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254)
254 화 청염(靑炎).
청염(靑炎).
찰팍.
핏빛 액체가 북제국의 수도 위로 쏟아붓길 한참. 늙은 황제와 귀족들의 치열한 전투가 이뤄지는 와중에 시끄러운 비명들로 가득하던 제국의 거리는 조금씩 뒤늦게 찾아온 고요가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수도의 외곽, 내려앉은 고요 속에서 대지 위에 내려앉은 핏빛 액체들은 다 같이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방향으로 끊임없이 흘러갔다. 그래, 계속 흘러만 갔다.
***
“가보렴.”
나긋한 한마디. 프리디야 스승님은 눈앞에 맹신(盲信)의 하바스를 두고 있음에도 너무나 여유롭게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는 나를 바라보았다.
“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단다.”
“딱히 한 적도 없고, 앞으로 할 생각도 없습니다.”
내 대답에 스승님의 깊고 푸른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건 조금 서운하구나.”
“그럼 먼저 가보겠습니다.”
프리디야 스승님이 리베라티오의 선지자를 상대한다. 그건 처음부터 정해진 계획이었다. 적의 가장 강한 말은 우리 쪽에서 쓸 수 있는 가장 강한 말로 상대하는 것이 옳았으니.
“가죠. 펄리.”
“그래그래!”
맹신(盲信)의 하바스는 우리의 대화를 전부 들었음에도 별다른 반응하지 않았다. 그 행동은 마치 내게 너희는 어서 지나가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예감처럼 나와 펄리가 자리를 박차고 거대한 광장을 가로질러 하바스의 등 너머에 있는 출구로 달려감에도 우리는 단 한 번의 방해조차 받지 않았다.
출구를 열고 빠져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펄리가 말을 툭 던졌다.
“이번엔 매정하게 뒤 한 번 안 돌아보네?”
“프리디야 스승님은 정말 제가 주제넘게 걱정할 필요가 전혀 없으니까요.”
스승님은 내가 아는 인간 중 최강이었다. 내게 있어 그녀가 꺾이거나 부러지는 건 정말이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거기다 나는 아직도 스승님의 ‘진짜’ 실력, 그 깊은 밑바닥을 단 한 번도 마주해 본 적이 없었다.
과연, 진심을 드러낸 스승님은 어디까지 하실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 등에 살짝 소름 돋았다. 나는 잽싸게 무의미한 상념을 떨쳐내고 여태 안고 있던 어머니를 향해 말을 꺼냈다.
“이제 슬슬 손으로 돌아오시지요. 지금부턴 최대한 빠르게 갈 겁니다.”
‘살해!’
아까 멋들어지게 총 한 번 쏘신 거로 만족하신 건지, 어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순순히 손으로 돌아와 내 품속으로 모습을 감추셨다.
당장에라도 뛰어갈 만반의 채비를 끝마쳤다. 내가 어머니와 말을 나누는 사이에 펄리는 출구 너머에서 우리를 반긴 널따란 복도를 살펴보았다.
“이야기는 다 끝났어?”
“예.”
“그럼 얼른 가자!”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힌 복도를 따라 열심히 달리길 한참. 펄리와 나는 곧 당혹스러운 상황과 마주쳤다.
꼬이고 꼬인 복도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신의 그릇이 있는 곳으로 향하는 문이 아니라 그저 단단하게 막힌 벽이었다.
“미로군요.”
“미로네.”
벽을 이리저리 매만진 펄리는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이 길 찾기 놀이에 어울려 주기엔 슬슬 시간이 조금 촉박할 거 같은데.”
“오히려 그걸 노리고 있는 걸지도 모릅니다. 어떻게 되든 저들은 신을 강림시키는 것이 목적이고, 기지 내부에 침입한 저희를 직접 제압하는 건 부차적인 문제니까요.”
오히려 맹신(盲信)의 하바스가 직접 우리, 아니 스승님과 한 판 붙기 위해 모습을 드러낸 것이 이상한 일이었지.
적들에게 기지 내부의 구조를 직접 조작할 수 있는 자가 있는 이상, 저들은 그저 우리가 그릇에 도착하지 못하도록 길을 계속 이리저리 바꾸기만 하면 될 뿐이었다.
“이럴까 봐 최대한 빠르게 돌파해보려고 한 거였는데, 변수 때문에 일이 조금 꼬였네.”
펄리는 짧게 혀를 차고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두 번째 계획대로 가자.”
“알겠습니다. 마침 이 복도도 충분히 넓군요.”
나는 가볍게 눈을 감고 조용히 기도했다.
“어머니.”
짧은 한마디. 그와 동시에 찢어지는 공간의 틈 너머로 익숙한 포효가 들려왔다.
– 그 아 아 아 아 아 아 아 ! ! !
