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Priest of Corruption RAW novel - Chapter (336)
336
페리토드.
“이거 진짜 죽은 건가…?”
지젤은 아주 조심스럽게 발을 뻗어 머리 없이 쓰러진 시체를 툭툭 건드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머리 잃은 악마는 그대로 진짜 죽어버렸고, 그가 기적적으로 다시 재생해 우리에게 정보를 팔아주는 형편 좋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진짜 어쩌지.
코앞에 우리가 찾는 모든 정보에 대한 열쇠가 있었는데.
아니, 애초에 악마 자식이 이렇게 쉽게 죽어 나자빠지는 게 잘못된 거 아닌가? 나는 녀석이 원하는 대로 해줬을 뿐인데.
아주 사소한 정보를 전달하는 걸 깜박하긴 했지만, 그래도 악마라면 그 정돈 알아서 잘 처리해야지.
혹시나 싶어 조금만 더 기다려봤지만, 악마는 진짜로 완전히 죽어버렸다는 사실만을 다시 확인했을 뿐이었다.
그렇게 나와 지젤은 악마가 보관해둔 유리 전시장 안의 빛가루들과 덩그러니 남겨졌다.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기로 결심한 건지, 지젤은 악마의 시체를 살펴보는 걸 그만두고 방안을 하나씩 뒤져보기 시작했다. 나도 그녀를 도와 방안 샅샅이 훑었지만 역시 저 빛가루들 말고는 특별한 것이 없었다.
지젤은 빛가루가 흩날리는 유리 전시장 하나 앞으로 가서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게 아무래도 악마가 모아둔 ‘정보’ 그 자체겠지?”
“그렇겠지.”
“이것들 중에 우리가 찾는 정보가 있을 확률도 높겠고?”
“그럴 확률이 높지.”
“그럼 우리가 전시장을 열고 직접 정보에 접촉해보는 건 어때?”
“음?”
지젤은 유리 전시장 하나의 뚜껑을 밀어서 열더니 그 안에서 돌아다니는 빛가루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아까 악마가 하는 걸 보니까 그냥 손가락 한 번 대보면 되는 거 같던데. 우리라고 못 할 이유가 없잖아. 안 그래?”
그건 악마라서 괜찮은 거 아니었을까. 괜히 악마를 따라 하는 건 지극히 위험했다.
나는 지젤에게 다가가며 그녀를 말렸다.
“그만둬. 우리가 만져도 괜찮은지 확인도 안 됐잖아.”
“괜찮을 거야. 왠지 모르게 그런 기분이 들어.”
팔을 걷어붙인 지젤이 전시장 안에서 조용히 돌아다니는 빛가루를 향해 손가락을 뻗었다. 그와 동시에 내 시야 한구석에 나타난 상투스가 다급하게 경고해왔다.
– 당장 말리십시오! 빨리!
그의 진지한 경고에 나는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지젤을 붙잡아 당겼다. 다행히 애초에 그녀를 말리기 위해 다가가고 있던 참이라 지젤의 손가락이 빛가루에 닿기 전에 멈출 수 있었다.
졸지에 내 품에 뒤로 안긴 지젤이 고개를 위로 들어 나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니, 진짜 괜찮을 거 같은 느낌이 들어. 딱 한 번만 해볼게. 응?”
“만지지 말래.”
“…누가?”
반사적으로 상투스가 라고 대답하려다 나는 그 이름을 삼켰다.
“있어. 쓸데없이 귀찮은 녀석.”
“아…그 네 상상 속 사람? 너 혼잣말 할 때마다 네 앞에 있다고 한 그 사람 말이지?”
날 바라보는 지젤의 눈빛에 자그마한 안쓰러움이 담겼다.
지젤은 내 머릿속 존재인 상투스가 존재한다는 걸 안 믿지만, 내가 그렇게 말하니 일단은 내 앞에선 믿어주는 척하는 듯했다.
나는 시선을 옮겨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서 그 자리에 서 있는 상투스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 말대로 말렸어. 그런데 이걸로 끝은 아니겠지? 대안도 제시하지 않고 무작정 말리기만 하는 건 정말이지 딱 질색인데.”
눈마저 가린 붕대투성이 얼굴이 나를 쳐다보았다. 조금 침묵하던 그의 입이 다시 천천히 열렸다.
