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03)
303 화 고객.
고객.
“흠.”
천천히 주변을 둘러본 나는 절망을 뽑아 어깨에 걸치고서 고개를 까딱였다.
“강도 되기 직전인 사람의 입장에서 딱 한 마디만 하자면 나는 지금 내 손에 든 이 사과하고 내 발밑에 있는 사과 한 통을 돈 주고 살 의향이 있거든? 네가 이 거래를 용인만 한다면 나는 날강도에서 고객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어.”
내 말을 듣자마자 솜니아가 내 바짓단을 잡아당기며 속삭였다.
“…그냥 다 죽이면 여기 있는 거 다 우리 꺼야.”
“이 싸이코패스 꼬맹이가 뭐라는 거야. 우리 꺼 하면? 네가 여기 있는 거 다 챙길래? 콩만한 게 아주 욕심보만 커가지고.”
이 녀석 대체 영주는 어떻게 하고 있었던 거지? 아. 영주 업무는 그 시건방진 할아범이 하고 있었지.
이거 어찌 보면 그 권력욕 덩어리 할아범이 옳은 선택을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겠는데.
“그게 무슨 헛소리인가! 무단으로 침입해서 물건을 도둑질하다 이젠 물건을 강제로 팔라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소리를 지껄이고 있어!”
내 제안에 중년 상인은 당연한 분노를 표출했다.
시야 한구석, 언제 나타났는지 모를 붕대투성이 사내가 나를 지그시 주시했다. 상투스 흉내나 내는 그놈이.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저 날 지켜만 보았다. 아무 말을 하지 않아도 거슬리긴 마찬가지라 중지를 들어 녀석에게 내보이고 상인을 향해 말했다.
“악신의 숭배자들을 이용해서 몰래 물건을 빼돌리려는 걸 보면 너도 마냥 켕기는 게 없지는 않을 텐데. 그냥 좋게좋게 돈 받고 끝내지?”
아삭.
사과를 심째로 씹어 삼킨 나는 상인의 선택을 느긋하게 기다렸다. 상인은 여전히 분노한 기색을 숨기지 않은 채 악신의 숭배자들을 향해 말했다.
“처리해주시오! 웃돈이라면 얹어드리겠소!”
최악의 선택지를 고르네.
상인의 말에 금발의 사내의 뒤에 서 있던 악신의 숭배자 둘이 당장에라도 공격할 태세를 갖췄다. 여전히 생글생글 웃고 있던 금발의 사내가 손을 뻗어 나머지 둘을 진정시켰다.
“잠시, 잠시만요. 싸우지 않는 편이 낫겠습니다. 그냥 저분이 줄 때 돈 받으시죠. 덴티스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요! 당신들이 정 못하겠다면 내 사람들을 쓰겠소! 이…”
상인이 길길이 날뛰며 창고 밖 용병을 부르려 했지만, 바닥에서 치솟은 그림자가 상인의 입을 틀어막았다. 갑자기 입을 막힌 상인이 진심으로 뭐하냐는 듯이 금발 사내를 노려보았지만, 금발 사내는 여전히 웃는 낯으로 조곤조곤 말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밖에 죽어있는 거대한 마수를 누가 죽인 건지 제가 알아낸 것 같거든요.”
“읍읍?!”
무어라 외치던 상인은 이내 두 눈을 크게 뜨고는 나와 금발 사내를 번갈아 보았다.
최소한의 눈치는 있나 보네. 그나저나 영주가 얼마나 정보를 잘 통제해놨으면 내가 죽인 것도 몰라? 아니, 것보다 저 악신의 숭배자놈들은 어떻게 안 거지? 정작 쟤네들은 이 도시에 온 지 얼마 안 된 거 같아 보이는데.
“조금 진정하신 거 같으니 입을 막은 그림자를 풀어드리겠습니다. 부디 어리석은 짓은 하지 마시길.”
정중한 말과 함께 금발의 사내가 권능을 풀자 상인은 울그락붉그락한 얼굴로 나와 금발 사내를 번갈아 보다 한숨을 푹 내쉬었다.
“…돈 받겠소.”
“현명한 판단이야. 자, 돈.”
나는 허리춤에 차고 온 주머니를 상인에게 던졌다. 얼떨떨한 얼굴로 주머니를 받아든 상인은 곧장 주머니를 풀고 안에든 걸 꺼내 확인했다.
“화, 황금?”
“그 정도면 충분하지? 이 사과 한 상자 우리가 가져간다?”
굳어있던 상인의 얼굴이 대번에 풀리며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거기 있는 사과 상자, 가져가고 싶은 만큼 가져가도 좋소.”
“됐어, 한 상자면 충분해.”
“…황금?”
상인이 외친 황금이라는 말에 솜니아가 지그시 내 얼굴을 바라보았다. 녀석이 뭔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 뻔해서 나는 인상을 팍 찌푸렸다.
