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32)
332
원했던, 원치 않았던 재회.(다키아 일러 스포일러 버전)
원했던, 원치 않았던 재회.
“하압!”
공중으로 낮게 떠오르는 2개의 육면체 주사위. 짧은 부유를 끝낸 주사위가 바닥을 굴러 숫자를 드러냈다.
6과 4. 합계 10.
“앗싸! 시작부터 좋아!”
쟈멜은 재빨리 ‘인생 게임’ 시작지점 카드 뭉치 중 합계 10단계의 재능 카드에서 한 장을 뽑았다. 재빨리 뽑아낸 카드에 적힌 문자를 읽어냈다.
‘무의 재능(상급).’
아주 좋은 시작이었다. 근래에 뽑은 재능 중에 가장 좋은 재능. 쟈멜은 씨익 웃으며 자신의 앞에 앉아 있는 펄리를 쳐다보며 말했다.
“주사위 굴려! 얼른!”
“응. 응.”
고개를 끄덕인 펄리가 굴린 두 개의 주사위가 멈추고 드러난 숫자는 ‘2, 3’. 펄리는 합계 5의 재능 카드에서 한 장의 카드를 뽑았다.
‘제법 큰 가슴(매력 보정).’
“이런 카드도 있었나? 흐음.”
둘은 시작지점에 각자의 말을 올리고 게임을 시작했다.
먼저 이어진 쟈멜의 선공.
‘귀족의 양자로 들어감.’
‘후계자로 인정받음.’
‘중앙 정계 진출.’
“아하하하핫! 오늘이 바로 날이네! 이히히!”
연속해서 제법 좋은 숫자와 카드들을 뽑은 데다 재능의 보정을 받아 쟈멜은 폭발적으로 업적 점수를 쌓아나가며 승승장구했다. 반면 펄리가 뽑은 카드들은 무척이나 평범했다.
‘농가의 여식.’
‘농사가 풍작임.’
‘소가 송아지를 순산함.’
이대로 가면 결국 업적 점수 차이로 펄리의 필패. 펄리가 다시 한번 주사위를 던지고 새로운 칸에 도착했다. 도착한 칸의 지시대로 이벤트 카드를 뽑자 선명한 글자가 그녀를 반겼다.
‘옆집 총각에게 청혼받음.’
“흐응. 얘는 내 가슴에 반했나 보네~.”
결혼은 제법 괜찮은 업적 점수를 주기에 좋은 카드였다. 하지만 펄리가 결혼해도 현재까지 업적 점수는 정계에 진출한 쟈멜의 압승.
“하지만 방심하지 않아! 왜냐! 나는 바로 승부사 쟈멜이니까! 하압!!!”
오늘, 쟈멜의 운은 끝 간 데를 모르는 듯, 그녀의 캐릭터는 연신 승승장구했다.
‘북부 야만족을 토벌 성공.(승진)’
‘남부 야만족을 토벌 성공.(승진)’
‘동부 야만족을 토벌 성공.(승진)’
무한한 승진을 거듭한 끝에 쟈멜의 캐릭터의 지위는 어느새 대장군. 반면, 펄리가 뽑은 카드들은 달랐다.
‘순산함.’
‘순산함.’
‘순산함.’
벌써 애만 셋. 펄리는 슴풍슴풍 애를 낳아대는 자신의 캐릭터를 보곤 키득키득 웃었다.
“내가 좀 순산형 몸매기는 해. 히히. 그런데 얘네 대체 얼마나 해대는 거야? 진짜.”
쟈멜은 완전히 아줌마가 되어가는 펄리의 캐릭터를 보며 씨익 웃었다.
“애만 낳아대선 날 이길 수 없어! 내 캐릭터는 벌써 30대에 대장군이라고!”
“그러게.”
이윽고 인생 게임의 파트가 40대에 접어들고 쟈멜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계승 전쟁 발발.’
‘내전 승리.’
‘가장 총애받는 신하.’
“어? 얘는 언제 결혼해? 나는 진짜 언제 결혼하냐고!”
펄리의 캐릭터에게로 시선을 옮기자 쪼롬히 달린 애만 벌써 여섯이었다. 펄리는 또 한 번 ‘순산’ 카드를 뽑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벌써 일곱째네.”
“아니, 아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당장 현재의 업적 점수는 쟈멜이 압도적이지만, 후계자가 없으면 승계 플레이를 할 수 없어서 이 캐릭터가 죽는 순간 게임이 끝나버리고 쌓아나가는 점수도 멈춰버렸다.
“애! 애를 낳아야 해! 빨리 아무 남자나 청혼해줘!!!”