– 이 정도는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군요. 전시장을 모두 열어주시겠습니까?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지젤은 여전히 안쓰러움 가득한 눈으로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네 상상 속 사람이 뭐래?”
“유리 전시장을 다 열어달라는데.”
“그래, 그러지 뭐.”
지젤이 가볍게 손짓하자 바닥에서 일어난 유형화된 그림자들이 유리 전시장들을 모두 열었다. 다행히 유리 전시장 안에 든 빛가루들은 당장에라도 유리 전시장을 빠져나와 돌아다닐 것처럼 역동적으로 움직이긴 했어도 정작 정말로 빠져나와 흩날리지는 않았다.
모든 전시장이 열리자 나는 상투스를 쳐다보며 고개를 까닥였다. 뭐라도 해보라고.
상투스는 나를 한 번 쳐다보곤 붕대로 둘러싸여 피부 하나 보이지 않는 손을 천천히 들어 올려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러자 모든 빛가루들이 마치 상투스의 부름에 응하기라도 하듯 유리 전시장에서 일제히 튀어나와 허공을 맴돌았다.
“뭐, 뭐야?!”
갑작스러운 빛가루들의 행진에 지젤이 깜짝 놀라서 내 품에 매달려왔다. 빛가루들은 지젤이 놀라든 말든 저들끼리 어지럽게 뒤섞여서 방안을 거칠게 한 번을 훑고는 조금씩 뭉쳐 들더니 이내 하나의 동그란 구체가 되어 상투스의 손바닥 위로 내려앉았다.
붕대투성이 손이 뭉쳐 든 정보의 구체를 쥐자, 그의 손에서 녹아내리며 상투스에게로 스며들어 갔다.
상투스는 마치 그 빛가루들을 음미라도 하듯 조용히 천장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잠시 후, 상투스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나를 쳐다보고서 입을 열었다.
– 이곳엔 연이 찾는 정보에 대한 기억이 없군요. 다만, 악마가 보관해둔 기억들이 이 층에만 있는 건 아닌 거 같으니 다른 층의 기억들도 한 번 보는 게 좋을 거 같습니다.
다른 기억의 보관실이 어디에 있는지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애초에 이 서재 뒤 숨겨진 공간엔 아래로 내려가는 무척이나 수상한 계단이 한 켠에 있었으니까.
그 계단을 내려가니 역시나 다른 빛가루들로 가득한 유리 전시장들이 잔뜩 나타났다. 지젤의 그림자들이 다시 한번 유리 전시장들을 열자, 아까 보았던 광경이 그대로 펼쳐지며 상투스가 빛가루들을 흡수했다.
그러나 상투스는 이번에도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내게 말했다.
– 이 층에도 찾는 정보에 대한 기억은 없군요. 빠르게 다음 층으로 갑시다.
너무나 쉽게 기억들을 모조리 흡수하는 그 모습에 나는 자그마한 의문이 들었다.
“아까 기억을 흡수하는 게 위험해서 말린 거 아냐? 너 그렇게 한 번에 많이 흡수해도 돼?”
상투스는 앞장서서 내려가던 걸음을 멈추고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 타인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건 지극히 위험한 일입니다. 특히 기억을 받아들이는 요령이 없다면 말이죠. 거기다 이 악마가 기억을 저장해둔 방식은 가공 없이 날 것의 기억을 단순히 추출만 해둔 거라. 멋대로 만졌다간 최악의 경우, 타인의 기억에 휩쓸려 본인의 자아가 오염될 수도 있어요. 그래서 말린 겁니다.
기억 자체에 집어 삼켜져서 자아에 혼란이 올 수도 있다는 건가.
상투스의 말을 들어도 의문은 전혀 해소되지 않았다.
이 날 것의 기억들을 흡수하는 게 그렇게나 위험한 일이라면, 어째서 저 상투스를 자칭하는 붕대 덩어리는 한 번에 그렇게 많은 기억을 한 번에 흡수했음에도 지극히 괜찮은 거지?
적어도 내가 아는 상투스는 타인의 기억을 들여다보는 재주 같은 건 없는 지극히 평범한 유지의 사제였는데. 그가 잘하는 건 시체를 염하고 무덤을 파서 묻어주는 정도였다.
“기억을 흡수하는 게 그렇게나 위험한 거면 너는 어째서 괜찮은 거지?”
– 그건…
그는 잠깐 뜸을 들이더니 이내 빙그레 웃었다.