나는 찢어진 틈을 비집고 나오는 친숙한 거인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눈앞의 거추장스러운 벽들을 모조리 부숴주십시오.”
– 그 아 아 아 아 아 ! ! !
부패의 거인은 짧게 답하곤 그대로 그 거대한 거체로 우리 앞을 가로막은 벽에 몸을 들이박았다.
쾅! 쾅! 쾅! 쾅! 쾅!
거인은 그 거체와 괴력을 이용해 끊임없이 길을 부수며 앞으로 나았다.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흙먼지와 쏟아지는 벽의 조각들 속에서 나와 펄리는 앞서 달려가는 부패의 거인의 뒤를 쫓아 달려나갔다.
***
바닥을 따라 흩어진 연둣빛 장발이 맹신(盲信)의 하바스가 몸을 일으킴에 따라 조용히 그를 따라 한 곳으로 모여들었다.
“이제야 둘만 남았군. 프리디야.”
프리디야는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몸을 일으키는 하바스를 바라보았을 뿐.
조금 전, 마르낙이 떠나기 직전까지 항상 입가에 걸려있던 희미한 미소는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도저히 감정을 읽어내기 힘든 무표정만이 그녀의 얼굴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하바스는 그런 프리디야를 보며 한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아니, 애초에 ‘달인’이란 것들은 한시도 경계를 늦출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신만의 아집으로 똘똘 뭉친 달인이란 것들은 인간의 ‘오만’이 살아있는 무력 덩어리로 돌아다니는 것과도 같았다.
프리디야는 푸른 검, 절명을 늘어뜨리고는 천천히 그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열었다.
“처음부터 네 전부를 꺼내는 게 나중에 억울하지 않을 거다.”
“큭큭.”
하바스는 비집어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오만하군. 프리디야. 네가 아무리 ‘달인’이라고 해도 그 경지가 널 무적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기나긴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많은 천재들이 있었고, 당연히 달인 또한 수없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이 비록 가진바 무력이 대단하다고 하나, 힘에 꺾여 패배한 달인들 또한 수없이 많았다.
하바스는 프리디야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나 또한 한 때, 가진 바 무를 갈고 닦다 달인의 경지에 닿을 뻔한 적이 있었다. 그때 나는 본능적으로 느꼈지. 이 경지에 닿게 되는 순간, 나는 더 이상 마냥 신실한 자로 남을 없게 되리라는 걸. 그렇기에 나는 선택해야만 했다. 이대로 일신의 경지를 위해 달인에 닿아 신을 향한 경애를 잃느냐, 그게 아니라면 이대로 남아 신을 향한 경애를 지키느냐. 나는 그 기로에서…”
하바스는 목을 향해 날아오는 푸른 검날 때문에 채 말을 다 완성하지 못했다. 그는 다급하게 몸을 뒤로 날려 프리디야의 검을 피해내며 성난 외침을 토해냈다.
“이 비겁한 년이!!!”
프리디야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 무심하게 검격을 이어나갔다.
애초에 굳이 입을 열어 쓸데없이 말을 꺼낸 것도 하바스가 말을 하길 기다렸다 기습하기 위함이었다.
방심한 순간 일격에 하바스를 죽여버릴 심산이었으나 예상 이상의 속도에 프리디야는 하바스에 대한 평가를 조금 수정했다.
그녀의 머리가 침착하게 계산을 하는 와중에도 프리디야의 푸른 검날은 선명한 궤적을 그려내며 하바스를 몰아붙였다.
매섭게 몰아치는 수십의 검격. 그러나 그중 단 하나도 하바스의 몸에 닿지 못했다. 하바스는 또 한 번 능숙하게 프리디야의 검을 피해내며 웃었다.
“하하하! 어떠냐! 범인들은 너희 ‘달인’이 무적이라는 환상이 있는 것 같지만, 나는 다르다! 나는 너희 달인들의 한계를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지!”
대답 대신 내리그어지는 검에 하바스는 다시 한 번 여유롭게 푸른 검날을 피해내며 말을 이어나갔다.
“너희가 빠르고 강하긴 하지만, 찾아보면 너희보다 빠른 생명체는 존재하고 너희보다 힘이 강한 존재도 존재하지! 그리고 지금의 내 육체는 프리디야, 너보다 훨씬 빠르고 강하다!”
툭.
단단한 무언가가 하바스의 등에 닿았다. 하바스는 직감적으로 자신의 등에 닿은 것이 이 거대한 광장의 벽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대체 언제 여기까지 밀린 것이지?
떠오른 잡념보다도 빠른 검격이 다가왔다. 하바스는 머릿속에 떠오른 잡념을 밀어냈다. 사실, 뭐가 됐든 상관없었다. 자신이 벽으로 내몰려봤자, 프리디야의 검격은 그에게 있어서 보고도 피할 수 있는 수준의 속도일 뿐.