쟈멜이 연신 주사위를 굴렸지만, 그녀의 캐릭터는 연애 따윈 관심도 없다는 듯 연속해서 세계의 사건에만 관여해나갔다.
‘세계의 위기 발생.’
‘인류 연합군 지휘관 취임.’
그리고 마침내 뽑아낸 붉은 카드. 해골 문양이 그려진 이 붉은 카드는 ‘사인(死因)’이었다.
‘위대한 희생(사망 사유).’
‘세계의 평화 달성.’
쟈멜은 한 캐릭터로 달성할 수 있는 최대 업적 점수를 쌓아 ‘전설적인 영웅’등급에 도달한 자신의 캐릭터를 사망자 칸에 옮기고는 벌써 열이나 되는 자식을 낳고서 손자들에게 둘러싸여 노년에 접어든 펄리의 캐릭터를 멍청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홀로 세계를 위해 희생해 영웅으로서 남은 자신의 캐릭터와 소박한 행복 속에서 살아가는 펄리의 캐릭터.
쟈멜의 눈이 절망으로 물들었다.
“내가 바라던 건 이런 삶이 아냐!!! 나도! 나도 사랑하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애나 낳고 나중엔 손자손녀한테 둘러싸여서 늙어가고 싶었다고!!! 어째서! 어째서!!! 나만! 나만 이렇게 불행하게 홀로 외롭게 죽어야 해? 왜 다들 그렇게 행복한 거야? 내 희생도 잊고?”
펄리는 주사위를 굴려 또 한 장의 카드를 뽑았다. 그녀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어? 또 임신했네? 이럼 애만 열 한 명인가?”
“으아아아아아!!!”
마침내 쟈멜은 모든 걸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바로 ‘영웅’으로서의 자신을.
“내가 행복할 수 없다면!!! 너희도 행복해선 안 돼!!!”
그녀가 마침내 자신의 모든 업적 점수를 소비해 저주받은 보랏빛 카드 뭉치, ‘원한의 서’에서 카드를 뽑으려던 그때.
황금빛 용의 몸 위에서 옆으로 드러누워 옆구리를 긁적이던 펄리의 왼쪽 보랏빛 동공이 빠르게 네 개로 분열하더니 마치 무언가를 발견한 듯 고속으로 움직이고는 이내 다시 하나로 뭉쳐 들었다.
펄리는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어? 마르낙이네?”
“다 죽여버리겠… 응? 방금 뭐라고 했어? 마르ㄴ…”
새하얀 손이 쟈멜의 입을 틀어막았다. 펄리는 쟈멜의 입을 틀어막고는 용의 목 언저리에 앉아서 명상하고 있는 다키아를 향해 눈짓하며 속삭였다.
“쟤랑 마르낙이랑 마주치면 그냥 아주 대판 싸움 나는 거야. 너는 그걸 원해? 원해?”
쟈멜은 오랜만에 마르낙을 보고 싶은 마음과 마르낙과 다키아의 싸움을 말리고 싶은 마음. 두 마음을 저울질한 끝에 간단한 결론에 다다랐다.
쟈멜은 펄리의 손을 떼어내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내가 싸우는 거 아니잖아. 여차하면 내가 다키아 뒤통수를 때려서 기절시키면 적장을 생포한 공로를 인정받아서 마르낙 사제님한테 칭찬을 들을 수 있지 않을까?”
“…너 진짜 다키아 편들 생각은 하나도 안 하는구나?”
“나는 항상 이기는 쪽 편이야. 그리고 마르낙 사제님은 다 이겨!”
“다 들려요.”
감겨있던 다키아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가고, 사금을 녹여낸 듯 황금빛 그 자체인 금안이 거친 마력을 토해내며 빛났다.
완성된 한 쌍의 마력 기관이 마력을 토해내며 최대한의 효율로 마력을 연소한다.
“어차피 펄리한테 마르낙 사제님이 어딨는지 물어도 대답 안 해 줄 거 같으니…”
다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양손을 앞으로 내뻗었다. 그녀의 손끝이 저 멀리 대지 위에 서 있던 도시로 향했다.
새하얀 열 가닥의 손가락 끝에서 가느다란 황금색 빛 수천 갈래가 뻗어 나와 지상의 도시로 쏟아졌다. 난반사되며 흩어진 빛들이 도시 전역을 훑고서 다키아의 손끝으로 다시 모여들었다.
뇌를 태워버릴 듯한 방대한 정보량이 다키아의 머릿속에 그대로 쏟아지고, 그녀는 그 정보의 해일 속에서 지독한 집념만으로 단 하나의 얼굴을 찾아냈다.