– …제가 유지의 사제이기 때문이지요. ‘항상성’. 저는 흔들림 없이 이 항상성을 유지하는데 나름의 재주가 있습니다. 그렇기에 수없이 많은 기억들을 받아들이더라도 ‘저’라는 자신을 놓지 않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그 기억들을 관조할 수 있는 거지요. 이 정도면 충분한 답이 됐습니까? 그럼 슬슬 다시 가보죠. 시간이란 게 마냥 넉넉하진 않으니까요.
상투스가 앞장서서 나아가고. 나와 지젤은 그의 뒤를 쫓았다.
언뜻 보면 상투스의 대답은 제법 조리 있고 말이 되는 듯했다. 그러나 내 근본적인 의문에 대한 답은 되질 않았다.
악마 정도 되는 존재나 추출해둘 수 있는 ‘타인의 기억’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상투스, 당신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지독한 찜찜함. 그가 의도적으로 그 주제에 대해 대답하는 걸 구렁이 담 넘듯 넘어간 이상, 여기서 더 캐묻는다고 그 답을 들을 수 있을 거 같진 않았기에 굳이 더 캐묻지 않았다.
우리는 차례차례 모든 전시장을 훑으며 가장 낮은 층의 기억들까지 모조리 회수했다.
마침내 마지막 기억의 빛가루까지 흡수한 상투스가 조용히 침묵하다 입을 천천히 열었다.
– 대충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파악했습니다. 페리토드가 누구인지, 상대가 뭘 원해서 그녀를 데리고 갔는지, 지금 그녀가 어디에 있는지까지 전부요.
“다 알아냈다고?”
– 네. 여기저기 조금씩 단서가 흩어져 있어 조금 오래 걸리긴 했어도 모든 기억을 흡수하니 결론이 명확해지는군요.
내 옆에 서 있던 지젤이 내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는 말했다.
“다 알아냈데?”
“어. 대충 다 알았데.”
그녀는 내가 쳐다보는 방향을 쳐다보더니, 조금 놀랍다는 듯이 말했다.
“…진짜 뭔가 있긴 했구나? 나한텐 안 보이는 무언가가.”
“여태 내가 하는 말을 안 믿었어? 진짜 있다니까?”
“나야 5년 전 그 일도 있고 하니 네 머리가 조금 아플 수도 있겠다 싶었던 거지. 사람이 심한 충격을 받으면 헛것을 보기도 하잖아.”
지젤은 툭 하고 말을 뱉어놓곤 실수했다는 듯이 다급하게 정정했다.
“아, 이거 나쁜 뜻으로 한 말은 아니다? 그냥 그렇게 생각을 했었다는 거지. 이젠 두 눈으로 뭔가가 있다는 걸 봤으니까 뭔가가 있다는 마르낙 네 말을 전적으로 믿고 있어.”
그녀는 말을 정정해놓고도 본인이 말실수했다고 생각하는 건지, 내 눈치를 슬슬 보다 물었다.
“…화난 거 아니지?”
나는 피식 웃었다.
“잘 안 믿길 수도 있는 거지. 그걸로 내가 왜 화내. 신경을 안 쓰니까 괜히 눈치 보지마. 그게 더 불편해.”
“뭐 그렇다면야. 나야 다행이고. 그나저나 페리토드가 무슨 일에 휘말린 거래?”
“그건 이제부터 물어봐야지.”
시선을 옮겨 상투스를 쳐다보았다. 그 붕대투성이 얼굴을 마주 보며 말했다.
“빨리 설명해줘. 듣고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 판단하게.”
상투스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페리토드, 그녀의 본명은 ‘페데리스 아드반토라드’. 성을 보면 아시겠지만, 그녀는 남제국 황실의 피가 흐르는 황실의 일족입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잠깐 뜸을 들인 상투스가 더 없이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 …남제국의 황실은 이미 점령당했습니다. 하늘에서 떨어진 단 한 마법사에 의해서.
***
남제국의 황실의 궁전 화려하고도 아름다운 가장 깊은 심처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페데리스 황녀님, 손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페데리스 아드반토라드.
제법 오랜만에 들어보는 자신의 이름.
그 익숙한 이름에 페리토드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자신이 처한 작금의 상황이 그리 이해가 가질 않았다.