거기다 슬슬 반격을 시도해도 좋을 때였다. 바로 자신이 겪었던 굴욕을 갚아주기 위한 첫 계단을 오르기엔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순간.
하바스는 여태까지와 달리 몸을 피하는 대신 눈앞으로 다가오는 검의 옆면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아니, 후려치려 했다.
그의 주먹이 검의 옆에 닿기 직전, 검이 빨라졌다. 그래, 검이 갑자기 빨라졌다.
있을 수 없는 현상.
계산을 벗어난 그 속도에 하바스는 무심코 검 너머에서 푸르게 가라앉은 여인의 눈을 보았다. 한 치의 감정조차 보이지 않아 유리알 같은 푸른 눈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여태 일부러 전력을 다하지 않았구나.
바로 지금 이 단 한순간, 자신의 신체 박자를 엉클어뜨리기 위해서.
푸른 검날은 허공을 친 주먹을 지나 그대로 하바스의 텅 빈 몸을 향해 다가왔다.
절체절명의 상황 속에서 하바스는 웃었다.
쉬지 않고 말을 하느라 비록 작은 실수가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원래 압도적인 육체란 것은 작은 실수를 수십 번해도 언제나 또 한 번의 기회를 주는 존재인 것이기에.
푸른 검날이 그의 몸을 베어 갈랐다. 튀어 오르는 붉은 핏방울들. 프리디야는 자연스럽게 검로를 비틀어 쉬지 않고 하바스의 왼팔을 잘라냈다. 마지막으로 하바스의 목을 쳐버리려 했지만 하바스는 빠르게 오른팔을 마저 희생해 막다른 벽에서 몸을 빼냈다.
“하하하하하!!!”
하바스는 여전히 웃었다. 양팔이 잘리고 상체의 반절이 뜯겨 너덜너덜한 상태로 웃었다.
“내 방심까지 유도해냈지만, 너는 내 목을 치진 못했군! 프리디야! 이게 뭘 의미하는지 아나?”
그 말과 동시에 프리디야의 검이 새긴 절단면을 따라 하바스의 피부와 몸이 빠르게 괴사해나갔다. 곧, 완전히 죽어버린 절단면이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 빈자리에서 빠르게 새로운 피와 살점들이 튀어나와 하바스의 몸을 재구축했다.
“보이나? 프리디야! 그래, 무척 당황스럽겠지!”
달인에게 입은 상처는 재생이 더뎌진다. 그것이 재생력을 강점으로 삼은 괴물들이 달인들에게 속수무책으로 힘을 못 쓰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지금의 내 육체는 신께서 내려주신 권능으로 개체의 구분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는 상태! 즉, 나는 ‘나’로서 온전히 하나인 동시에 수백, 수천, 수만의 ‘나’가 결합된 존재!!!”
완전히 멀쩡해진 하바스는 거침없이 웃었다.
“즉, 네가 아무리 나를 베어낸다고 해도, 이 ‘나’는 너에게 베이지 않았기에 무한히 재생할 수 있는 것이다! 크하하하!!!”
하바스의 새하얀 피부 위로 밝은 연록 빛 줄기들이 빠르게 솟아올라 굵은 줄기 다발로 뭉쳐들었다.
“힘과 속도 모두 내가 우월한 데다, 달인으로서의 네 강점도 이제 무용해졌다! 프리디야, 과연 언제까지 네가 버틸 수 있을까? 제발 내 마음이 족할 만큼 오래 버텨줬으면 좋겠군.”
프리디야는 잠깐 자신의 푸른 검을 내려다보곤 조용히 검집에 집어넣었다. 그리고는 여태 등 뒤에 메고 있었던 붕대로 칭칭 감아둔 물건을 꺼냈다.
툭.
가볍게 바닥을 두드리자 붕대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리고 거대한 푸른 검신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의 애검 절명(絶命)과 한 쌍을 이루는 푸른 대검 절체(絶體)가 여태 감춰두었던 제 존재를 과시했다.
프리디야는 한 손으로 가볍게 대검 절체(絶體)를 한 바퀴 돌려보고는 자세를 낮췄다.
아무래도 지금 그녀의 앞을 막은 적은 평소보다 크게 여러 번 베어야 하는 것 같았으니.
“성화(聖火)시여.”
시리도록 푸른 불꽃이 저만큼이나 푸른 검신을 따라 내달렸다.
옳은 가치를 좇기 위해서도, 약자를 구하기 위해서도, 악을 멸하기 위해서도 아닌.
그저 프리디야가 원했기 때문에 찬란한 청염(靑炎)이 환히 타올라 그녀를 밝게 비추었다.
지난 수백년간 당연히 그래왔던 것처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