“찾았다.”
무척이나 익숙하고 보고 싶었던 단 하나의 얼굴을.
다키아의 입가가 부드럽게 휘어지고, 그녀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머리를 많이 기르셨네. 가볼까. 그럼.”
새카만 부츠가 황금빛 비늘을 가볍게 박차고, 다키아는 그대로 지상을 향해 자유낙하를 시작했다. 그녀는 허리춤의 주머니에서 자그마한 무언가를 꺼내 던졌다.
자그마한 물체는 순식간에 덩치를 불리더니 이내 붉은 망토를 휘날리는 거대한 은빛 기사가 되어 제 진짜 모습을 드러냈다. 다키아는 세 번째 기사, 테르지오의 어깨를 붙잡고 옆구리에 발을 끼워 넣어 몸을 곧게 세우고서 말했다.
“착지할 수 있죠?”
금속 기사는 푸른 안광을 빛내며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
– 예.
***
다키아가 나타난다.
그 하나의 명제에 마르낙의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마침 페르카와 레페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오느라 굳이 지젤을 데리고 오지 않았었다.
마르낙은 다급하게 팔찌에 대고 말했다.
“지젤에게 당장 날 데리러 오라고 말해.”
– 후계자님. 다키아 공녀님의 일행에 쟈멜님이 합류한 이상, 지젤님께서 권능을 사용해 후계자님에게로 가면 그 권능의 여파 때문에 당장 후계자님의 위치가 특정될 수도 있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위치의 특정. 생각해보니 다키아는 자신의 흔적을 뒤쫓아 온 것이지. 여기에 있다고 ‘확신’하고서 나타난 게 아니었다.
그럼 최대한 은밀하게 행동하는 게 맞는 것.
결심을 내린 마르낙이 디스펜스에게 말했다.
“디스펜스, 승강기에 지젤을 태워서 내 근처로 데려다줘. 그건 괜찮겠지?”
– 그렇게 하겠습니다.
일단, 당장의 문제를 해결한 마르낙이 여태 달려오느라 숨을 헐떡이고 있는 레페와 페르카를 쳐다보았다.
“페리토드가 납치되었다니 무슨 말이야? 빨리 말해.”
레페와 페르카는 서로 눈빛을 교환한 끝에 페르카는 레페에게 전권을 위임하기로 결정했다. 레페가 입을 열었다.
“저희 집에서 페리토드가 아침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허공에서 붉은 로브를 입은 남자가 걸어 나오더니 순식간에 페리토드 언니를 제압하고는 들쳐메고 사라졌어요. 그러면서 우리한테 말하길 굳이 찾으러 올 거거든 남제국의 수도로 오라고 말하면서요! 그 남자가 나타나고 사라질 때까지 저희는 마치 무언가에 묶이기라도 한 듯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어요.”
마르낙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페리토드가 페리토드란 이름을 포함해 계속해서 가명을 대던 것부터 정체가 수상하긴 했다. 거기에 붉은 로브를 뒤집어쓴 남자는 또 뭐고, 기껏 납치해가면서 어디로 가는지까지 알려주는 이유는 또…
마르낙의 고민이 채 끝나기도 전. 거대한 마력의 파동이 하늘에서 퍼져나가고 자그마한 실타래 같은 황금색 빛들이 도시 전역에 난반사되며 수없이 맞부딪히고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불길함. 지독한 불길함이 마르낙의 척추를 타고 오르고, 그는 다급하게 팔찌에 대고 외쳤다.
“디스펜스! 지젤이 여기 오려면 얼마나 걸려?”
– 10분! 10분이면 도착합니다! 후계자님!
느려도 너무 느리다. 그 생각과 동시에 하늘에서 은빛의 거대한 무언가가 붉은 망토를 휘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은빛 덩어리가 대지와 충돌하기 직전, 전신에서 푸른 불꽃을 뿜어내며 감속한 은빛 기사가 대지에 부드럽게 착지했다.
탁.
새카만 부츠가 대지 위에 닿고, 선명한 은발이 가볍게 흩날리며 한 쌍의 황금빛 눈이 마르낙을 직시했다. 황금과 은의 완벽한 조화. 검은 옷 위에 새하얀 코트를 걸친 다키아가 5년 만에 찾아낸 남자를 향해 싱긋 웃었다.
“정말 많이 보고 싶었어요. 마르낙 사제님.”
마르낙은 5년 만에 마주친 다키아를 마주 보며 딱딱하게 표정을 굳혔다. 더욱이 그녀의 뒤에 선 그의 세 번째 기사, 테르지오의 존재를 다시금 확인했기에.