애초에 자신은 황녀라고 불릴만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자신은 방계 중에서도 방계. 굳이 따지자면 자신의 피에 황실의 피가 제대로 섞였다기보다는 그 향만 첨가한 수준에 불과했다.
그 자그마한 향만으로도 제법 부유한 삶과 적당한 지위를 누리며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있긴 했었지만, 황녀라는 명칭과는 평생 인연이 없었고, 없어야만 했을 위치였다.
호화로운 방문이 열리고, 붉은 로브를 푹 눌러쓴 남자가 천천히 걸어왔다.
페리토드는 그를 보자마자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여기에 처박아 둔 거야? 황녀라는 명칭은 또 뭐고. 애초에 나는 이 나라 황제의 자식도 아니라고.”
푹 눌러쓴 로브의 음영 사이로 보랏빛과 붉은색이 뒤섞인 기묘한 눈동자가 페리토드를 직시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잔일을 처리하느라 소개가 늦었군. 나는 마왕(魔王) 폐하를 모시는 ‘보랏빛 지네 켄티페스’다. 널 이 나라의 여황제로 만들어줄 자지.”
“…황제?”
페리토드는 대체 저 사내가 무슨 개소리를 하는지 당최 이해가 가질 않았다. 그녀는 눈앞의 사내를 노려보며 말했다.
“황제 폐하가 멀쩡히 살아 계시고, 그분의 후계자도 멀쩡히 잘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황제가 된다는 거야? 갑자기 사람을 납치해서는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페리토드의 반문에 그는 그저 나직이 쿡쿡 웃고서 말했다.
“황제는 이미 네가 자신의 뒤를 잇는 것에 동의했다. 그 후계자들 또한.”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네. 진짜. 아니, 난 황제 같은 거엔 관심이 없으니까 그냥 좀 꺼져. 아니다. 됐어.”
페리토드는 자리에서 일어나 맹렬히 마력을 피워내기 시작했다. 그녀의 선명한 붉은 눈 위로 주홍빛 문양이 떠올랐다.
지하 요새 훈련프로그램을 통해 습득한 ‘마력기관’의 발현. 아직은 마력기관 자체가 제법 불안정했지만, 잠시라면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유형화된 마력이 진득한 용암이 되어 페리토드의 주위에서부터 흘러넘치기 시작했다.
보랏빛 지네 켄티페스는 페리토드의 마력기관을 확인하곤 작게 감탄을 표했다.
“어디서 마력기관을 형성하는 법을 배운 거지? 나 말고 다른 녀석들과 먼저 만난 적이 있나?”
“죽기 싫으면 내 앞에서 비키기나 해. 나는 여기서 나갈 거니까.”
“그건 곤란하지.”
보랏빛과 붉은색이 뒤섞인 눈 위로 선명한 보랏빛 문양이 떠올랐다. 지극히 정교하게 완성된 마력기관의 발현.
여기저기로 마력이 폭발적으로 흘러나오는 페리토드와 달리, 켄티페스의 마력은 단 한 방울도 밖으로 새어나가지 않았다.
그는 페리토드를 바라보며 빙그레 웃었다.
“아득한 시간을 넘어 만난 동족에게 특별히 옛 시대의 선배로서 충고해주지. 마력기관을 꺼냈다면, 망설이지 마라. 특히나 너처럼 약해빠졌다면.”
그의 눈에 새겨진 자줏빛 문양이 자그맣게 빛나고, 페리토드의 동공이 빛을 잃었다. 의식을 잃은 몸뚱이가 푹신한 침대 위로 고꾸라졌다.
켄티페스는 침대 위에 쓰러진 페리토드를 똑바로 눕혀주고 정성스럽게 이불까지 덮어주었다.
그는 의식을 잃은 황족 유일의 마법사, 페데리스 아드반토라드를 바라보며 인자하게 웃었다.
“이 지상을 다스릴 자는 저 역겨운 반쪽짜리 가짜들이 아니라, 이 지상의 진정한 주인인인 우리의 동족이어야지. 암.”
페리토드를 눕혀두고서 방을 떠나는 켄티페스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사라졌다.
마음 같아선 당장에 이 대지 위를 거니는 역겨운 반쪽짜리 되다만 것들을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었으나, 아직은 저 역겨운 반쪽짜리들이라도 그 쓸모가 있었다.
그러니 지금은 참을 때였다.
다신 한 번 자신의 동족들이 이 대지 위를 온전히 지배할 그 날을 위해서.