“레페랑 페르카 가방에서 빼내온 거 아니니까 그런 식으로 쳐다보지 마.”
“…정말 아냐?”
“내가 걔네 코 묻은 돈을 왜 훔쳐! 이게 자꾸 내가 봐주니까 점점 더 기어오르네? 안 되겠다. 너 꿀밤 한 대 맞자.”
매콤한 꿀밤을 치켜들자 솜니아가 사과 하나를 챙기곤 쪼르르 달려 창고 물건들 틈 사이로 숨었다.
“저기.”
“왜?”
금발 사내는 내 바라보면 싱긋 웃었다.
“슬슬 저희 일을 시작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해. 나야 사과 한 통 샀으니 더 볼일도 없어.”
“좋습니다. 자자. 움직이죠.”
금발 사내의 신호를 기점으로 신성이 요동치더니 창고의 벽면에 새카만 그림자 덩어리가 동그랗게 퍼져나갔다.
일렁이는 새카만 그림자 속에서 건장한 일꾼들이 하나둘 씩 튀어나와 창고에 적재된 상자들을 하나씩 차곡차곡 그림자 속으로 옮겨나가기 시작했다.
“감독 부탁드릴게요.”
금발 사내는 같이 온 두 명에게 일을 맡기고는 사과 한 통을 어깨에 들쳐메고 있던 내게로 다가왔다.
왜 오는 거지?
내가 쳐다보자 금발 사내가 나를 향해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저는 ‘이어진 그림자’를 모시고 있는 마라트라고 합니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서 정말 반갑습니다. 마르낙 사제님.”
반짝이는 금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새카만 한 쌍의 두 눈에 내 얼굴이 비쳤다.
“…마르낙?”
어느새 다시 내 옆으로 쪼르르 온 솜니아가 마르낙이라는 이름에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 이름으로 날 부르지 마. 쳐 죽여버리기 전에.”
마라트라고 자신을 소개한 악신의 추종자는 나를 불쾌하게할 의도는 전혀 없다는 듯이 여전히 생글거리는 낯으로 정중하게 말했다.
“그럼 어떻게 불러드리면 괜찮을까요?”
“연. 그나저나 너, 날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마라트는 새카만 두 눈으로 내가 방금 잠시 빼 들었던 절망을 향해 눈짓했다.
“아까 뽑아 드셨던 푸른 검을 보고 알아챘습니다. 푸른 검날을 지닌 검이란 게 그리 흔하지는 않은 검이니까요. 제가 데리고 온 다른 두 친구는 지난 5년 사이에 사제가 된 지라 마르낙 사제… 아니, 연님과 몰라서 싸우려 들었지만 저는 저 두 친구들보다는 조금 더 오래된지라 5년쯤 전에 데스페라시오님이 우리 사제들에게 해주셨던 경고를 기억하고 있거든요.”
리베라티오를 이끄는 여섯 선지자 중 하나, 절망(絕望)의 데스페라시오. 그 은근히 재수 없는 자식이 내 이야기를 하고 다녔다고?
“뭐라 경고했는데?”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이 마주친 자가 검날이 푸른 검을 빼 들거든 냅다 죽을힘을 다해 도망치는 게 좋을 거라고 하셨었죠.”
“그런 것치고는 정작 너는 도망을 안 치고 있는데?”
마라트는 짐을 옮기는 일꾼들을 향해 힐긋 눈짓했다.
“저야 돈 받았으니 일을 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지난 5년 동안 어디서 뭘 하셨었습니까? 당신에 대한 소문은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서요.”
“네 알 바 아니야.”
“그러지 말고 조금만 이야기보따리를 푸시죠. 그러면 저도 물으시는 질문에 성심성의껏 답을 해드리겠습니다.”
녀석은 여전히 생글거리는 낯으로 나를 친근함을 듬뿍 담아 쳐다보았다.
대외적인 일을 하는 자라서 인지는 몰라도 마라트는 흔치 않은 금발흑안이 무척 잘 어울리는 친근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너, 리베라티오 소속이야?”
“아뇨. 리베라티오 소속이라기보다는 제가 소속된 교단이 리베라티오와 긴밀한 협력관계를 맺고 있는지라 서로 자주 일을 도와주곤 하는 편에 가깝죠.”
“그래서 리베라티오에 대해선 잘 모른다?”
“아뇨.”
마라트는 고개를 저었다.
“뭘 물으시든 어느 정돈 대답해드릴 수 있을 정도로 잘 아는 편입니다.”
“좋아. 말해줄게. 나는 지난 5년 동안 산속에 틀어박혀서 검만 갈고 닦았어. 약간의 성취를 얻어서 얼마 전에 하산했고. 됐어?”
“흐음.”
그는 천천히 내 위아래를 훑어보더니 다시 물었다.
“유지의 사제복은 왜 안 입고 다니시는 겁니까?”