테르지오가 저곳에 있다는 것은, 다키아가 자신이 앞으로 무엇을 할지 이미 다 알고 있다는 것을 뜻했으니.
마르낙, 아니. 연은 가라앉은 눈으로 그녀를 마주 보았다. 굳게 닫혀 있던 입이 천천히 열리고.
“나는 연이야.”
“요즘은 그 이름을 쓰신다고 들었어요.”
“그리고 한동안은 계속 연일 예정이야.”
“그러세요.”
“그러니 오늘은 이만 헤어지자. 다키아. 지금의 나는, 네게 아무런 볼 일이 없어.”
황금빛 눈이 천연이 빛나고 다키아는 부드럽게 웃었다.
“어쩌죠? 저는 마르낙 사제님에게 볼 일이 무척 많은데요.”
검은 부츠가 천천히 앞으로 튀어 나오려 하자, 마르낙은 허리춤의 절망에 손을 올렸다.
“거기서 단 한 발자국이라도 다가오면 벤다. 다키아.”
“어디 한 번 베어보세요.”
탁.
다키아는 아무렇지 않게 마르낙의 말을 무시하고 한쪽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절망이 제 검집에서 튀어나오는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다키아의 입가에 걸린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베지 않으셨네요.”
“아직 내 간격 안이 아니었을 뿐이야. 하지만 네 다음 걸음은 닿는다. 다가오지 마. 분명 경고했어.”
마르낙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다키아가 발을 내밀었다.
탁.
검은 부츠가 바닥에 닿음과 동시에 절망이 제 검집을 박차고 튀어나왔다.
까앙!!!
선명한 은빛 이모탈리움 검과 푸른 절망이 맞부딪히고. 연의 검을 받아낸 테르지오가 푸른 안광을 빛내며 그의 옛 주인을 쳐다보았다.
다키아는 여전히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말했다.
“절 베지 못하셨네요? 마르낙 사제님.”
“연, 내 이름은 연이야. 틀리게 부르지 마.”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다키아의 붉은 입술이 다시 벌어졌다.
“마르낙 사제님이 뭘 하시려고 하는지 이미 다 들었어요.”
“잊어.”
“들으니 바로 알겠더라고요. 왜 지난 5년간 저희들을 찾지 않으셨는지. 왜 지금 저에게 이렇게 대하시는지. 전부요. 마르낙 사제님은 제가 마르낙 사제님의 앞을 막아설 거라 생각하신거죠?”
“…”
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다키아는 말했다. 온전히 제 의지로. 단호하게.
“맞아요. 절 정확하게 보셨어요. 조금 기쁘기 마저 할 정도로요. 마르낙 사제님…”
“연이라니까.”
“…5년 전의 마르낙 사제님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아무리 궁지에 몰리고 또 몰리더라도 그런 선택을 하지 않으셨을 거예요. 이건 분명하게 옳은 일이 아니기에.”
그 마음처럼 한 점 흔들림 없이 올곧게 빛나는 황금빛 눈. 그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가슴속에서 부끄러움이란 감정이 나타나 그의 가슴을 긁어댔다.
그러나 그가 뒤집어쓴 두꺼운 절망의 가면을 벗겨내기엔 너무나 미약한 자극이었을 뿐.
연은 조용히 자세를 낮추며 다음 일격을 위한 준비를 끝마쳤다. 명백한 적의를 내뱉으며.
“더 다가오면 죽이겠다. 다키아.”
다키아가 쿡쿡 웃었다.
“마르낙 사제님. 당신은 이미 제 대답을 알고 계시잖아요. 저는 당신이 아무리 경고해도 또 한 걸음을 내디딜 거고, 그렇게 계속해서 당신께 다가가 닿을 거예요. 제 5년은 그러기 위한 5년이었고, 그러기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한 5년이었어요.”
완성된 마력 기관인 황금빛 두 눈에서 순수하게 정제된 마력이 넘실대고 다키아는 손가락을 가볍게 풀었다.
“죽도록 두들겨 패서라도 당신을 멈춰 세워 보이겠어요. 그것이 분명 마르낙 사제님께서 가장 후회하지 않을 유일한 길이기에. 온전히 마르낙 사제님을 위해서.”
그림자가 대지를 뒤덮는다.
“뭐래.”
격렬한 신성이 형상화한 기적의 권능. 테두리에서 새하얀 빛을 토해내는 새카만 헤일로를 빛내며 그림자 속에서 새카만 여인이 걸어 나왔다.
여인의 정체를 확인한 다키아의 눈이 자그마한 의문으로 물들었다.
