고 난리야!!!”
쟈멜은 호다닥 도망쳐 내 등 뒤에 숨어서 지젤을 째려보았다.
“자꾸만 마르낙 사제님의 심복인 내 위치를 위협한다면 아무리 친구라고 해도 나는 얼마든지 비정해질 수 있어!!! 조심하라고!!!”
“저 얼빠진 둔탱이가 진…”
지젤은 무어라 한 사발 걸쭉한 욕을 뱉어 내려다 내 눈치를 보곤 넘쳐 나오려던 구수한 욕들을 집어삼켰다. 지젤이 쟈멜을 이리저리 깎아내리긴 했지만, 쟈멜이 이렇게 한 점 가감 없이 모든 감정을 다 드러내 보이는 건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진짜 친한가 보네 이 둘은.
나는 일단 둘 사이를 대충 중재하고 온갖 선과 점들로 가득해진 지도를 가리켰다.
“그럼 일단 저희는 어디로 가야 하는 겁니까?”
지젤은 쿡 하고 지도 위의 한 점을 찍었다.
“에베도스. 운하로 이어진 도시들 중 가장 북쪽에 있는 이 도시로 가야 해. 이곳은 내가 외워 온 좌표들 중 하나인 만큼, 괜찮은 배를 수배하면서 겸사겸사 이곳에 있을지도 모르는 성물의 행방을 찾아보는 게 어떨까 싶어.”
우리는 만장일치로 지젤의 의견을 따라 에베도스로 향하기로 결정했다.
***
마르낙 일행이 떠나고 며칠 뒤, 그들이 묵었던 장소로 한 사내가 나타났다.
검은 모자와 코트. 입을 가린 채 허리춤에 찬 두 자루의 검집을 찬 사내는 무릎을 꿇고 바닥의 흙을 한 줌 집어 비벼 댔다.
“망자의 흔적들이라… 그런데 야영을 했다? 기괴하군.”
망자와 어둠을 벗 삼아 돌아다니는 안식의 나팔수들은 아무리 어두운 밤에도 불을 피우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곳에 야영의 흔적이 남아 있다면 그건, 안식의 나팔수 이외에 다른 누군가가 있었다는 뜻.
“흠.”
지난 며칠간 연락이 닿지 않은 스승이 남긴 표식은 이곳에서 끊겼다. 그렇다면 그 뜻은 단 하나.
“당했군. 노친네. 내가 그렇게 늙었으면 좀 쉬라고 충고했건만. 말귀를 안 들어 처먹더니.”
눈물은 없었다. 사내는 한참 동안 주변의 흙을 그러모으곤 주변의 나무들을 대충 베어 내고 다듬어 묘비를 만들어 그 앞에 꽂아 넣었다. 그는 묘비 앞에 서서 두 눈을 감고 짧게 읊조렸다.
“딱 보니 시체도 못 남기고 돌아가신 거 같아. 굳이 찾진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차피 우리네 일이란 게 시체 남기기 어려운 일이라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설명하신 건 스승님이시니, 열심히 찾는 시늉도 안 했다고 타박하시면 진짜 그때는 제대로 한 방 맞을 줄 아시길.”
사내는 짐 속에서 한 병의 술을 꺼냈다. 그는 술병을 한참이나 째려보다 한숨을 푹 내쉬곤 뚜껑을 열어 무덤 위에 뿌렸다.
“이거 나 뒈질 때 마시려고 아끼고 또 아낀 건데…”
결국 그는 마지막 미련을 못 버리고 술이 모조리 무덤 위로 떨어지기 직전, 가까스로 병을 꺾어 한 모금의 술을 지켜 냈다. 사내는 병과 무덤을 번갈아 보곤 피식 웃었다.
“혼자 마시면 적적할 테니 저도 한 모금만 합니다.”
대충 입 안에 술을 털어 넣은 사내는 이내 이마를 찌푸리고 술병을 대충 내던졌다.
“드럽게 비싸고 맛있는 술이라더니. 존나게 쓰네 진짜. 하, 이거 진짜 왜 이리 쓰지.”
그는 홀로 서서 연신 쓰다는 말을 중얼거리곤 내던졌던 술병을 다시 집어서 챙겼다.
“나중에 자는 데다 쓰레기 버리고 갔다고 뭐라 할까 봐 챙겨 갑니다. 그리고…”
사내는 한 손으로 검은 모자를 푹 눌러썼다. 장갑에 묻었던 흙이 그의 검의 모자 위로 묻어났다. 그는 자신의 눈을 감춘 채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스승님 그렇게 만든 놈도 곧 따라 보낼 테니, 조금만 기다리고 있으쇼. 당신한테 과분한 이 잘난 제자 ‘울토르’가 사냥하고자 해서 실패한 놈들은 아직 단 한 마리도 없으니까.”
***
“그거 진짜 쓸 거야?”
쟈멜의 물음에 지젤은 테르지오가 만든 수레에 앉아 쇠꼬챙이와 검으로 이루어진 한 쌍의 무기를 툭 하고 두드렸다.
“그럼 이 아까운 걸 그냥 거기 버려? 애초에 이거 따지고 보면 내가 손해야. 나는 그 죽은 노친네한테 내가 가지고 있던 돈이랑 짐을 모조리 뺏겼다고. 그러니 이거라도 챙겨야지.”
쟈멜은 붕대를 둘둘 감은 지젤의 옆에 놓인 검과 꼬챙이를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뭔가… 뭔가 찝찝한데…”
“됐고, 산적들은 어떻게 됐어?”
“아, 그건 마르낙 사제님이랑 다키아 공… 아니, 다키아가 직접 다 처리했어.”
다키아가 말을 편하게 해도 된다고 몇 번이나 쟈멜에게 당부했지만, 쟈멜은 여전히 습관적으로 다키아의 이름을 부를 때 존칭을 붙이곤 했다.
지젤은 수레 위에 앉아 저 멀리서 시체들을 한 줌의 신성으로 화해 흡수하는 마르낙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복잡한 밑 준비도 없이 시체에서 신성을 흡수해 사용한다니. 저건 그야말로 기존의 체계를 부수는 괴물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서 알짱대는 초록 머리 여인이자, 이 땅 위에 떨어진 악신.
부패의 어머니.
지젤은 그녀가 인간으로 위장한 신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까무러칠 뻔했다. 도저히 말이 안 되는 이야기여서.
지금 리베라티오의 두 파벌이 추구하는 ‘강림’과 ‘추락’ 방식은 조금씩 다를지언정 둘 모두 드높은 천상에 거주하는 신을 이곳으로 불러내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뜻을 같이했다.
지젤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 개종하고 싶네…’
재빨리 신성모독적인 생각을 털어 낸 그녀는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운하와 도시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도시에서 몇 시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산적질이라니, 이거 에베도스에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한 건가?”
옆에 서 있던 쟈멜은 친구의 중얼거림에 기다렸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마르낙 사제님과 함께면 가는 도시마다 사고가 생기는 법이야! 혹시 아무 사고가 없으면 곧 생길 거고! 분명 저기도 이미 무슨 일이 생겨 있을걸?”
“그게 말이 되는 이야기라고 생각해?”
쟈멜은 키득키득 웃어 댔다.
“너도 겪어 보면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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