“가짜 사제 흉내는 이제 질려서. 이제 내가 물어본다?”
나는 빙그레 웃으며 친근하게 질문을 던졌다.
“리베라티오에 사도가 몇이나 있어?”
“사도요…? 그게 뭐죠?”
사도를 모른다고? 이 자식 날 속여서 대충 얼버무리려는 건가?
마라트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지만, 이 자식이 연기를 잘하는 건지 그게 아니면 정말 모르는 건지는 몰라도 진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단 표정으로 날 쳐다보고 있었다.
내가 사도를 사냥한다는 정보가 마라트의 귀까지 닿았을 리는 없을 테니, 날 두려워해서 숨길 리도 없는데.
“진짜 몰라? 그거 있잖아. 뒤통수에 빛덩어리 띄우고 권능 쓰는 사제들 말이야. 최근 나타나기 시작한 녀석들.”
“아.”
어딘가 짚이는 것이 있는 건지 마라트는 그제야 좀 알겠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저희 교단의 성녀(聖女)님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성녀?”
하긴 사도라는 명칭은 임페트로가 그렇게 부른 거였지, 호칭 자체가 사도라고 딱 정해져 있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뭐가 됐든 좋았다. 운 좋게 새로운 사도의 존재를 알아냈으니.
“성녀든 뭐든 좋으니까 한번 만나보고 싶은데.”
만나서 머리통 한 번 쪼개봐야 하니까.
“으음. 성녀님을 만나 뵙고 싶다라… 이건 제 선에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군요. 누굴 만나고 말고는 성녀님 본인의 의사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니까요.”
곧바로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마라트의 반응은 그리 부정적이지 않았다.
“일단 제가 이번 일을 끝마치는 대로 교단 측에 소식을 한 번 넣어보겠습니다. 그런데 용무는 뭐라고 전해드리면 될까요?”
“음… 내가 큰일을 도모하는 중인데 자그마한 도움이 필요하다고 전해.”
“큰일? 어떤 큰일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그거까지는 넌 몰라도 되고.”
“일단 알겠습니다. 이거 받으시죠.”
마라트가 내민 건 자그마한 검은 구슬이었다. 나는 구슬을 받아 품속에 챙기며 물었다.
“이거 뭔데?”
“성녀님이 그리하기로 마음먹으신다면 그 구슬을 매개로 나타나실 겁니다.”
권능의 매개체 비슷한 건가 보네. 아마 위치추적 비슷한 기능도 달려있을 확률이 높겠지. 이걸 들고 다니면 내 위치가 꼬박꼬박 마라트의 교단 쪽으로 전해지는 건가.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새로운 ‘사도’와 접촉할 수 있는 기회는 얻어내야만 했다.
내겐 직접 사도를 찾아내는 능력이 없었으니까.
“좋아. 이제 다 됐어?”
“일단은 그런 것 같군요.”
“성녀한테 내가 열렬히 보고 싶어 한다고 최대한 빨리 전해.”
마라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겠습니다.”
***
사과 한 통을 어깨에 둘러메고 거리를 걷자 조용히 따라오던 솜니아가 불쑥 입을 열었다.
“…마르낙이 뭐야?”
“뭐긴, 물러터져서 지리멸렬하게 실패한 놈 이름이지.”
“…실패?”
“그래, 실패. ‘함께’니 ‘동료’니 뭐니 하면서 유유자적 놀고먹고 하면서 다니다 된통 실패한 놈이지. 녀석에겐 절박함이란 게 없었어. 처음부터 절박했다면 그토록 비참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솜니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새하얀 눈으로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왜 남일 이야기하듯이 말해?”
“내 기준으로는 50년도 더 전 일이니까. 이젠 기억도 잘 안 나.”
오늘 처음으로 한 거짓말.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현재가 비참할수록, 행복했던 과거는 수없이 되뇐 끝에 더욱 또렷이 새겨지는 법인데.
“…5년 지났다며? 어떻게 50년인데?”
“사과 통제당하기 싫으면 더 캐묻지 마. 대답해줄 기분 아니니까.”
“…쫌생이.”
***
“…사과 하나 줘.”
“오는 길에 벌써 2개 더 줬잖아.”
“…과일이 오랜만이라 더 맛있어.”
“이 꼬맹이가 혼자 아주 한 통 다 먹을 기세네. 이거.”
두런두런 떠들며 우리가 머무는 방문을 열어젖히자 우당탕탕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바닥에 엎어졌다.
“켈록. 켈록. 켈록.”
바닥에 쓰러진 붉은 머리 여인, 아도라는 피 섞인 기침을 연신 토해냈다. 저 발칙한 마법사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는 자명했다.
레페의 침대 위에 있는 가방이 하나 열려있었으니까.
가방 안에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황금들이 반짝반짝 빛났다.
나는 목에 붕대를 둘둘 감은 마법사를 보며 씨익 웃었다.
“봤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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