“…지젤?”
지젤은 가벼운 손짓 한 번으로 페르카와 레페를 그림자로 집어삼켜 어디론가 이동시키고는 다키아를 향해 손을 까딱여 인사했다.
“오랜만.”
다키아는 당혹스러운 눈빛으로 지젤을 쳐다보며 말했다.
“지젤이 왜 거기 있어요?”
“내가 왜 여기 있긴? 딱 보면 몰라? 나는 이쪽에 서기로 한 거야. 너랑은 다르게.”
“어째서요?”
“우리가 굳이 그런 거 하나하나 설명할 정도로 친한 사이였나?”
지젤이 피식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으로.
“적어도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는데. 이만 가자. 마르낙.”
자랑하듯 이름을 부른 지젤이 마르낙의 목에 팔을 감으며 그의 품 깊숙이 안겼다.
5년 전, 자신과 쟈멜을 내팽개치고 홀로 떠난 다키아를 향한 자그마한 악의를 듬뿍 담아서.
그녀의 의지를 따라 일어선 그림자가 연과 지젤을 순식간에 집어삼켰다.
으득.
지극히 명백한 도발에 다키아는 이를 한 번 갈았다. 그리고 그 도발에 응하듯 그녀는 진짜 ‘힘’을 드러냈다.
인간으로선 흘릴 수 없는 은빛 눈물이 그녀의 왼쪽 눈을 따라 흘러내리며 흔적을 남긴다. 그녀의 왼쪽 이마의 피부를 찢으며 기이한 형상의 새카만 뿔 하나가 자라났다.
섭리를 벗어난 힘, 명백한 악마(惡魔)의 힘을 드러낸 ‘악마계약자’ 다키아가 지젤과 마르낙이 사라졌던 공간을 비집고 손을 집어넣었다.
다키아가 움켜쥔 섭리를 비틀었다.
***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나는 내 몸에 매달린 지젤을 떨어뜨리며 말했다.
“다키아한테 쓸데없는 도발은 대체 왜 한 거야?”
지젤은 쿡쿡 웃으며 대꾸했다.
“그러고 싶었으니까. 해묵은 원한의 해소랄까? 나름 쌓아둔 게 좀 있어서.”
“하아.”
그래도 지젤 덕분에 손쉽게 다키아를 떨어뜨릴 수 있어서 다행인가.
새하얀 눈송이 하나가 내 뺨으로 다가와 내려앉았다. 차가웠다.
남제국은 아직 겨울이 아닌데. 여긴 어디지?
“대체 어디로 이동했길래 눈이 내려?”
지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을 끔벅대더니 고개를 갸웃했다.
“대체 왜 눈이 내리지? 여기 남제국 수도인데? 아까 디스펜스가 이동할 거면 여기로 가라길래 온 건데…”
눈으로 뒤덮인 거대한 수도를 바라보았다. 운치가 있긴 했지만, 이건 절대 자연적인 현상이 아니었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나 본…”
지젤을 잡아들고 뒤로 훌쩍 거리를 벌렸다. 지극히 낯설고 불길한 기운과 함께 우리가 나타났던 공간이 새카만 힘에 의해 우그러들더니 다키아의 상반신이 튀어나왔다.
검은 뿔을 달고서 튀어나온 다키아는 손가락을 타고 흐르는 은빛 피 한 방울을 대지에 떨어뜨리고는 찬란히 빛나는 황금빛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찾았다.”
억지로 비틀어 열린 공간이 천천히 닫혀간다. 비틀어둔 섭리가 제자리를 찾아가듯 조금씩 공간 속으로 빨려 들어가던 다키아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마르낙 사제님.”
원래 상태를 되찾아가던 공간이 다시 한번 우그러든다. 빨려 들어가던 공간 우그러뜨리며 다시 조금 튀어나온 그녀가 새하얀 손가락을 뻗어 정확하게 내 심장이 있는 위치를 가리켰다.
“언제가 됐든, 절대 늦지 않게, 당신이 후회를 남기지 않도록, 반드시 제가 멈춰 세워 보일 테니.”
황금빛 눈이 그 어느 때보다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 다키아는 단 한 점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고요히 선언했다. 반드시 그러고 말 리라는 확신 속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그 한마디를 끝으로 다키아는 조용히 공간 속으로 다시 빨려 들어가 사라졌다.
다키아가 사라지고도 우리는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쏟아지는 눈들이 머리와 어깨 위로 조금씩 쌓이고, 한 차례 몸을 부르르 떤 지젤이 무척이나 조심스럽게 입을 열고 한마디를 겨우 뱉었다.
“…조금 무섭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